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A nerDOONA odys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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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정재현  정하민

                                       

Q- 정재현, 정하민
A= 배두나

-내년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의 <레벨 문> 촬영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상을 보내고 계신가요.
=완전히 쉬고 있어요. 원래 조금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었고, 쉰대도 쉬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촬영 현장에서 쉬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스스로를 많이 소모해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재충전까진 아니더라도 제가 하는 일을 좀 더 신선하게 느끼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 푹 쉬었습니다. <레벨 문> 찍으며 혹사했던 몸도 잘 돌보고 있고요.

-<린다 린다 린다(2005)>나 <공기인형(2009)> 이후 일본 진출,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이후 할리우드 진출 등 한동안 해외와 국내를 자주 오가셨습니다. 그런데 팬데믹 기간엔 자의든 타의든 해외 활동을 쉬셨죠.
=일본에서 두 작품을 찍을 땐 정말 모든 게 신선했어요. 그리고 <클라우드 아틀라스> 이후로 유럽과 영미권 국가를 오가며 폭풍처럼 10년을 달렸어요. 루이비통 앰배서더를 하며 2박 3일, 심지어 1박 2일로 짧게 유럽 출장을 다녀온 후 바로 밀린 드라마 촬영을 하는 등 1년 중 하루도 못 쉰 날도 많고요. 그런데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럭키한 삶이기도 하잖아요? 몸은 비록 위험 신호를 보내오지만. (웃음) 그러던 중 코로나19로 인해 출국이 불가능했던 게 오히려 내겐 쉬는 시간이었어요. 한 곳에 잘 정착하지 않는 편이라 의도적으로 국내와 해외를 왔다갔다 했지만, 나는 한국에서 한국 영화를 찍는 게 참 재미있어요. 여기선 시차 없이 찍을 수 있고, 사람들과 농담도 통하니까요. 코로나19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한국에만 있던 시간이 참 좋았어요.

-배두나를 생각하면 여전히 청춘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세기말 소구된 청춘 담론의 선두에 배두나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당시 연기한 태희(<고양이를 부탁해>),현남(<플란다스의 개>)의 마음이 여전히 모든 캐릭터들에 녹아있다는 점 때문에요. 20대 초반 청춘의 절정을 보내던 배두나가 생각한 지금의 배두나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당시 제가 볼때 3, 40대는 무척 어려운 존재였죠. 그때의 전 선배들을 뵈면 '내가 인사해도 날 모르시겠지?', '내가 주제넘은 건 아닐까?'하는 생각만 마음속으로 하는 숫기없는 아이였고, 3, 40대가 되면 득도의 경지쯤 오르는 줄 알았어요. 지금 내가 40대가 됐잖아요? 그때랑 똑같아요! 여전히 아이같고, 아직도 뭐든 모르겠는 것이 많고, 헤매고 있고. 나만 똑같은 건진 모르겠지만. (웃음) 현장에서 선배가 되고 가끔은 선생님(같은) 역할도 연기하다 보니, 요즘은 그때 나같던 친구들이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 격려해주고 싶고.

-혹시 그 당시에도 내가 청춘의 담론에 선두에 서있다고 느끼셨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평론가들이나 기자들이 Something New한 배두나의 등장에 얼마나 신났을까 싶거든요.
=체감 못 했죠.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줄도 몰랐고요. 나는 내가 아웃사이더라고만 생각했어요. 세상이 만든 전형적인 틀 중에 내가 맞는 곳이 없었거든요. 2000년대 초반 제가 뉴 페이스처럼 보인 데엔, 엄청난 감독님들이 입봉하던 시기에 제가 현업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그분들이 원하는 상(象)이기도 했을 거예요. 열심히 살 것 같은 배우들 사이에 심드렁하고 나른하게 생긴 애가 하나 있었으니까.

-<플란다스의 개> 오디션장에서 졸고 계셨다는 일화가 대표적이죠.
=졸고 있었다기 보단 현남 역할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봉준호 감독님을 처음 만나던 날 굉장히 피곤했어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제가 연기에 엄청난 열의를 가진 게 아니었거든요. 다른 배우들은 오디션장에서 “노래 해볼게요”, “저 춤도 잘 춥니다”하며 장기를 어필하는데 그런 친구들 사이에 피곤해하는 제가 있었던 거죠. 마침 봉 감독님은 나른해 보이는 배우가 필요하셨고요. 제가 노력했다기보다 시류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최근 필모그래피에선 지금 사회의 단면을 콕콕 집어주고, 다음 세대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셨어요.
=사실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픈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동의하는 메시지를 품은 작품이 있다면 기꺼이 함께하죠. 내가 20대였던 시절보단 세상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해외 활동을 시작하며 이런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는데요, 해외에서 나와 동시대를 보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에서 사는 삶이 정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빡빡한 삶이더라고요. 심지어 그런 삶의 방식을 만인이 강요받았단 생각도 하게 됐고요. 이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 모두에게나 개성이 있고 남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 이런 진리를 해외 활동을 시작한 30대가 되어서야 체득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이미 그 시기를 지나왔잖아요. 그러면 그 시기를 지난 어른들이 우리가 지나온 답답한 생활을 어린 친구들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젊은이들이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그렇다고 내가 운동의 선봉장에 서는 건 죽어도 못하고요, 서포터는 할 수 있어요. 가랑비에 옷 젖는 방식의 영향력을 선호하기도 하고요.

-서포터라는 말을 들으니, 배두나씨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나서서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단 우선 타인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상황을 지켜본 후 한마디를 건네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실제의 저도 그래요. 그런데 남들은 제가 들으려고 한다는 걸 잘 몰라요.

-왜 그럴까요.
=모르겠어요! 그런데 내가 그런 역할을 고른다기보단 나를 캐스팅하려는 감독님들의 의사가 더 중요하죠. “시나리오 재밌으니까 저 이 역할 할래요”라고 감독님께 말해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감독님들이 나한테서 어떤 배역을 보시느냐가 더 중요해요. 만약 정주리 감독님이 <다음 소희> 시나리오를 주시면서, 오유진 형사가 아닌 소희 엄마 역을 제의하셨대도 응했을 거예요.

-배두나씨의 평소 성정과, 감독들이 바라보는 배두나씨가 우연히 맞아 떨어진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제 연기관이 딱 그래요. 배우로서 감독이 하는 말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이것 이상의 의식은 없어요. 딱 영화 안에만 캐릭터로서 살아있길 바라지, ‘내 연기로 영화를 빛내주겠어!’ 하는 마음도 없고요. 또 그런 연기를 좋아하는 감독님들의 작품들을 많이 했네요. 제3자, 관찰자,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사람... 그런데 형사는 그만 하려고요.

-직업만 같을 뿐이지, 다 다른 캐릭터인데도요?
=(읊조리며) 범인... 이제는 범인이 하고 싶어...

-나는 기술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다”, 나는 100%를 다 채우는 것보다 관객이 능동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는 연기를 좋아한다”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빈 곳을 만드는 것 또한 배우의 고유 기술이죠.
=무슨 일이든 20년을 하다 보면, 기술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내 캐릭터 분석 방식이 100%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언급한 연기론을 종종 이야기하는데요, 내 연기론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최근 찾았어요.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한 ‘푼크툼’요. 내가 만약 100%의 내 감정으로만 캐릭터를 채워버리면, 그건 제 경험만 가득한 거잖아요. 그런데 내 감정을 절제하면, 관객 각각의 푼크툼이 들어와서 더 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관객들은 비싼 푯값을 지불하고 큰 스크린이 걸린 개봉관에 오롯이 집중하려 오시잖아요. 그분들은 내 설명 이상의 것을 원할 거란 말이죠. 스크린도 크니까 내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일지 관객들은 금방 눈치챌 테고요. 이 방식이 ‘관객 배두나’가 선호하는 연기기도 해요. 나는 전시회에 가도 작가 코멘트가 너무 많으면 별로거든요. “작가님, 설명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로. 예술 작품을 보고 감흥과 영감을 얻는다는게, 작가의 의도를 알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작품 홍보용 인터뷰마다 제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이 장면에서 감독님이 어떤 의미를 담았다고 생각하세요?”같은 것들이에요. 그걸 내 입으로 말하면 재미도 없고, 내가 그렇게 연기를 안하기도 했고.

-배두나씨가 영화 속에서 연기한 대사들 중 무얼 가져와도 배우 배두나를 설명할 수 있는 대사더라고요. 가령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동진(송강호 분)에게 고문받을 때 외치는 나 보통 사람 아니거든요”라든가, <고양이를 부탁해(2001)>에서 태희가 아버지에게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에요”라며 일갈하는 대사 등이요. 혹시 유독 좋아하는 본인의 대사가 있으세요?
=사실 내 출연작을 거의 안 봐요. 그래서 누가 이렇게 언급해줘야 내가 이런 대사를 연기했었지, 하며 재상기하죠. 그런데 <고양이를 부탁해> 속 태희 대사 중 잊지 못하는 한 줄이 있어요. “나는 네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 그래도 네 편이야”. 태희가 지영(옥지영 분)에게 건네는 대사인데요, 당시의 내가 남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이 장면을 다시 말하려니 지금도 또 울컥하네. 그때 찍힌 화면을 보면 내 눈두덩이가 이만큼 부어있어요. 촬영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남들의 만류에도 본인의 선택을 관철할 때, 이 선택이 성공할 것만 같은 강력한 확신이 드세요?
=몸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어요. (웃음) 후회하더라도 내가 후회하겠다는 마음이죠. 사실 작품을 고를 때도 주변에 많은 의견을 구하거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내 정신이 홀딱 빠져 있는 작품을 선택해요. 넷플릭스에서 <센스8>을 처음 찍었을 때도, 넷플릭스가 훗날 미디어 업계를 선도할 거란 생각은 못했어요. 그냥 친한 워쇼스키 감독님들이 TV 시리즈 하나 하자고 하셔서, “해보죠~”하는 마음으로 갔으니까요. 영어 공부를 하러 훌쩍 떠난 것도 그래요. 한국에선 인지도도 있고, 주연작도 많은 배우인데 영어를 배우러 런던에 간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말렸어요. 그런데 몸이 이미 움직였어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함께 찍은 동료들에게 치하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땐 영어 실력이 지금같지 않다 보니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했거든요. 그 후회를 없애고 싶어 영어를 배우러 간 거예요.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습니다.
=사실 ‘인간 배두나’는 모든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영화는, 혹은 연기는 몸을 사리지 않고 해보고 싶어요. 나는 정형화된 스타일의 연기를 한다기보다 내가 귀납적으로 터득한 방식의 연기를 하잖아요. 이런 연기 스타일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요. 일에 있어 도전과 탐험은 주저하지 않으려 해요.

-살다보면 직업인 나자연인 나가 서로 화합할 때도, 상충할 때도 있지 않나요. 오랫동안 직업인으로 살아오신 배두나씨께 여쭤봅니다. 직업인으로서 잘 사는 것과 자연인으로서 잘 사는 것이 어떤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세요?
=나이가 들어도 ‘자연인 배두나가 잘 사는 법’은 잘 모르겠어요. 만약 내가 회사원이면 직업인 배두나와 자연인 배두나를 정말로 잘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이쪽 일은 배우의 자아에 무게가 실리거든요. 그런데 직업인 배두나는 지금 굉장히 만족스럽고, 사실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 하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잘 참으면 지금처럼 무리 없이 계속 갈 것 같아요. 그런데 자연인 배두나는 청소년기에 생각했을 법한 고민들을 여전히 품고 살아요. ‘인간관계는 왜 어렵지?’,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하게 잘 살까?’하는 의문들이요. 그래서 요즘은 행복해야겠다는 강박을 느끼지 말자고 생각해요. ‘굳이 행복해야 해?’하는 마음이요.

-인생이 42.195km짜리 마라톤이라면, 배두나씨는 지금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달리고 계신 길의 질감도 궁금해요.
=이 마라톤이 내일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디쯤 와 있다고 가늠은 못 하겠어요. 마흔이 넘으면서,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완주해야 하는 총 거리를 알고 싶진 않고요. 음... 내가 지금 서 있는 길은 모래사장 위 레드카펫같아요. 나 레드카펫 진짜 좋아하거든요? 예쁘게 차려입고 멋있게 걷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같은 순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모래사장이에요.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건너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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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하민
배두나가 걷는 모래사장에는 여러 깃발이 꽂혀있다.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괴물(2006)>을 거쳐 <다음 소희(2023)>까지, 그녀가 꽂은 깃발들을 따라가 보면 한국 영화의 그때와 지금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늘 시대의 변곡점에서 가장 독특한 색채를 가진 아이콘이자, 사회의 모습을 투명하게 비추는 배우였다. 배두나가 연기한 여성들은 온전히 동시대적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과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태희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와 함께 성장통을 앓는다. 당시 현남, 태희와 같은 시간을 살았던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마주해야 했던 시대적 혼란과 치기 어린 욕망을 ‘배두나’로 기억하게 됐다. 그녀의 이름 세 글자는 어떤 세대에겐 마치 친구와 노닥거리며 적은 쪽지를 담은 세기말의 타임캡슐이다.

노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무구한 눈을 깜박이던 친구 현남은 어느 날 붉은 트레이닝 복을 목 끝까지 잠그고 활을 쏘는 고모가 되어 나타난다. <괴물(2006)>의 남주의 화살은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가로질러 자신의 다음 세대를 지킬 줄 아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배두나의 여성상은 주체로 우뚝 섰다. 해외 활동 이후 그녀는 북한에서 온 탁구선수 리분희로 관객들에게 나타났다. 리분희는 채를 휘두르며 삼팔선을 닮은 탁구대의 네트 위로 탁구공을 넘겼다. 호오가 갈리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배두나는, 배두나만큼은 평가와 무관하게 언제나 그때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누군가로 존재했다.

<도희야(2014)>부터 배두나는 본격적으로 구원자의 얼굴을 입는다. 봉준호 감독이 그린 현남과 남주의 계보가 확장되어 정주리 감독의 영남은 ‘듣는 인물’로서의 배두나를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약자의 위치에서도 약자를 도왔던 현남과 약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치를 세웠던 남주, 그리고 제복을 입은 영남까지. 그들은 늘 자리에 상관 없이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인물이다. 앞다투어 제 목소리만 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배두나의 여성은 히어로의 모습을 한다.

이토록 긴밀하게 시간과 교감하는 인물들을 배두나는 시대초월적으로 연기한다. 아주 길게 늘어진 선형적 시간을 유연하게 구부리고, 이를 접고 또 접어 곧 좁고 두꺼운 인물을 만들어 낸다. 배두나라는 공간에 켜켜이 쌓인 인물의 마음은 때로는 그녀의 치켜뜬 눈으로, 때로는 다부진 뒷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배두나는 그녀가 만난 인물의 시간을 관객에게 강요하지도, 내던지지도 않는다. 다만 작게 출판된 저항 시인의 시집처럼, 묵직한 침묵으로 전달할 뿐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침묵은 살아보지 않은 시간과 지금을 치열하게 부딪치게 한다. 관객이 비집고 들어갈 틈, 그곳에서 오늘날의 청년들은 23년 전의 현남과 태희를 마주하고, 그들과 공명한다.

배두나와 같은 시간을 밟아온 관객들도 그녀가 초월한 시간을 함께 뛰어넘은 관객들도, 모두 그녀가 걷는 레드카펫을 잡아주고 있다. 그녀가 이 모래사장의 레드카펫을 조금 더 단단하게 밟아갈 수 있도록. 같지만 다른 시대를 숨 쉰 수많은 관객은 분명 태희가 지영에게 그래 주었던 것처럼 영영 그녀의 오디세이에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