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그리고 치킨 너겟
WEBZINE
WEDITOR 김지윤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몇 살인지, 성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펑크를 좋아하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반려동물은 있는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문학 취향은 어떻게 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방법이 있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런 종류의 설명을 아무리 길게 늘여 놓아도 나의 본질에 닿지 않는다. 잘 말해주어 봤자 단편적인 속성에 불과하다. 이는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이 이미 준비된, 레디 메이드 답변이었기 때문이리라. 일부는 나에 관한 과거의 사실을 반영하고, 또 다른 일부는 결코 일상적인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빛나는 순간만을 담고 있으며, 나머지는 ‘내가 이렇게 비추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은근한 바람이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답변을 들은 사람이 떠올리게 되는 상은 김지윤이 아니라 유사-김지윤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스스로 납득 가능한 설명은 나에 관한 추상적 정보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와 내가 어떻게 이어져 왔느냐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라는 인물은 일상에서 미약하게나마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의 관계 다발인 것이다. 관계는 고정된 시점의 단면을 넘어 통시성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한 사람에 관한 설명의 수단으로 아주 적절히 기능한다. 이중 사물과의 관계는 특히나 유효하다.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물과의 관계는 굳이 왜곡하여 인지하지 않는 까닭에 어느 수준 이상의 솔직함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타인도 함께하지 않은 개인적인 시간, 이를테면 친구와 헤어진 뒤 빈 골목길을 걸을 때나 아주 늦은 밤 후드 집업으로 무장한 채 외출했을 때의 나를 훔쳐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물이다.
그래서 나는 바퀴(휠)와 너겟에 대해 말하고 싶다.
(1) 바퀴의 경우
바퀴와의 인연은 작년, 팔로우하던 디자이너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 오토바이 휠 사진에 마음을 빼앗기며 시작되었다.
한 번 휠에 매료되자 길가에 세워진 바퀴 달린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차 혹은 오토바이의 아름다움을 전체적인 형태나 색 등에서 찾았다. 그런데 위 사진을 본 뒤로 휠까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탈것이 가진 아름다움에서 휠이 차지하는 지분은 점차 커져, 미적인 휠을 가지지 않은 차는 그 가격대와 관계없이 미완성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더불어 훌륭한 휠을 보면 어디서든 멈추어 사진을 찍는 소소한 취미도 생겼다.
평소 선호하는 휠은 너무 두껍거나 얇지 않은 적당한 두께의 타이어를 가지고 있으며, 바퀴살이 얇고 내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종류의 바퀴다.
이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대체로 오토바이 휠이다. 오토바이 휠의 디스크는 자동차의 두꺼운 바퀴로는 낼 수 없는 매력을 가졌다. 칼날같이 매섭게 생긴 디스크를 가진 바퀴를 보고 있자면, 디스크 사이에 손가락이 들어가면 매끈하게 잘려 나가겠다는 생각에 조금 위협감을 느낀다. 말하자면 오토바이 휠의 아름다움은 기계적인 위험, 절단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그 기묘한 징그러움을 핵심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특히 섬세한 바퀴를 가진 오토바이는 일상에서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핸드폰에 주로 찍히는 바퀴는 자동차 휠이다.
자동차 휠은 두껍기 때문에 오토바이 휠이 주는 날카로운 느낌을 내기는 어렵다. 바퀴살도 함께 두꺼워져 오토바이에서는 찾기 어렵던 안정적이고 클래식한 세련됨을 느낄 수 있다.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차 중 위 사진과 비슷한 스타일을 가장 많이 차용하고 있는 차는 제네시스 정도다.
흥미로운 것은 자동차 바퀴의 진가가 휠에 일종의 생물학적인 징그러움이 포함되었을 때 비로소 발휘된다는 점이다. 위 사진에 나타난 바퀴살은 언뜻 거미 다리처럼 보인다. 평소 거미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거대한 거미가 타이어를 움켜쥐고 있는 광경을 보면 당황스러움부터 느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휠이 가진 아름다움은 바로 그 은은한 역겨움을 축으로 해 내 안의 더 깊은 곳까지 들어온다. 그래서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보면 나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의 필요조건은 위협성 혹은 역겨움의 조그만 가능성이다.
오토바이 휠의 탁월함은 그 기계적 위협성에, 자동차 휠의 탁월함은 그 생물학적 역겨움의 가능성에 근거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험을 내부에 간직한 바퀴들이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은 채 묵묵히 주인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 사물에 대한 경외심을 높인다.
(2) 너겟의 경우
너겟을 언제 처음 먹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되었다. 다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너겟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생생히 떠오른다.
2020년 겨울 어느 날 나는 모 대학 면접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대기 시간이 두 시간이 넘어가며 긴장감은 증발하고 지루함만이 남아, 자료는 접어두고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던 순간이었다. 문득 너겟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욕구는 시간이 갈수록 지수함수적으로 강해졌고 30분이 지나자 나는 면접을 보기로 되어있던 대학보다도 너겟을 원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너겟도 아닌 맥너겟이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소스도 아닌 케이준 소스여야 했다. 인생을 통틀어 음식에 관한 욕망이 이렇게까지 컸던 것은 아마도 그날이 처음이었으리라. 갈증의 대상은 다른 무엇도 아닌, 케이준 소스에 찍은 맥너겟(6조각)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이런 저런 패스트푸드점을 다니며 너겟을 먹어보았고, 냉정히 말해 맥너겟보다 나은 너겟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가령 맘스터치의 경우 너겟 안에 잘게 다진 할라피뇨가 들어있으며 주문과 동시에 조리를 시작해 항상 최상의 상태의 너겟을 제공한다. 갈린 닭고기 외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심지어 종종 조금 식어버린 너겟을 주는 맥도날드와 대비되는 탁월함이다.
그러나 맥너겟을 갈망했던 그 면접 날 이후로 맥너겟은 내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성의 영역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애인보다 외적으로 훌륭한 사람, 더 다정하고 더 똑똑한 사람이 있음은 알고 있지만 그 앞에서 이러한 사실 따위는 완전히 무력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맥너겟을 먹으러 가는 리추얼은 주로 늦은 밤 이루어진다.
너겟은 먹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부터 행복을 준다. 너겟을 먹는 시간은 유튜브를 보든 짧게나마 책을 읽든, 주로 재미가 보장된 여가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먹으면서 뭐할까? – 고민하며 집을 나서면 하늘은 이미 새까맣고, 공기는 낮보다 조금 차가워져 있으며,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져 길가는 고요하다. 딱 그 순간 조금 들뜨는 기분이 소중하다. 맥도날드에 도착해 너겟을 받고 나면 꺼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아무것도 손 대지 않은 채 집에 가야 한다. 이 과정은 꽤 큰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길가에 멈추어 케이준 소스를 뜯어서 벌써 눅눅해지기 시작한 너겟을 찍어 먹는, 야만적이고 미성숙한 타협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집에 다다르면 곧바로 에어 프라이어를 예열하고 너겟을 충분히 데운 뒤 마침내 먹는다. 예상 가능한 맛이지만 질리는 법은 결코 없는 것이다.
맥너겟은 분명 경탄이 나오는 맛은 아니지만, 한 입 베어 물면 ‘내가 인생에서 굳이 무언가를 더 바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급해하고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나를 지탱해줄 만큼의 행복은 얼마든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밖에서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든, 맥도날드가 맥너겟을 계속 파는 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꽤나 큰 위로인 것이다.
우선 몇 살인지, 성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펑크를 좋아하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반려동물은 있는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문학 취향은 어떻게 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방법이 있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런 종류의 설명을 아무리 길게 늘여 놓아도 나의 본질에 닿지 않는다. 잘 말해주어 봤자 단편적인 속성에 불과하다. 이는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이 이미 준비된, 레디 메이드 답변이었기 때문이리라. 일부는 나에 관한 과거의 사실을 반영하고, 또 다른 일부는 결코 일상적인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빛나는 순간만을 담고 있으며, 나머지는 ‘내가 이렇게 비추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은근한 바람이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답변을 들은 사람이 떠올리게 되는 상은 김지윤이 아니라 유사-김지윤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스스로 납득 가능한 설명은 나에 관한 추상적 정보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와 내가 어떻게 이어져 왔느냐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라는 인물은 일상에서 미약하게나마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의 관계 다발인 것이다. 관계는 고정된 시점의 단면을 넘어 통시성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한 사람에 관한 설명의 수단으로 아주 적절히 기능한다. 이중 사물과의 관계는 특히나 유효하다.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물과의 관계는 굳이 왜곡하여 인지하지 않는 까닭에 어느 수준 이상의 솔직함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타인도 함께하지 않은 개인적인 시간, 이를테면 친구와 헤어진 뒤 빈 골목길을 걸을 때나 아주 늦은 밤 후드 집업으로 무장한 채 외출했을 때의 나를 훔쳐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물이다.
그래서 나는 바퀴(휠)와 너겟에 대해 말하고 싶다.
(1) 바퀴의 경우
바퀴와의 인연은 작년, 팔로우하던 디자이너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 오토바이 휠 사진에 마음을 빼앗기며 시작되었다.
한 번 휠에 매료되자 길가에 세워진 바퀴 달린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차 혹은 오토바이의 아름다움을 전체적인 형태나 색 등에서 찾았다. 그런데 위 사진을 본 뒤로 휠까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탈것이 가진 아름다움에서 휠이 차지하는 지분은 점차 커져, 미적인 휠을 가지지 않은 차는 그 가격대와 관계없이 미완성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더불어 훌륭한 휠을 보면 어디서든 멈추어 사진을 찍는 소소한 취미도 생겼다.
평소 선호하는 휠은 너무 두껍거나 얇지 않은 적당한 두께의 타이어를 가지고 있으며, 바퀴살이 얇고 내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종류의 바퀴다.
이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대체로 오토바이 휠이다. 오토바이 휠의 디스크는 자동차의 두꺼운 바퀴로는 낼 수 없는 매력을 가졌다. 칼날같이 매섭게 생긴 디스크를 가진 바퀴를 보고 있자면, 디스크 사이에 손가락이 들어가면 매끈하게 잘려 나가겠다는 생각에 조금 위협감을 느낀다. 말하자면 오토바이 휠의 아름다움은 기계적인 위험, 절단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그 기묘한 징그러움을 핵심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특히 섬세한 바퀴를 가진 오토바이는 일상에서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핸드폰에 주로 찍히는 바퀴는 자동차 휠이다.
자동차 휠은 두껍기 때문에 오토바이 휠이 주는 날카로운 느낌을 내기는 어렵다. 바퀴살도 함께 두꺼워져 오토바이에서는 찾기 어렵던 안정적이고 클래식한 세련됨을 느낄 수 있다.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차 중 위 사진과 비슷한 스타일을 가장 많이 차용하고 있는 차는 제네시스 정도다.
흥미로운 것은 자동차 바퀴의 진가가 휠에 일종의 생물학적인 징그러움이 포함되었을 때 비로소 발휘된다는 점이다. 위 사진에 나타난 바퀴살은 언뜻 거미 다리처럼 보인다. 평소 거미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거대한 거미가 타이어를 움켜쥐고 있는 광경을 보면 당황스러움부터 느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휠이 가진 아름다움은 바로 그 은은한 역겨움을 축으로 해 내 안의 더 깊은 곳까지 들어온다. 그래서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보면 나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의 필요조건은 위협성 혹은 역겨움의 조그만 가능성이다.
오토바이 휠의 탁월함은 그 기계적 위협성에, 자동차 휠의 탁월함은 그 생물학적 역겨움의 가능성에 근거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험을 내부에 간직한 바퀴들이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은 채 묵묵히 주인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 사물에 대한 경외심을 높인다.
(2) 너겟의 경우
너겟을 언제 처음 먹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되었다. 다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너겟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생생히 떠오른다.
2020년 겨울 어느 날 나는 모 대학 면접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대기 시간이 두 시간이 넘어가며 긴장감은 증발하고 지루함만이 남아, 자료는 접어두고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던 순간이었다. 문득 너겟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욕구는 시간이 갈수록 지수함수적으로 강해졌고 30분이 지나자 나는 면접을 보기로 되어있던 대학보다도 너겟을 원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너겟도 아닌 맥너겟이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소스도 아닌 케이준 소스여야 했다. 인생을 통틀어 음식에 관한 욕망이 이렇게까지 컸던 것은 아마도 그날이 처음이었으리라. 갈증의 대상은 다른 무엇도 아닌, 케이준 소스에 찍은 맥너겟(6조각)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이런 저런 패스트푸드점을 다니며 너겟을 먹어보았고, 냉정히 말해 맥너겟보다 나은 너겟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가령 맘스터치의 경우 너겟 안에 잘게 다진 할라피뇨가 들어있으며 주문과 동시에 조리를 시작해 항상 최상의 상태의 너겟을 제공한다. 갈린 닭고기 외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심지어 종종 조금 식어버린 너겟을 주는 맥도날드와 대비되는 탁월함이다.
그러나 맥너겟을 갈망했던 그 면접 날 이후로 맥너겟은 내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성의 영역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애인보다 외적으로 훌륭한 사람, 더 다정하고 더 똑똑한 사람이 있음은 알고 있지만 그 앞에서 이러한 사실 따위는 완전히 무력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맥너겟을 먹으러 가는 리추얼은 주로 늦은 밤 이루어진다.
너겟은 먹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부터 행복을 준다. 너겟을 먹는 시간은 유튜브를 보든 짧게나마 책을 읽든, 주로 재미가 보장된 여가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먹으면서 뭐할까? – 고민하며 집을 나서면 하늘은 이미 새까맣고, 공기는 낮보다 조금 차가워져 있으며,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져 길가는 고요하다. 딱 그 순간 조금 들뜨는 기분이 소중하다. 맥도날드에 도착해 너겟을 받고 나면 꺼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아무것도 손 대지 않은 채 집에 가야 한다. 이 과정은 꽤 큰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길가에 멈추어 케이준 소스를 뜯어서 벌써 눅눅해지기 시작한 너겟을 찍어 먹는, 야만적이고 미성숙한 타협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집에 다다르면 곧바로 에어 프라이어를 예열하고 너겟을 충분히 데운 뒤 마침내 먹는다. 예상 가능한 맛이지만 질리는 법은 결코 없는 것이다.
맥너겟은 분명 경탄이 나오는 맛은 아니지만, 한 입 베어 물면 ‘내가 인생에서 굳이 무언가를 더 바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급해하고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나를 지탱해줄 만큼의 행복은 얼마든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밖에서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든, 맥도날드가 맥너겟을 계속 파는 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꽤나 큰 위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