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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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형택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2022)>를 마지막으로 본 지 한 달이 지났다. 두 번의 관람이 남긴 여러 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이미지들로 추려졌고, 그 중 롱텀-메모리로 전환된 뚜렷한 그림은 두 개: 콜름의 웨이스트코트(waistcoat)와 도미닉의 베이커보이 햇(baker boy hat)이다.


두 아이템은 각각 착용자의 캐릭터를 정확하게 대변한다. 핏하게 들어맞는 웨이스트코트의 냉철함은 콜름이 파우릭을 대하는 딱딱함과 결을 같이하고, 삐딱하게 쓰인 도미닉의 베이커보이 햇은 그의 유순한 듯 반항적인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코스튬만 놓고 보자면 콜름과 도미닉의 대립 구도가 훨씬 더 그럴싸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의상 감독 에이머 니 마올돔나이프Eimer Ni Mhaoldomhnaigh가 그녀의 코스튬 디렉팅 철학에 대하여 “시대 고증보다 캐릭터와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신경 쓴다”고 언급한 것이 왜 그런지 알 것도 같다.

“의상이 캐릭터를 잘 대표해서”만이 그 둘만 유독 인상깊었던 이유는 아니다. 시오반의 레드 울 코트 또한, 작중 아일랜드 본토에서의 개인적 성공과 이니셰린에서의 평범한 삶 그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한 그녀의 흔적을 나타내기 충분했다. 파우릭이 입은 레드 체크 셔츠도 그의 naive함과 더없이 잘 어우러졌다.


콜름의 웨이스트코트와 도미닉의 베이커보이 햇이 특히 깊게 남는 이유는 그 두 아이템이 지닌 역사적 가치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코트’는 세계 어딜 가도 ‘코트’로 불리고, ‘셔츠’는 세계 어딜 가도 ‘셔츠’다. 그렇지만 ‘웨이스트코트’와 ‘베이커보이 햇’은 영국-아일랜드에서만 불리는 고유 명칭이다. 이 둘이 영국 의복사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영국에서 베이커보이 햇을 ‘뉴스보이 캡’으로 부르면 집단 린치를 당할 수 있다.

웨이스트코트는 우리가 ‘정장 조끼’ 라 부르는 옷이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베스트 자켓’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엄밀히 구분짓자면 베스트 자켓은 보다 캐주얼해진 형태를, 웨이스트코트는 본래의 쓰리피스 수트(트라우저-웨이스트코트-자켓)에 해당하는 신사적이고 정형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는 두 용어 모두 서로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이나, 굳이 나누자면 그렇다.


웨이스트코트는 단순한 조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내의로 입을 셔츠, 그 위에 입을 자켓과 함께 최고의 궁합을 이루도록 제작되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정교한 패턴을 요구했다. 자연스레 패턴이나 원부자재에서 드러난 웨이스트코트의 정교함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가늠하게 하는 척도가 되었다.

정교하게 제작된 웨이스트코트는 착용자에게 멋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셔츠-웨이스트코트가 주는(때로는 신사적이면서도 때로는 목가적인) 분위기는 여러 매체에서 그들을 코스튬으로 활용하기에 좋은 조건을 제공한다. <작은 아씨들(2019)> 에서 시어도어 로렌스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의 웨이스트코트는 지금까지 봐왔던 남자 배우 코스튬 중 단연 최고였다.



‘뉴스보이 캡’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베이커보이 햇 또한 영국-아일랜드에서만 해당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모자의 기원 또한 영국에 있다. 1910년대 후반을 시작으로 하층민 사이에서 빠르게 유행한 이 모자는 배달부 뿐만 아니라 농부, 공장장이, 선착장 인부들에게 폭넓게 쓰였고, 상류층의 레저웨어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베이커보이 햇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된다. 노동으로 인해 더러워진 피부, 멀끔하지 않은 옷차림, 말투에서 나타나는 교양의 부족. 이 프레임은 도미닉이 베이커보이 햇을 착용하고 등장함과 동시에 우리 뇌리에 박혔다. 실제로 그렇게 묘사되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차세대 힙스터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웨이스트코트와 베이커보이 햇 모두 20세기 초반의 영국 복식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들이지만, 두 아이템이 각각 상징했던 바는 콜름과 도미닉만큼이나 다르다. 그리고 상극의 두 아이템은 역사적으로 되풀이되어온 집단 간의 갈등 속에서 새로운 대립구도를 만들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상징이었던 베이커보이 햇은 오늘날 힙스터의 타겟이 되어 트렌드를 이끌고 있고, 상류층의 전유물로 시작된 웨이스트코트는 오늘날 캐주얼 베스트 자켓으로 변화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작업복 외투에까지 쓰이고 있다. 파우릭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콜름에게 말했듯, 양상은 바뀌어도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좋은 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