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팀 발제 : 정재은 - <고양이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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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윤상지

                                       

발제 일자: 11.23
발제 영화: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
참석 인원: MJ,EB,DE,YJ,HM,JH,HG,SJ

오늘의 이야기는 이 링크에서부터 시작한다.
https://3002kumsukangsan.tistory.com/8450514
‘역사 천재들의 모임’에 의하면 백제 건국 설화의 두 주인공인 비류와 온조는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형 비류는 인천 미추홀에 도읍지를 세우고, 동생 온조는 서울 위례성에 도읍지를 세운다. 미추홀은 바닷물이 짜고 땅이 습해 비류의 나라는 멸망한다. 멸망한 비류의 나라는 온조가 세운 백제에 편입된다. 그리고 2001년, 인천의 한 도시에서 비류와 온조라는 쌍둥이 자매가 또 다시 등장한다. 이 세계의 비류와 온조는 정재은 감독이 만들어 낸 <고양이를 부탁해> 세계관 속에 있다. 그들을 따라 <고양이를 부탁해>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태희



태희는 “나는 네가 도끼로 사람을 죽였어도 네 편이야”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은 배두나 배우가 인터뷰에서 당신 자신이 남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고 언급한 대사이기도 하다.

HM: 그 말이 배두나 배우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그 나이대에 사람들이 다 듣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그것은 동시대적이지 않고 통시적이다.
태희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유효한 말일까? 현실에서 저런 말을 듣는다면 위로로 다가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 말이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이들은 다수 있었다. 다만 영화 내의 맥락에서 생각했을 때는 다르다.

YJ : 태희가 그 말을 한 상대인 지영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가족마저 사라진, 폭력적인 상황에 처해있기에 그 정도의 말은 해야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태희는 이유 없이 상대를 받아주는 ‘환대’를 실행하는, 실제로 친구를 데리고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가 건네는 ‘네 편’이라는 말은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진심으로 들리기도 한다.
태희는 모든 것을 품고자 하기도 하지만, 어떤 세계와는 불화하기도 한다. 태희는 그녀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집’이라는 세계가 그녀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와 다른 곳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집을 떠난다. 태희는 언젠가 집의 세계로 다시 돌아올까?

JH : ‘돌아온 탕아’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처럼..

HM : ‘돌아온 탕아’는 오히려 기다려 주는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이야기이니 오히려 태희가 지영을 기다려 주는 아버지의 역할이 아닐까?

YJ : 태희가 완전히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저 나이에는 다들 집을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나가서 살다 들어오면 아빠가 어느정도 바뀌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태희가 돌아올지 영영 떠나서 살아갈지는 모르겠다. 태희는 단단한 사람이고, 단단한 선택을 할 것이기에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혜주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태희와 달리 혜주는 두 발을 현실에 붙이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지금, 여기에 남아 할 수 있는 선택을 해 나간다.

EB : 저 상황이었다면 혜주처럼 굴었을 것 같아서 가장 몰입이 되는 캐릭터다.

YJ : 제일 잘 아는 양 행동하며 선택하는 것이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때가 있다. 그런 불안정한 선택을 하고, 태희와 지영을 떠나보내는 혜주가 안쓰럽기도 하다.

HM : 혜주라는 현실적인 사람 하나를 넣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넣어 보는 사람들이 이상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불쾌한 불편감은 아니고, 자의적으로 선택한 나의 상황이 아니라 사회가 나를 놓은 그 위치를 상기시켜 준다. 개봉 당시 2000년대 초반 관객들이 봤을 때 태희, 지영과 혜주의 대조되는 부분들이 슬프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감독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혜주에 몰입하는 동시에 태희, 혹은 지영 캐릭터를 동경하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 것 같다.
서울의 증권사에 취업해 일하는 혜주에게 팀장은 “이렇게 보조적인 일만 계속한다면 저부가가치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혜주가 달고 있는 ‘저부가가치’라는 이름표는 그녀의 뿌리인 인천에 달린 이름표이기도 했다. 금융, IT, 문화 등 고부가가치 산업은 서울에 주 무대를 두었고, 인천에는 제조업과 같은 저부가가치 산업이 몰려 있었다. 혜주가 발 딛고 살아온 곳은 인천이다. 하지만 서울은 혜주에게 ‘서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도록 요구한다. 스스로가 속한 바운더리를 지우고 바깥의 바운더리로 자신을 평가하는 일은 슬프고, 어렵다. 혜주가 라식 수술을 하고, 태희, 지영과의 약속보다 서울 회사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장면은 그래서 조금 슬펐다. 그런데 정말로 혜주는 자신의 주변부적 정체성을 탈피해 중앙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인물일까?

HM : 혜주가 진짜 뿌리를 부인하는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우리가 뭔가로 보이기 싫어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내 안에 너무 깊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가 부인한다고 해서 탈피가 아니라 그 정체성 안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가진 속성들을 충분히 타자화한 상태에서 인지했을 때 오히려 도래할 수 있는 생각인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혜주는 아주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냥 인천에 계속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천 사람’이 아닌가 싶다.

YJ : 모든 것이 서울로 몰리는 경향이 사회 전반에 있는데, 모든 개인이 의미를 가지고 서울로 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목표나 원하는 가치가 있어서 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냥 다들 서울을 원하니까 가기도 한다. 영화에서 보면 태희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한다. 혜주는 방향을 찾는 고민을 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것을 일단 했다. 태희가 고민을 하는 시간 동안 혜주가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혜주가 나중에 가서 방향성을 찾은 후 성장해서 나중의 결과는 뭔가 뒤바뀔 수도 있다. 혜주는 분명 언젠가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찾을 것 같다.

EB : 혜주가 창가에서 우는 모습이 역광으로, 정갈하게 찍힌 장면이 있다. 그 장면 하나에서는 에드워드 양 영화의 순간이 생각났다. 혜주가 그냥 선보고 결혼해서 살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혜주의 미래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영



지영은 텍스타일을 그린다. 그녀는 아주 작은 그림에서 시작해서 그 그림을 반복해 커다란 그림으로 확장시킨다. 텍스타일 그림처럼 혜주도 더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싶지만, 상황은 그녀의 마음을 막는다. 삶은 지영을 주변부에서도 더 주변부로 밀어낸다. 주변부의 끝으로 밀려나 혼자가 된 순간, 지영은 입을 닫는다. 경찰서에서도, 법원에서도 입을 다문채로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그러다 교도소에 간다. 그런 상황에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지영 나름의 저항으로 보인다. 지영은 텍스타일을 배우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집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집은 무너졌다. 지영은 사회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영도 똑같이 사회에게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태희와 지영



영화의 시작점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웃던 친구들은 20살이 되며 각자의 길로 갈라진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도 성인이 되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많은 것이 바뀌고, 더 이상 애정했던 공동체에 속해 있을 수 없음을 느끼기도 하고. 영화 중간 길을 걷던 태희와 지영 사이에 노숙인이 튀어나오는 장면이 있다. 지영은 자신의 미래가 저렇게 될까 걱정하는 반면 태희는 그가 자유로워 보여 부럽다고 한다. 이 장면은 어쨌든 돌아갈 안정적인 집이 있는 태희와 그렇지 않은 지영 사이의 간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결말 부에 이르러 태희와 지영은 함께 한국을 떠난다. 지영은 이미 가족과 집을 잃은 홈리스가 된 상황이다. 태희는 가족과 집은 있지만, 가족사진에서 자신을 오려 내며 자발적 홈리스가 된다. 어쨌든 둘은 ‘함께’ 홈리스가 되기로 선택한다.


태희와 지영, 그리고 혜주

태희와 지영이 떠나고, 혜주는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태희와 지영은 함께이고, 혜주는 함께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태희가 말했듯 “누군가 널 떠난다고 해서 널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태희, 혜주, 지영은 셋이면서 하나다. 감독은 20대 초반의 여자가 가지고 있을 법한 모든 속성을 분리해 세 캐릭터로 만들어 삶의 선택과 갈등을 나눠서 보여준다. 셋의 이야기는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로 합쳐지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그 나이대에 가질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인천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살리기 시민 모임


<고양이를 부탁해>에 일어난 특별한 움직임이 있다. 개봉 당시 <고양이를 부탁해>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었다. 이 영화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느낀 인천 사람들은 ‘인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살리기 시민 모임’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영화의 상영관을 늘리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왜 이런 모임을 만들었을까. 그들은 이 영화가 지닌 주변부, 혹은 경계선의 정체성과 인천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읽어낸 것일까?

HM : 사실 ‘인천 영화’는 아니다. 인천의 상징성을 부여하긴 했지만, 꼭 인천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주변부가 될 수 있는 모든 지역들의 이야기 같다. 그런데 인천이 특별히 감동받은 것일지도..

JH : 환대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강제로 집에 왔을 때 내가 그 사람을 내쫓지 않고, 나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천에는 부두가 있다. 부두를 통해 드나드는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는 환대의 도시로 인천을 읽을 수 있다. 이런 ‘환대’의 개념 아래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인천 영화라는 것이 이해된다.

HG : ‘인천 영화’라고 보는 것은 한정적이겠지만, 인천이라는 지역이 영화에서 분명 큰 역할을 한다. 인천에 살지 않는 사람에게 인천은 주로 인천공항의 이미지이다. 어떤 거쳐 가는 관문의 상징이 되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인천의 정주민들과 인천을 거쳐 가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이 영화를 꿰뚫고 있지 않나 싶다. 태희, 지영, 혜주 모두 인천의 정주민인데 그들은 지역을 떠나고 싶어 하는 반면,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천이 떠날 때 거쳐 가는 거점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영화와 맞닿아 있다.


고양이를/부탁해 : <고양이를 부탁해> 에는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가?



고양이를
HM :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제목이 ‘그 시절 하이틴’ 같은 느낌을 내려는 것 같아서 부적절한 느낌이 든다.

SJ : 20대 초반 여자의 이미지에 고양이의 속성을 부여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외롭고, 방랑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이고 소녀적인 그런 이미지를 주고 싶은 것이다.  

JH : 고양이 자체가 남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동물이다. 이유 없이. 그런 면에서 고양이는 환대의 매개물이면서 환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태희, 혜주, 지영 3명의 관계는 삼각형의 구조처럼 보이고, 고양이는 그 셋 사이에서 돌아간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 고양이를 온조와 비류 쌍둥이에게 맡기면서 환대가 닫힌 삼각형을 넘어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SJ : 고양이의 최종 도착지가 온조와 비류인 것이 이 영화가 ‘인천 영화’로 읽히는 또 다른 지점이다. 고양이는 셋의 우정 혹은 인천에서 살던 시절 자체에 대한 상징이다. 그 고양이가 마지막에 이방인이라고 여겨지는 화교의 자녀인 온조와 비류한테 간다. 인천이 가지는 이방인, 외지인에 대한 수용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부탁해
영화가 개봉한 2001년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의 시작쯤이다. 그 시기의 작품들은 새롭고,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감독들이 그리던 작품의 세계(이를테면 <올드보이>나 <살인의 추억>, 혹은 <달콤한 인생> 같은) 에서는 ‘부탁’이라는 단어가 통용되지 않았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부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세계의 틈을 열어주었다. 부탁함으로써 연대할 수 있고, 할퀴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영화의 세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