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 미니멀리즘에 관한 단상들
WEBZINE
WEDITOR 장태원
의자 앞의 공이 떨어진다. 검은 바닥 아래로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가 검은 벽에 부딪힌다. 흐르듯 움직이는 결벽증적 곡선의 공과 미동조차 하지 않는 직선의 의자와 비동질적 운동만이 존재한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말한 줄로만 알았던 “Less is More”라는 이 구절은 아직도 우리의 곁에 살아 숨 쉰다. 수컷 공작의 깃털처럼 한껏 부풀려진 것을 찬미하다가도 황철석(Pyrite)의 응축된 간결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처럼 디자인적 미를 바라보는 수많은 유행이 존재해 왔지만 현대 사회에 접어들며 이토록 일관되게 사랑받아온 흐름은 역시나 미니멀리즘일 것이다.
그리고 이 어휘는 우리의 삶에 너무나도 깊게 녹아들어 개념 혹은 경향의 지위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힙하다는 말이 멋지다는 말과 혼용되고 애(愛)와 호(好)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미니멀하다는 말을 여러 군데에 갖다 붙인다. 모노톤 혹은 듀오톤의 것, 조형적 기초와 가까운 것, 구성 요소가 적은 것,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를테면 안도 타다오(Ando Tadao)의 빛의 교회 같은 건축물) 등 다양한 것에 미니멀하다고 판단을 한다. 천문학적 질서에 감복하는 모습도 고결한 도자기에 탄복하는 모습도 일종의 미니멀한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뭘 보든 “오...”하기만 하는 태도도 미니멀한 행동의 일종이다.
흔히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주로 미술, 건축, 음악 그리고 라이프스타일 정도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유독 패션에서는 미니멀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한다. -ism이라는 접미사는 강력한 독트린을 언어에 부여한다. Capitalism, Marxism, Feminism 등... 미니멀리즘 또한 일종의 독트린으로써 문화에 영향을 끼쳐왔다. 미술을 예로 들자면 미니멀리즘이 지향하던 회화의 부조(浮彫)화나 연극화가 하나의 독트린이었고 관객과의 강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매개의 의지도 그러했다.
패션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독트린이라고 불릴 만큼의 힘을 가지지도 못하며 하나의 이념을 이룰 응집성 또한 지니지 않는다. 여느 다른 장르들보다 그 틀이 조악해 오히려 미니멀리즘이라는 언어에 입각하여 조금 더 비틀어 볼 수 있는 여지를 다양하게 남긴다. 가장 먼저 언급해 두어야 할 해석은 역시 제일 직관적인 것이다. 시각적인 간결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색상과 장식의 축소, 구조의 단순화와 같은 것이 미니멀한 패션이라는 걸 사람들이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답변이 되리라 예상한다.
이 관점에서 질 샌더(Jil Sander)보다 적확한 브랜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질 샌더의 설립자인 하이드마리 질라인 샌더(Heidemarie Jiline Sander)는 호화스러움과 사치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파리 패션계에 철저하게 장식을 배제한 옷을 선보인다. 보일락말락 한 솔기와 포켓은 강한 빛을 비추면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파리는 그러한 그녀를 배척했다. 파리의 낭만주의적인 경향과는 맞지 않았다. 그녀의 성공은 이탈리아에서 이뤄졌다.
어쩌면 이탈리아는 그녀를 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갖는 특유의 소재에 관한 집착은 그녀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차가운 기후의 북부부터 흔히들 떠올리는 따스한 남부까지 이탈리아는 그 작은 반도 안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원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어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국산 장려 및 수입 억제 정책으로 이탈리아는 독자적인 시장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질 샌더는 그녀의 이상향에 걸맞은 형태와 질감을 조성하기 위해 소재를 선정하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의 협력자들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녀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미학을 따른다. 자연스레 그녀의 디자인은 건축적이며 기능적이다. 물론 그 기능이라는 것은 형식주의적인 것이며 해당 의류의 틀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기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능에 관해서는 후술할 예정이다. 다시 돌아와, 이러한 조형적 요소를 강조하는 패션을 조형적 미니멀 패션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이들은 미니멀리즘 미술이 추구하던 관계의 미학을 계승한다. 예를 들어,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의 옷들은 착용자 혹은 감상자의 감정을 강력하게 촉발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객체의 힘이 강력해지고 이는 종종 주체를 압도하기도 한다. 과시적인 브랜드 파워가 드러나는 옷들이 그러하다.
조형적 미니멀 패션은 그 비어있음에 주체가 개입할 여지를 준다. 사물은 필시 의식과 결합하여 있으며 타자와 관계한다. 우리는 그러한 의류들을 바라볼 때 남겨진 요소들과 비워진 요소들을 떠올리며 의복의 본질적 형태에 관한 숙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들에 탐닉하며 더욱 편집증적인 시선으로 구성 요소들을 파헤친다. 자켓의 필수적 구성 요소는 어디까지인가? 칼라는 꼭 있어야 하는가? (이에 관해서는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가 이미 칼라리스 자켓으로 온당한 답변을 제공했다) 사실 패션에 있어서 정태적인 본질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지만, 칸트가 제시한 것처럼 소위 말하는 깔끔한 옷을 보고 쾌-그리고 거기에서 촉발된 멋있음-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칸트적인 취미판단이 요망된다.
사실 이건 현대인의 특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미의 영역도 예술미의 영역도 아니다. 오히려 종종 깔끔한 것의 미감을 추구하는 이 보편적 주관성이 미적 영역에 편입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 인류에게 전후로 학습된 아비투스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누가 그걸 학습시켰는가. 결국 또 자본주의가 야기한 문화 대말살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걸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지, 아름답다고 어쨌든 여기고 있으니 아름다운 것인지, 자본주의의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을 요인들을 효율적으로 뭉뚱그린 건 아닌지. 단순히 그 이유를 추적할 순 없다. 사실 그걸 성실하게 캐내는 것은 미학자, 사회학자, 문화인류학자의 소명이다. 예술가나 작가는 그것에 관한 개인적인 탐구를 이루는 정도이다. 애초에 현대 사회의 변화라는 건 명징하게 규정될 수 없으니 말이다.
조형적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선호는 꽤 무취적이고 규명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그걸 미니멀하다고 표현하는 애매모호한 기준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미감을 포착한다. 헬무트 랭(Helmut Lang)도 더 로우(The Row)도 미니멀하다고 얘기한다. 단순한 공간적 매트함이 미니멀의 구성요소를 뜻하는가. 말해지는 미니멀 패션은 그러한 걸지도 모르겠다. 남친룩에서 미니멀룩으로, 미니멀룩에서 올드머니룩으로 이름만 바꿔가며 변태하는 이 양상은 표현의 두려움에 기인한다. 튀는 옷을 시도하는 일은 시선을 끄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고 모두가 맥락 안에서만 존재하고자 한다. 미니멀 패션을 주장하던 그들의 말에는 옷을 대하는 그들의 최소한의 신경, 즉 미니멀한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규명해 내기 어려운 것이다. 역사와 심미안을 갖고 판단하는 지적 유희의 영역이 아닌 합목적성의 영역이자 생존의 발로로 직결되는 것이 작금의 미니멀 패션이라고 알려진 것이니.
일전에 나는 어떤 이의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미엘 포트젠스(Camiel Fortgens)의 옷이 미니멀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나와 친구들은 어떻게 카미엘 포트젠스가 미니멀하다고 말할 수 있냐며 웃었다. 그때로부터 2년가량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꽤 시사하는 바가 많은 발언-발화자의 의도를 넘어서는-이었다. 우선 카미엘 포트젠스의 의류에서 미니멀하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옷들에 더해져 있는 장식이 소위 말하는 화려한 옷들의 것들과는 다른 느낌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워크웨어와 캐주얼웨어를 기반으로 하고 보디(Bode)나 카사블랑카(Casablanca)와 같은 화려한 장식이 없기에 대조적으로 담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껏 부풀린 턱(Tuck)이 돋보이는 바지, 마감을 하지 않아 나부끼는 실밥, 컬러 블록을 이루는 셔츠와 자켓 등의 요소들을 본다면 이건 캐주얼 패션의 범주에 가깝지, 조형적 미니멀리즘의 양태를 보인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그리고 카미엘 포트젠스의 옷을 판단할 때 대중적인 미니멀 패션과의 괴리를 마주하게 된다. 장식을 배제한 채로 표현되는 실루엣과 물성과 같은 것들이 미니멀 패션의 방점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아주 헐렁한 핏의 카미엘 포트젠스의 옷도, 과장된 양식의 헤드 메이너(Hed Mayner)의 옷도, 더욱 과장된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파워드 자켓도 미니멀 패션의 문법 아래에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여기기엔 당장 읽으면서도 석연찮은 구석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카미엘 포트젠스의 옷에서 느껴지는 고전적 물성과의 괴리감이 상존한다. 푸퍼나 베스트에서의 소재 변주, 매트하고 스트레이트한 흔적이 느껴지는 일본산 데님과 같은 것들이 알고 있던 원형의 옷들에서 변주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여기서 찾게 된 하나의 실마리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미니멀 패션은 고전성과 최소한의 장식 및 기능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복각으로 회귀하게 된다. 더욱 엄밀히 말하면 클래식과 모던 클래식의 조화이다. 그 흐릿한 룰을 깨지 않는 선에서 미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20세기의 비즈니스적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여운을 현대의 일상복에 녹여내는 것이다. 포멀한 옷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기술자들과 장인이 추구하던 완벽한 옷을 향한 열망을 현재의 작업에 투영하고 몇십 년 동안 그 유전자를 보며 살아온 우리들의 눈에 결국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미니멀하다고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성만이 미니멀의 규정 양식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세상에서 가장 미니멀한 옷은 리바이스(Levi's)의 501이 되었으리라. 그 원형에서의 추가적인 탐구를 이뤄나가며 미니멀 패션에 도달하게 된다. 청바지를 예로 들긴 다소 소재상의 어색함이 느껴지긴 하나 미니멀적 탐구를 통해 리벳을 제거하거나 은폐하고 버튼 플라이를 지퍼 플라이로 이행하는 것이 조형적 무결함으로 다가가는 일종의 여정이다. 그곳에서 최소한의 기능성을 조우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더니즘적 디자인 기초에 따라 디자이너들은 장식을 배제하고 구성요소에서 꼭 필요한 기능적 부분들만을 남겨두는 실험을 감행하곤 한다. 더 나아가 최소한이라는 그 계면의 한계까지도 건드려보곤 한다. 바지의 주머니를 모두 없애 최대한 무결한 바지를 만드는 그런 시도들 말이다. 그렇게 미니멀리즘은 역사와 공백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패션 안에 위치한다.
...
...
장황하게 펼쳐놨지만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들은 단상이고 응집력을 지니지도 못한다. 이 사유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일련의 결론을 내고자하는 목적도 없다. 단지 글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질 샌더를 마주쳤을 뿐이며 평소에 품던 의문들을 텍스트로 옮겨낸 것일 뿐이다. 미니멀리즘을 바라보는 시선의 진술이며 현상(現狀)의 현상(現像)이다. 독트린이 아닌 미니멀리즘을 애초에 정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예술계에 차고 넘치는 ‘느슨한 공동체’처럼 작금의 미니멀 패션이란 것도 ‘느슨한 관념’들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말한 줄로만 알았던 “Less is More”라는 이 구절은 아직도 우리의 곁에 살아 숨 쉰다. 수컷 공작의 깃털처럼 한껏 부풀려진 것을 찬미하다가도 황철석(Pyrite)의 응축된 간결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처럼 디자인적 미를 바라보는 수많은 유행이 존재해 왔지만 현대 사회에 접어들며 이토록 일관되게 사랑받아온 흐름은 역시나 미니멀리즘일 것이다.
그리고 이 어휘는 우리의 삶에 너무나도 깊게 녹아들어 개념 혹은 경향의 지위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힙하다는 말이 멋지다는 말과 혼용되고 애(愛)와 호(好)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미니멀하다는 말을 여러 군데에 갖다 붙인다. 모노톤 혹은 듀오톤의 것, 조형적 기초와 가까운 것, 구성 요소가 적은 것,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를테면 안도 타다오(Ando Tadao)의 빛의 교회 같은 건축물) 등 다양한 것에 미니멀하다고 판단을 한다. 천문학적 질서에 감복하는 모습도 고결한 도자기에 탄복하는 모습도 일종의 미니멀한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뭘 보든 “오...”하기만 하는 태도도 미니멀한 행동의 일종이다.
흔히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주로 미술, 건축, 음악 그리고 라이프스타일 정도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유독 패션에서는 미니멀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한다. -ism이라는 접미사는 강력한 독트린을 언어에 부여한다. Capitalism, Marxism, Feminism 등... 미니멀리즘 또한 일종의 독트린으로써 문화에 영향을 끼쳐왔다. 미술을 예로 들자면 미니멀리즘이 지향하던 회화의 부조(浮彫)화나 연극화가 하나의 독트린이었고 관객과의 강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매개의 의지도 그러했다.
패션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독트린이라고 불릴 만큼의 힘을 가지지도 못하며 하나의 이념을 이룰 응집성 또한 지니지 않는다. 여느 다른 장르들보다 그 틀이 조악해 오히려 미니멀리즘이라는 언어에 입각하여 조금 더 비틀어 볼 수 있는 여지를 다양하게 남긴다. 가장 먼저 언급해 두어야 할 해석은 역시 제일 직관적인 것이다. 시각적인 간결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색상과 장식의 축소, 구조의 단순화와 같은 것이 미니멀한 패션이라는 걸 사람들이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답변이 되리라 예상한다.
이 관점에서 질 샌더(Jil Sander)보다 적확한 브랜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질 샌더의 설립자인 하이드마리 질라인 샌더(Heidemarie Jiline Sander)는 호화스러움과 사치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파리 패션계에 철저하게 장식을 배제한 옷을 선보인다. 보일락말락 한 솔기와 포켓은 강한 빛을 비추면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파리는 그러한 그녀를 배척했다. 파리의 낭만주의적인 경향과는 맞지 않았다. 그녀의 성공은 이탈리아에서 이뤄졌다.
어쩌면 이탈리아는 그녀를 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갖는 특유의 소재에 관한 집착은 그녀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차가운 기후의 북부부터 흔히들 떠올리는 따스한 남부까지 이탈리아는 그 작은 반도 안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원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어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국산 장려 및 수입 억제 정책으로 이탈리아는 독자적인 시장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질 샌더는 그녀의 이상향에 걸맞은 형태와 질감을 조성하기 위해 소재를 선정하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의 협력자들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녀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미학을 따른다. 자연스레 그녀의 디자인은 건축적이며 기능적이다. 물론 그 기능이라는 것은 형식주의적인 것이며 해당 의류의 틀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기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능에 관해서는 후술할 예정이다. 다시 돌아와, 이러한 조형적 요소를 강조하는 패션을 조형적 미니멀 패션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이들은 미니멀리즘 미술이 추구하던 관계의 미학을 계승한다. 예를 들어,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의 옷들은 착용자 혹은 감상자의 감정을 강력하게 촉발한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객체의 힘이 강력해지고 이는 종종 주체를 압도하기도 한다. 과시적인 브랜드 파워가 드러나는 옷들이 그러하다.
조형적 미니멀 패션은 그 비어있음에 주체가 개입할 여지를 준다. 사물은 필시 의식과 결합하여 있으며 타자와 관계한다. 우리는 그러한 의류들을 바라볼 때 남겨진 요소들과 비워진 요소들을 떠올리며 의복의 본질적 형태에 관한 숙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들에 탐닉하며 더욱 편집증적인 시선으로 구성 요소들을 파헤친다. 자켓의 필수적 구성 요소는 어디까지인가? 칼라는 꼭 있어야 하는가? (이에 관해서는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가 이미 칼라리스 자켓으로 온당한 답변을 제공했다) 사실 패션에 있어서 정태적인 본질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지만, 칸트가 제시한 것처럼 소위 말하는 깔끔한 옷을 보고 쾌-그리고 거기에서 촉발된 멋있음-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칸트적인 취미판단이 요망된다.
사실 이건 현대인의 특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미의 영역도 예술미의 영역도 아니다. 오히려 종종 깔끔한 것의 미감을 추구하는 이 보편적 주관성이 미적 영역에 편입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 인류에게 전후로 학습된 아비투스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누가 그걸 학습시켰는가. 결국 또 자본주의가 야기한 문화 대말살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걸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지, 아름답다고 어쨌든 여기고 있으니 아름다운 것인지, 자본주의의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을 요인들을 효율적으로 뭉뚱그린 건 아닌지. 단순히 그 이유를 추적할 순 없다. 사실 그걸 성실하게 캐내는 것은 미학자, 사회학자, 문화인류학자의 소명이다. 예술가나 작가는 그것에 관한 개인적인 탐구를 이루는 정도이다. 애초에 현대 사회의 변화라는 건 명징하게 규정될 수 없으니 말이다.
조형적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선호는 꽤 무취적이고 규명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그걸 미니멀하다고 표현하는 애매모호한 기준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미감을 포착한다. 헬무트 랭(Helmut Lang)도 더 로우(The Row)도 미니멀하다고 얘기한다. 단순한 공간적 매트함이 미니멀의 구성요소를 뜻하는가. 말해지는 미니멀 패션은 그러한 걸지도 모르겠다. 남친룩에서 미니멀룩으로, 미니멀룩에서 올드머니룩으로 이름만 바꿔가며 변태하는 이 양상은 표현의 두려움에 기인한다. 튀는 옷을 시도하는 일은 시선을 끄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고 모두가 맥락 안에서만 존재하고자 한다. 미니멀 패션을 주장하던 그들의 말에는 옷을 대하는 그들의 최소한의 신경, 즉 미니멀한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규명해 내기 어려운 것이다. 역사와 심미안을 갖고 판단하는 지적 유희의 영역이 아닌 합목적성의 영역이자 생존의 발로로 직결되는 것이 작금의 미니멀 패션이라고 알려진 것이니.
일전에 나는 어떤 이의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미엘 포트젠스(Camiel Fortgens)의 옷이 미니멀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나와 친구들은 어떻게 카미엘 포트젠스가 미니멀하다고 말할 수 있냐며 웃었다. 그때로부터 2년가량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꽤 시사하는 바가 많은 발언-발화자의 의도를 넘어서는-이었다. 우선 카미엘 포트젠스의 의류에서 미니멀하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옷들에 더해져 있는 장식이 소위 말하는 화려한 옷들의 것들과는 다른 느낌이기 때문이라 여긴다. 워크웨어와 캐주얼웨어를 기반으로 하고 보디(Bode)나 카사블랑카(Casablanca)와 같은 화려한 장식이 없기에 대조적으로 담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껏 부풀린 턱(Tuck)이 돋보이는 바지, 마감을 하지 않아 나부끼는 실밥, 컬러 블록을 이루는 셔츠와 자켓 등의 요소들을 본다면 이건 캐주얼 패션의 범주에 가깝지, 조형적 미니멀리즘의 양태를 보인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그리고 카미엘 포트젠스의 옷을 판단할 때 대중적인 미니멀 패션과의 괴리를 마주하게 된다. 장식을 배제한 채로 표현되는 실루엣과 물성과 같은 것들이 미니멀 패션의 방점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아주 헐렁한 핏의 카미엘 포트젠스의 옷도, 과장된 양식의 헤드 메이너(Hed Mayner)의 옷도, 더욱 과장된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파워드 자켓도 미니멀 패션의 문법 아래에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여기기엔 당장 읽으면서도 석연찮은 구석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카미엘 포트젠스의 옷에서 느껴지는 고전적 물성과의 괴리감이 상존한다. 푸퍼나 베스트에서의 소재 변주, 매트하고 스트레이트한 흔적이 느껴지는 일본산 데님과 같은 것들이 알고 있던 원형의 옷들에서 변주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여기서 찾게 된 하나의 실마리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미니멀 패션은 고전성과 최소한의 장식 및 기능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복각으로 회귀하게 된다. 더욱 엄밀히 말하면 클래식과 모던 클래식의 조화이다. 그 흐릿한 룰을 깨지 않는 선에서 미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20세기의 비즈니스적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여운을 현대의 일상복에 녹여내는 것이다. 포멀한 옷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기술자들과 장인이 추구하던 완벽한 옷을 향한 열망을 현재의 작업에 투영하고 몇십 년 동안 그 유전자를 보며 살아온 우리들의 눈에 결국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미니멀하다고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성만이 미니멀의 규정 양식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세상에서 가장 미니멀한 옷은 리바이스(Levi's)의 501이 되었으리라. 그 원형에서의 추가적인 탐구를 이뤄나가며 미니멀 패션에 도달하게 된다. 청바지를 예로 들긴 다소 소재상의 어색함이 느껴지긴 하나 미니멀적 탐구를 통해 리벳을 제거하거나 은폐하고 버튼 플라이를 지퍼 플라이로 이행하는 것이 조형적 무결함으로 다가가는 일종의 여정이다. 그곳에서 최소한의 기능성을 조우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더니즘적 디자인 기초에 따라 디자이너들은 장식을 배제하고 구성요소에서 꼭 필요한 기능적 부분들만을 남겨두는 실험을 감행하곤 한다. 더 나아가 최소한이라는 그 계면의 한계까지도 건드려보곤 한다. 바지의 주머니를 모두 없애 최대한 무결한 바지를 만드는 그런 시도들 말이다. 그렇게 미니멀리즘은 역사와 공백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패션 안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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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게 펼쳐놨지만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들은 단상이고 응집력을 지니지도 못한다. 이 사유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일련의 결론을 내고자하는 목적도 없다. 단지 글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질 샌더를 마주쳤을 뿐이며 평소에 품던 의문들을 텍스트로 옮겨낸 것일 뿐이다. 미니멀리즘을 바라보는 시선의 진술이며 현상(現狀)의 현상(現像)이다. 독트린이 아닌 미니멀리즘을 애초에 정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예술계에 차고 넘치는 ‘느슨한 공동체’처럼 작금의 미니멀 패션이란 것도 ‘느슨한 관념’들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