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문화 바깥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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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은빈

                                       

이런 영화도 있다. 우리의 시야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영화들. ‘상업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와 같은 단어는 규범으로서 영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선결정짓지만, 일반적인 씨네필 비평 문화 속에서 규범 바깥의 영화를 만나게 된다면 (또는 그 어떤 일용할 정보도 없는 영화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떤 위치에 놓아야 될지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일반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에게 있어 비평의 기준을 결정짓는 지점이자 영화의 위치와 계보를 결정짓는 영화-비평의 당연한 기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것은 이런 기능보다는 순전히 씨네필 문화 속에서 경험적으로 벌어지는 일에 관한 것이다. -이제는 더 말하기도 식상한- 타르콥스키나 오즈의 영화를 정전으로 대하는 일, 경건한 태도로 수많은 텍스트 속 영화를 보는 것의 역기능적 경우. 씨네필들의 향유 대상인 ‘예술 영화’가 되지 못한 영화들, 검색해 봐도 블로그나 한두 개의 영화제에서 간혹 소개되거나 또는 그러지조차 못한 영화들을 보았을 때 벌어지는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최근 나는 씨네필들에게 관심 바깥의 영화들을 보려고 노력 중이다. 이 영화들은 각종 이유로 우리의 씨네필 문화 규범에서 멀어지게 된 영화들인데, 그들의 개인 사정은 각자 다르다. ‘예술 영화’로 의미화된 관점을 제공하기에 국내 정보가 너무 부족한 경우, 국내에서 인터넷으로만 접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이고 이해하지 못할 지리적 특성을 띤 영화인 경우, 국내의 그 누구도 발굴해 주지 않아 담론이 형성되지 않은 경우, 또는 그냥 만들어질 당시에 이도 저도 아닌 c급 영화였는데 시간이 지나 고전이 되어버린 경우, 감독이 요절한 경우 등등… 이유는 다양하고 영화는 많다. 이런 규범 바깥에 있는 영화들은 이제 볼 영화가 없는 하드-하드코어 40대 씨네필 (주로 씨네스트에 상주)이나 정말 국내에 소개하고자 노력하는 몇몇 프로그래머에 의해 4-5년 전쯤 상영되었거나… 그런식이다. 이런 영화들은 정석이거나 정석을 비껴간 평가도 없기에, 차마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모르겠기에, 순수하게 개인의 영화적 경험에 의존해 영화를 판단해야되는 일이 발생한다. (실제로 왓챠피디아에 가면 정말 다양한 종류의 코멘트를 발견할 수 있다) 근래 본 몇 편의 영화 리스트를 공개한다.


#1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1990), 비탈리 카네프스키


인상적인 제목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러시아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영화와는 크게 관련이 없었던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첫 데뷔작이었고, 돈이 한 푼도 없어 돈을 꾸며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핑크 플로이드의 벽>(1982)로 유명한 알란 파커가 칸 영화제에 추천해주어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일종의 비공식 정전에 오르게 됐던 작품이라는 비하인드가 존재한다. 90년대 영화이지만 본인의 어렸던 소련 시절을 재연하기 위해 (또는 그만큼 늙어서) 60년대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형식적으로 매우 독특한 엔딩까지.


#2 나의 위니펙(2007), 가이 매딘


지금은 국내에서도 유명한 캐나다의 실험영화 감독 가이 매딘의 작품 중 하나이다. 가이 매딘의 고향인 위니펙에서 벌어진 이상한 수면, 몽유병에 대한 시각 에세이-다큐멘터리-판타지 필름이다. 캐나다 출신답게 그렇게 이질적이지 않은 영어 나레이션에 맞춘 흑백 무빙 이미지가 황홀하게 아름답다.


#3 여전사 그웬돌린(1984), 쥐스트 쟈킨


국적불명의 영화. 쥐스트 쟈킨은 프랑스에서 ‘인기’ 에로 영화를 만들던 감독이었지만, 무슨 바람이었는지 <여전사 그웬돌린>이라는 괴작을 탄생시키고 영화계에서 사라진다. 프랑스 영화이지만 미국 판타지 모험물의 외피를 쓰고 있으며 약간의 고어와 다량의 누드, 전혀 대화가 안 통하는 남녀 주인공의 노멀리티 – 로맨스 장르, 코미디, 동양 비하(?), 플롯에서 사라져 버린 원래 영화의 목적(아버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4 모래시계 요양원(1973), 보이체크 하스


폴란드 영화계에서는 아마 비공식 정전 중 하나일 <모래시계 요양원>은 브루노 슐츠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 자체가 가진 독특한 환상성과 기이한 이미지 묘사 덕분에 영화 자체가 초현실주의적 기조를 띄며 아름다운 미쟝센을 구사하게 되었다. 폴란드 자국의 사회문화적 혼란기와 다른 영화 감독들의 위치를 가늠하며 볼 수 있다.


#5 위장(1977), 크지쉬토프 자누쉬


보이체크 하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크지쉬토프 자누쉬의 영화이다. 같은 시대의 영화이지만, 매우 현대적인 화면을 가지고 있다. 성격 이상한 대학원생이 고통받고 수난 받는 냉소적인 코미디이다. 이 영화 또한 폴란드 자국에 대한 시대적인 독해를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엔딩에 다다라 보이는 넓은 풍광과 인간 군상이 화면에서 보았다. 미약한 대학원생 코미디에서 타르콥스키적 엔딩을 봤다고 하면 믿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