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사랑, 그리고 나카모리 아키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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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민준

                                       

지독한 짝사랑을 몇 번 겪었다. 사실 짝사랑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마음이 향해 있었건만 용기가 부족했던 우리는, 차마 마지막 한 발자국을 떼지 못하고서는 그저 그 무엇도 아닌 채로 서서히 멀어졌을 뿐이다. 차라리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연소돼 차가워진 상태로 내던져졌으면 좋았으려만. 무심한 새벽, 책상 앞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며 지금도 묘한 관계로 이어져 있는 우리의 연결망에 대해 생각해 본다. 왜 나는 당신과의 아무것도 아닌 그 추억들을 아직까지도 붙잡아 두고는 멘솔 향 전자담배의 연무에 투사하여 허공 속으로 내뿜고 있는지. 뻐끔 뻐끔.

부조리와 안티-클라이맥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미완성된 사랑의 상처로 고통받는 인간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점에 부단히 깊은 안도와 연대감을 느낀다. 그런 맥락에서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의 <Crimson(1986)>은 나의 오랜 벗이요 동지이다. 2019년 겨울 연남동의 김밥레코즈 매장 앞에서 디제이 하세가와 요헤이가 개인 소장하던 레코드를 판매할 때 오리지널반을 덥썩 들고 와 아직도 애지중지 여기고 있다. 당시 고작 2만원에 구했던 레코드가 작년 서울 레코드 페어 현장에서 9만원(!)에 거래되는 것을 보고 잠시 판매의 유혹에 빠지긴 했지만.



아키나가 그녀의 정규 10집을 통해 그려내는 인간상은 어둡고 처량하다. 청승맞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겠다. 툭하면 술에 취해 흘러간 옛 연인을 그리고, 이미 임자가 있는 누군가에 대한 연모의 길에 된통 빠져버리기 십상이다.


薬指のリングより
人目忍ぶ恋選んだ
強い女に見えても
心の中いつも
切なさに揺れてる


빛나는 반지보다는
남의 눈을 피하는 사랑
강인한 여자처럼 보여도
마음속은 언제나
애절함에 흔들리고 있어


<OH NO, OH YES! - Nakamori Akina (Crimson, 1986)>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자각하면서도 이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내면은 어찌나 모순적인가. 그녀의 사랑 또한 순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대담하고도 위태로운 사랑 이야기의 틀에 내던져진 화자는 자신의 이성과 본능 사이 그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이어나가고, 사랑을 행했다는 사실은 스스로에 의해, 또 나의 감정이 옳지 못한 것이라며 손가락질하는 규범들에 의해 숱하게 부정된다. 결국 화자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하는 일련의 감정 덩어리와 새벽의 고독 뿐이다.

사랑. 감정이라기보다는 충동에 가까운 그것은 심연 깊이 숨어있다가도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면 비로소 강렬해진다. loonatic이란 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오리콘은 이 앨범의 타이틀 ‘Crimson(심홍)’을 노을진 바다와 하늘의 색, 입술의 색, 그리고 애프터 파이브 드레스의 색이라고 묘사했다. 어둠에 몸을 의탁한 인간은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어 각자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격정적인, 숨기려하면 할수록 명징해지는, 어두컴컴한 암실의 문을 열고나서야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내면의 그림자. 이에 발맞춰 화자는 온갖 가식이나 도덕의 틀을 벗어던진 채 자신의 혼란한 감정만을 있는 그대로 노래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무언가에 대해. 그녀는 완전히 망가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다소곳이 드러내고 달빛이 그녀의 애수 어린 얼굴을 내비친다.


그녀가 아니면 이 앨범을 다른 누가 노래했을까. 마츠다 세이코松田 聖子는 지나치게 발랄하고, 안리杏里는 펑키하며, 타케우치 마리야竹内 まりや의 보컬은 썩 젊지 못하다. 미드 템포의 발라드 트랙 위에 그녀는 회한과 순수, 관능을 절묘하게 뒤섞은 읊조림을 쏟아내고 연약함이라는 표상 안에 분명한 강단을 부여한다. 실제로 아키나 자신 또한 수줍음은 많았지만 신인 시절부터 무대 의상과 소품, 음악의 방향성까지도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소위 ‘기존쎄’ 캐릭터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앨범에서 더욱 아키나 그녀의 내면 그대로를 느낀다. 그녀의 자살 기도 사건은 앨범 발매로부터 3년이 흐른 1989년의 일이지만, 이전부터도 그녀는 수 차례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원했고 이로 인해  <Crimson> 앨범의 제작은 그 과정과 불가분에 놓이는 숙명을 부여받았다. 자신의 목숨을 저버리는 자는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貴方の心の海に
浮かんでる 無人の島
見知らぬ花が咲いた
遥かな愛の影

당신의 마음의 바다에
떠 있는 아무도 없는 섬
낯선 꽃이 피어있네
아득한 사랑의 그림자


<Ekizotika - Nakamori Akina (Crimson, 1986)>


실패한 사랑은 결코 술자리에서의 좋은 안주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나마 대차게 고백했다가 까이기라도 했다면 조롱과 위안의 대상이라도 될 수 있지, 그것이 묘한 미완의 상태로 잔존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도 인간 세계에는 맹목적으로 감정을 쏟아낼 수 있도록 설계된 우회로가 존재한다. <Crimson>은 그녀 자신의 그림자에 대한 자전적 성찰임과 동시에 모순된 사랑의 고통을 겪어내고 있는 모두를 위한 목소리였을 것이다. 나 또한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나의 그림자를 남몰래 나카모리 아키나에게 투사하고, 익명의 독자에게 내던지는 이 텍스트에 투사하며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이리저리 매만진다.

사무치게 그리우면서도, 나는 당신과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은 조금 두렵다. 그 때와는 달라진 지금의 나를 당신이 본다면, 그리고 지금의 당신을 내가 본다면 서로 되려 실망하지는 않을까.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아름다운 동화가 깨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존재한다. 당신을 떠올리며 아직까지도 마음 깊이 아파할 수 있는 까닭은 필시 그 시간이 미완의 형태로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아름답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손에 닿지도 않는 그것은, 완성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기에 비로소 아름답다. 냉혹한 이성주의와 냉철한 이해관계 사이에서 권태로운 산문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비참하고도 아름다운 운문적 운율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사랑, 그것도 미완의 사랑뿐이다. 위스키를 홀짝이고 멘솔 향 전자담배를 입에 머금는다. 뻐끔 뻐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