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팀 발제 : 알랭 레네 -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WEBZINE
WEDITOR 윤다은
발제 일자: 3.22
발제 영화: 알랭 레네 감독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2011)>
참석 인원: MJ,EB,DE,CY,HJ,SY,HG,SJ
DE :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름 제목과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쓴 알랭 레네를 가져왔다.
매우 간략한 감독 소개를 하면, 프랑스 감독, 누벨바그 좌안파 감독으로, 누벨바그와 누보로망의 측면을 모두 가졌다.
HJ : 누벨바그랑 누보로망의 차이도 알려줘야 하지 않나?
DE : 우선 매체 자체가 다르다. 누벨바그는 영화고 누보로망은 문학이니까…
HK : 누벨바그도 고다르 트뤼포의 흐름이 있고 좌안파라고 알랭레네랑 바르다 등의 흐름이 있는데, 주로 좌안파가 누보로망하고 같이엮이는 거다. 알랭레네도 처음 시작했을 때 누보로망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인 뒤라스와 함께했었고… 그래서 누벨바그와 좌안파 누보로망의 흐름이 주로 같이 나온다.
#1
DE : 전체적으로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그리고 이 영화에는 에우리디케 설화가 등장한다. 웨이터가 와서 아리스타이우스의 구애와 같은 편지를 전해준다거나, 독사에 밟히는 대신 트럭에 치인다거나 하는 설정들에서 이미 모두 아셨을 것 같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며, 삶과 죽음의 경계가 나오고, “얼굴을 보면 안된다.” 라는 설정이 주어지는데,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각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보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읽었는지 나눠보면 어떨지…?
**에우리디케 설화
에우리디케는 트라이카 지방의 님프인데, 원정이 끝나고 돌아온 오르페우스와 결혼하다. 그러나 산책을 나갔다가 아리스타이우스의 구애를 받게되는데, 이를 거부하고 도망친다. 안타깝게도, 도망치던 중 에우리디케는 독사를 밟게 되어 저승세계로 떨어지게 된다….
SJ : 좋은 영화인데 살짝 취향하고는 빗겨가는 영화였다. 그런 영화들이 있다. 좋은데 수용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지점들이 있는 영화 말이다. 층위가 여러 개라 이해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영화를 느끼기 어려웠다. 이해를 하려다보니까 영화로서 좀 많이 느끼거나 즐기질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관람을 하기도 했다. 좋았던 건 여태까지 주로 봐온 영화들이나, 사람들이 점점 갈수록 더 좋다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떠먹여주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영화의 경우엔 스토리의 힘만 가져가는 영화에 속한다고 생각되어서 흥미로웠다.
DE : 사실 스크린 안에 연극이란 매체가 바로 삽입된 수준이라 좀 헷갈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선 자체가 영화 안에서 단계적으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인물에 부여된 상태처럼 있다. 그러다보니 계속 교차점이 생기면서, 물건도 있었던 자리에 없거나 사라지고, 대사도 중간에 다시 반복되는 부분들이 만들어지고, 그걸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지점들 자체가 좀 재미있었다. 나는 영화 밖에서 2차 관객이 되고 앙투한 당탁씨의 지인들은 1차 관객으로 있으며, 화면 속 화면에도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사람들은 결국 연극 배우라는 지점들 말이다.
EB : 사실 이 영화에 있는 개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들이 좀 무용하다고 봤다. 왜냐하면, 이 영화 안에서는 논리적으로 구성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건 오히려 약간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코멘트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SJ : 마찬가지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의미의 영화적인 체험이라 생각했다. 스크린에 압도되는 느낌의 영화적인 체험 말고 말이다. 그게 보통의 영화적인 체험이라고 느끼는 것 같고, 나 역시도 대체로 그렇게 느끼는 편이지만 사실 그런 종류 말고 다른 의미의 영화적인 체험을 할 수 있지 않나. 이 내용은 너무 계속 반복이 된다. 그랬어가지고 뭐 하지 말랬는데 하고, 후회를 하고, 하지 말랬는데 한 다음에 후회를 하고,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좀 궁금하다.
CY : 이 감독님(알랭 레네)이 노장이라는 것을 너무 중점적으로 봤을 수도 있는데, 당탁이 나중에 연출가로 다시 튀어나와서 배우들한테이 연극이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확인받고 싶었다고 말을 한다. 그게 감독님의 개인적인 소망처럼 읽히기도 했고, 완전 라스트 댄스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보니까 배우들도 계속 필모그래피에서 쓰시던 배우들을 쓰셨다. 그런 부분들에서 자기의 이야기처럼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결국에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이 사람들이 자기를 애정해 주는지 아니면 자기의 영화가 계속 기억될 수 있을지를 좀 확인하고 싶었던 미련처럼 느껴졌다.
MJ : 나는 남자가 계속해서 진실을 보려고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인간의 영역이나 삶의 영역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신화를 생각을 했을 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금기시되는 행동을 하면 다들 죽거나 다치거나 한다. 영화 속 남자는 계속해서 인간이나 삶에선 느낄 수 없는, 인간으로 살면 마주할 수 없는 그런 진실을 초월해서 보려고 하고 마지막을 맞는 것 같았다.
HK : 원본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나오는 에우리디케 이야기다. 원본에서는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규칙으로 나온다. 물론 얼굴을 보게 되었지만, 바로 죽지는 않는다. 에우리디케만 다시 지옥으로 빠지고, 오르페우스는 지하세계에서 올라와서 슬퍼하게 된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들에게 다시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고, “나는 난 내 천년의 사랑을 잃었어 저는가만히 있을 거예요.” 라는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맞아 죽는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연극으로 각색된 버전을 사용하고 있다.
EB :심지어 영화 속 연극 영상의 감독도 따로 있다.
HK : 그래서 ‘얼굴을 본다는 것’의 의미도 레이어가 엄청나게 많을 뿐만 아니라 변색도 많이 됐다고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걸 봤을때 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감독님이 라스트 댄스처럼 만든 영화라서 자기 전작에 대한 것을 배우 말고도 많이 넣어놨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게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라는 영화다. 포스터가 대놓고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을 가장 관통하는 대사가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못했어.“ 다. 대놓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인지하고, 무엇을 봤냐”에 대한 질문을수도 없이 하는 감독이라서 여기서도 다시 질문을 환기시키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얼굴에 또 초점을 맞추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게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2014)>다.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트라우마적인 기억이 형상화된 얼굴의 비가시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래서 어쩌면 비슷한 맥락으로도 왜 얼굴일까를 좀 생각해 볼 수 있는 맥락아닐까 싶다.
DE : 저는 피닉스를 말하니까 제발트 소설이 확 생각났다. 제발트도 되게 표현주의 영화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알랭 레네 영화랑도 교차점이 되게 많은데, 비가시성도 그렇고 다루고 있는 지점 자체가 겹치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다. 문학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면, 영화 내에서 세 가지의 매체가 계속 어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연극, 문학이 계속해서 돈다. 연극적 효과는, 중간중간 핀 조명처럼 빛을 쏜다던가, 얼굴 제외하곤 페이드아웃 시켜서 얼굴만 둥둥 뜨게 한다거나 하는 부분들에서 많이 보였다. 문학적인 건 알랭 레네의 30분짜리 다큐 <밤과 안개>가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랑 확 맞닿는 것처럼 설화를 끌고 와서 재현할 때의 방식도 그렇고 문학의 해석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은유하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EB : 또 다른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사실 이 영화가 포용하고 있는 그러니까 이 영화가 끌어안을 수 있는 텍스트의 범위가 굉장히 넓고 아까 말한대로 심지어 표현주의적으로도 볼 수도 있고 세부적인 것들도 많다. 그런데 저의 경우엔 보다가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포기를 했고, 형식 측면에서 봤다. 기본적으로 문학을 기반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고, 그 다음 시대 사람들이 리얼리즘을 벗어난 방법론을 시도하고자 했는데 레네는 그중에서도 영화 외의 무언가를 가져와서 영화를 규명하려고 했던 사람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 저는 <사랑해 사랑해(1968)> 까지만 보고 이후로 본 적이 없는데, 지금도, 현재도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얼렁뚱땅하게도 웨스 앤더슨이 생각났다. <애스터로이드시티(2023)> 등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소 단위 같은 걸 실험하지 않나. 웨스앤더슨은 너무 직접적으로 가져오기도 하고 아예 연극이 구성되어 있으니까 좀 웃기긴 하지만 여기에 있는 연극적인 이미지들은 기본적으로 연극에서 온 게 아니라 영화에서 온 연극 정도로 생각을 했다.
저는 알랭레네는 (형식만 보자면) 영화의 한계나 아니면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왔고 죽기 전까지도 이 고민을 했다고 본다.
#2
EB : 에우리디케는 고다르도 쓰는 것이다. 영화사들에서 에우리디케를 이야기하면서 영화의 역사를 돌아보고, 영화의 미래를 가늠하는 인용된 이야기로 쓰고 있다. 여기서도 똑같이 쓰였다는 것이 좀 의미심장해 보였는데, 어쨌든 형식주의적으로 이것은 영화의 미래를 좀가늠해보는 식의 영화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이게 희망적인 내용인가, 아니면 허무주의적인 내용인가 이게 궁금하다.
SJ : 완전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영화는 감독이 90살 가까이 나이가 들고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 알랭레네가 느끼기에 본인이 젊었던 시절부터 영화는 시대에 있던 예술 중 가장 프로그래스된 진보적인 예술이었는데, 그것이 점점 퇴색되고 있나 혹은 그런 예술이 안 되고 있지 않나라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느꼈다. 본인이 고민을 한 결과를 보여준 것 같다. ‘여전히 시네마는 가장 진보된 예술이 되지않나’ ,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가장 첨단의 어떤 무언가를 보여줘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 같아서 그런 것은 결국 희망이라고 본다. ‘시네마가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라고 자기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이니 말이다.
HK : 세대간의 교차 혹은 화합 혹은 대화가 굉장히 큰 주제다. 그런데 마지막 장례식, 마지막 장면이 그 젊은 여배우가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거기서 희망을 안 보기가 힘들 것 같다. 마지막을 그 여배우의 얼굴로 끝낸다는 것 자체가 감독이 자기가 죽어도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실 그런 내용이다. 자기 죽음을 먼저 상정하고 얘기하는 이야기다. 나는 여기서 오만하기보다는 정말 진솔하고, 자기 작품의 막바지에서 이후에 어떻게 될까에 대한 겸허한 희망이 담긴 소고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3
HJ : 나는 희망과 허무주의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안 해봐서, 만약에 이 영화를 희망으로 읽는다면, 만약에 영화에 대해서 낙관을 한다면,어떤 방식으로 낙관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EB : 이 영화는 희망적인 영화가 맞다고 본다. 알랭 레네 스스로도 희망적이게 남기고 싶어 했고 영화 내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왜 이걸 물어봤냐하면(희망인지 허무주의인지) 나는 이 형식 자체가 무섭다. 이 영화가, 심지어 가장 극단의 예술영화라 할 수도 있는 것이, 반(反)영화로서 연극의 요소를 갖고 오고, 영화의 리얼리즘을 끝까지 무너뜨리고, 논리적으로도 규명이 안되는 상태라는 것이 말이다. 그런 것들은 실은 가장 극단에 위치한 산업 영화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등을 보면 가능한 현상이다. 완전히 극단에 있지만 말이다.
혹시 오해할까 말하는 부분인데, 이 해체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영화의 파편성은 리얼리즘과 동시에, 그저 가지고 있는 영화의 기본적인 속성이라서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DE : 나는 꼴라주와 디꼴라주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런 지점들이 독창적인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가 계속해서 끌려오면서, 시간적인 부분들이 끌려오면서, 그저 지나쳤기보다는 결국에는 다시 현현하는 상태가 된다. 로브그리예가 말한 것처럼 영화라는 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단촐한 회상이 아닌 과거를 계속 끌고 온 현재적인 것이라는 걸 계속해서 영화 안에서 상기하게 되었던 것 같다.
CY : 약간 막연한 생각을 했는데, 편집이 굉장히 자유분방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되게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되게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에 아웃포커싱된 상태로 젊은 연극단이 한마디 하면 앞에서 똑같은 대사를 늙은 배우가 하는 지점에서 이미 주어져 있는 틀 같은 것을 본 거 같기도 하고, 약간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미래 세대가 새로운 길을 이렇게 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보기보다는, 결국에 우리는 가겠지만, 이제 너희들이 가서 비슷한 행위들을 하겠지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발제 영화: 알랭 레네 감독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2011)>
참석 인원: MJ,EB,DE,CY,HJ,SY,HG,SJ
DE :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름 제목과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쓴 알랭 레네를 가져왔다.
매우 간략한 감독 소개를 하면, 프랑스 감독, 누벨바그 좌안파 감독으로, 누벨바그와 누보로망의 측면을 모두 가졌다.
HJ : 누벨바그랑 누보로망의 차이도 알려줘야 하지 않나?
DE : 우선 매체 자체가 다르다. 누벨바그는 영화고 누보로망은 문학이니까…
HK : 누벨바그도 고다르 트뤼포의 흐름이 있고 좌안파라고 알랭레네랑 바르다 등의 흐름이 있는데, 주로 좌안파가 누보로망하고 같이엮이는 거다. 알랭레네도 처음 시작했을 때 누보로망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인 뒤라스와 함께했었고… 그래서 누벨바그와 좌안파 누보로망의 흐름이 주로 같이 나온다.
#1
DE : 전체적으로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그리고 이 영화에는 에우리디케 설화가 등장한다. 웨이터가 와서 아리스타이우스의 구애와 같은 편지를 전해준다거나, 독사에 밟히는 대신 트럭에 치인다거나 하는 설정들에서 이미 모두 아셨을 것 같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며, 삶과 죽음의 경계가 나오고, “얼굴을 보면 안된다.” 라는 설정이 주어지는데,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각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보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읽었는지 나눠보면 어떨지…?
**에우리디케 설화
에우리디케는 트라이카 지방의 님프인데, 원정이 끝나고 돌아온 오르페우스와 결혼하다. 그러나 산책을 나갔다가 아리스타이우스의 구애를 받게되는데, 이를 거부하고 도망친다. 안타깝게도, 도망치던 중 에우리디케는 독사를 밟게 되어 저승세계로 떨어지게 된다….
SJ : 좋은 영화인데 살짝 취향하고는 빗겨가는 영화였다. 그런 영화들이 있다. 좋은데 수용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지점들이 있는 영화 말이다. 층위가 여러 개라 이해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영화를 느끼기 어려웠다. 이해를 하려다보니까 영화로서 좀 많이 느끼거나 즐기질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관람을 하기도 했다. 좋았던 건 여태까지 주로 봐온 영화들이나, 사람들이 점점 갈수록 더 좋다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떠먹여주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영화의 경우엔 스토리의 힘만 가져가는 영화에 속한다고 생각되어서 흥미로웠다.
DE : 사실 스크린 안에 연극이란 매체가 바로 삽입된 수준이라 좀 헷갈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선 자체가 영화 안에서 단계적으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인물에 부여된 상태처럼 있다. 그러다보니 계속 교차점이 생기면서, 물건도 있었던 자리에 없거나 사라지고, 대사도 중간에 다시 반복되는 부분들이 만들어지고, 그걸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지점들 자체가 좀 재미있었다. 나는 영화 밖에서 2차 관객이 되고 앙투한 당탁씨의 지인들은 1차 관객으로 있으며, 화면 속 화면에도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사람들은 결국 연극 배우라는 지점들 말이다.
EB : 사실 이 영화에 있는 개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들이 좀 무용하다고 봤다. 왜냐하면, 이 영화 안에서는 논리적으로 구성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건 오히려 약간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코멘트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SJ : 마찬가지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의미의 영화적인 체험이라 생각했다. 스크린에 압도되는 느낌의 영화적인 체험 말고 말이다. 그게 보통의 영화적인 체험이라고 느끼는 것 같고, 나 역시도 대체로 그렇게 느끼는 편이지만 사실 그런 종류 말고 다른 의미의 영화적인 체험을 할 수 있지 않나. 이 내용은 너무 계속 반복이 된다. 그랬어가지고 뭐 하지 말랬는데 하고, 후회를 하고, 하지 말랬는데 한 다음에 후회를 하고,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좀 궁금하다.
CY : 이 감독님(알랭 레네)이 노장이라는 것을 너무 중점적으로 봤을 수도 있는데, 당탁이 나중에 연출가로 다시 튀어나와서 배우들한테이 연극이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확인받고 싶었다고 말을 한다. 그게 감독님의 개인적인 소망처럼 읽히기도 했고, 완전 라스트 댄스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보니까 배우들도 계속 필모그래피에서 쓰시던 배우들을 쓰셨다. 그런 부분들에서 자기의 이야기처럼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결국에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이 사람들이 자기를 애정해 주는지 아니면 자기의 영화가 계속 기억될 수 있을지를 좀 확인하고 싶었던 미련처럼 느껴졌다.
MJ : 나는 남자가 계속해서 진실을 보려고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인간의 영역이나 삶의 영역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신화를 생각을 했을 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금기시되는 행동을 하면 다들 죽거나 다치거나 한다. 영화 속 남자는 계속해서 인간이나 삶에선 느낄 수 없는, 인간으로 살면 마주할 수 없는 그런 진실을 초월해서 보려고 하고 마지막을 맞는 것 같았다.
HK : 원본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나오는 에우리디케 이야기다. 원본에서는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규칙으로 나온다. 물론 얼굴을 보게 되었지만, 바로 죽지는 않는다. 에우리디케만 다시 지옥으로 빠지고, 오르페우스는 지하세계에서 올라와서 슬퍼하게 된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들에게 다시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고, “나는 난 내 천년의 사랑을 잃었어 저는가만히 있을 거예요.” 라는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맞아 죽는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연극으로 각색된 버전을 사용하고 있다.
EB :심지어 영화 속 연극 영상의 감독도 따로 있다.
HK : 그래서 ‘얼굴을 본다는 것’의 의미도 레이어가 엄청나게 많을 뿐만 아니라 변색도 많이 됐다고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걸 봤을때 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감독님이 라스트 댄스처럼 만든 영화라서 자기 전작에 대한 것을 배우 말고도 많이 넣어놨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게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라는 영화다. 포스터가 대놓고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을 가장 관통하는 대사가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못했어.“ 다. 대놓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인지하고, 무엇을 봤냐”에 대한 질문을수도 없이 하는 감독이라서 여기서도 다시 질문을 환기시키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얼굴에 또 초점을 맞추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게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2014)>다.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트라우마적인 기억이 형상화된 얼굴의 비가시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래서 어쩌면 비슷한 맥락으로도 왜 얼굴일까를 좀 생각해 볼 수 있는 맥락아닐까 싶다.
DE : 저는 피닉스를 말하니까 제발트 소설이 확 생각났다. 제발트도 되게 표현주의 영화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알랭 레네 영화랑도 교차점이 되게 많은데, 비가시성도 그렇고 다루고 있는 지점 자체가 겹치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다. 문학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면, 영화 내에서 세 가지의 매체가 계속 어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연극, 문학이 계속해서 돈다. 연극적 효과는, 중간중간 핀 조명처럼 빛을 쏜다던가, 얼굴 제외하곤 페이드아웃 시켜서 얼굴만 둥둥 뜨게 한다거나 하는 부분들에서 많이 보였다. 문학적인 건 알랭 레네의 30분짜리 다큐 <밤과 안개>가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랑 확 맞닿는 것처럼 설화를 끌고 와서 재현할 때의 방식도 그렇고 문학의 해석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은유하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EB : 또 다른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사실 이 영화가 포용하고 있는 그러니까 이 영화가 끌어안을 수 있는 텍스트의 범위가 굉장히 넓고 아까 말한대로 심지어 표현주의적으로도 볼 수도 있고 세부적인 것들도 많다. 그런데 저의 경우엔 보다가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포기를 했고, 형식 측면에서 봤다. 기본적으로 문학을 기반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고, 그 다음 시대 사람들이 리얼리즘을 벗어난 방법론을 시도하고자 했는데 레네는 그중에서도 영화 외의 무언가를 가져와서 영화를 규명하려고 했던 사람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 저는 <사랑해 사랑해(1968)> 까지만 보고 이후로 본 적이 없는데, 지금도, 현재도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얼렁뚱땅하게도 웨스 앤더슨이 생각났다. <애스터로이드시티(2023)> 등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소 단위 같은 걸 실험하지 않나. 웨스앤더슨은 너무 직접적으로 가져오기도 하고 아예 연극이 구성되어 있으니까 좀 웃기긴 하지만 여기에 있는 연극적인 이미지들은 기본적으로 연극에서 온 게 아니라 영화에서 온 연극 정도로 생각을 했다.
저는 알랭레네는 (형식만 보자면) 영화의 한계나 아니면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왔고 죽기 전까지도 이 고민을 했다고 본다.
#2
EB : 에우리디케는 고다르도 쓰는 것이다. 영화사들에서 에우리디케를 이야기하면서 영화의 역사를 돌아보고, 영화의 미래를 가늠하는 인용된 이야기로 쓰고 있다. 여기서도 똑같이 쓰였다는 것이 좀 의미심장해 보였는데, 어쨌든 형식주의적으로 이것은 영화의 미래를 좀가늠해보는 식의 영화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이게 희망적인 내용인가, 아니면 허무주의적인 내용인가 이게 궁금하다.
SJ : 완전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영화는 감독이 90살 가까이 나이가 들고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 알랭레네가 느끼기에 본인이 젊었던 시절부터 영화는 시대에 있던 예술 중 가장 프로그래스된 진보적인 예술이었는데, 그것이 점점 퇴색되고 있나 혹은 그런 예술이 안 되고 있지 않나라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느꼈다. 본인이 고민을 한 결과를 보여준 것 같다. ‘여전히 시네마는 가장 진보된 예술이 되지않나’ ,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가장 첨단의 어떤 무언가를 보여줘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 같아서 그런 것은 결국 희망이라고 본다. ‘시네마가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라고 자기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이니 말이다.
HK : 세대간의 교차 혹은 화합 혹은 대화가 굉장히 큰 주제다. 그런데 마지막 장례식, 마지막 장면이 그 젊은 여배우가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거기서 희망을 안 보기가 힘들 것 같다. 마지막을 그 여배우의 얼굴로 끝낸다는 것 자체가 감독이 자기가 죽어도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실 그런 내용이다. 자기 죽음을 먼저 상정하고 얘기하는 이야기다. 나는 여기서 오만하기보다는 정말 진솔하고, 자기 작품의 막바지에서 이후에 어떻게 될까에 대한 겸허한 희망이 담긴 소고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3
HJ : 나는 희망과 허무주의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안 해봐서, 만약에 이 영화를 희망으로 읽는다면, 만약에 영화에 대해서 낙관을 한다면,어떤 방식으로 낙관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EB : 이 영화는 희망적인 영화가 맞다고 본다. 알랭 레네 스스로도 희망적이게 남기고 싶어 했고 영화 내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왜 이걸 물어봤냐하면(희망인지 허무주의인지) 나는 이 형식 자체가 무섭다. 이 영화가, 심지어 가장 극단의 예술영화라 할 수도 있는 것이, 반(反)영화로서 연극의 요소를 갖고 오고, 영화의 리얼리즘을 끝까지 무너뜨리고, 논리적으로도 규명이 안되는 상태라는 것이 말이다. 그런 것들은 실은 가장 극단에 위치한 산업 영화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등을 보면 가능한 현상이다. 완전히 극단에 있지만 말이다.
혹시 오해할까 말하는 부분인데, 이 해체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영화의 파편성은 리얼리즘과 동시에, 그저 가지고 있는 영화의 기본적인 속성이라서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DE : 나는 꼴라주와 디꼴라주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런 지점들이 독창적인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가 계속해서 끌려오면서, 시간적인 부분들이 끌려오면서, 그저 지나쳤기보다는 결국에는 다시 현현하는 상태가 된다. 로브그리예가 말한 것처럼 영화라는 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단촐한 회상이 아닌 과거를 계속 끌고 온 현재적인 것이라는 걸 계속해서 영화 안에서 상기하게 되었던 것 같다.
CY : 약간 막연한 생각을 했는데, 편집이 굉장히 자유분방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되게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되게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에 아웃포커싱된 상태로 젊은 연극단이 한마디 하면 앞에서 똑같은 대사를 늙은 배우가 하는 지점에서 이미 주어져 있는 틀 같은 것을 본 거 같기도 하고, 약간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미래 세대가 새로운 길을 이렇게 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보기보다는, 결국에 우리는 가겠지만, 이제 너희들이 가서 비슷한 행위들을 하겠지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