우리들의 ‘얼터너티브한’ SM플레이
WEBZINE
WEDITOR 이연호
수많은 창작물이 범람하고 있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시점에서 이미 나올 만 한 것은 다 나왔다는 말에 쉽게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그럴수록 창작가들은 소위 말해 ‘에스테틱한’ 무언가를 횡단하며 예상치도 못한 것을 한데 모아 콜라주한다. 주류 메탈에 대항해 탄생한 그런지, 일렉트로닉 뮤직을 댄스플로어에서 감상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IDM. (IDM 용어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많지만 여기서는 사전적 의미로서 사용한다.) 이들은 모두 일종의 대안을 제시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얼터너티브’ 장르로 정의된다. 하지만 그런지(grunge) 또한 메탈에 뿌리를 두고 있고, IDM도 테크노에 기반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위대한 것처럼 느껴지던 그 뮤지션들에게도 히어로가 있었음을 상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아가 얼터너티브의 정의 또한 모호해진다. 너바나와 펄 잼, 스매싱 펌킨즈가 얼터너티브 록인 것인지, 라디오헤드 또한 여기에 포함되는 것인지는 더더욱 헷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을 들어보면 그들 각각의 사운드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라디오헤드의 <KID A>를 듣고 얼터너티브 록이 느껴진다고 하기엔 록과의 간극이 매우 크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그냥 ‘실험적’이게 느껴지면 얼터너티브한 것인지, 그 누구도 재단할 수 없음에 당혹하고 만다. 장르의 구분이 애매모호해지는 것이다. 사실 이태원 등지의 유수한 디제이들에게 “주로 어떤 장르를 트나요?”라고 묻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에게 “어떤 장르를 작곡하시나요?”라고 물으면 쉽게 말문을 떼지 못하고 “글쎄요.”라고 답하거나 머리를 긁적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장르에 대해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리스너와 평론가들은 하우스, 저지클럽, 시부야계… 등 다양한 장르 구분에 애를 먹지만, 마치 무용지물이라는 듯 씬의 믹스체인저는 아주 옛날의 것부터 현재 사이를 현란하게 헤엄친다.
애초에 창작가가 만들고자 하는 것들은 물성이 명확하지 않고 말하자면 안개나 파도와 같다. 창작물의 주된 소비층인 대중, 평론가의 구획과 그를 벗어나려는 아티스트들의 밀당을 생각하면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트렌드의 선두주자들은 “날 정의하지 마요.”라고 이야기하지만 대중들은 콧방귀 뀌며 “넌 고프코어야.”, “넌 긱시크야.”, “넌 뉴웨이브야.”라고 명명한다. 그러하니 분명 한 번쯤 이라도 예술가들은 팔리기 위해 장르와 씬(scene)의 울타리 속에서 고뇌할 수 밖에 없다. 이로써 세상은 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의 관계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본인의 ‘마조-사디론’이 더욱 굳건해져만 간다.
허나 작품이 오묘하기 때문에 마치 강아지의 꼬순내를 맡듯 대중들은 자꾸 맛본다. 그들의 입 속에서 데굴데굴 굴려지는 창작가들은 잘게 잘린 포도당처럼 씬에 흡수된다. 마침내 각계각층의 장르로 규정된 유리창을 두드리며 나는 곧 체인지 메이커가 될 것이라는 양기에 이를 가는 아티스트들. 어쩌면 얼터너티브하다는 것은 소비자가 예술가들에게 선고한 지독하고 에로틱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그냥 ‘실험적’이게 느껴지면 얼터너티브한 것인지, 그 누구도 재단할 수 없음에 당혹하고 만다. 장르의 구분이 애매모호해지는 것이다. 사실 이태원 등지의 유수한 디제이들에게 “주로 어떤 장르를 트나요?”라고 묻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에게 “어떤 장르를 작곡하시나요?”라고 물으면 쉽게 말문을 떼지 못하고 “글쎄요.”라고 답하거나 머리를 긁적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장르에 대해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리스너와 평론가들은 하우스, 저지클럽, 시부야계… 등 다양한 장르 구분에 애를 먹지만, 마치 무용지물이라는 듯 씬의 믹스체인저는 아주 옛날의 것부터 현재 사이를 현란하게 헤엄친다.
애초에 창작가가 만들고자 하는 것들은 물성이 명확하지 않고 말하자면 안개나 파도와 같다. 창작물의 주된 소비층인 대중, 평론가의 구획과 그를 벗어나려는 아티스트들의 밀당을 생각하면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트렌드의 선두주자들은 “날 정의하지 마요.”라고 이야기하지만 대중들은 콧방귀 뀌며 “넌 고프코어야.”, “넌 긱시크야.”, “넌 뉴웨이브야.”라고 명명한다. 그러하니 분명 한 번쯤 이라도 예술가들은 팔리기 위해 장르와 씬(scene)의 울타리 속에서 고뇌할 수 밖에 없다. 이로써 세상은 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의 관계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본인의 ‘마조-사디론’이 더욱 굳건해져만 간다.
허나 작품이 오묘하기 때문에 마치 강아지의 꼬순내를 맡듯 대중들은 자꾸 맛본다. 그들의 입 속에서 데굴데굴 굴려지는 창작가들은 잘게 잘린 포도당처럼 씬에 흡수된다. 마침내 각계각층의 장르로 규정된 유리창을 두드리며 나는 곧 체인지 메이커가 될 것이라는 양기에 이를 가는 아티스트들. 어쩌면 얼터너티브하다는 것은 소비자가 예술가들에게 선고한 지독하고 에로틱한 숙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