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팀 발제 : 장이머우 - <홍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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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이예준

                                       

발제 일자: 11.9
발제 영화: 장이머우 감독의 <홍등(1991)>
참석 인원: DE, EB, HG, HJ, HM, MJ, SJ, YJ, JH



이번 발제는 부쩍 추워진 날씨와 함께했다. 차갑고 쓸쓸한 가을 공기에 지하철 운행 문제까지 겹쳐 모두들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 들어왔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자 따뜻한 대화가 솔솔 피어올랐다. 바보 같은 농담들을 제지하며 이번 발제를 시작했다. 장이머우는 대표적인 중국 5세대 감독이다. 대표작으로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과 같은 작품들이 있으며 화려한 색감과 미장센으로 수많은 해외 영화제를 휩쓸었다. <홍등>은 전성기 시절 공리의 아름다운 모습과 ASMR 같은 사운드와 화면이 매력적인 작품이라 관심 있게 보았다. 톡톡 튀는 너드들이 이 영화와 오리엔탈리즘, 더불어 장이머우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 발제 영화로 선정했다.




국가적 통제 체제와 가부장제의 유사성 - 가스라이팅
<홍등>의 나리(마정무 분)는 집안의 질서를 유지하고 아내들과 종들을 통제하기 위해 몇 가지 수단을 이용한다. 그가 사용하는 가부장적 통제 방법들은 국가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특히 당시 중국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한 다양한 통제와 억압에 맞닿아 있다. 그 첫 번째는 당근과 같은 달콤한 요소다. 나리와 밤을 보내는 부인의 처소 앞에는 붉은 등이 밝혀지고, 그 부인은 발 마사지를 받을 수 있으며 원하는 반찬도 마음대로 주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국민들이 다른 사소한 재밋거리와 흥미 요소에 눈을 돌려 정치에 관심 두지 않도록 하던 과거 정책들이 겹치는 부분이다.
네 명의 부인은 이 권한을 갖고자 서로를 견제하고 암투를 벌인다. 왜 이들은 이런 별것도 아닌 것에 목매며 살아가게 된 것일까, 정말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유효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들의 분열은 효율적인 통제의 두 번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을 나눠 순위를 매기고 차등한 권력을 쥐여 주게 되면 이들은 진정 이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항할 생각은 잊고 그들 간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게 된다. 권력은 내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피지배자들이 경쟁하고 서로 분열하게 만든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될 수 없는가?
HM은 영화가 마치 가스라이팅 피해자인 송롄(공리 분)에게 책임소재를 묻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HM은 이런 인상이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캐릭터의 묘사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대학생이던 송롄의 유약한 성격과 주체성이 느껴지도록 사소한 반항을 묘사하였기에, 이후의 절망적인 결과의 책임이 피해자에게도 있는 것 마냥 묘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JH 또한 송롄에게서 주체성을 느꼈다.
HM은 JH의 의견에 동의하며, 그러한 묘사를 포함, 송롄의 미묘하게 주체적인 성격 묘사를 쌓아 올리는 전반적 과정은 송롄이 가스라이팅과 억압의 피해자임에도 그녀에게 문제와 책임이 있다고 느껴지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녀는 감독의 시선과 태도가 송롄에게도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느껴졌고, 이것이 불쾌했다고 주장했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는 대체로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라면 그가 주체적으로 폭력에 가담해서는 안 되며 수동적인 모습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이 언제나 사실이지는 않을 것이다. 무결한 피해자만이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피해자가 저지르는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피해자도 언제든 다른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부분에서 피해자를 인식하는 중립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폭력의 책임, 특히 일차적 가해 이후 파생된 이차적인 폭력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억압의 묘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책임 소재 파악의 혼란을 겪게 한다. 가정이나 친밀한 관계일수록, 그리고 많은 내부 구성원이 관련될수록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모호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1의 가해자인 권력자가, 이후 파생되는 폭력을 조장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내부의 2차 폭력의 가해자가 일차적으로는 피해자였다고 하더라도 그 가해를 하게 된 배경에는 1차 가해자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하곤 한다.
간혹 1차 가해자가 간접적으로 벌인 폭력임이 명확함에도 표면적으로는 1차 피해자가 만들어 낸 새로운 폭력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책임을 1차 피해자에게 돌리는 등으로 혼동하지 않는 주의가 필요할 것이며, 아마 HG가 지적한 부분도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홍등>의 송롄은 셋째 부인(하새비 분), 옌아(공림 분)가 폭력을 겪게 한다. 셋째 부인의 경우 송롄이 술김에 고자질한 불륜사실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 죽음의 책임이 표면상으로는 송롄의 고자질에 있는 듯 해도 정확히 말하자면 나리가 죽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복잡한 관계는 나리의 잘못된 시스템과 권력 분배, 폭력과 억압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각 관계의 책임 소재를 소상히 나열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리가 이 모든 일을 자초하였으며 셋째 부인의 죽음은 확실히 나리의 가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동양인은 오리엔탈리즘을 실천할 수 없는가?
HJ과 HG은 공리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뒤이어 SJ는 자신이 이 영화를 보면서 오리엔탈리즘적 아름다움만을 포착하고 느낀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에 HG가 반박하며 이후 지속될 엄청난 논란의 서막을 알렸다.

SJ: “나 너무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이 영화를 즐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내가 동양인 여잔데 왜 동양인 여자를 보면서 오리엔탈리즘을 느끼는 거지..?”
HG: “동양인 여자로서 동양인 여자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굳이 오리엔탈리즘이라 설명할 수 없어요.”
SJ: “하지만 내가 좋아한 포인트들이 너무 오리엔탈리즘인데?”




과연 장이머우는 숱한 논란대로 서양이 주류인 해외 영화제들과 해외 평론가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오리엔탈리즘적 연출을 한 것일까? 혹은 HG의 주장대로 그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아예 불가한 것일까? <홍등>에 대한 흔한 비판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이 있다는 설명에 HJ는 이 영화가 어째서 오리엔탈리즘 여부의 논란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장이머우가 <홍등>을 통해 묘사한 1920년대의 중국은 분명 그가 경험한 적 있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세상이 항상 <홍등>에서 묘사된 대로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실상 그는 그가 묘사하고자 하는 ‘과거 중국’을 더 과장되게, 더욱 감각적으로 묘사해 낸 것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장이머우의 영화는 서양이 주류인 외부 평론가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중국을 이국화 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미장센의 아름다움은 노골적으로 서양의 시선에 매력적일 만한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를 재생산해 낸 결과라는 것이다.

EB는 만약 이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에 봤다면 장이머우를 의심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와서 보니 정말 서양 평론가들을 의식하고 제작하였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HG는 이 대화에 한 가지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동양의 작가나 동양의 예술가에게 오리엔탈리즘적이라는 비판을 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해당 동양 문화에 속해 있지 않은, 서구 사람들이 동양에 대해 갖는 인식을 일컫는 용어인데 어떻게 동양 문화에 속한 동양인의 예술에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이 가능한지 의아해했다. 단지 묘사가 비현실적이고 극적이라 현실이 고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주장했다.
HJ는 이 의견에 동의했다. 연극적인 효과를 위한 과장이지 이것이 서양인들의 눈에 예쁘게 만들고자 한 의도가 담겼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EB는 동양인이 하는 오리엔탈리즘이 과연 불가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서양인들이 제 3세계 문화를 착취하고 타자화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실용되고 있는 예시들이 존재함을 언급하며 만약 그러한 착취와 타자화가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져 여러 문화권에서 이용되곤 하는 수단의 하나로 공고히 된다면, 동양인의 오리엔탈리즘도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HJ는 충분히 동양인 당사자가 만든 창작물을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예쁘게 그려낸 것을 두고 비난할 수 없지 않으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작자의 양심과 의도의 문제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과연 동양인은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데에 일조할 수 있는가? 너드들은 카디비와 그녀 자신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비판, 흑인 여성으로서 입지를 다져나간다는 의미, 여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야한 웹툰을 그리는 경우와 당사자성의 중요성에 대해 열렬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난장판이 이어졌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감독의 의도가 서양 평론가의 취향을 노려 제작하였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는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했으리라는 점이었다.




장이머우의 오리엔탈리즘 이미지 폭격이 실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박
발제는 다음 소주제로 이어졌다. 장이머우가 받아온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의견 한 가지를 소개하였다.
타인을 바라볼 때 보고 싶은 장면만을 편집하여 바라보고 타인에게 왜곡된 인식을 만들며, 관찰당하는 대상은 반박이나 주장을 할 수 없는 무력한 위치에 처하게 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관음’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갖는 복합적인 모습들, 그리고 본인이 관찰되는 중이라는 것을 인식했더라면 보였을 만한 다른 태도와 주장 같은 것은 무시한 채, 보고 싶은 모습만을 마음대로 조금 봐놓고서는 타인을 멋대로 규정하는 관음의 태도가 오리엔탈리즘의 시선과 매우 유사하다는 이야기다.
혹자는 장이머우가 과장되고 화려한 ‘중국적’ 이미지를 계속해서 차용하고 이런 이미지를 폭격하듯 구성하여 둔 것이 이러한 서양의 관음에 대항하는 새로운 시선이며, 이미지와 시선의 폭력성을 이용해 되려 그들에게 이 이미지를 강렬하고 무차별적으로 제시하여 당황을 느끼게 하는 노출증적 반발이 들어있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한 의견을 너드들에게 묻자 강한 반발부터 쏟아져 나왔다.

HM: “장이머우가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인가요?”
EB: “설령 의도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결과가 과연 그렇게 나왔나요?”
HJ: “아 그래서 이게 메타의 메타다?”
HM: “어쩌면 장이머우는 진짜…’여우들의 전쟁!’ 이것만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어. ㅋㅋ”
SJ: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이걸 만약 쿠엔틴 타란티노가 했었다면 <게이샤의 추억> No.2가 됐겠지만..”




이번 발제는 폭소와 기상천외한 비유들로 가득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하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인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장이머우는 과연 아무 생각 없는 여우들의 전쟁 제작자일까, 혹은 오리엔탈리즘에 이미지로 응수하는 전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