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작별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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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최정원

                                       

어느덧 직장인이 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이것이다. 잠자고 있는 나를 깨우려는 사람은 많아도 나를 재워주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밤마다 잠을 설친다. 이럴 때마다 어렸을 때 어두운 방이 무서워서 같이 있어 달라고 하면 옆에서 나를 재워주곤 했던 그 분이 떠오르곤 한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수록 그 분은 더욱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셨다.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없고,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을 수 없으며, 소음에 예민하시며 혼자 있기를 무서워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그 분은 성실한 삶을 이끌어 온 만큼 누구보다도 자기 확신에 차 있는 분이셨지만 마지막에 마주한 그 두 눈에는 축 내려온 다크서클과 함께 불안이 서려 있었다.

어느 밤 그녀는 홀로 주방 식탁에 멍하나 앉아계셨다. 잠을 설치신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말동무가 되어드릴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잠이 부족해서였을까. 고요히 식탁 앞에 앉아있던 그녀 옆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어느덧 직장인이 된 나는 잠에 못 드는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이 왜 잠들지 못하지라는 의문보다는 나만큼 고생하겠냐는 불만이 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내가 똑바로 일하는지 확인하는 눈빛들이 많았기에. 멈추지 않는 업무 알람처럼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소리는 많아도 이제는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래서일까. 나는 어린 시절 나처럼 누군가의 자장가가 필요해 보이는 그녀를 외면했다.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분과 마지막으로 보낸 밤은 어땠을지 상상해 보고는 한다. 옆을 지키며 그녀가 불러준 자장가를 돌려주었으면 내 마음이 지금처럼 허할지 고민해 본다. 그렇다면 내가 그 밤을 ‘죽음’이 아니라 ‘작별’로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내가 꿈꿀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감독이 있다. 바로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커스틴 존슨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커스틴 존슨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딕 존슨을 따라다니며 아버지가 죽는 여러 시나리오를 촬영한다. 계단에 굴러떨어져 보기도 하고, 가상 장례식을 개최하기도 한다. 커스틴 존슨은 환상과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이용하여 죽음을 재현하지만 절대 죽음 자체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여러 재현을 통해서 처음이라 너무나도 서툴렀던 작별 인사를 미리 연습해 본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죽음에 대한 고찰이나 철학을 설득하기 위해 찍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려면 그 사람 옆을 맴돌아야 하듯이, 커스틴 존슨은 촬영 내내 아버지 옆을 지킨다. 영상에서 딸과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에는 지나간 기억, 서로를 향한 애틋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대화들은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만 우러나온 것들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끝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촬영은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딕 존슨이 죽는 순간은 대본으로 예정되어 있기에 그들은 임박한 가상의 죽음을 반복하며 죽음을 체화한다. 또 서서히 그 주제에 대해 더욱 솔직해진다. 비록 상황들은 허구였어도, 그 과정에서 느끼었던 감정은 진실하다.

“넌 이제 보살필 동생이 있잖아.”

이스라엘로 떠나는 커스틴 존슨에게 그는 마치 누나 없이는 혼자 잠들지 못하는 동생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돌봐야 할 존재가 된 것이고 그 사실을 두 사람은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다. 그렇게 이 영화는 서로에 대한 진심을 한 흐름으로 엮는다.

더없이 사적인 목적을 띄는 이 영화가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지점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통한이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적이 있다. 몇십 년 동안 카메라 감독이었던 커스틴은 정작 본인의 어머니를 거의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게다가 거의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영상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그녀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상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악착같이 시간을 붙잡는다. 관객은 모두 미련이 남는 누군가와의 이별이 있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감정을 늦기 전에 전달했으면 하는 후회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진실한 감정을 속삭여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한 가지의 말을 속삭이기 위해 얼마나 큰 애정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첫 번째는 누구나 서투를 수밖에 없다. 어머니를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낸 것에 대한 커스틴의 후회는 인간적이다. 그 후회로 인해 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그녀의 진심도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이 영화는 어머니와의 미숙했던 이별에 대한 속죄이면서 그 시절 그녀를 그냥 떠나보내야 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용서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느 밤이 딕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지 모르기에 매일 진심을 다해 그의 옆을 지킨다.

일상에서 소리치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무언가를 속삭여 주는 사람들은 없다. 다들 원하는 곳으로 가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고 누군가의 옆자리를 지키는 데는 관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속삭이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나 또한 때로는 커스틴 존슨이 하였듯이 잠이 들지 못하는 그녀의 옆을 지키면서 볼품없는 목소리로라도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을 상상한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몇 마디라도 건네고 곁을 지켰더라면 후회가 없었을 텐데. 아주 잠깐이라도 온 세상에는 잠들어 가는 우리들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깨우려고 해도 서로를 재워주려 했다는 확신으로 편히 잠들 수 있을 텐데. 이제는 그 밤의 그녀처럼 내 옆에도 아무도 없을 것 같기에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