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렌식 불가! 아카이브 1.0
WEBZINE
WEDITOR   이다현




아카이브, 진부한 이야기라는 건 알지만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하드커버를 직접 만져보고 난 후 필자는 디지털 아카이브에 대한 감흥을 지워버렸다. 짙은 회색 종이 위 검은색 포일로 반복되는 뱀가죽 패턴. 그 유명한 아르마딜로Armadillo 힐을 떠올려보자. 이건 맥퀸의 〈Plato’s Atlantis〉 컬렉션에 사용된 파충류 가죽에 대한 오마주다. 

과거 아키비스트들의 권력 아래 있던 아카이브 사원은 오늘날 인터넷 액세스가 가능한 ‘가상의 기억 공간’으로 대체되었고, 이러한 변화를 ‘아카이브 2.0’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 중심축을 이루는 디지털 아카이브는 자료들이 동질의 전자 형태로 존재하기에 특화된 보존 방법도, 물리적 공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경제적이다. 하지만,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전 세계를 ‘www’로 연결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웹 환경과 저장 매체는 수차례 개선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전에 생성된 데이터들은 부지되고 있다. 130여 년 뒤에는 디지털 정보 생성을 유지하는 데에 현재 지구에서 생산되는 전체 전력량만큼이 필요할 것이라는 연구가 있기도.





이는 미술관에서 디지털 콘텐츠를 보존할 때도 환기해야 할 문제다. 디지털에 의존해 기억을 외주화하는 시대에 저장 매체의 노화와 우발적 삭제, 그리고 차세대 정보매체라 불리던 CD롬이 불과 수십 년 사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측 불가한 디지털 기술은 온도와 습도에 예민한 아날로그 수집품 못지않게 보존이 까다롭다. 이때 그의 반등으로 디지털 자료가 아날로그 물성을 가진 종이 아카이브 북에 기록되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디지털 콘텐츠가 아날로그 매체에 기록되는 현상에 주목하고, 기존의 디지털 아카이브와 구분하기 위한 일명 ‘역-아카이브’.

에른스트 반 알펜Ernst Van Alphen은 저서 『아카이브를 무대화하기』에서 아카이브를 거대 역사의 흐름 중 그저 일부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현재를 구성함으로써 역사를 가동하는 방법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책과 아카이브의 특성이 이렇게 상반됨에도 아카이브를 책 형태로 만드는 예술가들의 선택이 놀랍다고 언급하는데, 생각해 보자. 아카이브가 시작도 끝도 없는 비선형적 수단이라면, 책은 시작과 끝이 있는 선형적 코덱스Codex 형태를 띤다. 아카이브는 일차적으로 아키비스트에 의해 구축되지만, 그것이 공개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용자에 의해 다시 조직된다는 점에서 아카이브에 내재한 작은 서사들을 발굴하는 일은 이용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카이브라는 형식, 즉 표 서식부터 연대기적 흐름의 나열, 분류와 체계 방식, 그리고 유형학적 이미지 배치 등 이 나름의 ‘형식미’가 지면에 전이될 때 아카이브는 책이라는 매체에 의해 일정한 흐름을 부여받는다. 일정 독서 시간이 넘어가거나 반복해서 읽을 경우, 이 형식미는 이용자가 그 흐름을 거스르거나 뒤섞는 행위를 허용하기도 한다. 이 선형성과 비선형성 사이의 긴장 구조가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대량으로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라는 특성으로 인해 자체적인 역사를 생성하지 못하는 아카이브에 곧 이용자의 능동적인 재배치라는 역사 구성 행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카이브 장소로서 책만이 갖는 새로운 위상이자 가능성이다.



아카이브가 아카이브로서의 가치를 넘어 역사적 가치를 획득하는 때는 단지 하나의 의도를 넘어 복수의 서사, 또는 그와 다른 의미를 생성할 때다. 결국, 축적된 증거의 신성함은 오직 책, 아카이브 1.0에서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