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위한 변명
WEBZINE
WEDITOR 최하경
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이런 사람이 비교문학을 전공하다니, 최악의 선택이다. 글쓰기 싫은데 하루하루가 마감일이다. 매일 고통받고 툭하면 휴학하는 데는 모두 이유가 있다.
글을 써야 하면 마감 일주일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물론 스트레스만 받고 글을 쓰기 시작하지는 않는다. 마감 직전에 밤새고 울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을 나 자신이 보이지만 쓰지 않는다. 굳건히.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도달하여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면 우선 내 자신을 방 안에 가둬놓는다. 글을 쓰다 보면 숨이 막혀오므로 옆에 1L 물통도 갖춰 놓는다. 글자가 적히지 않을 때마다 물을 한 모금씩 마시니까 매일 한 3L는 마시는 것 같다. 건강에는 좋겠지. 책상 뒤에는 요가 매트를 깔아놓고 심란해질 때마다 가벼운 운동을 한다. 정신이 엄청 사납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글 하나 쓰는 데도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편이다.
나한테 글쓰기는 늘 기나긴 자괴의 과정이다. 나의 어휘의, 생각의, 논리의 한계를 부끄러워하며 유려하지 못하고 무거워지기만하는 문장에 절망한다. 요란하나 내실 없는 문장들로 가득 찬 화면을 보며 나에 대한 끝없는 의혹을 품는다. 본디 기술이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련해져야 마땅한데 나의 글쓰기 속도는 갈수록 느려지기만 한다. 글쓰기는 늘 과도한 카페인과 체중 감량, 두통과 무릎 통증을 뜻한다.
이처럼 쓰기는 나에게 가장 어렵고 지독한 행위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글을 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쓰기를 업으로 삼으려한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는 마감에 두려움으로 심장이 뛸 때마다 자문한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치기 어린 지적 허영심의 잔재일까. 그나마 가진 기술이 이 미천한 글솜씨라 재능의 부재를 외면하고 이곳에 안주하는 걸까. 버저비터로 어찌어찌 완성한 글을 보냈을 때의 그 쾌감에 중독된 것일까. 어쩌면 그냥 고통받는 걸 좋아하는 성향일지도. 그래도, 나의 이 글에 대한 미련에 조금 멋들어진 변명은 하나 붙여주고 싶다.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글쓰기에 마감이 아닌 실체적 동기가 있을까? 아무리 써봐도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변명밖에 나오지 않고 모순되게도 나는 그런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밤을 새워가며 장황한 글을 썼지만, 아침에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전부 지웠다. 그래서 보다 신용할 수 있는, 내가 사랑하는 작가의 언어에 의존해보고자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렇게 적는다. 쓰기는 말하기 어려운, 너무도 낯선, 하지만 한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그 감정들에 대해 말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지극히 섬세하고 더없이 심오하며 무척이나 육체적인, 또한 본질적인,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을 온전히 품어 부화해낼 수 있는 행위. 그게 바로 글쓰기라고. 그래, 나는 내가 버거워 글을 쓰는 것 같다. 내 감정과 생각이 차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커질 때, 그곳에 잠식되지 않으려 글을 쓴다. 그래서 자주 싫어하는 것들에 관해 쓴다. 미워하는 감정만큼 빨리 커지는 것은 없으니. 나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그것에 대해 글을 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글로 가라앉히지 않으면 세상에 가질 못된 마음이 너무 많은 부족한 사람이라 계속 글을 쓰나 보다.
그러니 나는 글쓰기를 싫어하지만, 그것은 언제든 울부짖을, 눈물 흘릴 태세로 내 앞에 버티고 있다. 쓰기는 그렇게 나에게 오고 나에겐 그걸 떨쳐낼 힘이 없다.
[나의 우상 수전 손택도 상당히 파괴적인 글쓰기 습관을 지녔다 한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부자연스러운 행위이자 고독이고 고통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도 글을 쓰는 것을 힘들어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훌륭한 글이 아닐지라도, 계속 글을 적으려는 또 다른 아무개도 그 과정을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비교문학을 전공하다니, 최악의 선택이다. 글쓰기 싫은데 하루하루가 마감일이다. 매일 고통받고 툭하면 휴학하는 데는 모두 이유가 있다.
글을 써야 하면 마감 일주일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물론 스트레스만 받고 글을 쓰기 시작하지는 않는다. 마감 직전에 밤새고 울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을 나 자신이 보이지만 쓰지 않는다. 굳건히.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도달하여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면 우선 내 자신을 방 안에 가둬놓는다. 글을 쓰다 보면 숨이 막혀오므로 옆에 1L 물통도 갖춰 놓는다. 글자가 적히지 않을 때마다 물을 한 모금씩 마시니까 매일 한 3L는 마시는 것 같다. 건강에는 좋겠지. 책상 뒤에는 요가 매트를 깔아놓고 심란해질 때마다 가벼운 운동을 한다. 정신이 엄청 사납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글 하나 쓰는 데도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편이다.
나한테 글쓰기는 늘 기나긴 자괴의 과정이다. 나의 어휘의, 생각의, 논리의 한계를 부끄러워하며 유려하지 못하고 무거워지기만하는 문장에 절망한다. 요란하나 내실 없는 문장들로 가득 찬 화면을 보며 나에 대한 끝없는 의혹을 품는다. 본디 기술이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련해져야 마땅한데 나의 글쓰기 속도는 갈수록 느려지기만 한다. 글쓰기는 늘 과도한 카페인과 체중 감량, 두통과 무릎 통증을 뜻한다.
이처럼 쓰기는 나에게 가장 어렵고 지독한 행위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글을 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쓰기를 업으로 삼으려한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는 마감에 두려움으로 심장이 뛸 때마다 자문한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치기 어린 지적 허영심의 잔재일까. 그나마 가진 기술이 이 미천한 글솜씨라 재능의 부재를 외면하고 이곳에 안주하는 걸까. 버저비터로 어찌어찌 완성한 글을 보냈을 때의 그 쾌감에 중독된 것일까. 어쩌면 그냥 고통받는 걸 좋아하는 성향일지도. 그래도, 나의 이 글에 대한 미련에 조금 멋들어진 변명은 하나 붙여주고 싶다.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글쓰기에 마감이 아닌 실체적 동기가 있을까? 아무리 써봐도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변명밖에 나오지 않고 모순되게도 나는 그런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밤을 새워가며 장황한 글을 썼지만, 아침에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전부 지웠다. 그래서 보다 신용할 수 있는, 내가 사랑하는 작가의 언어에 의존해보고자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렇게 적는다. 쓰기는 말하기 어려운, 너무도 낯선, 하지만 한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그 감정들에 대해 말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지극히 섬세하고 더없이 심오하며 무척이나 육체적인, 또한 본질적인,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을 온전히 품어 부화해낼 수 있는 행위. 그게 바로 글쓰기라고. 그래, 나는 내가 버거워 글을 쓰는 것 같다. 내 감정과 생각이 차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커질 때, 그곳에 잠식되지 않으려 글을 쓴다. 그래서 자주 싫어하는 것들에 관해 쓴다. 미워하는 감정만큼 빨리 커지는 것은 없으니. 나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그것에 대해 글을 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글로 가라앉히지 않으면 세상에 가질 못된 마음이 너무 많은 부족한 사람이라 계속 글을 쓰나 보다.
그러니 나는 글쓰기를 싫어하지만, 그것은 언제든 울부짖을, 눈물 흘릴 태세로 내 앞에 버티고 있다. 쓰기는 그렇게 나에게 오고 나에겐 그걸 떨쳐낼 힘이 없다.
[나의 우상 수전 손택도 상당히 파괴적인 글쓰기 습관을 지녔다 한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부자연스러운 행위이자 고독이고 고통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도 글을 쓰는 것을 힘들어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훌륭한 글이 아닐지라도, 계속 글을 적으려는 또 다른 아무개도 그 과정을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