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우리 안에
WEBZINE
WEDITOR 박지수
공포는 이성 사이 공백에서 시작한다. 일상을 구성하는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이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향해 공포심을 느낀다. 미지의 영역을 채우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는 원하지 않아도 가장 끔찍한 상황까지 상상하게 하여 공포심을 배가한다. 이성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벗어나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주도권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공포 영화의 문제는 이성 사이 공백이라는 공포의 전제에서부터 생긴다. 기록 영상의 몽타주로서 영화는 물리적인 삼차원의 공간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포 영화가 선택할 방안은 공포의 대상을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공포의 대상을 스크린에 보여줄 때 이 대상은 실사적인 공간에서 물리적인 질감과 움직임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게 된 이상, 이성 사이 공백을 채웠던 두루뭉술한 상상과 그에 따른 주관적인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흐려지게 된다. <놉(2022)>의 해파리 생물체가 등장해버린 순간 <놉>이 더 이상 공포 영화가 아니라 서부극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특수분장과 포토샵으로 기괴하게 만들어낸 귀신이나 크리처도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진다. 이 때문에 ‘보여주는 공포’는 점프 스케어나 고어적 연출에 의한 물리적인 거북함에 의존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어떤 연출가들은 이성 사이의 공백과 그에 따른 공포심을 이용한다. 가령 공포의 실체가 악마일 때 스크린에 CG 처리된 악마의 실체가 나온다면 관객은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악마가 지니는 종교적 아우라가 퇴색된 시대에 그의 존재는 공포심을 자아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컨저링> 시리즈나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 등 많은 공포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공포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신 공포의 대상이 자아내는 괴현상으로 공포심을 자극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죠스(1975)>에서 상어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나 <사이코(1960)>의 샤워 살인 장면에서 살인자 대신 칼과 비명을 지르는 여성만이 등장하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구현되지 않은 공포의 대상은 분명 효과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한 지금까지도 구연동화 형식의 괴담이 효과적인 공포 매체인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공포스러운 현상은 일어났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원초적인 공포심을 느낀다.
하지만 위와 같은 공포의 구현 또한 역사가 누적됐다. 우리에겐 공포와의 새로운 공존이 필요하다. 스크린 내 구현이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이 아닌, 물리적으로 영화를 보기 힘들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공포의 대상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공포심을 자아낼 방법이. 이는 최근 공개된 공포 영화들이 나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과도 연관이 있다. <유전(2018)>은 흥미로운 연출에 비해 노골적인 잔인함, 무력한 재난적 상황과 같은 장르 관습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실망스러웠다. <겟 아웃(2017)>, <비바리움(2019)>은 인간의 근원적 공포보다 관객이 살면서 축적해 온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공포 장르로 보기는 어렵다.
괴담, 공포 게임, 코즈믹 호러 팟캐스트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공포를 접하면서 신박한 공포심을 찾은 결과, 현재 내가 도착한 공포의 이데아는 만화다. 그림을 통해 현실을 구현하는 만화는 화자와 세상 사이의 거리에 대한 극단적인 주도권을 갖는다. 극사실체로 현실을 묘사하는 동시에도 과장된 표정 묘사와 움직임, 다양한 효과음, 그리고 주관적인 배경 묘사를 통해 완전히 화자의 시선에서 재구성된 현실로 공간을 꾸밀 수도 있다. 또한 만화는 사실적인 현실을 구현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더 다양한 공포 소재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겨운 악마와 귀신, 사이비 종교와 여성 혐오 연쇄 살인마는 안녕!)
그중 제일은 이토 준지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공포의 대상, 이토 준지 특유의 그림체를 통해 연출하는 공포의 현실. 섬세한 흑백의 펜선으로 그려낸 이토 준지의 세계관은 뒤틀린 표정과 섬뜩한 톤칠로 두렵고도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이토 준지의 기묘한 상상력이 비사실적 현실로서 만화 세상에 더해져 상상도 못한 존재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토 준지의 단편 「목매다는 기구」에는 수십 개의 거대한 사람 얼굴 풍선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제 얼굴의 주인을 찾아 풍선 줄에 목을 매단다. 「아미가라 단층의 과거」에서는 단층 지대에 인간의 형체를 한 구멍이 숭숭 뚫리자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꼭 맞는 구멍에 들어가 죽어 나간다. 예상치 못한 공포 소재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이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공포의 대상으로 제시할 때 많은 영화는 그 대상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한다. 공포의 비이성과 이를 해결할 이성의 대결 구도에서 공포 영화는 두 가지의 엔딩만을 갖는다. 미지의 대상을 해석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공포적 상황을 해결하는 해피 엔딩이나 그런 노력이 모두 실패하는 파멸 엔딩이다. <놉>에서는 OJ(대니얼 컬루야 분)가 해파리 괴물을 길들이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공포 상황이 종결되고, <유전>에서는 피할 수 없는 가족력에 굴복하거나 희생당함으로써 그레이엄 가족은 파멸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대결 구도의 전제하에 많은 공포영화는 공포 상황에서도 침착한 피해자와 공포적 상황에 동조하는 악역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공포영화 속 악역에는 공포적 상황의 흑막인 캐릭터 외에도 자기 혼자 살고자 하다 상황을 망치는 캐릭터, 재난 상황에도 욕심을 못 버려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캐릭터, 위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거나 간과해 재난 상황을 더욱 크게 만드는 캐릭터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이성이야말로 공포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하고 유일한 방법으로 그려내곤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재난 예방 훈련하듯이 침착하게 살 길을 모색하는 인물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재난 영화이지 공포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이토 준지는 종종 비이성과 이성의 대결이라는 전제 자체를 뒤집는다. 이토 준지의 작품 중 대부분은 주인공들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과 동화될 때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공포의 상황에 동화된다는 것은 외부의 괴물이 우리의 무의식 내에 잠재된, 혹은 억눌린, 무언가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인공은 내면 깊이 존재하는 욕구를 통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토 준지의 대표작, 「토미에」 시리즈의 경우 수많은 남성이 토미에를 사랑하고 수많은 여성이 그를 동경한다. 결국 그 강력한 감정이 혐오로 변질하고 토미에를 잔인하게 살해하기에 이른다. 주인공들은 ‘토미에’라는 재난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 아름다운 소녀 토미에의 주변에는 광기에 가득 차 폭력적인 사람들이 가득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토미에를 향해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이토 준지 작품이 공포 장르로서 매혹적인 이유는 결국 이성과 비이성, 곧 공포심을 느끼는 주체와 공포의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토 준지 세계관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나 자신이다. 외부의 괴물은 우리 내면에 억눌린 괴물이 해방되는 계기일 뿐, 결국 공포의 상황에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오는 것은 이성을 잃어버린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광기에 휩싸여 공포 상황에 동화될 때 이야기의 주인공은 더 이상 죄 없는 피해자가 아니다. 「토미에」 시리즈에서 토미에라는 재난은 ‘팜므 파탈 토미에’가 아닌, 한 여성을 향한 사랑과 소유욕, 동경과 질투가 한데 뒤섞여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를 잃은 채 욕구만 존재하는 괴물로 변하는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목매다는 기구」의 주인공 카즈코는 자살한 주변인들이 거대 얼굴 풍선의 구애에 속아 목을 매달게 된 사실을 깨닫고 처음에는 충격에 빠진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제 모습을 한 거대 얼굴 풍선에 유혹에 빠져 목을 매달고 싶어 한다. 주인공마저 자신에 대한 통제를 광기 어린 상황에 위탁하며 스스로의 죽음에 방조하는 극한의 공포에 노출되는 것이다. 「꼭두각시 저택」의 하루히코와 나츠미 남매는 어렸을 때 가출을 한 형의 연락을 받아 초대받게 되고 형의 대저택에서 스스로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형을 발견한다. 고용인들을 시켜 자신과 제 가족의 몸을 조종하도록 하는 모습에 께름칙함을 느끼면서도 아름다운 인형들에 둘러싸인 채 부유한 삶을 사는 형을 보며 나츠미 자신도 꼭두각시가 되기를 염원하여 결국 자기 몸을 꼭두각시 줄에 매달게 된다. 이성에 대한 통제를 잃고 자신이 두려워했던 광기 어린 상황에 스스로 동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포가 아닐까.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기존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타파하고 이토 준지의 작품 세계에서는 느낄 수 있었던 공포심을 스크린에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토 준지의 그림체와 표정 묘사, 펜선으로 그려낸 흑백의 세상은 만화의 고유한 영역이며 이토 준지 원작에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 준지가 공포의 대가인 이유는 그의 그림에만 머물지 않는다.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공포의 대상에 대한 넓은 스펙트럼, 그리고 주인공과 공포적 상황 사이 연결 지점은 이토 준지식 공포의 중요한 요소이며 충분히 스크린에서도 구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공포영화에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공포에 대해 넓고 깊은 내러티브다. 얄팍하고 진부한 공포의 소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더 다양하고 새로운 공포 소재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공포심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 픽션의 상황이 현실 관객의 공포심으로 재현되는 이유는 결국 공포심이라는 것이 인간 내면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공포심을 울리는 본능의 근본은 무엇인가. 한 생명이 갖는 생존욕인가, 인간 존엄성의 상실에 대한 반발심인가. 반복해 접해온 경고의 이야기cautionary tale에 따른 조건반사가 울리는 경계심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무지인가. 사회가 금지한 터부taboo의 실행에 대한 거부감인가, 제어가 안 되는 욕망에 대한 초자아의 처벌인가. 이처럼 공포심은 인간의 이성 사이 공백을 채우는 비이성이기 때문에 공포영화는 관객의 이성을 위한 연출뿐 아니라 인간 심연 속 비이성을 위한 서사를 필요로 한다. 비이성을 위한 서사는 공포심의 근원을 찾을 때 비로소 구체화 되어 영화 속 공포가 현실 관객의 공포심으로 공명한다. 이토 준지의 세계관 속 비이성은 현실의 독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작품 내에 주인공들이 느꼈던 감정이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가 싸한 공포심을 느낄 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깊은 매혹감을 가질 때, 독자는 이미 작품 속 괴물과 공명하고 있다. 인간 내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 공포물은 관객이 자신 안에 있는 괴물과 맞닥뜨리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익숙하고 불쾌한 그 괴물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짜 공포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공포 영화의 문제는 이성 사이 공백이라는 공포의 전제에서부터 생긴다. 기록 영상의 몽타주로서 영화는 물리적인 삼차원의 공간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포 영화가 선택할 방안은 공포의 대상을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공포의 대상을 스크린에 보여줄 때 이 대상은 실사적인 공간에서 물리적인 질감과 움직임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게 된 이상, 이성 사이 공백을 채웠던 두루뭉술한 상상과 그에 따른 주관적인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흐려지게 된다. <놉(2022)>의 해파리 생물체가 등장해버린 순간 <놉>이 더 이상 공포 영화가 아니라 서부극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특수분장과 포토샵으로 기괴하게 만들어낸 귀신이나 크리처도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진다. 이 때문에 ‘보여주는 공포’는 점프 스케어나 고어적 연출에 의한 물리적인 거북함에 의존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어떤 연출가들은 이성 사이의 공백과 그에 따른 공포심을 이용한다. 가령 공포의 실체가 악마일 때 스크린에 CG 처리된 악마의 실체가 나온다면 관객은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악마가 지니는 종교적 아우라가 퇴색된 시대에 그의 존재는 공포심을 자아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컨저링> 시리즈나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 등 많은 공포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공포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신 공포의 대상이 자아내는 괴현상으로 공포심을 자극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죠스(1975)>에서 상어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나 <사이코(1960)>의 샤워 살인 장면에서 살인자 대신 칼과 비명을 지르는 여성만이 등장하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구현되지 않은 공포의 대상은 분명 효과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한 지금까지도 구연동화 형식의 괴담이 효과적인 공포 매체인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공포스러운 현상은 일어났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원초적인 공포심을 느낀다.
하지만 위와 같은 공포의 구현 또한 역사가 누적됐다. 우리에겐 공포와의 새로운 공존이 필요하다. 스크린 내 구현이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이 아닌, 물리적으로 영화를 보기 힘들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공포의 대상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공포심을 자아낼 방법이. 이는 최근 공개된 공포 영화들이 나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과도 연관이 있다. <유전(2018)>은 흥미로운 연출에 비해 노골적인 잔인함, 무력한 재난적 상황과 같은 장르 관습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실망스러웠다. <겟 아웃(2017)>, <비바리움(2019)>은 인간의 근원적 공포보다 관객이 살면서 축적해 온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공포 장르로 보기는 어렵다.
괴담, 공포 게임, 코즈믹 호러 팟캐스트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공포를 접하면서 신박한 공포심을 찾은 결과, 현재 내가 도착한 공포의 이데아는 만화다. 그림을 통해 현실을 구현하는 만화는 화자와 세상 사이의 거리에 대한 극단적인 주도권을 갖는다. 극사실체로 현실을 묘사하는 동시에도 과장된 표정 묘사와 움직임, 다양한 효과음, 그리고 주관적인 배경 묘사를 통해 완전히 화자의 시선에서 재구성된 현실로 공간을 꾸밀 수도 있다. 또한 만화는 사실적인 현실을 구현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더 다양한 공포 소재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겨운 악마와 귀신, 사이비 종교와 여성 혐오 연쇄 살인마는 안녕!)
그중 제일은 이토 준지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공포의 대상, 이토 준지 특유의 그림체를 통해 연출하는 공포의 현실. 섬세한 흑백의 펜선으로 그려낸 이토 준지의 세계관은 뒤틀린 표정과 섬뜩한 톤칠로 두렵고도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이토 준지의 기묘한 상상력이 비사실적 현실로서 만화 세상에 더해져 상상도 못한 존재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토 준지의 단편 「목매다는 기구」에는 수십 개의 거대한 사람 얼굴 풍선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제 얼굴의 주인을 찾아 풍선 줄에 목을 매단다. 「아미가라 단층의 과거」에서는 단층 지대에 인간의 형체를 한 구멍이 숭숭 뚫리자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꼭 맞는 구멍에 들어가 죽어 나간다. 예상치 못한 공포 소재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이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공포의 대상으로 제시할 때 많은 영화는 그 대상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한다. 공포의 비이성과 이를 해결할 이성의 대결 구도에서 공포 영화는 두 가지의 엔딩만을 갖는다. 미지의 대상을 해석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공포적 상황을 해결하는 해피 엔딩이나 그런 노력이 모두 실패하는 파멸 엔딩이다. <놉>에서는 OJ(대니얼 컬루야 분)가 해파리 괴물을 길들이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공포 상황이 종결되고, <유전>에서는 피할 수 없는 가족력에 굴복하거나 희생당함으로써 그레이엄 가족은 파멸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대결 구도의 전제하에 많은 공포영화는 공포 상황에서도 침착한 피해자와 공포적 상황에 동조하는 악역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공포영화 속 악역에는 공포적 상황의 흑막인 캐릭터 외에도 자기 혼자 살고자 하다 상황을 망치는 캐릭터, 재난 상황에도 욕심을 못 버려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캐릭터, 위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거나 간과해 재난 상황을 더욱 크게 만드는 캐릭터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이성이야말로 공포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하고 유일한 방법으로 그려내곤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재난 예방 훈련하듯이 침착하게 살 길을 모색하는 인물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재난 영화이지 공포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이토 준지는 종종 비이성과 이성의 대결이라는 전제 자체를 뒤집는다. 이토 준지의 작품 중 대부분은 주인공들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과 동화될 때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공포의 상황에 동화된다는 것은 외부의 괴물이 우리의 무의식 내에 잠재된, 혹은 억눌린, 무언가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인공은 내면 깊이 존재하는 욕구를 통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토 준지의 대표작, 「토미에」 시리즈의 경우 수많은 남성이 토미에를 사랑하고 수많은 여성이 그를 동경한다. 결국 그 강력한 감정이 혐오로 변질하고 토미에를 잔인하게 살해하기에 이른다. 주인공들은 ‘토미에’라는 재난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 아름다운 소녀 토미에의 주변에는 광기에 가득 차 폭력적인 사람들이 가득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토미에를 향해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이토 준지 작품이 공포 장르로서 매혹적인 이유는 결국 이성과 비이성, 곧 공포심을 느끼는 주체와 공포의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토 준지 세계관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나 자신이다. 외부의 괴물은 우리 내면에 억눌린 괴물이 해방되는 계기일 뿐, 결국 공포의 상황에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오는 것은 이성을 잃어버린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광기에 휩싸여 공포 상황에 동화될 때 이야기의 주인공은 더 이상 죄 없는 피해자가 아니다. 「토미에」 시리즈에서 토미에라는 재난은 ‘팜므 파탈 토미에’가 아닌, 한 여성을 향한 사랑과 소유욕, 동경과 질투가 한데 뒤섞여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를 잃은 채 욕구만 존재하는 괴물로 변하는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목매다는 기구」의 주인공 카즈코는 자살한 주변인들이 거대 얼굴 풍선의 구애에 속아 목을 매달게 된 사실을 깨닫고 처음에는 충격에 빠진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제 모습을 한 거대 얼굴 풍선에 유혹에 빠져 목을 매달고 싶어 한다. 주인공마저 자신에 대한 통제를 광기 어린 상황에 위탁하며 스스로의 죽음에 방조하는 극한의 공포에 노출되는 것이다. 「꼭두각시 저택」의 하루히코와 나츠미 남매는 어렸을 때 가출을 한 형의 연락을 받아 초대받게 되고 형의 대저택에서 스스로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형을 발견한다. 고용인들을 시켜 자신과 제 가족의 몸을 조종하도록 하는 모습에 께름칙함을 느끼면서도 아름다운 인형들에 둘러싸인 채 부유한 삶을 사는 형을 보며 나츠미 자신도 꼭두각시가 되기를 염원하여 결국 자기 몸을 꼭두각시 줄에 매달게 된다. 이성에 대한 통제를 잃고 자신이 두려워했던 광기 어린 상황에 스스로 동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포가 아닐까.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기존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타파하고 이토 준지의 작품 세계에서는 느낄 수 있었던 공포심을 스크린에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토 준지의 그림체와 표정 묘사, 펜선으로 그려낸 흑백의 세상은 만화의 고유한 영역이며 이토 준지 원작에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 준지가 공포의 대가인 이유는 그의 그림에만 머물지 않는다.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공포의 대상에 대한 넓은 스펙트럼, 그리고 주인공과 공포적 상황 사이 연결 지점은 이토 준지식 공포의 중요한 요소이며 충분히 스크린에서도 구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공포영화에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공포에 대해 넓고 깊은 내러티브다. 얄팍하고 진부한 공포의 소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더 다양하고 새로운 공포 소재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공포심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 픽션의 상황이 현실 관객의 공포심으로 재현되는 이유는 결국 공포심이라는 것이 인간 내면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공포심을 울리는 본능의 근본은 무엇인가. 한 생명이 갖는 생존욕인가, 인간 존엄성의 상실에 대한 반발심인가. 반복해 접해온 경고의 이야기cautionary tale에 따른 조건반사가 울리는 경계심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무지인가. 사회가 금지한 터부taboo의 실행에 대한 거부감인가, 제어가 안 되는 욕망에 대한 초자아의 처벌인가. 이처럼 공포심은 인간의 이성 사이 공백을 채우는 비이성이기 때문에 공포영화는 관객의 이성을 위한 연출뿐 아니라 인간 심연 속 비이성을 위한 서사를 필요로 한다. 비이성을 위한 서사는 공포심의 근원을 찾을 때 비로소 구체화 되어 영화 속 공포가 현실 관객의 공포심으로 공명한다. 이토 준지의 세계관 속 비이성은 현실의 독자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작품 내에 주인공들이 느꼈던 감정이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가 싸한 공포심을 느낄 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깊은 매혹감을 가질 때, 독자는 이미 작품 속 괴물과 공명하고 있다. 인간 내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 공포물은 관객이 자신 안에 있는 괴물과 맞닥뜨리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익숙하고 불쾌한 그 괴물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짜 공포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