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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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황윤재

                                       

초등학생 시절 유연성 검사를 하는 그 마음을 기억하는지. 어젯밤 자란 만큼의 손톱 길이라도 더 밀어내고 싶어 마음으로는 안달하는 한편 햄스트링 부근은 끊어질 듯이 당겨오는 그 긴장 관계 속 애태움. 아무리 밀어내도 더이상 밀어지지 않을 때 아이가 부딪히는 한계. 손가락으로 반동을 이용해 밀어내는 얕은 술수 따위는 관용하지 않는 준엄한 담임 선생님. 아이는 유연성 검사의 의의를 이해할 수 없다. 아이는 던져진 의무 아래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온 힘 다해 밀어낸다. 아이는 그 30초 안에 삶을 경험한다. 어린아이의 유연성을 왜 검사하는지, 유연성의 우열을 매김으로써 모종의 권력관계를 아이들에게 왜 지우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내가 열의 위치에 존재했던 기억에 불편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삶의 상징을 새로 찾았다는 마음에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냐 묻는다면, 뛰었다. 글이 써지지 않아서. 여러 서랍을 뒤적이고 고르고 만지다가 뛰고 나서야 내보일 마음을 찾았다. 여전히 같은 지점에 서 있지만 한 바퀴 배회한 곳에서 새로운 감각을 찾아 돌아왔다. 달리기가 이번에도 내게 선물을 쥐여주었다는 말이다.

삶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틀에 부합하기를 요구한다. 이해할 수 없는 유연성을 강화하도록 짓누른다. 밀리고 물러나다 벽에 등이 닿을 때 나는 달리기를 부른다. 달리기는 민주적이다. 뛸 기력과 의지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든지 뛸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달리기에는 권력관계가 없다. 속도보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달리기는 도망치는 행위다. 다만 돌아올 것을 담보하고 일상성으로부터 ‘잠시’ 도주하는 행위이기에 달리기는 배회와 같다. 첫 1키로를 배회하며 맞는 바람은 개운하다. 2키로를 채울 때는 언제나 못 건널 것 같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달리기는 그 안에서 자주 달리는 행위로부터도 도망치며, 일상성을 벗어나는 이상한 ‘달리기적 도약’은 이 지점에서부터 이루어진다. 2키로 가량 쉬지 않고 달리면 점 하나가 보인다. 그 점은 출입이 가능한데, 그 점으로 들어간 곳은 언제나 사막이었다.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리는 사막에는 뛰는 나와 정신 두 개만이 있다. 달리기로부터 벗어나 나를 볼 수 있다. 뛰는 내가 보이는 것이 신기해 그것을 구경하다 보면, 못 건널 것 같던 거리는 항상 건너졌다.





사막을 찍고 나와 돌아오는 행위가 가져오는 감각이 있다. 배회하다가 돌아온 점에는 무언가 달라져 있다. 같은 지점이더라도 배회하고 돌아왔을 때 쥐어지는 감각은 일상에서 끝까지 밀어낼 수 있는 힘으로 기능할 수 있다. 나는 잠시 도망침으로써 완전히 도망치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어떤 순간들은 착란적이다. 인간 안정제들에 더이상 의존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에서 시적 도약에 의존한다. 달리기는 시보다 건강한 도약을 제공한다. 나는 시와 달리기를 통해 비일상적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막을 찍고 일상의 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다시 수그려 측정기를 밀 때, 새로운 감각으로 다만 조금 더 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다. 그 기대에 맞게 지금까지는 효능이 있다. 정릉천에서 우리 마주친다면 같이 함성을 지르자. 그 목소리로 서로를 사막으로 밀어주자. 그러고 잘 돌아와서는 사막에서 자란 손톱만큼 더 밀어 보자.

내가 아무리 사랑해도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당신 옆에서 배회하기로 한다. 나는 당신까지 잠길까봐 내 슬픔 모두 꺼낼 수 없다. 당신도 내 옆에서 뛰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