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팀 발제: 빅토르 에리세 - <벌집의 정령>
WEBZINE
WEDITOR 조현준
발제 일자: 2023.11.9
발제 영화: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1973)>
참석 인원: DE, EB, HG, HJ, HM, MJ, SJ, YJ, JH
이미지로 채워진 영화에 관해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애초에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재현될 뿐 언어적으로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기에, 하나의 일관성 있는 언어로 영화에 관한 글을 풀어낸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뜩이나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은 정말 이미지가 흩뿌려진 채로, 무게중심이 되는 뚜렷한 주제 내지 플롯 없이 전개되는 영화이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중심으로 너드 구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픈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발제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발제 직전까지 고민이 많았다. 발제 시작 2시간 전 즈음, HM에게 완성된 글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이미지나 키워드 중심으로 발제를 진행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해준 HM 덕에, 발제 준비에 대한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언어로 선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촉발되는 발제'야 말로 빅토르 에리세가 재현하고자 했던 영화론과도 부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에리세가 헐거운 이미지들이 제 스스로 엮이도록 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듯, 우리 너드 필름팀 역시 느슨한 키워드와 영화 속 이미지들에 대한 각자 생각의 파편들을 모아모아 한 편의 이야기(라고 쓰고 '수다'라 읽는다)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경계의 모호성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
<벌집의 정령>은 인과성이 존재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거대한 기둥 삼아, 흩뿌려진 이미지들이 서로 느슨하게 관계 맺도록 한다. 각각의 장면들은 접근하기 나름의 방식이 되도록 최소한의 의미적/이미지적 중첩만이 존재하도록 일종의 열린 배치로 배열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헐거운 이미지들을 묶어주는 견련성은, 오히려 이미지의 ‘모호성’ 그 자체 혹은 현실과 환상의 흐려진 경계 그 자체에 있다.
"영화에서 나온 건 다 뻥이야 거짓말이라구. 근데 나, 그 괴물 살아있는 거 봤다?"
필자에게도 그랬고, 너드의 많은 멤버들에게 <벌집의 정령>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로 다가왔던 문장이다. 분명 "영화에서 나오는 것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바로 뒤에 “영화 속의 괴물(크리쳐)을 봤다"고 말하는 이사벨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필자는 이것이 현실과 허구의 구분되지 않는 느슨한 경계를 영화가 가장 노골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벌집"
HJ: 영화가 벌집이라는 오브제를 구체적으로 선택한 부분이 영화의 주제나 연출 방식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벌집이란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지만, 어떤 문이나 막이 세워져 있지 않다. 그렇기에 벌들은 벌집의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것이 나에겐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인 경계의 모호성, 나아가 현실과 환영의 구분되지 않음에 대한 메타포로 다가왔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벌집의 정령>은 빅토르 에리세가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 정치적인 코멘트를 남긴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여기에서 벌집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왱왱거리는 벌들이 스페인 내전 전후의 정치적 투쟁을 그린 것은 아닐까.
HG: 벌들의 왕복운동은 투쟁의 의미보단 내전 당시의 혼란을 투사한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벌의 이미지를 보고, 오히려 갇혀 있고 자신들을 망각하여 마비된 마을 사람들이 연상되었다.
JH: "누군가가 이 모든 일들을 본다. 경외 속에서 주시하다가 재빨리 눈길을 돌려버린다." 벌 떼와 관련된 이 의미심장한 대사를 통해, 안나가 경험하는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경계 내부에서, 억압받는 독재 정권 내에서부터, 경계 밖으로 나가고, 나아가 그 과정을 관망할 수 있는 주체로 이행해가는 성장 과정으로 이 영화를 감상하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안나는 발코니 창문을 열고, 창문 안 쪽을 들여다본다. 집과 외부 간의 경계로 자리잡고 있는 벌집 모양의 창문이 있는데, 벌집이 사람들을 억압 속에 가둬 두는 사회의 테두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눈"
학교에서 인체 모형에서 눈 부위를 붙이는 장면부터, 눈은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미지로 자리잡는다. 특히 영화관에 아이들이 몰려간 장면에서 카메라는 안나의 눈과 영화를 번갈아서 프레임에 담아냄으로써, 본 영화가 안나라는 어린 아이의 시선 내지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것임을 넌지시 알린다. 흩뿌려진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관람객 입장에서의 혼란이, 어찌 보면 안나가 감내해야 했던 잔혹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당혹감, 그리고 세계의 불가해함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HG: 본 영화에는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안나의 시선을 대변하는 시선,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이 안나가 그린 그림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안나가 바라보는 세상을 카메라라는 다른 매체를 경유해서 보여주는 영화 같았다.
"집"
안나와 이사벨이 뛰노는 집을 계속해서 영화는 보여준다. 필자는 이 집이 개인적으로 벌집 같다고 생각했다. 벌집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대한 메타포인 만큼, 벌집에서 벌어지는 비일상적인 경험(새로운 공간을 접하는 것이라든지, 군인 아저씨를 만나게 되는 것이라든지)을 말미암아 환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시각적으로도 별도의 경계막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집의 구조가 벌집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느껴졌다.
HM은 이에 대해, 영화가 집을 사용하는 방식이 영화 <스펜서(2021)>에 등장하는 집이 영화 내 장치로 이용되는 것과 닮아 있다고 했다.
HG는 집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장면에서, 안나와 이사벨이 카메라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연출이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스페인 내전"
SJ는 본 영화가 스페인 내전의 컨텍스트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에 관한 해석을 찾아보고 나서, 일대일 대응으로 영화에 대한 치밀한 답안지를 보는 것 같아 영화에 대한 감흥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말했다.
필자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레이어를 알고 나니 영화가 더 감명 깊게 느껴졌던 만큼 이에 반대했다. 일반적으로 예술이 정치적인 역사에 코멘트를 남기는 방식이 아젠다를 직접적으로 끌고 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비해 빅토르 에리세가 <벌집의 정령>을 통해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내놓은 방식은 굉장히 시적이고 은유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이 상당히 순수하고 시적인 포맷을 취하면서도 얼마든지 정치적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인상 깊었고, 그래서 오히려 작품이 더 처연하고 처절하게 느껴졌다는 소감을 전했다. 추가로, 초반에 아이들이 영화관으로 사용했던 공간이, 후반부에 가서는 저항군의 시체를 보관하는 시체 안치소로 사용된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대목이 스페인 내전 이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성역으로 여겨졌던 영화 혹은 예술의 영역 마저, 독재에 의해 오염되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EB와 HM은 영화사적으로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이 정치적인 색채를 지니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벌집의 정령>이 1973년 작인데, 에리세가 당시에 영향을 받았을 영화 사조가 이탈리아 시적 리얼리즘이었기에, 그의 작품이 정치적인 맥락과 함께 읽힐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동기에서 발아하였으나, 얼기설기 얽힌 이미지로써 관람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도록 연출한다는 점에서, 에리세의 영화가 시적 리얼리즘의 특징을 계승하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우물"
우물은 많은 작품에서 신비롭고 풀리지 않는 퍼즐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많이 사용된다. 나아가, 필자는 우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이들이 뛰노는 시골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우물이 정겨운 풍경에 녹아듦과 동시에, 유년시절에 겪었을 심연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우물 옆의 집에서 안나는 군인 아저씨와 친해졌고, 그녀는 다음날 죽은 그의 피가 묻은 현장을 목격한다. 안나가 어린 아이로서 감내해야 했던 불가해함에 대한 공포가 우물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다시금 환기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HM은 우물에 돌을 넣었을 때의 돌의 가시성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돌이 보이지만, 그것이 점점 멀어지며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사라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나아가 이것이 영화에서 반복되어 언급되는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연출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크리쳐)의 속성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HG는 <벌집의 정령>이 영화에 관한 영화인 만큼, 우물이 가진 빛(우물 밖)과 어둠(우물 내부, 심연)의 양가적 속성이 영화를 구성하는 빛과 어둠의 조합에 대한 유비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우물은 많은 매체에서 죽음과 연결되는 공포스러운 장치라는 점에서, 우물이라는 오브제 역시 영화 내에서 안나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죽음과 어둠의 이미지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랑켄슈타인>"
필자는 본 영화가 <프랑켄슈타인>을 레퍼런스 삼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느꼈다. 필자는 <프랑켄슈타인>을 원본과 복제품 간의 관계, 나아가 현실과 허구의 이분법적 구도를 다루는 작품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왔다. <벌집의 정령>이 현실과 환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만큼, 그런 주제의식을 <프랑켄슈타인>만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없다고 느꼈다.
SJ: <프랑켄슈타인>에서 크리쳐는 다소 맹목적으로 타자화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크리쳐를 배척하는 것에 비해, 그는 어떤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실재하지 않는 크리쳐의 위협을 두고 사람들이 갖는 맹목적인 폭력성이, 허황된 이념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스페인 내전의 실상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둘 다 속 빈 강정이라고나 할까.
HG: 메리 셜리 원작의 <프랑켄슈타인>에는 연못에서 아이를 죽이는 장면 자체가 없다. 그것은 영화로 각색되면서 생겨난 장면이다. 이에 대해 되게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영화의 원본에서는 크리쳐가 연못에서 아이를 던져버리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너무 잔인하다고 판단되어 삭제되었고, 소녀가 죽은 모습만 영화에 결국에 담기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녀의 죽은 모습만 덩그러니 영화가 비춤으로써, 관객은 소녀가 크리쳐에 의해 어떻게 죽었을까 상상하며 오히려 더 잔혹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이미지가 선형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매체다. 이미지가 누락되기도 하고, 붙기도 한다. 이처럼 편집된 영상을 관객이 보았을 때 파생될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 <벌집의 정령>이 메타영화로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HJ: <벌집의 정령> 역시 선형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흩뿌려진 이미지들을 엮기 나름이 되도록 열린 배치로 구성되어있다. 따라서 이미지를 어떻게 자르고 붙이느냐에 따라 파생되는 영화적 경험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코멘트를 남기기 위해, <프랑켄슈타인> 영화에 얽힌 아이코닉한 일화를 가져온 것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해석처럼 느껴진다.
EB는 이에 덧붙여서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쳐가 죽음 사체를 재조합해서 현실로 환생이 된 캐릭터인 만큼, 마을에 영화라는 일종의 환상이 도착한 것은 죽음의 이미지가 도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지는 죽음이다"라고 말한 모 비평가(앙드레 바쟁으로 추정)의 어록이 떠오른다고 했다.
"정령의 존재?"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벌집의 정령이란 무엇인가?'였다. 필자는, 이미지들을 엮어주는 은유적 신비 그 자체를 정령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파헤치고, 불가해함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시선들이 존재한다. 이해될 수 없는 것과, 이해하려는 시선 사이의 공백을 엮어주는 아름다운 신비야말로 정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결론 맺으며, 서둘러 발제를 마무리 지었다.
발제 영화: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1973)>
참석 인원: DE, EB, HG, HJ, HM, MJ, SJ, YJ, JH
이미지로 채워진 영화에 관해 한편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애초에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재현될 뿐 언어적으로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기에, 하나의 일관성 있는 언어로 영화에 관한 글을 풀어낸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뜩이나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은 정말 이미지가 흩뿌려진 채로, 무게중심이 되는 뚜렷한 주제 내지 플롯 없이 전개되는 영화이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중심으로 너드 구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픈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발제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발제 직전까지 고민이 많았다. 발제 시작 2시간 전 즈음, HM에게 완성된 글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이미지나 키워드 중심으로 발제를 진행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해준 HM 덕에, 발제 준비에 대한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언어로 선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촉발되는 발제'야 말로 빅토르 에리세가 재현하고자 했던 영화론과도 부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에리세가 헐거운 이미지들이 제 스스로 엮이도록 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듯, 우리 너드 필름팀 역시 느슨한 키워드와 영화 속 이미지들에 대한 각자 생각의 파편들을 모아모아 한 편의 이야기(라고 쓰고 '수다'라 읽는다)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경계의 모호성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
<벌집의 정령>은 인과성이 존재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거대한 기둥 삼아, 흩뿌려진 이미지들이 서로 느슨하게 관계 맺도록 한다. 각각의 장면들은 접근하기 나름의 방식이 되도록 최소한의 의미적/이미지적 중첩만이 존재하도록 일종의 열린 배치로 배열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헐거운 이미지들을 묶어주는 견련성은, 오히려 이미지의 ‘모호성’ 그 자체 혹은 현실과 환상의 흐려진 경계 그 자체에 있다.
"영화에서 나온 건 다 뻥이야 거짓말이라구. 근데 나, 그 괴물 살아있는 거 봤다?"
필자에게도 그랬고, 너드의 많은 멤버들에게 <벌집의 정령>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로 다가왔던 문장이다. 분명 "영화에서 나오는 것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바로 뒤에 “영화 속의 괴물(크리쳐)을 봤다"고 말하는 이사벨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필자는 이것이 현실과 허구의 구분되지 않는 느슨한 경계를 영화가 가장 노골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대사라고 생각했다.
"벌집"
HJ: 영화가 벌집이라는 오브제를 구체적으로 선택한 부분이 영화의 주제나 연출 방식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벌집이란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지만, 어떤 문이나 막이 세워져 있지 않다. 그렇기에 벌들은 벌집의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것이 나에겐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인 경계의 모호성, 나아가 현실과 환영의 구분되지 않음에 대한 메타포로 다가왔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벌집의 정령>은 빅토르 에리세가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 정치적인 코멘트를 남긴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여기에서 벌집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왱왱거리는 벌들이 스페인 내전 전후의 정치적 투쟁을 그린 것은 아닐까.
HG: 벌들의 왕복운동은 투쟁의 의미보단 내전 당시의 혼란을 투사한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벌의 이미지를 보고, 오히려 갇혀 있고 자신들을 망각하여 마비된 마을 사람들이 연상되었다.
"눈"
학교에서 인체 모형에서 눈 부위를 붙이는 장면부터, 눈은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미지로 자리잡는다. 특히 영화관에 아이들이 몰려간 장면에서 카메라는 안나의 눈과 영화를 번갈아서 프레임에 담아냄으로써, 본 영화가 안나라는 어린 아이의 시선 내지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것임을 넌지시 알린다. 흩뿌려진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관람객 입장에서의 혼란이, 어찌 보면 안나가 감내해야 했던 잔혹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당혹감, 그리고 세계의 불가해함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집"
안나와 이사벨이 뛰노는 집을 계속해서 영화는 보여준다. 필자는 이 집이 개인적으로 벌집 같다고 생각했다. 벌집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대한 메타포인 만큼, 벌집에서 벌어지는 비일상적인 경험(새로운 공간을 접하는 것이라든지, 군인 아저씨를 만나게 되는 것이라든지)을 말미암아 환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시각적으로도 별도의 경계막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집의 구조가 벌집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느껴졌다.
HG는 집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장면에서, 안나와 이사벨이 카메라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연출이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스페인 내전"
SJ는 본 영화가 스페인 내전의 컨텍스트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에 관한 해석을 찾아보고 나서, 일대일 대응으로 영화에 대한 치밀한 답안지를 보는 것 같아 영화에 대한 감흥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말했다.
필자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레이어를 알고 나니 영화가 더 감명 깊게 느껴졌던 만큼 이에 반대했다. 일반적으로 예술이 정치적인 역사에 코멘트를 남기는 방식이 아젠다를 직접적으로 끌고 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비해 빅토르 에리세가 <벌집의 정령>을 통해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내놓은 방식은 굉장히 시적이고 은유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이 상당히 순수하고 시적인 포맷을 취하면서도 얼마든지 정치적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인상 깊었고, 그래서 오히려 작품이 더 처연하고 처절하게 느껴졌다는 소감을 전했다. 추가로, 초반에 아이들이 영화관으로 사용했던 공간이, 후반부에 가서는 저항군의 시체를 보관하는 시체 안치소로 사용된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대목이 스페인 내전 이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성역으로 여겨졌던 영화 혹은 예술의 영역 마저, 독재에 의해 오염되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우물"
우물은 많은 작품에서 신비롭고 풀리지 않는 퍼즐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많이 사용된다. 나아가, 필자는 우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이들이 뛰노는 시골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우물이 정겨운 풍경에 녹아듦과 동시에, 유년시절에 겪었을 심연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우물 옆의 집에서 안나는 군인 아저씨와 친해졌고, 그녀는 다음날 죽은 그의 피가 묻은 현장을 목격한다. 안나가 어린 아이로서 감내해야 했던 불가해함에 대한 공포가 우물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다시금 환기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HG는 <벌집의 정령>이 영화에 관한 영화인 만큼, 우물이 가진 빛(우물 밖)과 어둠(우물 내부, 심연)의 양가적 속성이 영화를 구성하는 빛과 어둠의 조합에 대한 유비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우물은 많은 매체에서 죽음과 연결되는 공포스러운 장치라는 점에서, 우물이라는 오브제 역시 영화 내에서 안나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죽음과 어둠의 이미지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랑켄슈타인>"
필자는 본 영화가 <프랑켄슈타인>을 레퍼런스 삼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느꼈다. 필자는 <프랑켄슈타인>을 원본과 복제품 간의 관계, 나아가 현실과 허구의 이분법적 구도를 다루는 작품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왔다. <벌집의 정령>이 현실과 환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만큼, 그런 주제의식을 <프랑켄슈타인>만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없다고 느꼈다.
HG: 메리 셜리 원작의 <프랑켄슈타인>에는 연못에서 아이를 죽이는 장면 자체가 없다. 그것은 영화로 각색되면서 생겨난 장면이다. 이에 대해 되게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영화의 원본에서는 크리쳐가 연못에서 아이를 던져버리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너무 잔인하다고 판단되어 삭제되었고, 소녀가 죽은 모습만 영화에 결국에 담기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녀의 죽은 모습만 덩그러니 영화가 비춤으로써, 관객은 소녀가 크리쳐에 의해 어떻게 죽었을까 상상하며 오히려 더 잔혹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이미지가 선형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매체다. 이미지가 누락되기도 하고, 붙기도 한다. 이처럼 편집된 영상을 관객이 보았을 때 파생될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 <벌집의 정령>이 메타영화로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HJ: <벌집의 정령> 역시 선형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흩뿌려진 이미지들을 엮기 나름이 되도록 열린 배치로 구성되어있다. 따라서 이미지를 어떻게 자르고 붙이느냐에 따라 파생되는 영화적 경험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코멘트를 남기기 위해, <프랑켄슈타인> 영화에 얽힌 아이코닉한 일화를 가져온 것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해석처럼 느껴진다.
EB는 이에 덧붙여서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쳐가 죽음 사체를 재조합해서 현실로 환생이 된 캐릭터인 만큼, 마을에 영화라는 일종의 환상이 도착한 것은 죽음의 이미지가 도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지는 죽음이다"라고 말한 모 비평가(앙드레 바쟁으로 추정)의 어록이 떠오른다고 했다.
"정령의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