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볼 수 없고 제대로 알 수도 없다면
WEBZINE
WEDITOR 박설연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제대로 알 수도 없다면 왜 계속해야 하는가? 무언가 단 하나에 대해서라도 똑바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보이는 것은 보인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를 지니는데 말 그대로 너머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잡아내려는 시도는 좌절된다. 언어는 그 너머를 단어 이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둔다. 증명되지도 않고 포착되지도 않는 것이 어쩌면 모든 이미지고, 삶이다.
어쩌면 다분히 회의적이고 공허한 담론이다. 그다음을 모르기에 무의미하다는 것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왜 계속 더 찾고, 더 알고자 하고, 더 필요로 하는가? 왜 죽지 않고 사는가?
세 편의 영화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주관적이고, 어쩌면 정당화에 불과하지만,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정립하려 했다.
1.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2018)>에서는 주인공 아사코(카라타 에리카 분)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과 연애하는데, 이후 그녀는 다시 찾아온 진짜 첫사랑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 분), 그리고 첫사랑과 똑 닮은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 분) 사이에서 고민한다. 아사코는 결국 첫사랑에게 잠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오는 선택도 한다.
처음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그녀가 속한 사회로부터 배제될 것을 알았고, 기존의 삶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바쿠의 차에 탔고, 핸드폰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안정적으로 결혼할 수도 있었고, 친구를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불확실함 속에 자기 자신을 던졌다. 재난이건 운명이건 선택이건, 거기에 맞서는 아사코가 강해 보였다.
아사코로부터 내린 결론은 이렇다.
a. 너머에 무엇이 있건, 내가 보는 대로 보면 된다
b. 무슨 선택을 했건 받아들이면 된다.
c. 선택에 대해 물러나지 않으면 된다.
d.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 확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확대(1966)>는 이미지의 다면성과 증명 가능성, 기타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사진작가 주인공을 내세워 묻는다. 사진가인 주인공은 극도로 현실에 가까운, 혹은 완전히 연출된 두 종류의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현실의 단상을 담아내려던 책의 마지막 사진을 위해 찍은 공원에서의 연인의 모습이 알고 보니 살인사건에 대한 사진이었다는 것이 영화의 주요 사건이다. 사진을 확대하면 총이 나오고, 또 확대하면 시체가 나온다. 이 사진에서든 영화 전반에서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유리 로트만은 이 영화에 대해 이미지로 고정된 가벼워진 맥락을 말하고, 그로 인해 명쾌함이 없어졌으며, 그렇게 상실된 명쾌성에 하나의 설명만이 가능하다면 이는 나쁜 것이라 말한다.
이 해석과 영화를 통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a. 명쾌하지 않은 이미지에 여러 해석 가능성이 열리는 건 당연하다.
b. 하나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c. 그 안에 살 수만 있다면 마음대로 왜곡해서 봐도 된다.
3. 이키루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1952)>는 위암에 걸린 주인공이 마지막 6개월을 살아내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지난 20년을 묵묵히 공무원으로 일해 왔으며, 죽음에 다다라서야 자기가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았다’고 보지 않고 인생을 다시 본다. 이 영화는 우리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감없이 말한다. 이건 비관적일 수도 있고 낙관적일 수도 있는 문제다. 죽을 때 아무것도 없다는 건 죽기 전까지 뭔가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뭔가를 만들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린 결론은,
a. 불행은 인간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b. 모두에게 불행은 있다.
c. 불행도 직시하면 편하다.
d. 순간의 생의 감각에 집중하면 가벼워진다, 는 것이다.
이 11가지 결론으로 어디까지 맞서고, 확대하고, 살아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스스로 의구심을 품은 일에 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다분히 회의적이고 공허한 담론이다. 그다음을 모르기에 무의미하다는 것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왜 계속 더 찾고, 더 알고자 하고, 더 필요로 하는가? 왜 죽지 않고 사는가?
세 편의 영화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주관적이고, 어쩌면 정당화에 불과하지만,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정립하려 했다.
1.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2018)>에서는 주인공 아사코(카라타 에리카 분)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과 연애하는데, 이후 그녀는 다시 찾아온 진짜 첫사랑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 분), 그리고 첫사랑과 똑 닮은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 분) 사이에서 고민한다. 아사코는 결국 첫사랑에게 잠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오는 선택도 한다.
처음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그녀가 속한 사회로부터 배제될 것을 알았고, 기존의 삶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바쿠의 차에 탔고, 핸드폰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안정적으로 결혼할 수도 있었고, 친구를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불확실함 속에 자기 자신을 던졌다. 재난이건 운명이건 선택이건, 거기에 맞서는 아사코가 강해 보였다.
아사코로부터 내린 결론은 이렇다.
a. 너머에 무엇이 있건, 내가 보는 대로 보면 된다
b. 무슨 선택을 했건 받아들이면 된다.
c. 선택에 대해 물러나지 않으면 된다.
d.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 확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확대(1966)>는 이미지의 다면성과 증명 가능성, 기타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사진작가 주인공을 내세워 묻는다. 사진가인 주인공은 극도로 현실에 가까운, 혹은 완전히 연출된 두 종류의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현실의 단상을 담아내려던 책의 마지막 사진을 위해 찍은 공원에서의 연인의 모습이 알고 보니 살인사건에 대한 사진이었다는 것이 영화의 주요 사건이다. 사진을 확대하면 총이 나오고, 또 확대하면 시체가 나온다. 이 사진에서든 영화 전반에서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유리 로트만은 이 영화에 대해 이미지로 고정된 가벼워진 맥락을 말하고, 그로 인해 명쾌함이 없어졌으며, 그렇게 상실된 명쾌성에 하나의 설명만이 가능하다면 이는 나쁜 것이라 말한다.
이 해석과 영화를 통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a. 명쾌하지 않은 이미지에 여러 해석 가능성이 열리는 건 당연하다.
b. 하나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c. 그 안에 살 수만 있다면 마음대로 왜곡해서 봐도 된다.
3. 이키루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1952)>는 위암에 걸린 주인공이 마지막 6개월을 살아내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지난 20년을 묵묵히 공무원으로 일해 왔으며, 죽음에 다다라서야 자기가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았다’고 보지 않고 인생을 다시 본다. 이 영화는 우리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감없이 말한다. 이건 비관적일 수도 있고 낙관적일 수도 있는 문제다. 죽을 때 아무것도 없다는 건 죽기 전까지 뭔가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뭔가를 만들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린 결론은,
a. 불행은 인간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b. 모두에게 불행은 있다.
c. 불행도 직시하면 편하다.
d. 순간의 생의 감각에 집중하면 가벼워진다, 는 것이다.
이 11가지 결론으로 어디까지 맞서고, 확대하고, 살아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스스로 의구심을 품은 일에 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