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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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조현준

                                       

고등학교 문학 시간, 수업에서 우리는 어떠한 시의 어조가 '여성적'이라고 배우곤 한다. 대개 학교 수업에서 그러한 배움이 있기 이전에 '여성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답해볼 기회를 가져보진 않는다. 그럼에도, 직관적으로 시를 다시 한번 스스로 읊조리며 어조가 '여성적'이라는 공교육 상 국어 과목의 해석에 대해 관성적으로 수긍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프레임이나 도식에 대한 받아들임은 관성적으로 작용한다. 경험적으로 느껴온 바가 있기에, 어떤 입력 값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이 다소 고정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학 수업 시간에 수없이 거론되었을 '여성적 어조'에 대해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것 역시, 그러한 도식의 정형성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식은 고정적이다. 때로 견고함을 바탕으로 혼돈을 정돈해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편견에 매몰되는 방향으로 우리의 시각을 오도하며 편협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순기능 그 이면엔, 혼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회피가 잠자고 있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예술적으로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칭송 받는 영화를 보더라도, 이상하게 불편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특히 여성 인물이 다뤄지는 데 있어서 평면성이 드러날 때 묘한 위화감이 찾아왔다. 그러한 시각을 명시적으로 '혐오'로 규정하긴 어렵겠지만, 전통적으로 답습되어온 실존적 성찰의 주체로서의 남성의 이미지가 내면화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영화들에서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결코 '단선적인 배제'의 의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인물을, 어떤 도식이 아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을 뒤로 밀어낸다.


여성 인물을 '정령화(신비화라는 용어 대신 정령화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넘어, 초월적 숭고함을 암시하는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이다)'하여 지나치게 숭고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수많은 영화에서, 무수한 도덕적 결함들과 실존적인 방황을 겪는 인물들을 품어주거나, 몸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속세의 고민들로부터 동떨어진 정령 같은 여성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  




<헤어질 결심(2022)>의 서래(탕웨이 분)를 살펴보자. 극 중 서래는 겪은 일들만 놓고 보면 인생이 기구하고 마음 아픈 상처로 가득하다. 가족을 이른 나이에 여의고, 힘겹게 넘어온 한국에서 결혼한 남편 기도수(유승목 분)는 가정 폭력을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악질의 변태다. 히스토리가 히스테리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럼에도 서래는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고한 모습을 지킨다. 사무치는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장해준 형사(박해일 분)와 달리, 서래는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삼키듯 초연함을 잃지 않는다. 관객은 이내 서래의 욕망과 격정 앞에 흔들리지 않는 아우라에 매료된다. 서래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우아한 여성 인물로 인자하게 재현하는 것은, 반대로 내면의 복잡한 감정선을 '정령화'라는 다소 단선적인 재현론으로 환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래는 모든 것을 인자하게 감내하는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남편 기도수를 죽이기까지 한, 손이 피로 얼룩진 살인자다. 그녀가 내몰렸던 고통스러운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녀가 저지른 살인은 온전히 정당화되기 어렵다. 서래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느꼈을 감정과 충동들은 다분히 격정적이며 인간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반복하여 재현되는 서래의 붕 떠있는 듯한 초연함으로 인해, 그녀가 택한 살인이라는 선택 역시 (다분히 인간적인 분노에서 오는 결정이 아닌) 정령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의 우아한 발현 정도로 다가온다. 인물 제마다의 감정의 표현 방식이 있을 것이지만, 서래가 감당하던 고통을 그저 가여운 정령이 감수하는 숭고의 무게가 아닌, 질펀하고도 세속적인 실존의 체험으로 재현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 아닌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세가지 색: 블루(1993)>의 줄리(줄리엣 비노쉬 분)는 남편을 잃고 난 뒤의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 나선다. 영화의 아름다운 미장센을 차치하고, 줄리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영화가 다루는 방식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줄리는 남편을 잃은 직후, 남편의 전 동료 올리비에(브누아 레정 분)의 추근덕거림(유사 스토킹)에 시달린다. 영화 내에선 마치 슬픔에 빠진 여성에게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 마냥 주둥이를 놀리지만, 그저 유약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가스라이팅하려는 시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같잖은 접근에 줄리는 단호하고 차갑게 대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정령의 품위와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필자였다면 아주 험한 말을 내뱉고 접근금지명령 신청을 했을 텐데 말이다. 물리적으로 감당해야할 슬픔이 비대한 주인공 줄리에게, '제 딴에는 나름 깨어 있는 남성 예술가' 올리비에가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예술에 의한 구원(이라 쓰고 맨스플레인을 곁들인 사욕 채우기라 읽는다)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 가학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 와중에도 줄리는 이 모든 것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집 앞 수영장에서 물살을 가로지르며 우아하게 아픔을 삼키고 흘려보낸다. 후반부에 이르러 줄리는 죽은 남편의 생전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줄리는 자신의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불륜녀 상드린(플로렌스 퍼넬 분)마저도 용서하며, 홀로 남겨진 그녀에게 남편이 남긴 저택에서 살 것을 제안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종국엔 올리비에가 계속 요구하던 예술 작업의 재개를 받아들이고, 올리비에와의 관계도 화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암시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도대체 왜 줄리는 이 불편한 상황들에 대해 불쾌함을 표하지 않아야 했던 것인가? 왜 상드린에게 들끓는 복수심을 품지 않고 그녀를 곧바로 용서해야 했던 것인가? 왜 모든 것을 그녀는 다분히 인간적인 범주의 감정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채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는가?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성에 대한 페티시즘을, 구도적 숭고를 떠받든다는 명목 하에, 정령화의 도식에 꾸겨 넣으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범속적인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영혼의 소유자로서 여성인물들이 심심찮게 영화 내에서 재현되곤 한다. 정령의 침묵이 가지는 세련된 고고함도 그 나름의 미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재현 방식이 여성 인물을 다루는 고정적인 도식으로 자리잡아 다양한 형태의 인물들을 외면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정령으로 재현하는 방식은 여성 인물들이, 방황하며 고민하는 주체로서의 (대개 남성으로 그려지는)인물보다 우월하고 숭고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로써 정령화의 재현론은 여성 인물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을 명시적으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자화의 비판을 교묘하게 회피한다. 나아가, 정령화로 인해 남성 화자에게 기대될 수 있는 중간자적 갈등 서사를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숭고함에 대한 예찬의 탈을 쓴 타자화와 다름없다.


논의의 방향을 약간 옮겨서, 정령화의 재현론이 영화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 내지 '시대적 성찰'을 재현하는 방식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파이어(2023)>의 주인공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레온(토마스 슈베르트 분)은 전형적으로 많은 매체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방황하는 젊은 예술가의 문법을 따른다. 비대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예술 창작에 대한 고상한 자부심이 단단히 꼬인 퉁명스러움으로 배설되는 인물이다. 다소 모질게 그에 대한 묘사를 했지만, 이는 너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프레임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는 작품 속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화자는 대개 방황하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약간 괴팍하기도 한 양상을 띤다. 그리고 필자가 느끼기에 그런 고민하는 예술가는 대개 남성으로 재현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싶다.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의 본문 앞에 영화 비평적으로 주요한 인물들을 열거한 목록이 전부 남성 비평가/영화인이었던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예술의 계보 내지 예술사(나아가 넓은 의미에서의 지성사)라고 불리는 것이 상당 부분 남성 화자에 의해 기획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영화에서 그리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앞서 제시한 성격들을 가진 남성 작가로 그려진다는 점이 새삼스럽지 않다. 이에 비해 예술가의 곁을 맴도는 여성 인물은 시선의 중심에서 멀어진다는 점을, 나아가 여성인물의 '정령화'라는 재현 방식에 의해 그러한 초점의 불평등에 대해 면책이 이루어질 위험성을 들춰 보고자 한다.



다시 <어파이어>로 돌아와서, 주인공을 곁을 맴돌며 그가 흠모하게 되는 여인 나디야(파울레 베어 분)는 다분히 앞서 이야기해 온 '정령'의 전형적인 특성을 따른다. 나디야는 방황하는 인물을 품어주는 자애롭고 지혜로운 여인이다. 레온이 불완전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 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숙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여성으로 나디야가 그려진다고 한들, 그녀는 레온 옆에서 한층 성숙한 정령으로서 그의 퉁명스러움을 감내하며 지혜와 관용을 베풂으로써 보조할 뿐이다. 만약 노골적으로 나디야를 배제하는 연출이 이루어졌다면, 어렵지 않게 시대적 성찰의 주체를 상정하는 부분에 있어서 차별이 존재한다는 지적을 쉽게 짚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파이어>는 나디야를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굉장히 유능하고 이상적인 인물로 치켜세운다. 이로써 앞선 위화감에 대한 문제의식은 흐려지며, 정령화의 도식적 재현론은 다소 기만적으로 불평등한 시선의 초점과 야합한다.




청년 작가의 초상을 담아낸 <물안에서(2023)> 역시 그러한 인물관계의 도식을 답습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주인공 성모(신석호 분)는 영화를 찍고 싶어하지만, 여느 젊은 예술가가 그러하듯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에 온전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고민하고 안개 앞을 휘저으며 제주도에서의 영화 촬영을 이어간다. 성모가 영화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에서도 아이 컨택을 거의 동료 상국(하성국 분)과 한다. 성모에게 고민을 공유하는 대상으로서 상국은 받아들여지는 듯하지만, 어째 과 후배 남희(김승윤 분)는 고민의 장에서 소외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함께 있을 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응원을 해줄 뿐이다. 이것만 두고 보았을 때엔, 정령화라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이다. 그 대신, 성모는 해변에서 자의적으로 쓰레기를 줍는 신비롭고 숭고한 존재, 즉 정령과도 같은 배역을 남희에게 준다. '현실에서 붕 떠있는 듯한 존재를 마주한 실존적 주체'의 구도가 <물 안에서>라는 영화 속의 영화에서 재현됨으로써, 영화가 정령적 도식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음이 재확인된다.


물론 <어파이어>라는 작품만 놓고 보았을 때, 레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산만하게 나디야에 관한 심층적인 히스토리까지 다루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물 안에서>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남희의 속 사정에 대해 담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파이어>와 <물안에서>가 재현하고 있는 ‘방황하는 남성 예술가(이자 화자) 그리고 그 옆의 정령적 여성 인물’로 구성된 구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고민을 포착하는 영화에서의 문법으로 굳어지는 것에 대해 우려 깊은 경계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이 글은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비판하고자 쓰인 것이 아니다. 교묘한 도식 속에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하는 다양한 인물상의 확대에 대한 호소일 뿐이다. 당초에 이 기사를 통해 어떤 답 내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으나, '카메라는 인물을 이러이러하게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도식을 정립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떤 대안을 확정적으로 제시한다면, 새로운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타자들에 대한 직간접적 배제와 연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을 유보하고자 한다. 샹탈 애커만의 단편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지 우먼La Paresse(1986)>은 담담하게 한 게으른 여성의 수수한 하루를 담아낸다. 늦잠을 자서 늦게 일어나고, 몸을 씻고, 악기를 연주하고, 담배를 한대 피우고, 그리고 다시 잠에 든다. 이러한 소박한 재현론이 단일한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정령적으로 재현된 인물들의 반대 편에는 이런 인물상도 존재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사람의 서사에는 대개 거창하지도, 마냥 숭고하지도, 마냥 악하지도 않은 혼탁한 소박함이 녹아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물의 모호한 흐리멍텅함을 있는 그대로, 편협하지 않게 바라보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 지금 당장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제 아무리 영화의 창작자가 등장인물을 만든다고 하지만, 창작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은 필연적으로 작가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대변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작품 속 인물의 이야기는 '타인의 이야기'가 얽혀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타인의 서사를 다루는 작업이, 서사에 대한 편협한 사적 전유로 퇴행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온전히 바라보고 포용해주고자 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이 제안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가져가, 그녀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고자 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