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사랑론
WEBZINE
WEDITOR 최재환
모든 형태의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당신에게는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지. 내게는 지나간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그들과 함께 쌓아 올렸던 것들, 모래성 혹은 바빌론 같은 것들이 떠오르고, 또 그것들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모습이 보인다. 가끔은 잘 가다듬어진 영상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한다. 생활 혹은 꿈 속의 장면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언제나 눈에 익은 한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고, 커튼 새로 드는 빛,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지리한 시골길, 그녀와 내가 길을 걷다가 머리를 맞대고 웃고, 춤을 추다가 맨길가에 털썩 쓰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세상의 온갖 먼지같은 것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사랑은 어떤 형태로도 정의할 수 없다고 믿는다. 사랑은 대상으로서의 사람도 아니며 행위도 아니다. 리비도나 뇌 속의 신경과 호르몬을 비롯한 신경 전달 물질들의 화학 작용과 그 총체도 아니다. 사랑은 세상의 온갖 것들과 맞닿아 있다. 사랑은 언급한 것들 외의 모든 형태의 사랑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가능한 한 상위 영역의 그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스스로도, 타자에게도 사랑인 것을 사랑 아닌 것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사랑에 대한 모든 정의는 잠정적이다. 사랑은 정의되지 않는다.
무척 멋진 사랑
어떤 낭만적인 사람이라면, 이상적인 사랑 같은 것이 따로 있고 그런 류의 사랑을 최고선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좇아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생에 단 한 번, 대단한 사랑을 한 적이 있다. 나를 향한 부모님의 헌신을 포함해서, 그밖의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랑들의 대부분이 뻔하거나 시시하게도 느껴질 만큼. 타자의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그것을 체계화할 수는 없지만, 분명 사랑의 모양은 다양하고 그것은 모종의 기준에 따라 유형화할 수도 있겠고, 그 기준 하의 내가 경험치 못한 사랑에 대해서도 충분히 강한 인상과 감흥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멋진 사랑들. 릴케가 짚었던, 상대를 소유할 수 없음에도 굴하지 않고 고통받을수록 더욱 거대한 사랑으로 화했던, 위대한 여인들의 그것들. 정말 어떤 사랑은 분명히 위대해서, 혹자가 사랑을 동경한대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혹은 비정상적으로 볼 것은 없다. 사랑을 건설 혹은 경영적인 측면에서 한 인간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사랑은 실제적인 성취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나아가 사람이 가장 유연해지는 때는, 그래서 가장 많은 변화가 발생하는 때는 사랑의 득실과 관련한 때라고 생각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글씨체와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게 한다. 애인을 따라 여태껏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먼 나라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하룻밤새 내릴 수도 있다. 죽어가던 사람을 살게 할 수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며 정사 혹은 자살로 이끌기도 한다. 사랑이 연인 간의 사랑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사랑은 인간에게 작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핏빛 자오선
사랑의 유형이 나눠지듯이, 사랑의 성취의 방향도 그것이 속한 유형과 경우에 따라 상이하다고 본다. 앞서 개인적인 얘기를 꺼냈던 것은 그 사랑을 전후로 어떤 사랑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그 사랑이 내가 이 글에서 짚으려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들 중에서 긍정성보다 부정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사랑들, 그중에서 사랑에 제 몸을 투신하여서 제 몸으로 밀고 나아간 사람들의, 가장 먼 곳까지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랑들. 나는 그들이 미적 성취를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오직 간접적으로만 접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어떤 작품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경우, 그것의 작품성과 미적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잣대를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다루는 작품들은 일련의 이유로 인해 일반적 의미에서의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회와 개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 세계의 정도를 벗어난 인물들, 그들의 편협한 시야와 유치한 언행, 정도가 높아질수록 희박해지는 보편성과 개연성. 그러나 세계의 밖에 위치한 자들, 호모 사케르로서의 그들을 대할 때, 아우슈비츠 이후의 미학 이론에 소외된 자 혹은 소수자를 편입시켰던 것과 같이, 일반론적인 잣대를 대고 재는 일 역시 또 하나의 못 할 일은 아닌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 그들이 어디까지 갔느냐. 세계의 두께는 다양성에 많은 몫을 기댄다. 봉건적 시간관 하의 흘러가는 일직선상의 시간이 있고, 많은 사람들은 한델 향해 나아간다. 앞만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만이 세상에 있다면 우리는 질식해 언젠가 졸도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정한 궤도 하에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초인과 정복자, 영웅과 악당이 필요하다. 더는 걸어갈 수 없을만큼 지친 순간, 땀흘리며 걸어가는 옆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가 나를 바라보며 웃는, 타자와의 조응,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발전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세계의 가능성이 진정한 가능성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우리에게 보다 많은 자유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특별한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핏빛 사랑론
앞서 사랑을 이야기할 적에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한다’고 표현한 것과 달리,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대부분의 사랑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려 하는 것, 혹은 보여주려 하는 것, 불가능성에 대한 불복,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체, 기어코 그곳에 가닿으려는 치열한 사투, 이는 내가 지닌 예술적인 것 혹은 미학적인 것,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 중 하나이다. 에로스와 파토스와 타나토스, 가장 강력한 충동과 욕망이 뒤섞이는 곳. 눈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의식할 수밖엔 없는 랭보의, ’나는 아름다움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단언에 근접한 영역, 그곳에서 우리는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본다. 볼 수 없는 것, 여전히 볼 수 없더라도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꿈과 무의식을 경유하지 않고도 존재와 비존재가 뒤섞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의 발자국이 보였다고 믿는다. 이것이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 그 사랑은 반드시 어두워야 한다. 서로의 정신에 복구할 수 없는 커다란 타격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의 메인 테제로서의 사랑과 분간할 수 없는 삶, 그러니까 삶이, 삶과 죽음이 일직선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사랑의 건설적인 힘과 파괴적인 힘이 사실 같은 곳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소위 병적인, 비정상성이 내포되어야 한다. 인간의 한계와 인간이라는 심연, 가장 동떨어져 있는 두 가지의 문제가 맞닿아 있는 곳. 내가 그들이 미적 성취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검붉은빛, 색도 아니고 빛이어야 한다. 핏빛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은 세계의 틈을 열어주지 않는다.
우리라는 세계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이 원래부터 사랑 예찬론자였는지는 중요한 것은 못 된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들을 붙잡는 것들,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주변인으로부터 느꼈던 정과 사회적이고 일반적인 생활에 대한 애정과 관습과 같은, 먼 세계로부터 떠나는 것을 붙잡는 것들, ‘정과 생활’로 통칭되는 것들을 무시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탕아가 더 높은 것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좇아 그밖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가 일종의 낙원처럼 묘사되는 가정을 떠나, 나병 환자를 안아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마지못해 떠난 사람들은 언제나 돌아갈 날을 염두에 두게 되고, 언제나 걱정이 앞선다. 더 멀리까지 가도 괜찮을까,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위해 고갱은 무엇을 버렸는가.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철저히 무시할 것. 그렇게 떠나고 나면, 좋든 싫든 세상에서 오직 중요한 것은 너와 나, 우리밖엔 없다. 오직 두 사람만이 있는 세계. 그 좁은 세계 안에는 무엇보다도 넓은 세계가 있다, 그들은 그렇게 믿게 된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소년 소녀가 세상도 의리도 잊어버리고 생명조차 무시하고 육체를 파괴해서라도 영혼을 녹여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정과 열을 바치며 서로가 즐겼다.”
삶의 한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의 세상이 되고 나면, 그들에게는 더이상 외부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제3자는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다. PDA는 예사, 미친 사람처럼, 혹은 아이처럼 사람들이 지나는 길을 뛰어다니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아이처럼. 아이가 아닌 사람이 아이처럼 굴 수 있다는 것, 그래도 괜찮다는 특권을 선사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나의 모든 것인 너로부터. 나아가, 서로의 아이같은 모습을 상대가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 권능에도 비견된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들을 보고 미친 사람으로 인식할 줄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쾌락을 선사한다.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는 착각. 드물게 밤하늘이 파랗거나 큰 달이 뜨면, 세상도 그들을 위해서 아름답기로 작정했다며 즐거워한다. 둘레세계 내의 완전성은 물론 세계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지만, 그들의 세계관에는 강한 영향을 미친다. 세계의 모든 것으로부터 낭만적인 인상만을 받는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있으므로,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진실이며 우리는 세계와의 화해를 이루어냈다고 믿는다. 그들은 서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나가 되고 있고 머잖아 하나가 될 거라고 믿는다. 따라 증폭되는 외부 세계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현현하는 이데아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 자족성을 획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것을 서로에게 건넨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단점과 결핍,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네가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데. 네가 게워낸 것을 받아 내 입에 넣는다. 고마워, 잘 먹을게. 입과 입 사이를 오가는 따뜻한 물 한 모금. 흘리면 핥아먹는다. 우리는 번식한다. 나의 모든 것이 수용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때의 쾌락, 관계에 대한 욕망은 곧 수용과 인정에 대한 욕망과 같으므로. 세상은 우리의 것, 원체 믿지도 않던 신의 권능을 인식하고, 그것을 얼마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존재의 층위는 격상한다. 천사가 되었다는 기쁨을 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는지를 매일같이 점검하며, 이전보다 한층 넓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 좁아지고 있는 세상을 모른체하면서, 그들은 창조적, 퇴폐적, 묵시록적, 온갖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아깝지 않으며 되려 모자랄 만큼의 감정을 느낀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환상이 환각이 되어 현현한다. 언젠가 스쳐지났던 예감, 신화와 전설, 심지어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과거의 이야기들, 잃어버린 신화 속의 시인이 깨어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또 전설 속의 거인들을 피해 돌아다니며 즐거워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낙원 혹은 천국이리라고 믿었지만, 이 장면 역시 언젠가 잃어버릴 신화일 줄도 알았다. 그러나 신화 속의 인물이 되었다는 것 역시 세계를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만 할 뿐이다. 모든 것이 과잉되고 과장되었으며, 또 일시적일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멈출 줄도 몰랐다. 빗물처럼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받아먹으며 몸집을 불렸다. 바늘만 콕 찔러도 쉽게 터져버리게끔.
복낙원
그녀는 어느날 내게 천국과 낙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었다. 우리는 어느 쪽이나 신을 믿지 않았고 따라서 그 질문은 이미 굳건히 존재하는 천국과 낙원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내가 천국과 낙원이라는 지난 세계의 잔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같았다. 그리고 어느쪽이 더 좋은지 답변하기 위해서는, 천국과 낙원을 상상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더 정확한 질문이라고 할 것이 있다면, 천국과 낙원을 상상할 수는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백의, 구름, 천사, 검은 눈동자, 그리고 종소리? 일견 모두 좋아보이기만 하는 천국과 낙원인데, 그것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천국과 낙원 사이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좁혀질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천국에의 도달가능성, 그것은 없다. 조지 오웰은 말했다. 성경에서조차 천국은 좋다고만 하지, ‘종소리’와 같은 겉도는 표현 외에는 어떤 묘사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고. 천국을 생각해 본다. 무엇이 보이겠나? 잘 그려지지 않는데, 틀에 박힌, 인습적인 따분한 생활만이 눈에 챈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천국에 대한 정의와 그것을 가능케 할 어떤 공통적인 인식만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잘은 모르겠으나, 대충 좋은 곳, 절대적으로 좋은 곳, 좋기만 한 곳. 조지 오웰은 또 말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로만 가득찬 세계가 있다면, 우린 긍정성의 물결 속에서 머잖아 질식해 죽을 거라고. 천국이라는 단어에 씌인 홑겹 아름다운 무늬의 비단을 걷고 나면 거기에는 온통 흰빛 맑은 강물같이 따분한 세상이 있겠다고 믿는다. 세상의 모든 역설 중의 가장 거대한 역설. 오웰의 천국론을 읽기 전에도 천국은 낙원도 못 되며 또 말해 좋은 곳도 못 된다고 줄곧 믿고 있었다. 언제나 낙원만을 원했지. 추방의 가능성이 있는 곳, 뱀이 종종 보이고 또 무화과나무 혹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 당분간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나를 버릴지도 모르는 어머니, 혹은 그녀를 닮은 누군가가 있는 곳. 그렇더라도 천국보단 낙원이 좋아보였다. 또 하나의 거짓 신화, 낙원에의 꿈을 꾸고 그곳을 향한 하늘길들을 찾아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기도 했다. 낙원은 상대성을 지닌 이상적 공간이다. 파랑새적 관점으로 본다면 현실을 낙원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온세상이 낙원이면 낙원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사라진다. 낙원엔 이브, 뱀과 무화과와 같이, 아주 좋은 것과 아주 나쁜 것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낙원을 복각했다.
최저낙원
“우리 사이에는 ‘왜’라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떤 낙원에 있을 적을 생각한다. 모든 것은 당연했다. 너무 당연해서, 너의 모든 것이 내 팔이 있을 자리에 팔이 붙어있듯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네가 잠들어 있을 때 뱉고 마쉬는 숨의 속도를 안다. 네가 악몽을 꿀 때면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도 없던 것들이 심심찮게 일어나던 세계. 우리는 우리를 서로의 자연에 맡겼다. 우리는 아이처럼 유치해졌다.
최근 구의 증명을 다시 읽으며 든 생각 중 하나도 몹시 유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치할 수밖엔 없지 않은가. 그들은 세계를 재정립했다. 그리고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세계 밖에 놓였다는 말과 같다. 그들은 소외된 인물이 된다. 그들은 그 세계의 첫 사람들, 그들이 세운 기준은 얼마나 빈약할지. 성숙한 사람이란 모든 외적인 측면에서의 유치한 면모를 지워낸 사람일 텐데, 소외된 이들은 소외된 채 살아오는 동안 어떤 측면에서는 탁월한 성숙도를 획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과 몸을 맞대고 살아가며 그들의 모난 면을 닳고 깎을 사람들이 아주 적거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던 속마음을 꺼내보일 때. 거기에 무언가 좋고 아름다운 것만 있으리라는 생각은 철저한 착각이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 거기에 있는 것은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구의 증명, 소니 빈 이야기
구의 증명에는 ‘소니 빈 이야기’가 등장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연인이 바닷가의 동굴에 살며,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그들이 많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또 많은 아이들을 낳고. 소외된 이들이 형성한 하나의 코뮌. 만일 이들이 유치하기만 했다면, 세계는 조금 더 조각난 형태였어도 좋았을 것이다. 지나친 사랑이 유치하기만 했다면, 누구도 그것을 지나치다고 평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 그들이 거주하는 그곳은 치외법권으로 비단 인습만이 아니라 법의 영향력도 닿지 않는다. 소니 빈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과 소설 속에서 구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 내의 완전성과 외부를 향한 배타성, 사랑에 내재해 있는 존재론적인 틈, 사랑을 어느 지점까지 밀고 나아갔을 때 드러나는 사랑의 한계, 그것은 곧 세계의 한계이자 세계의 틈이다. 소니 빈 이야기는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이라는 심연, 그것이 맞닿는 원리와 그 지점을 설명하는 비극적 우화이다.
Misfit’s Anthem
두 사람이 세상의 전부인데 우리 밖의 무언가가 정말 중요할까? 우리는 애인이 생겼다며 친구들을 손절하다시피 냉대하는 친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낭만을 좇아 이세계로 떠나는 청춘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시.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미안하다며 연락하고는 만나면 지난 애인의 욕을 한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게 된다. 앞서의 완전한-혹은 완전해 보이는-사랑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다른 어떤 좋은 것이 아니라 과잉, 과장, 환상이었다. 또, 멋진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은 순해지거나 선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하다. 다만 제 지닌 많은 욕구와 욕망의 많은 몫을 제 애인으로부터 취할 수 있고 그 애인과의 관계는 세상에 둘도 없을, 어머니와의 관계보다도 더 값진 관계이므로 그들은 의식적인 노력을 들여 겨우 만족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채워내지 못한 욕망들을 억누르거나 모른체하면서, 혹은 그저 상대에게나 겨우 숨겨내면서. 그들은 제 사랑과 세계의 완전성에 대한 인식의 허위성을 감지한다. 조응하던 둘레세계와 외부 세계의 연관성이 사라진다. 그들이 달을 향해 쏘았던 수많은 화살은 달에 닿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그들을 향해 빗발치고 있다. 남들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을 그렇게 즐겁게 만들어주었던 것이 이제는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한다. 사랑은 어느 지점까지는 오직 좋고 순하기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그 사랑에는 균열이 생긴다. 사랑에 대한 흔한 비유 중 하나, 공중누각. 실재에 기반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실재.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으로 이끄는 것들 중 ‘필연적인’ 것은 아주 적거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오해와 착각을 비롯해, 모든 인식의 실패로부터 기인한,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성가와 같다. 사랑은 창조적이다.
무력한 천사의 비명
세계를 좁힘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던 그들의 사랑은, 이제는 일반적인 사랑의 발전을 따르게 된다. 서로의 향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나 높은 정합성을 보인다고 여겨지는 미래에 대한 약속과 같은 것들이 아니고서는 사랑은 발전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고착 상태에 빠졌다. 점점 서로가 아닌 것들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아니, 차라리 철저히 다른 것만 보게 된다면 그들은 악무한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를 철저하게 사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많은 변화들. 그들이 바꾼 모든 것들은 오랜 시간과 반복의 지탱 없이도 새로운 관성을 형성해내고, 그들은 그들을 생각한다. 너무 지겨워서, 끔찍하게 여겨질 때까지.
은빛 다리 위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고
지긋지긋한 확률론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형태의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상기한 소외 외에도 불건전한 애착 관계를 비롯한 각종 정신적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랑과 감사’로 대표되는 건강한 대인 관계와 튼튼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 이런 사랑을 했다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있나. 적어도 내게는 없다. 또, 애착 관계에 대한 이론이 보여주듯이, 불건강한 한 인물은 마찬가지로 불건강한 인물을 찾아내는 것에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1991)>을 생각한다. 눈이 멀어가는 미쉘은 다리가 부러진 알렉스를 발견했다. 그들은 사랑을 키워나가다가, 점점 버틸 수 없는 고통에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알렉스, 따라서 넘어지는 미쉘. 그들은 포개진 채로 키스를 한다. 서로가 더 얽매였다며, 좋다며 웃고는 다시 키스, 숨이 막혀가는지도, 맥박이 옅어진지도 모르고. 우리가 사랑이라면서 지껄였던 말들, 그 속에 숨겨졌던 비수. 서로 눈이 멀어, 곧이곧대로 삼키고는 나중에서야 알아차리고서 하는 말. 너는 네 열등감을 내게 덮어씌웠어. 불치병같은 너의 자기연민. 그런 거지같은 환상은 어디 창녀들한테나 풀지 그래? 지긋지긋한 가스라이팅, 또 시작이다. 그럼 어디 혼자 살아보지 그래? 너는 나 없으면 하루도 못 버틸걸. … 미안해, 말이 너무 심했어. 혼자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반성했어. 나를 받아줘. 사실 나도 네가 그리웠어. 멀리 있으면서도, 사실 너를 떠난 날부터 너만 생각했어. 이상하게 미워했어, 너무 심하게 말했던 것 같아. 이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맹세할게. 보통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을 드러내던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감독관이 되어 그들을 매질한다. 알렉스와 미쉘의 사랑은 핏빛 사랑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른다.
욕망의 혼돈적 발현
만일 이런 사랑을 위험하다고 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붉어지며 떠오르는 어떤 부정성들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에도 작용하는 어떤 욕망들의 변이 때문이기도 하다. 단 한 사람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어떤 욕망들은 기존의 형태로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소멸하거나, 다른 형태로 변질되고, 다른 욕망으로 전이하기도 한다. 앞서 제시했던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가장 가혹한 감독관이 되는 것도 이상주의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 스스로에게 들이밀던 엄격한 잣대를 한몸이 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상대에게 들이밀 때 발생하는 양상 중 하나일 테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사랑은 음식 혹은 식사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생활의 측면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상대를 향한 애정의 표출이다. 밥 먹었어, 밥 차려 놨으니까 이따가 먹어, 라면 먹고 갈래… 하지만 이런 연관성은 어느 일상적인 사랑에나 모두 해당되는 것이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렸을 때 본 어느 에로틱한 영화에서, 애인의 가슴께에 스파게티를 얹고 그것을 먹던 장면을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장면이 상대를 먹고 싶은 마음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후로 이 장면은 한 영화의 특이한 장면이 아닌 내적 필연성을 갖춘 특별한 장면으로 여기고 있다. “너를 먹고 싶어”는 현실에서도 종종 쓰이는 에로스에 대한 관습적인 표현이다. 또, 구강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행위 역시, 특수한 쾌락이겠지만 동시에 은유로 기능하기도 한다. 구의 증명에서 구가 담을 먹겠다고 했던 말이나, 담이 구의 시체를 뜯어먹는 장면도 꽤나 파격적으로 보였겠지만 이 역시 괜한 행동이 아니다. 상대를 먹는 것, 혹은 먹고 싶은 것은 상대와의 합일에 대한, 당신의 존재가 오래금 지속되기를 바라는, 특별한 선물을 나누고자 하는, 멀어져 가는 당신을 더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과 다름없다. 만일 내가 파우릭이었다면, 콜름의 손가락을 하나쯤 먹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발달단계와 리비도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그 원리를 얼마간 설명할 수도 있겠고.
서로를 바라보며 죽여버림
강한 사랑에 빠진 이들의 어떤 강한 열망이 그들의 사랑을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은 다시 그들의 열망을 강하게 만들었다. 굳이 사랑과 관련하지 않아도, 가장 강력한 열망을 지닌 이들의 종착역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우리의 사랑이 바다처럼 깊고 푸르고 또 잔잔하다고 느낀다고 말했고 나는 동의했다. 웃기게도, 그 말을 한 시기를 기점으로 우리는 미친듯이 싸웠다. 폭풍이 인다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우리는 한 주에도 두어 번 극단을 오갔다. 화는 많을지언정 그것을 밖으로 꺼내는 일 없이 삭이기만 하던 나였는데, 너한테는 매일처럼 화를 냈다.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네가 떠나갈까봐 불안하지만 네가 만족스럽지는 않아. 상대가 여전히 절대적인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굳건했는데,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또 싫었다. 거울에 비친 못 미더운 나의 얼굴을 괜찮다고 하는 너의 말, 못 미더운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너를 못 미더워하고 있었다. 화가 나서 잠도 못 잤다. 분노는 자연스럽게 폭력을 향했다. 폭력이 필요했다. 너를 향한 것이든, 나를 향한 것이든, 그리고 무차별적인 죽음 충동. 그러나 여전히 강력했던 에로스와 파토스, 그 뒤섞이는 느낌은 지금도 강력한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정주의 『화사집』 에 곧장 연결되게끔 배치되어 있는 ‘화사’와 ‘문둥이’가 충돌하고 또 결합하는 모양으로. 사랑이 이만큼씩이나 낙조의 분위기를 띠고 나면, 거기에는 슬픔도 그리움도 없다. 이 사랑이 핏빛을 떠오르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의, 사라지기 직전의 가장 붉게 빛나는 순간. 태양은 매일같이 뜨고 지지만, 그 색은 매일 다르며 어떤 날의 태양은 유독 붉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저물고, 눈에 남은 잔상과 우리에게 기억되는 모양. 끝과 가장 가까운 어떤 것, 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 그리움이나 슬픔을 연상케 하는 하늘의 분홍빛이나 새로이 시작되는 모험적인 어떤 것을 연상케 하는 파란색의 밤하늘이 아니라, 핏빛이어야만 하는.
더블 플라토닉 수어사이드
정사를 예찬했고 행했던 일본의 유명 작가 아리시모 타케오의 표현이다. 사랑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죽음 충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죽음은 사랑의 중대한 목적 중 하나인 합일 혹은 영원에 가까이 가는 것을 돕는다. 많은 부분에 있어 선취적이었던 이상, 그가 변동림-김향안-에게 고백 대신 건넨 말. “우리 함께 죽을까? 아니면 어디 먼 데 갈까?“ 그는 사랑에 있어서도 좀 앞서갔나 보다. 시작하는 단계에 그 끝을 예정하며. 끝은 어떻든 존재하고, 그것을 누군들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다가오는 끝이, 이별로서가 아니라 공통의 죽음으로라면. 사랑으로 죽음을 덮으면, 적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어떤 만족 속에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정사를 논하지 않아도 그렇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죽자는 약속을 뱉었다. 그것은 남겨진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세계의 슬픔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두 사람이 한날 한시에 자연사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만약에 이 행위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남겨진 이의 안락사 혹은 자살-다만 식음을 전폐하는 등의 보다 소극적인 의미에서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이조차도 권장할 수는 없을 텐데, 정사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혹은 사랑의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사는 곧 사랑의 성공이다. 포장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개인의 영과 육, 그리고 우리의 그것이 하나가 되는 유일한 방법, 현실에서의. 끝까지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접근할 수도 없는 영역. 남겨진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이다. 크게 세 가지의 시선이 있겠다. 우리도 좀 생각해 주지, 하는 주변인들의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시선, 멋모르는 젊은 천치들 혹은 아름다운 사람들로 보는.
Eden without eve
만약에 정사의 초월성을 부정해야만 한다면,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랑이 바다를 만나며 획득하는 초월성도 부정해야 한다. 결국에 죄다 포장 혹은 무의미한 의미 부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도 되는 일 아닌가. 사랑에 대한 모든 말들도 다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어떻든 사랑은 끝난다. 사람들은 제가 원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고 또 많은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아주 제자리로 돌아오는지는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더 소심해졌고 무엇이든 더 못 믿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 멋진 사랑을 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닌가. 괜찮나. 멋진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진짜로 멋진 사랑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우리, 대단했던 것 맞지? 당연히 물어보지 못했고. 한 번 높아진 눈은 여간해서는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난 세월만을 뒤쫓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난 주말, 그녀를 만났다. 어느 쪽으로나 많이 건강해진 것 같았다. 짧은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확신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도 그냥 뻔한 사랑 이야기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인이 있으면서 나를 불렀던 너나, 알면서도 좋다고 갔던 나나, 우린 모두 마음 속의 채워질 수 없는 빈 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사랑은 무척 멋진 사랑이었다고 기억하는 것.
I Got It Bad And That Ain’t Good
내가 그 사람을 잃은 후 사후적으로 도출해 낸, 망가진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관계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고 원체 무기력해서 그런지, 몹시 소극적인 것들이지만, 아무튼. 밝게 웃으며 자랑하는 아이를 보고 꼴사나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감을 증폭시키는, 불순한 목적 없는 자랑.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듯한 농담. 밝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나 영원에 대한 약속과 같은, 과장과는 미묘하게 다른 결의 그것들, 그리고 “Okay.”. 괜찮아요, 안 괜찮을 줄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거짓말.
그러나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나는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본다. 불협화음 속의 화음을 그렇게도 많이 만들어 내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또 무엇이 있는지. 진실에 기반한 예술. 집어치우자. 그런 차원에서 보면 랭보는 조현병 환자 이상은 못 되고, 우리는 프루스트의 기억력을 철저히 검증해야 하며 도스토옢스키가 앉아 있는 초월성의 왕좌를 무너뜨려야만 한다. 반대로 말해본다면.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언제든 두고 그려볼 수 있는 이상적인 내면 공간의 형성이며, 신성에의 근접, 도달 혹은 신성의 창조이다. 사랑은 창조의 궁극이다. 원래 이상하고 아픈 사람 둘이 만나서, 어딘가 깊은 곳을 향해 언제나 제 한몸 기꺼이 투신하고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사랑, 그래서 핏빛의, 찬란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당신에게는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지. 내게는 지나간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그들과 함께 쌓아 올렸던 것들, 모래성 혹은 바빌론 같은 것들이 떠오르고, 또 그것들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모습이 보인다. 가끔은 잘 가다듬어진 영상 같은 것이 보이기도 한다. 생활 혹은 꿈 속의 장면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언제나 눈에 익은 한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고, 커튼 새로 드는 빛,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지리한 시골길, 그녀와 내가 길을 걷다가 머리를 맞대고 웃고, 춤을 추다가 맨길가에 털썩 쓰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세상의 온갖 먼지같은 것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사랑은 어떤 형태로도 정의할 수 없다고 믿는다. 사랑은 대상으로서의 사람도 아니며 행위도 아니다. 리비도나 뇌 속의 신경과 호르몬을 비롯한 신경 전달 물질들의 화학 작용과 그 총체도 아니다. 사랑은 세상의 온갖 것들과 맞닿아 있다. 사랑은 언급한 것들 외의 모든 형태의 사랑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가능한 한 상위 영역의 그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스스로도, 타자에게도 사랑인 것을 사랑 아닌 것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사랑에 대한 모든 정의는 잠정적이다. 사랑은 정의되지 않는다.
무척 멋진 사랑
어떤 낭만적인 사람이라면, 이상적인 사랑 같은 것이 따로 있고 그런 류의 사랑을 최고선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좇아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생에 단 한 번, 대단한 사랑을 한 적이 있다. 나를 향한 부모님의 헌신을 포함해서, 그밖의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랑들의 대부분이 뻔하거나 시시하게도 느껴질 만큼. 타자의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그것을 체계화할 수는 없지만, 분명 사랑의 모양은 다양하고 그것은 모종의 기준에 따라 유형화할 수도 있겠고, 그 기준 하의 내가 경험치 못한 사랑에 대해서도 충분히 강한 인상과 감흥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멋진 사랑들. 릴케가 짚었던, 상대를 소유할 수 없음에도 굴하지 않고 고통받을수록 더욱 거대한 사랑으로 화했던, 위대한 여인들의 그것들. 정말 어떤 사랑은 분명히 위대해서, 혹자가 사랑을 동경한대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혹은 비정상적으로 볼 것은 없다. 사랑을 건설 혹은 경영적인 측면에서 한 인간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사랑은 실제적인 성취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나아가 사람이 가장 유연해지는 때는, 그래서 가장 많은 변화가 발생하는 때는 사랑의 득실과 관련한 때라고 생각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글씨체와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게 한다. 애인을 따라 여태껏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먼 나라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하룻밤새 내릴 수도 있다. 죽어가던 사람을 살게 할 수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며 정사 혹은 자살로 이끌기도 한다. 사랑이 연인 간의 사랑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사랑은 인간에게 작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핏빛 자오선
사랑의 유형이 나눠지듯이, 사랑의 성취의 방향도 그것이 속한 유형과 경우에 따라 상이하다고 본다. 앞서 개인적인 얘기를 꺼냈던 것은 그 사랑을 전후로 어떤 사랑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그 사랑이 내가 이 글에서 짚으려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들 중에서 긍정성보다 부정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사랑들, 그중에서 사랑에 제 몸을 투신하여서 제 몸으로 밀고 나아간 사람들의, 가장 먼 곳까지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랑들. 나는 그들이 미적 성취를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오직 간접적으로만 접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어떤 작품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경우, 그것의 작품성과 미적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잣대를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다루는 작품들은 일련의 이유로 인해 일반적 의미에서의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회와 개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 세계의 정도를 벗어난 인물들, 그들의 편협한 시야와 유치한 언행, 정도가 높아질수록 희박해지는 보편성과 개연성. 그러나 세계의 밖에 위치한 자들, 호모 사케르로서의 그들을 대할 때, 아우슈비츠 이후의 미학 이론에 소외된 자 혹은 소수자를 편입시켰던 것과 같이, 일반론적인 잣대를 대고 재는 일 역시 또 하나의 못 할 일은 아닌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 그들이 어디까지 갔느냐. 세계의 두께는 다양성에 많은 몫을 기댄다. 봉건적 시간관 하의 흘러가는 일직선상의 시간이 있고, 많은 사람들은 한델 향해 나아간다. 앞만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만이 세상에 있다면 우리는 질식해 언젠가 졸도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정한 궤도 하에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초인과 정복자, 영웅과 악당이 필요하다. 더는 걸어갈 수 없을만큼 지친 순간, 땀흘리며 걸어가는 옆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가 나를 바라보며 웃는, 타자와의 조응,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발전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세계의 가능성이 진정한 가능성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우리에게 보다 많은 자유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특별한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핏빛 사랑론
앞서 사랑을 이야기할 적에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한다’고 표현한 것과 달리,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대부분의 사랑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려 하는 것, 혹은 보여주려 하는 것, 불가능성에 대한 불복,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체, 기어코 그곳에 가닿으려는 치열한 사투, 이는 내가 지닌 예술적인 것 혹은 미학적인 것,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 중 하나이다. 에로스와 파토스와 타나토스, 가장 강력한 충동과 욕망이 뒤섞이는 곳. 눈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의식할 수밖엔 없는 랭보의, ’나는 아름다움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단언에 근접한 영역, 그곳에서 우리는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본다. 볼 수 없는 것, 여전히 볼 수 없더라도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꿈과 무의식을 경유하지 않고도 존재와 비존재가 뒤섞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의 발자국이 보였다고 믿는다. 이것이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 그 사랑은 반드시 어두워야 한다. 서로의 정신에 복구할 수 없는 커다란 타격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의 메인 테제로서의 사랑과 분간할 수 없는 삶, 그러니까 삶이, 삶과 죽음이 일직선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사랑의 건설적인 힘과 파괴적인 힘이 사실 같은 곳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소위 병적인, 비정상성이 내포되어야 한다. 인간의 한계와 인간이라는 심연, 가장 동떨어져 있는 두 가지의 문제가 맞닿아 있는 곳. 내가 그들이 미적 성취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검붉은빛, 색도 아니고 빛이어야 한다. 핏빛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은 세계의 틈을 열어주지 않는다.
우리라는 세계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이 원래부터 사랑 예찬론자였는지는 중요한 것은 못 된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들을 붙잡는 것들,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주변인으로부터 느꼈던 정과 사회적이고 일반적인 생활에 대한 애정과 관습과 같은, 먼 세계로부터 떠나는 것을 붙잡는 것들, ‘정과 생활’로 통칭되는 것들을 무시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탕아가 더 높은 것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좇아 그밖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가 일종의 낙원처럼 묘사되는 가정을 떠나, 나병 환자를 안아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마지못해 떠난 사람들은 언제나 돌아갈 날을 염두에 두게 되고, 언제나 걱정이 앞선다. 더 멀리까지 가도 괜찮을까,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위해 고갱은 무엇을 버렸는가.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철저히 무시할 것. 그렇게 떠나고 나면, 좋든 싫든 세상에서 오직 중요한 것은 너와 나, 우리밖엔 없다. 오직 두 사람만이 있는 세계. 그 좁은 세계 안에는 무엇보다도 넓은 세계가 있다, 그들은 그렇게 믿게 된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소년 소녀가 세상도 의리도 잊어버리고 생명조차 무시하고 육체를 파괴해서라도 영혼을 녹여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정과 열을 바치며 서로가 즐겼다.”
삶의 한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의 세상이 되고 나면, 그들에게는 더이상 외부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제3자는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다. PDA는 예사, 미친 사람처럼, 혹은 아이처럼 사람들이 지나는 길을 뛰어다니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아이처럼. 아이가 아닌 사람이 아이처럼 굴 수 있다는 것, 그래도 괜찮다는 특권을 선사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나의 모든 것인 너로부터. 나아가, 서로의 아이같은 모습을 상대가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 권능에도 비견된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들을 보고 미친 사람으로 인식할 줄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쾌락을 선사한다.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는 착각. 드물게 밤하늘이 파랗거나 큰 달이 뜨면, 세상도 그들을 위해서 아름답기로 작정했다며 즐거워한다. 둘레세계 내의 완전성은 물론 세계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지만, 그들의 세계관에는 강한 영향을 미친다. 세계의 모든 것으로부터 낭만적인 인상만을 받는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있으므로,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진실이며 우리는 세계와의 화해를 이루어냈다고 믿는다. 그들은 서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나가 되고 있고 머잖아 하나가 될 거라고 믿는다. 따라 증폭되는 외부 세계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현현하는 이데아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 자족성을 획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것을 서로에게 건넨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단점과 결핍,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네가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데. 네가 게워낸 것을 받아 내 입에 넣는다. 고마워, 잘 먹을게. 입과 입 사이를 오가는 따뜻한 물 한 모금. 흘리면 핥아먹는다. 우리는 번식한다. 나의 모든 것이 수용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때의 쾌락, 관계에 대한 욕망은 곧 수용과 인정에 대한 욕망과 같으므로. 세상은 우리의 것, 원체 믿지도 않던 신의 권능을 인식하고, 그것을 얼마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존재의 층위는 격상한다. 천사가 되었다는 기쁨을 느낀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는지를 매일같이 점검하며, 이전보다 한층 넓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 좁아지고 있는 세상을 모른체하면서, 그들은 창조적, 퇴폐적, 묵시록적, 온갖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아깝지 않으며 되려 모자랄 만큼의 감정을 느낀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환상이 환각이 되어 현현한다. 언젠가 스쳐지났던 예감, 신화와 전설, 심지어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과거의 이야기들, 잃어버린 신화 속의 시인이 깨어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또 전설 속의 거인들을 피해 돌아다니며 즐거워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낙원 혹은 천국이리라고 믿었지만, 이 장면 역시 언젠가 잃어버릴 신화일 줄도 알았다. 그러나 신화 속의 인물이 되었다는 것 역시 세계를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만 할 뿐이다. 모든 것이 과잉되고 과장되었으며, 또 일시적일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멈출 줄도 몰랐다. 빗물처럼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받아먹으며 몸집을 불렸다. 바늘만 콕 찔러도 쉽게 터져버리게끔.
복낙원
그녀는 어느날 내게 천국과 낙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었다. 우리는 어느 쪽이나 신을 믿지 않았고 따라서 그 질문은 이미 굳건히 존재하는 천국과 낙원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내가 천국과 낙원이라는 지난 세계의 잔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같았다. 그리고 어느쪽이 더 좋은지 답변하기 위해서는, 천국과 낙원을 상상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더 정확한 질문이라고 할 것이 있다면, 천국과 낙원을 상상할 수는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백의, 구름, 천사, 검은 눈동자, 그리고 종소리? 일견 모두 좋아보이기만 하는 천국과 낙원인데, 그것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천국과 낙원 사이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좁혀질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천국에의 도달가능성, 그것은 없다. 조지 오웰은 말했다. 성경에서조차 천국은 좋다고만 하지, ‘종소리’와 같은 겉도는 표현 외에는 어떤 묘사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고. 천국을 생각해 본다. 무엇이 보이겠나? 잘 그려지지 않는데, 틀에 박힌, 인습적인 따분한 생활만이 눈에 챈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천국에 대한 정의와 그것을 가능케 할 어떤 공통적인 인식만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잘은 모르겠으나, 대충 좋은 곳, 절대적으로 좋은 곳, 좋기만 한 곳. 조지 오웰은 또 말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로만 가득찬 세계가 있다면, 우린 긍정성의 물결 속에서 머잖아 질식해 죽을 거라고. 천국이라는 단어에 씌인 홑겹 아름다운 무늬의 비단을 걷고 나면 거기에는 온통 흰빛 맑은 강물같이 따분한 세상이 있겠다고 믿는다. 세상의 모든 역설 중의 가장 거대한 역설. 오웰의 천국론을 읽기 전에도 천국은 낙원도 못 되며 또 말해 좋은 곳도 못 된다고 줄곧 믿고 있었다. 언제나 낙원만을 원했지. 추방의 가능성이 있는 곳, 뱀이 종종 보이고 또 무화과나무 혹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 당분간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나를 버릴지도 모르는 어머니, 혹은 그녀를 닮은 누군가가 있는 곳. 그렇더라도 천국보단 낙원이 좋아보였다. 또 하나의 거짓 신화, 낙원에의 꿈을 꾸고 그곳을 향한 하늘길들을 찾아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기도 했다. 낙원은 상대성을 지닌 이상적 공간이다. 파랑새적 관점으로 본다면 현실을 낙원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온세상이 낙원이면 낙원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사라진다. 낙원엔 이브, 뱀과 무화과와 같이, 아주 좋은 것과 아주 나쁜 것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낙원을 복각했다.
최저낙원
“우리 사이에는 ‘왜’라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떤 낙원에 있을 적을 생각한다. 모든 것은 당연했다. 너무 당연해서, 너의 모든 것이 내 팔이 있을 자리에 팔이 붙어있듯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네가 잠들어 있을 때 뱉고 마쉬는 숨의 속도를 안다. 네가 악몽을 꿀 때면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도 없던 것들이 심심찮게 일어나던 세계. 우리는 우리를 서로의 자연에 맡겼다. 우리는 아이처럼 유치해졌다.
최근 구의 증명을 다시 읽으며 든 생각 중 하나도 몹시 유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치할 수밖엔 없지 않은가. 그들은 세계를 재정립했다. 그리고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세계 밖에 놓였다는 말과 같다. 그들은 소외된 인물이 된다. 그들은 그 세계의 첫 사람들, 그들이 세운 기준은 얼마나 빈약할지. 성숙한 사람이란 모든 외적인 측면에서의 유치한 면모를 지워낸 사람일 텐데, 소외된 이들은 소외된 채 살아오는 동안 어떤 측면에서는 탁월한 성숙도를 획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과 몸을 맞대고 살아가며 그들의 모난 면을 닳고 깎을 사람들이 아주 적거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던 속마음을 꺼내보일 때. 거기에 무언가 좋고 아름다운 것만 있으리라는 생각은 철저한 착각이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 거기에 있는 것은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구의 증명, 소니 빈 이야기
구의 증명에는 ‘소니 빈 이야기’가 등장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연인이 바닷가의 동굴에 살며,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그들이 많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또 많은 아이들을 낳고. 소외된 이들이 형성한 하나의 코뮌. 만일 이들이 유치하기만 했다면, 세계는 조금 더 조각난 형태였어도 좋았을 것이다. 지나친 사랑이 유치하기만 했다면, 누구도 그것을 지나치다고 평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 그들이 거주하는 그곳은 치외법권으로 비단 인습만이 아니라 법의 영향력도 닿지 않는다. 소니 빈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과 소설 속에서 구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 내의 완전성과 외부를 향한 배타성, 사랑에 내재해 있는 존재론적인 틈, 사랑을 어느 지점까지 밀고 나아갔을 때 드러나는 사랑의 한계, 그것은 곧 세계의 한계이자 세계의 틈이다. 소니 빈 이야기는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이라는 심연, 그것이 맞닿는 원리와 그 지점을 설명하는 비극적 우화이다.
Misfit’s Anthem
두 사람이 세상의 전부인데 우리 밖의 무언가가 정말 중요할까? 우리는 애인이 생겼다며 친구들을 손절하다시피 냉대하는 친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낭만을 좇아 이세계로 떠나는 청춘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시.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미안하다며 연락하고는 만나면 지난 애인의 욕을 한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게 된다. 앞서의 완전한-혹은 완전해 보이는-사랑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다른 어떤 좋은 것이 아니라 과잉, 과장, 환상이었다. 또, 멋진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은 순해지거나 선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하다. 다만 제 지닌 많은 욕구와 욕망의 많은 몫을 제 애인으로부터 취할 수 있고 그 애인과의 관계는 세상에 둘도 없을, 어머니와의 관계보다도 더 값진 관계이므로 그들은 의식적인 노력을 들여 겨우 만족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채워내지 못한 욕망들을 억누르거나 모른체하면서, 혹은 그저 상대에게나 겨우 숨겨내면서. 그들은 제 사랑과 세계의 완전성에 대한 인식의 허위성을 감지한다. 조응하던 둘레세계와 외부 세계의 연관성이 사라진다. 그들이 달을 향해 쏘았던 수많은 화살은 달에 닿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그들을 향해 빗발치고 있다. 남들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을 그렇게 즐겁게 만들어주었던 것이 이제는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한다. 사랑은 어느 지점까지는 오직 좋고 순하기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그 사랑에는 균열이 생긴다. 사랑에 대한 흔한 비유 중 하나, 공중누각. 실재에 기반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실재.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으로 이끄는 것들 중 ‘필연적인’ 것은 아주 적거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오해와 착각을 비롯해, 모든 인식의 실패로부터 기인한,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성가와 같다. 사랑은 창조적이다.
무력한 천사의 비명
세계를 좁힘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던 그들의 사랑은, 이제는 일반적인 사랑의 발전을 따르게 된다. 서로의 향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나 높은 정합성을 보인다고 여겨지는 미래에 대한 약속과 같은 것들이 아니고서는 사랑은 발전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고착 상태에 빠졌다. 점점 서로가 아닌 것들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아니, 차라리 철저히 다른 것만 보게 된다면 그들은 악무한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를 철저하게 사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많은 변화들. 그들이 바꾼 모든 것들은 오랜 시간과 반복의 지탱 없이도 새로운 관성을 형성해내고, 그들은 그들을 생각한다. 너무 지겨워서, 끔찍하게 여겨질 때까지.
은빛 다리 위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고
지긋지긋한 확률론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형태의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상기한 소외 외에도 불건전한 애착 관계를 비롯한 각종 정신적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랑과 감사’로 대표되는 건강한 대인 관계와 튼튼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 이런 사랑을 했다는 것을 듣거나 본 적이 있나. 적어도 내게는 없다. 또, 애착 관계에 대한 이론이 보여주듯이, 불건강한 한 인물은 마찬가지로 불건강한 인물을 찾아내는 것에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1991)>을 생각한다. 눈이 멀어가는 미쉘은 다리가 부러진 알렉스를 발견했다. 그들은 사랑을 키워나가다가, 점점 버틸 수 없는 고통에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알렉스, 따라서 넘어지는 미쉘. 그들은 포개진 채로 키스를 한다. 서로가 더 얽매였다며, 좋다며 웃고는 다시 키스, 숨이 막혀가는지도, 맥박이 옅어진지도 모르고. 우리가 사랑이라면서 지껄였던 말들, 그 속에 숨겨졌던 비수. 서로 눈이 멀어, 곧이곧대로 삼키고는 나중에서야 알아차리고서 하는 말. 너는 네 열등감을 내게 덮어씌웠어. 불치병같은 너의 자기연민. 그런 거지같은 환상은 어디 창녀들한테나 풀지 그래? 지긋지긋한 가스라이팅, 또 시작이다. 그럼 어디 혼자 살아보지 그래? 너는 나 없으면 하루도 못 버틸걸. … 미안해, 말이 너무 심했어. 혼자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반성했어. 나를 받아줘. 사실 나도 네가 그리웠어. 멀리 있으면서도, 사실 너를 떠난 날부터 너만 생각했어. 이상하게 미워했어, 너무 심하게 말했던 것 같아. 이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맹세할게. 보통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을 드러내던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감독관이 되어 그들을 매질한다. 알렉스와 미쉘의 사랑은 핏빛 사랑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른다.
욕망의 혼돈적 발현
만일 이런 사랑을 위험하다고 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붉어지며 떠오르는 어떤 부정성들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에도 작용하는 어떤 욕망들의 변이 때문이기도 하다. 단 한 사람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어떤 욕망들은 기존의 형태로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소멸하거나, 다른 형태로 변질되고, 다른 욕망으로 전이하기도 한다. 앞서 제시했던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가장 가혹한 감독관이 되는 것도 이상주의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 스스로에게 들이밀던 엄격한 잣대를 한몸이 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상대에게 들이밀 때 발생하는 양상 중 하나일 테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사랑은 음식 혹은 식사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생활의 측면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상대를 향한 애정의 표출이다. 밥 먹었어, 밥 차려 놨으니까 이따가 먹어, 라면 먹고 갈래… 하지만 이런 연관성은 어느 일상적인 사랑에나 모두 해당되는 것이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렸을 때 본 어느 에로틱한 영화에서, 애인의 가슴께에 스파게티를 얹고 그것을 먹던 장면을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장면이 상대를 먹고 싶은 마음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후로 이 장면은 한 영화의 특이한 장면이 아닌 내적 필연성을 갖춘 특별한 장면으로 여기고 있다. “너를 먹고 싶어”는 현실에서도 종종 쓰이는 에로스에 대한 관습적인 표현이다. 또, 구강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행위 역시, 특수한 쾌락이겠지만 동시에 은유로 기능하기도 한다. 구의 증명에서 구가 담을 먹겠다고 했던 말이나, 담이 구의 시체를 뜯어먹는 장면도 꽤나 파격적으로 보였겠지만 이 역시 괜한 행동이 아니다. 상대를 먹는 것, 혹은 먹고 싶은 것은 상대와의 합일에 대한, 당신의 존재가 오래금 지속되기를 바라는, 특별한 선물을 나누고자 하는, 멀어져 가는 당신을 더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과 다름없다. 만일 내가 파우릭이었다면, 콜름의 손가락을 하나쯤 먹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발달단계와 리비도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그 원리를 얼마간 설명할 수도 있겠고.
서로를 바라보며 죽여버림
강한 사랑에 빠진 이들의 어떤 강한 열망이 그들의 사랑을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은 다시 그들의 열망을 강하게 만들었다. 굳이 사랑과 관련하지 않아도, 가장 강력한 열망을 지닌 이들의 종착역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우리의 사랑이 바다처럼 깊고 푸르고 또 잔잔하다고 느낀다고 말했고 나는 동의했다. 웃기게도, 그 말을 한 시기를 기점으로 우리는 미친듯이 싸웠다. 폭풍이 인다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우리는 한 주에도 두어 번 극단을 오갔다. 화는 많을지언정 그것을 밖으로 꺼내는 일 없이 삭이기만 하던 나였는데, 너한테는 매일처럼 화를 냈다.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네가 떠나갈까봐 불안하지만 네가 만족스럽지는 않아. 상대가 여전히 절대적인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굳건했는데,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또 싫었다. 거울에 비친 못 미더운 나의 얼굴을 괜찮다고 하는 너의 말, 못 미더운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너를 못 미더워하고 있었다. 화가 나서 잠도 못 잤다. 분노는 자연스럽게 폭력을 향했다. 폭력이 필요했다. 너를 향한 것이든, 나를 향한 것이든, 그리고 무차별적인 죽음 충동. 그러나 여전히 강력했던 에로스와 파토스, 그 뒤섞이는 느낌은 지금도 강력한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정주의 『화사집』 에 곧장 연결되게끔 배치되어 있는 ‘화사’와 ‘문둥이’가 충돌하고 또 결합하는 모양으로. 사랑이 이만큼씩이나 낙조의 분위기를 띠고 나면, 거기에는 슬픔도 그리움도 없다. 이 사랑이 핏빛을 떠오르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의, 사라지기 직전의 가장 붉게 빛나는 순간. 태양은 매일같이 뜨고 지지만, 그 색은 매일 다르며 어떤 날의 태양은 유독 붉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이 저물고, 눈에 남은 잔상과 우리에게 기억되는 모양. 끝과 가장 가까운 어떤 것, 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 그리움이나 슬픔을 연상케 하는 하늘의 분홍빛이나 새로이 시작되는 모험적인 어떤 것을 연상케 하는 파란색의 밤하늘이 아니라, 핏빛이어야만 하는.
더블 플라토닉 수어사이드
정사를 예찬했고 행했던 일본의 유명 작가 아리시모 타케오의 표현이다. 사랑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죽음 충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죽음은 사랑의 중대한 목적 중 하나인 합일 혹은 영원에 가까이 가는 것을 돕는다. 많은 부분에 있어 선취적이었던 이상, 그가 변동림-김향안-에게 고백 대신 건넨 말. “우리 함께 죽을까? 아니면 어디 먼 데 갈까?“ 그는 사랑에 있어서도 좀 앞서갔나 보다. 시작하는 단계에 그 끝을 예정하며. 끝은 어떻든 존재하고, 그것을 누군들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다가오는 끝이, 이별로서가 아니라 공통의 죽음으로라면. 사랑으로 죽음을 덮으면, 적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어떤 만족 속에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정사를 논하지 않아도 그렇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죽자는 약속을 뱉었다. 그것은 남겨진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세계의 슬픔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두 사람이 한날 한시에 자연사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만약에 이 행위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남겨진 이의 안락사 혹은 자살-다만 식음을 전폐하는 등의 보다 소극적인 의미에서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이조차도 권장할 수는 없을 텐데, 정사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혹은 사랑의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사는 곧 사랑의 성공이다. 포장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개인의 영과 육, 그리고 우리의 그것이 하나가 되는 유일한 방법, 현실에서의. 끝까지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접근할 수도 없는 영역. 남겨진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이다. 크게 세 가지의 시선이 있겠다. 우리도 좀 생각해 주지, 하는 주변인들의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시선, 멋모르는 젊은 천치들 혹은 아름다운 사람들로 보는.
Eden without eve
만약에 정사의 초월성을 부정해야만 한다면,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랑이 바다를 만나며 획득하는 초월성도 부정해야 한다. 결국에 죄다 포장 혹은 무의미한 의미 부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도 되는 일 아닌가. 사랑에 대한 모든 말들도 다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어떻든 사랑은 끝난다. 사람들은 제가 원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고 또 많은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아주 제자리로 돌아오는지는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더 소심해졌고 무엇이든 더 못 믿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 멋진 사랑을 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닌가. 괜찮나. 멋진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진짜로 멋진 사랑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우리, 대단했던 것 맞지? 당연히 물어보지 못했고. 한 번 높아진 눈은 여간해서는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난 세월만을 뒤쫓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난 주말, 그녀를 만났다. 어느 쪽으로나 많이 건강해진 것 같았다. 짧은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확신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도 그냥 뻔한 사랑 이야기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인이 있으면서 나를 불렀던 너나, 알면서도 좋다고 갔던 나나, 우린 모두 마음 속의 채워질 수 없는 빈 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사랑은 무척 멋진 사랑이었다고 기억하는 것.
I Got It Bad And That Ain’t Good
내가 그 사람을 잃은 후 사후적으로 도출해 낸, 망가진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관계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고 원체 무기력해서 그런지, 몹시 소극적인 것들이지만, 아무튼. 밝게 웃으며 자랑하는 아이를 보고 꼴사나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감을 증폭시키는, 불순한 목적 없는 자랑.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듯한 농담. 밝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나 영원에 대한 약속과 같은, 과장과는 미묘하게 다른 결의 그것들, 그리고 “Okay.”. 괜찮아요, 안 괜찮을 줄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거짓말.
그러나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나는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본다. 불협화음 속의 화음을 그렇게도 많이 만들어 내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또 무엇이 있는지. 진실에 기반한 예술. 집어치우자. 그런 차원에서 보면 랭보는 조현병 환자 이상은 못 되고, 우리는 프루스트의 기억력을 철저히 검증해야 하며 도스토옢스키가 앉아 있는 초월성의 왕좌를 무너뜨려야만 한다. 반대로 말해본다면. 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언제든 두고 그려볼 수 있는 이상적인 내면 공간의 형성이며, 신성에의 근접, 도달 혹은 신성의 창조이다. 사랑은 창조의 궁극이다. 원래 이상하고 아픈 사람 둘이 만나서, 어딘가 깊은 곳을 향해 언제나 제 한몸 기꺼이 투신하고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사랑, 그래서 핏빛의, 찬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