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여자들
WEBZINE
WEDITOR 정하민
인간은 끊임없이 걷는다. 두 다리에 힘을 줄 수 있게 된 날부터 우리는 하루라도 걷지 않은 날이 없다. 그것이 가령 침대에서 화장실까지의 거리라고 해도 말이다. 걷는 행위는 원초적 명상의 도구이다. 발바닥을 땅에 붙였다가 떼면 신체의 모든 근육은 조금씩 움찔거린다. 숨은 편안하고, 일상적이다. 바쁜 일이 없다면 우리는 걷는 시간 동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한참 동안 주변을 눈에 담으면 익숙한 공간은 낯설게 느껴지고, 낯선 공간은 익숙하게 느껴진다. 걷는 행위에 집중해 본다. 교차하는 두 다리, 몸통을 스치며 앞뒤로 흔들리는 두 팔. 이제 걸음에 리듬감을 더해본다.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발바닥이 땅에 닿았다가 곧 떨어진다. 한 걸음, 다음 걸음.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진다. 이번엔 보폭을 넓혀본다. 성큼성큼. 발바닥을 잡아당기는 거대한 중력을 1분에도 몇 번씩 거스른다.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격렬한 수직 운동과 수평 운동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렇게 인간은 달린다.
달리는 일은 걷기의 확장이지만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보통의 걷기는 매우 일상적이지만 이에 가속을 붙인 달리기는 비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걷기에 비해 숨이 차고,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빠르게 달아오른다. 달리기 운동의 대표 격인 마라톤이 우리나라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시기가 딱 두 번 있다. 첫째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손기정 선수의 활동 시기이다. 살에 닿은 뼈가 훤히 드러나는 마른 체격의 손기정 선수는 대한민국에 어떤 운동 도구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릴 때까지 뛰었다. 그러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이봉주 선수가 마라톤의 전성기를 다시금 불러온다. IMF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이 크게 휘청거렸을 때이다. 우리는 늘 절박한 순간에 달려왔다. 달리기는 우리에게 자연이 허락한 신체만을 요구한다. 이 원초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의식하게 하고, 결국 ‘나’를 발산한다. 나의 움직임으로 내가 나를 체험하는 달리기는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 존재를 선언하는 몸부림이다.
무언가를 위해 달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리코리쉬 피자(2022)>는 달리는 영화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그가 평소에도 달리는 행위에 얼마나 많은 시네마 적 힘을 쏟는지 알 수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3)>에서 배리 역의 애덤 샌들러는 쉬지도 않고 달린다. 영화 본연의 정신없는 템포에 발맞추어 쉬지 않고 뛰는 애덤 샌들러를 보고 있자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 ‘과연 앤더슨이 저 장면들을 몇 테이크에 끝냈을까’와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 궁금해진다. 도 마찬가지다.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 분)은 밭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프레임 안에 보일락 말락 하는 추격자로부터 도망치는 그는 넓은 롱숏에서 그저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달리기는 무력해 보인다. 이 무력감은 앤더슨 영화의 달리는 장면 대부분에 존재한다. 그는 인물들의 무의미한 달리기를 조명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제자리걸음을 냉소한다. 하지만 <리코리쉬 피자>에서의 달리기는 달랐다. 앤더슨이 보여준 알라나와 게리(쿠퍼 호프만 분)의 달리기는 분명 힘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리코리쉬 피자>에는 알라나와 개리의 관계를 상징하는 세 번의 주요한 달리기가 등장한다. 그 중 두 번은 알라나와 개리가 각각 달리고, 한 번은 함께 달린다. 하나는 경찰서에 갇힌 개리를 꺼내주기 위해 달리는 알라나이고 둘은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알라나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개리이다. 앤더슨은 이 두 숏을 비슷하게 운용한다. 인물을 바스트 숏으로 잡고 함께 달린다. 인물의 속도가 카메라의 그것보다 뒤처져 프레임을 벗어날락 말락 하지만, 카메라는 이내 방향을 틀어 인물과 발을 맞춘다. 병렬적으로 위치한 두 번의 달리기 속 알라나와 개리 모두 오른쪽을 향해 달린다. 이대로라면 달리기의 끝에서 둘은 서로를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세 번째 달리기는 이를 역전시킨다.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 개리와 알라나는 서로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이때 개리는 오른쪽을, 알라나는 왼쪽을 향하고, 화면에는 앞서 언급한 두 번의 달리기가 교차 편집된다. 여전히 오른쪽을 향해 달리는 개리와 다르게 왼쪽을 향해 달리는 알라나에게는 전에 등장한 적 없는 왼쪽을 향해 달리는 푸티지가 삽입된다. 방향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변화한 인물은 알라나이다. 오른쪽만을 향해 달리던 알라나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개리를 만났다. 여성 캐릭터가 주도적으로 변화해서 쟁취한 이 사랑은 앤더슨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남성들의 달리기와는 다르다. 욕망을 드러내고 욕망을 향해 달리는 알라나는 결국 이 달리기의 끝에서 개리를 와락 안는다.
방향이 잘못 되었더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특정 영화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몇 가지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 매체로서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다. 이 측면에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오슬로 트릴로지의 마지막 작품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는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 그의 연출은 온 세상이 멈추고 혼자만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질주하는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 분)의 모습을 관객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게 했다. —<나의 결혼 원정기(2005)> 속 정재영 배우의 ‘택배 짤’에 빚진 부분도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이 달리기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율리에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의 자주권을 온전히 가진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달리기가 과연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혹은 율리에의 상상 속 허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든 허구든 율리에는 그 시공간 속에서 완벽히 자유로웠다.
율리에는 이 달리기를 통해 오랫동안 스스로를 갉아먹던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녀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성숙한 연인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 분)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을 주는 에이빈드(헤르베르트 노르드룸 분)를 향해 달려 나갔고, 온 세상이 사랑으로 물드는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율리에의 달리기는 그뿐이다. 에이빈드는 율리에의 정답이 되지 못한다. 그녀의 종착지가 에이빈드였기 때문에, 율리에는 나침반을 다시 맞추어야 했다. 율리에가 뛰어야 하는 길의 끝에 서 있는 이는 악셀도, 에이빈드도 아니다. 다만 율리에 본인이다. 애인의 집을 전전하고, 애인의 일상에 맞춰 본인을 조각하던 율리에는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혼자 살게 된다. 본인이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 벽을 꾸민 율리에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르게 편안해 보인다. 나침반을 다시 맞춘 그녀의 달리기는 이제 완성된 것이다.
그 어떤 힘이 당신의 발목을 붙들지라도 계속해서 달려줬으면 한다.
율리에가 몰랐던 것을 속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 분)는 알았다. 아름다운 모습의 유리들이 위태롭게 서로 부딪치는 샹들리에처럼, 화려하지만 바스러질 듯한 삶을 살았던 다이애나는 자신을 가둔 인형의 집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이애나’가 아닌 ‘스펜서’로 존재할 수 있는 집을 찾는다. 다이애나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영화 초반, 스펜서 가문의 마지막 유산을 걸친 허수아비를 본 다이애나는 차를 멈춘다. 그녀는 뾰족한 검정 구두를 신고 울타리를 넘어 눅눅한 밭길을 걷는다. 구두 굽이 밭에 푹 꽂히고, 끈적한 흙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지만, 다이애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힘을 주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허수아비에게 얹힌 오래된 재킷을 벗긴다. 먼지가 가득한 옷을 털어 팔에 걸치고 돌아가는 다이애나의 발걸음은 사뿐사뿐한 듯 보이지만 실은 진득한 땅으로부터 뾰족한 구두 굽을 떼어내는 강한 힘과 의지의 표상이다.
영화 말미 다이애나는 자유를 갈구하는 춤을 춘다. 꽉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펴듯 그녀는 발아하는 춤을 춘다.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춤은 점점 격렬해지고, 거울이 가득한 방에서는 캉캉의 그것과 비슷한 스텝을 밟는다. 수많은 다이애나가 교차하는 그 방에서 춤을 추던 다이애나 이후에 하늘색 자전거의 패달을 힘차게 밟는 어린 다이애나가 등장한다. 그녀는 교복을 입는 소녀가 되고, 책 세 권을 안고 달리던 소녀는 곧 책을 내던진다. 달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추진력을 얻은 다이애나는 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력을 다해 뛴다. 노란 셋업을 입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발에는 검정 구두가 아닌 흰 운동화가 신겨 있다. 다이애나는 바람을 가로지르며 노란 모자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녀의 질주는 온전히 그녀를 위해, 그녀를 향하여 있다. 다이애나는 해방되었다. 온전히 그녀가 얻어낸 해방이다.
⌜사랑의 단상(1977)⌟ 에서 롤랑 바르트가 쓴 언어를 빌리자면, 오랜 시간 동안 여자는 “칩거자”, 남자는 “사냥꾼이자 나그네”였다. 심지어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26마일 이상을 뛰면 자궁이 찢어져서 떨어져 나간다”는 이유로—당신은 마라톤을 뛰어서 자궁이 찢어진 여성을 본 적이 있는가—여성의 마라톤 참여는 금지되어 왔다. 여성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들의 오만한 권위는 여성의 두 다리를 묶었지만, 로베르타 깁 벤게이, 캐서린 스위처와 같은 이름은 그들의 자연한 움직임을 되찾기 위해 부딪히고 달렸다.
여성의 달리기는 조롱의 돌부리들을 보란 듯 걷어 찼고, 이제는 더 멀리 질주하고 있다. 이 여정은 스크린에서도 계속된다. 알라나의 ‘사랑’, 율리에의 ‘성장’, 그리고 다이애나의 ‘자유’는 영화 속에서 달리기로 나타났다. <리코리쉬 피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펜서> 뿐 아니라 최근 개봉한 콤 베어리드의 <말없는 소녀(2022)>에서도 주인공 코오트(캐서린 클린치 분)는 자신을 학대하는 가정으로부터 진정한 집의 의미를 알려준 에이블린(캐리 크로울리 분)과 션(앤드류 베넷 분)에게로 질주한다. 영화 속 달리는 여자들은 달리기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어 욕망을 드러내고, 자아를 발견하고, 집을 찾아낸다. 목구멍에서 피의 비린 맛이 올라오고, 숨의 뱉고 마심이 육안으로 보일 것만 같은 여성의 질주는 오랜 시간 분투해 온 그들의 존재를 선언하는 몸부림이다.
달리는 일은 걷기의 확장이지만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보통의 걷기는 매우 일상적이지만 이에 가속을 붙인 달리기는 비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걷기에 비해 숨이 차고,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빠르게 달아오른다. 달리기 운동의 대표 격인 마라톤이 우리나라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시기가 딱 두 번 있다. 첫째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손기정 선수의 활동 시기이다. 살에 닿은 뼈가 훤히 드러나는 마른 체격의 손기정 선수는 대한민국에 어떤 운동 도구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릴 때까지 뛰었다. 그러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이봉주 선수가 마라톤의 전성기를 다시금 불러온다. IMF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이 크게 휘청거렸을 때이다. 우리는 늘 절박한 순간에 달려왔다. 달리기는 우리에게 자연이 허락한 신체만을 요구한다. 이 원초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의식하게 하고, 결국 ‘나’를 발산한다. 나의 움직임으로 내가 나를 체험하는 달리기는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 존재를 선언하는 몸부림이다.
무언가를 위해 달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리코리쉬 피자(2022)>는 달리는 영화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그가 평소에도 달리는 행위에 얼마나 많은 시네마 적 힘을 쏟는지 알 수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3)>에서 배리 역의 애덤 샌들러는 쉬지도 않고 달린다. 영화 본연의 정신없는 템포에 발맞추어 쉬지 않고 뛰는 애덤 샌들러를 보고 있자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 ‘과연 앤더슨이 저 장면들을 몇 테이크에 끝냈을까’와 같은 쓸데없는 것들이 궁금해진다. 도 마찬가지다.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 분)은 밭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프레임 안에 보일락 말락 하는 추격자로부터 도망치는 그는 넓은 롱숏에서 그저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달리기는 무력해 보인다. 이 무력감은 앤더슨 영화의 달리는 장면 대부분에 존재한다. 그는 인물들의 무의미한 달리기를 조명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제자리걸음을 냉소한다. 하지만 <리코리쉬 피자>에서의 달리기는 달랐다. 앤더슨이 보여준 알라나와 게리(쿠퍼 호프만 분)의 달리기는 분명 힘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리코리쉬 피자>에는 알라나와 개리의 관계를 상징하는 세 번의 주요한 달리기가 등장한다. 그 중 두 번은 알라나와 개리가 각각 달리고, 한 번은 함께 달린다. 하나는 경찰서에 갇힌 개리를 꺼내주기 위해 달리는 알라나이고 둘은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알라나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개리이다. 앤더슨은 이 두 숏을 비슷하게 운용한다. 인물을 바스트 숏으로 잡고 함께 달린다. 인물의 속도가 카메라의 그것보다 뒤처져 프레임을 벗어날락 말락 하지만, 카메라는 이내 방향을 틀어 인물과 발을 맞춘다. 병렬적으로 위치한 두 번의 달리기 속 알라나와 개리 모두 오른쪽을 향해 달린다. 이대로라면 달리기의 끝에서 둘은 서로를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세 번째 달리기는 이를 역전시킨다.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 개리와 알라나는 서로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이때 개리는 오른쪽을, 알라나는 왼쪽을 향하고, 화면에는 앞서 언급한 두 번의 달리기가 교차 편집된다. 여전히 오른쪽을 향해 달리는 개리와 다르게 왼쪽을 향해 달리는 알라나에게는 전에 등장한 적 없는 왼쪽을 향해 달리는 푸티지가 삽입된다. 방향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변화한 인물은 알라나이다. 오른쪽만을 향해 달리던 알라나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개리를 만났다. 여성 캐릭터가 주도적으로 변화해서 쟁취한 이 사랑은 앤더슨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남성들의 달리기와는 다르다. 욕망을 드러내고 욕망을 향해 달리는 알라나는 결국 이 달리기의 끝에서 개리를 와락 안는다.
방향이 잘못 되었더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특정 영화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몇 가지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 매체로서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다. 이 측면에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오슬로 트릴로지의 마지막 작품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는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 그의 연출은 온 세상이 멈추고 혼자만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질주하는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 분)의 모습을 관객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게 했다. —<나의 결혼 원정기(2005)> 속 정재영 배우의 ‘택배 짤’에 빚진 부분도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이 달리기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율리에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의 자주권을 온전히 가진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달리기가 과연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혹은 율리에의 상상 속 허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든 허구든 율리에는 그 시공간 속에서 완벽히 자유로웠다.
율리에는 이 달리기를 통해 오랫동안 스스로를 갉아먹던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녀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성숙한 연인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 분)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을 주는 에이빈드(헤르베르트 노르드룸 분)를 향해 달려 나갔고, 온 세상이 사랑으로 물드는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율리에의 달리기는 그뿐이다. 에이빈드는 율리에의 정답이 되지 못한다. 그녀의 종착지가 에이빈드였기 때문에, 율리에는 나침반을 다시 맞추어야 했다. 율리에가 뛰어야 하는 길의 끝에 서 있는 이는 악셀도, 에이빈드도 아니다. 다만 율리에 본인이다. 애인의 집을 전전하고, 애인의 일상에 맞춰 본인을 조각하던 율리에는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혼자 살게 된다. 본인이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 벽을 꾸민 율리에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르게 편안해 보인다. 나침반을 다시 맞춘 그녀의 달리기는 이제 완성된 것이다.
그 어떤 힘이 당신의 발목을 붙들지라도 계속해서 달려줬으면 한다.
율리에가 몰랐던 것을 속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 분)는 알았다. 아름다운 모습의 유리들이 위태롭게 서로 부딪치는 샹들리에처럼, 화려하지만 바스러질 듯한 삶을 살았던 다이애나는 자신을 가둔 인형의 집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이애나’가 아닌 ‘스펜서’로 존재할 수 있는 집을 찾는다. 다이애나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영화 초반, 스펜서 가문의 마지막 유산을 걸친 허수아비를 본 다이애나는 차를 멈춘다. 그녀는 뾰족한 검정 구두를 신고 울타리를 넘어 눅눅한 밭길을 걷는다. 구두 굽이 밭에 푹 꽂히고, 끈적한 흙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지만, 다이애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힘을 주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허수아비에게 얹힌 오래된 재킷을 벗긴다. 먼지가 가득한 옷을 털어 팔에 걸치고 돌아가는 다이애나의 발걸음은 사뿐사뿐한 듯 보이지만 실은 진득한 땅으로부터 뾰족한 구두 굽을 떼어내는 강한 힘과 의지의 표상이다.
영화 말미 다이애나는 자유를 갈구하는 춤을 춘다. 꽉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펴듯 그녀는 발아하는 춤을 춘다.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춤은 점점 격렬해지고, 거울이 가득한 방에서는 캉캉의 그것과 비슷한 스텝을 밟는다. 수많은 다이애나가 교차하는 그 방에서 춤을 추던 다이애나 이후에 하늘색 자전거의 패달을 힘차게 밟는 어린 다이애나가 등장한다. 그녀는 교복을 입는 소녀가 되고, 책 세 권을 안고 달리던 소녀는 곧 책을 내던진다. 달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추진력을 얻은 다이애나는 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력을 다해 뛴다. 노란 셋업을 입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발에는 검정 구두가 아닌 흰 운동화가 신겨 있다. 다이애나는 바람을 가로지르며 노란 모자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녀의 질주는 온전히 그녀를 위해, 그녀를 향하여 있다. 다이애나는 해방되었다. 온전히 그녀가 얻어낸 해방이다.
⌜사랑의 단상(1977)⌟ 에서 롤랑 바르트가 쓴 언어를 빌리자면, 오랜 시간 동안 여자는 “칩거자”, 남자는 “사냥꾼이자 나그네”였다. 심지어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이 26마일 이상을 뛰면 자궁이 찢어져서 떨어져 나간다”는 이유로—당신은 마라톤을 뛰어서 자궁이 찢어진 여성을 본 적이 있는가—여성의 마라톤 참여는 금지되어 왔다. 여성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들의 오만한 권위는 여성의 두 다리를 묶었지만, 로베르타 깁 벤게이, 캐서린 스위처와 같은 이름은 그들의 자연한 움직임을 되찾기 위해 부딪히고 달렸다.
여성의 달리기는 조롱의 돌부리들을 보란 듯 걷어 찼고, 이제는 더 멀리 질주하고 있다. 이 여정은 스크린에서도 계속된다. 알라나의 ‘사랑’, 율리에의 ‘성장’, 그리고 다이애나의 ‘자유’는 영화 속에서 달리기로 나타났다. <리코리쉬 피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펜서> 뿐 아니라 최근 개봉한 콤 베어리드의 <말없는 소녀(2022)>에서도 주인공 코오트(캐서린 클린치 분)는 자신을 학대하는 가정으로부터 진정한 집의 의미를 알려준 에이블린(캐리 크로울리 분)과 션(앤드류 베넷 분)에게로 질주한다. 영화 속 달리는 여자들은 달리기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어 욕망을 드러내고, 자아를 발견하고, 집을 찾아낸다. 목구멍에서 피의 비린 맛이 올라오고, 숨의 뱉고 마심이 육안으로 보일 것만 같은 여성의 질주는 오랜 시간 분투해 온 그들의 존재를 선언하는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