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 영화 - 부유하는 이미지
WEBZINE
WEDITOR 최현수
한국영상자료원, 서울아트시네마, 각종 시네마테크와 독립영화관, 그리고 영화제에는 좀비들이 살고 있다. 아침까지 술을 먹고도 귀신같이 9시, 10시 조조 영화를 보러 기어 나오는 좀비들. 밤샘 작업과 피곤함에 절은 육신을 아메리카노나 에너지 음료로 채워놓고선 기어코 극장으로 향한다. 특히 영화제만 되면 그 증상은 더 심해진다. 하루에 적게는 4편, 많으면 6편의 영화를 보고,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술을 마시러 간다. 명심하자. (나를 포함한) 이들은 절대로 철인이 아니다. 부작용은 필히 존재한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중첩되다 못해 쇄도하면서 비롯되는 일종의 시각-인지적 숙취. 대부분 잠은 형편없는 영화를 볼 때 충당한다. 문제는 엄청난 영화를 볼 때도 피로와 잠이 쏟아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 좀비’들은 연속이 불가능한 분절된 이미지들의 더미만을 목격할 따름이다.
이 영화 좀비들의 행태를 생각하면서 나는 졸음에 허덕이면서도 뇌리에서 잊지 못하는 몇몇 영화의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작년 부산, 아침 9시에 숙취를 게우며 알베르 세라의 <퍼시픽션(2022)>을 보았고, 나른한 하와이안 서프 뮤직 때문인지 내내 휘청거리며 잠을 잤다. 165분의 러닝타임 중 제대로 영화를 본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흰색 정장을 고집한 채 식민지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고위 공무원 드 롤러 (브노아 마지멜 분)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곤 섬을 빠져나가는 용병 군인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른한 보랏빛 석양 아래에서 보트는 유유히 떠나고 있고, 맥락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의 얼굴이 보이다가 금세 다시 장엄한 자연 속에서 보트는 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왜 그 섬을 떠나는지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3년 전 나는 NERD를 통해서 넷플릭스부터 디즈니 플러스로 이어지는 OTT의 독자적인 배급망이 영화의 중단을 가속할 것이며, 이 중단이 곧 프레임 단위의 강박으로 이어지는 자극적 영화의 확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내보였다. 언뜻 볼 때 영화를 보다가 조는 행위는 OTT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정지시키는 행위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지점 모두 이미지의 매혹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정지는 영화의 연속적 운동 자체를 중단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면, 전자의 수면은 영화의 운동을 멈출 수 있는 위력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리클라이너 좌석에서 침을 흘리며 자는 동안에도 영화는 당신을 놀리듯 계속 움직인다. 잠에서 깬 뒤에 당신에게 남는 것은 서사의 중추가 토막 나 버린 한 뭉텅이의 이미지다. 맥락도 서사도 소거된 채 움직임과 비주얼만이 남은 이미지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퍼시픽션>의 퇴각하는 군인들의 얼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이 겁에 질려서 도망친 것인지, 부정한 일에 엮여서 쫓기듯 섬을 떠난 것인지 혹은 모든 정복과 승리를 끝낸 채 유유히 섬을 빠져나가는 것인지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그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퇴각의 목적도 그들의 감정도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는 나는 왜 그 이미지에 매료된 것일까? 전혀 엉뚱하게도 나는 그 장면에서 F.W 무르나우의 <타부(1931)>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소년이 금기를 어긴 채 소녀와 탈출하려 하지만, 끝내 거친 파도가 그들을 집어삼키고 만 장면이었다. 물론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바다를 영화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퍼시픽션>과 <타부>의 공간적 배경은 유사할지 모르지만, <퍼시픽션>의 기이할 만큼 나른한 리듬과 비하면 <타부>는 공격적이다. 마치 에이햅 선장과 모비 딕의 이야기가 연상될 만큼 거친 파도가 인물을 덮치고, 끝내 인물을 프레임에서 집어삼켜 삭제시키는 급진성을 지니고 있다. 도무지 두 영화는 쇼트의 리듬, 강도, 인물과 자연의 인과성을 고려해볼 때 크게 연관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난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퍼시픽션> 속 그 장면으로부터 <타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섬을 떠나는 군인들의 표정에서 어떠한 기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앞에 붙은 일련의 쇼트들은 모두 수면으로 인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하는지 알 방도가 없다. 더는 어떤 의미 작용도 하지 않는 인물들의 표정 뒤에 유유히 떠나는 배 한 척의 모습은 마치 목석처럼 변해버린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모는 인상을 준다.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삭제시키는 바다의 풍광.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퍼시픽션>과 <타부>의 서로 다른 영화적 운동을 연결할 수 있었다. 이토록 터무니없는 연상법의 사고 과정을 추적해보면서, 우리는 ‘기표’의 유실이라는 지점이 곧 수면의 영화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우리를 비웃으며 여전히 운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서사와 논리의 사슬을 끊어버린 채 공허하게 떠도는 이미지만을 직시하고 있지 않은가?
맥락이 소거된 이미지. 역설적으로 수면은 이미지에서 서사와 맥락을 소거함으로 새로운 몽타주를 구축할 기회를 선물한다. 마치 <퍼시픽션>의 한 장면을 보고 연관성이 옅은 <타부>를 소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면의 몽타주는 유실된 서사의 자리에 이미지의 운동을 통한 다른 영화의 이미지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가령 내내 코를 골며 잠을 잤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1950)>에서 유일하게 건져 올린 장면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도는 성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각자 뿔뿔이 흩어지는 라스트 시퀸스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장 그레미용의 <폭풍우(1941)> 속 회전하는 인물들의 춤사위를 떠올렸다. 당연히 회전하는 인물들을 다룬 작품이야 막스 오퓔스의 <마담 드(1953)>같은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지만, <폭풍우> 속 회전 무도회의 장면은 원과 직선이 모두 존재한다는 점에서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속 원과 방사형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두 영화를 이어 하나의 몽타주처럼 사용할 때, 나는 오로지 이미지의 운동에만 집중했다. <폭풍우>는 치정극이고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는 성자를 다루는 종교적인 영화다. 과연 서사와 문맥이 소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두 영화를 함께 병치할 수 있었을까?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잠에 드는 행위는 당연히 당신이 그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퍼시픽션>과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의 줄거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잠에 허덕이며 흐릿하게 기억해낸 각 영화의 장면마저 사실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그 장면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맥락이 유실된 채 부유하다가 우연히 조우하게 된 이미지의 매혹을 믿을 뿐이다. 제아무리 사경을 헤매듯 좌석 등받이에서 이리저리 몸을 휘저으며 조는 관객이라고 해도, 어떤 작품의 이미지가 지닌 활력은 서사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 이미지가 지니는 힘은 새로운 망상의 몽타주를 개발할 기회를 제공한다. 비어있는 기표의 공백만이 남은 자리에 오로지 동적인 유사성만을 지닌 다른 작품의 주석이 덧대어진다. 감정은 무용하고, 이데올로기와 표상마저 사라지는 순간, 우습게도 수면의 영화는 프레임과 카메라의 활강이 관객을 매료할 때가 찾아온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런 순간을 느껴본 적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편협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당신들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이 상황을 설명해보고 싶었다.
나는 이 글을 마치고 곧장 이태원으로 향해서 밤을 지샐 예정이다. 내일 오후 2시에는 정동에서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2016)>을 볼 것이다. 아메리카노와 에너지 드링크를 꼽고 정신을 차려보려 노력하겠지만, 혹여 내가 객석에서 졸아도 마음을 놓을 것 같다. 설령 잠에 취해 분절된 이미지만이 뇌리에 박혀 있어도, 나는 그 이미지가 주는 쾌감을 기꺼이 만끽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 좀비들의 행태를 생각하면서 나는 졸음에 허덕이면서도 뇌리에서 잊지 못하는 몇몇 영화의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작년 부산, 아침 9시에 숙취를 게우며 알베르 세라의 <퍼시픽션(2022)>을 보았고, 나른한 하와이안 서프 뮤직 때문인지 내내 휘청거리며 잠을 잤다. 165분의 러닝타임 중 제대로 영화를 본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흰색 정장을 고집한 채 식민지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고위 공무원 드 롤러 (브노아 마지멜 분)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곤 섬을 빠져나가는 용병 군인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른한 보랏빛 석양 아래에서 보트는 유유히 떠나고 있고, 맥락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의 얼굴이 보이다가 금세 다시 장엄한 자연 속에서 보트는 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왜 그 섬을 떠나는지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3년 전 나는 NERD를 통해서 넷플릭스부터 디즈니 플러스로 이어지는 OTT의 독자적인 배급망이 영화의 중단을 가속할 것이며, 이 중단이 곧 프레임 단위의 강박으로 이어지는 자극적 영화의 확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내보였다. 언뜻 볼 때 영화를 보다가 조는 행위는 OTT 플랫폼을 통해 영화를 정지시키는 행위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지점 모두 이미지의 매혹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정지는 영화의 연속적 운동 자체를 중단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면, 전자의 수면은 영화의 운동을 멈출 수 있는 위력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리클라이너 좌석에서 침을 흘리며 자는 동안에도 영화는 당신을 놀리듯 계속 움직인다. 잠에서 깬 뒤에 당신에게 남는 것은 서사의 중추가 토막 나 버린 한 뭉텅이의 이미지다. 맥락도 서사도 소거된 채 움직임과 비주얼만이 남은 이미지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퍼시픽션>의 퇴각하는 군인들의 얼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이 겁에 질려서 도망친 것인지, 부정한 일에 엮여서 쫓기듯 섬을 떠난 것인지 혹은 모든 정복과 승리를 끝낸 채 유유히 섬을 빠져나가는 것인지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그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퇴각의 목적도 그들의 감정도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는 나는 왜 그 이미지에 매료된 것일까? 전혀 엉뚱하게도 나는 그 장면에서 F.W 무르나우의 <타부(1931)>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소년이 금기를 어긴 채 소녀와 탈출하려 하지만, 끝내 거친 파도가 그들을 집어삼키고 만 장면이었다. 물론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바다를 영화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퍼시픽션>과 <타부>의 공간적 배경은 유사할지 모르지만, <퍼시픽션>의 기이할 만큼 나른한 리듬과 비하면 <타부>는 공격적이다. 마치 에이햅 선장과 모비 딕의 이야기가 연상될 만큼 거친 파도가 인물을 덮치고, 끝내 인물을 프레임에서 집어삼켜 삭제시키는 급진성을 지니고 있다. 도무지 두 영화는 쇼트의 리듬, 강도, 인물과 자연의 인과성을 고려해볼 때 크게 연관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난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퍼시픽션> 속 그 장면으로부터 <타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섬을 떠나는 군인들의 표정에서 어떠한 기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앞에 붙은 일련의 쇼트들은 모두 수면으로 인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하는지 알 방도가 없다. 더는 어떤 의미 작용도 하지 않는 인물들의 표정 뒤에 유유히 떠나는 배 한 척의 모습은 마치 목석처럼 변해버린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모는 인상을 준다.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삭제시키는 바다의 풍광.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퍼시픽션>과 <타부>의 서로 다른 영화적 운동을 연결할 수 있었다. 이토록 터무니없는 연상법의 사고 과정을 추적해보면서, 우리는 ‘기표’의 유실이라는 지점이 곧 수면의 영화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우리를 비웃으며 여전히 운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서사와 논리의 사슬을 끊어버린 채 공허하게 떠도는 이미지만을 직시하고 있지 않은가?
맥락이 소거된 이미지. 역설적으로 수면은 이미지에서 서사와 맥락을 소거함으로 새로운 몽타주를 구축할 기회를 선물한다. 마치 <퍼시픽션>의 한 장면을 보고 연관성이 옅은 <타부>를 소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면의 몽타주는 유실된 서사의 자리에 이미지의 운동을 통한 다른 영화의 이미지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가령 내내 코를 골며 잠을 잤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1950)>에서 유일하게 건져 올린 장면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도는 성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각자 뿔뿔이 흩어지는 라스트 시퀸스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장 그레미용의 <폭풍우(1941)> 속 회전하는 인물들의 춤사위를 떠올렸다. 당연히 회전하는 인물들을 다룬 작품이야 막스 오퓔스의 <마담 드(1953)>같은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지만, <폭풍우> 속 회전 무도회의 장면은 원과 직선이 모두 존재한다는 점에서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속 원과 방사형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두 영화를 이어 하나의 몽타주처럼 사용할 때, 나는 오로지 이미지의 운동에만 집중했다. <폭풍우>는 치정극이고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는 성자를 다루는 종교적인 영화다. 과연 서사와 문맥이 소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두 영화를 함께 병치할 수 있었을까?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잠에 드는 행위는 당연히 당신이 그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퍼시픽션>과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의 줄거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잠에 허덕이며 흐릿하게 기억해낸 각 영화의 장면마저 사실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그 장면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맥락이 유실된 채 부유하다가 우연히 조우하게 된 이미지의 매혹을 믿을 뿐이다. 제아무리 사경을 헤매듯 좌석 등받이에서 이리저리 몸을 휘저으며 조는 관객이라고 해도, 어떤 작품의 이미지가 지닌 활력은 서사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 이미지가 지니는 힘은 새로운 망상의 몽타주를 개발할 기회를 제공한다. 비어있는 기표의 공백만이 남은 자리에 오로지 동적인 유사성만을 지닌 다른 작품의 주석이 덧대어진다. 감정은 무용하고, 이데올로기와 표상마저 사라지는 순간, 우습게도 수면의 영화는 프레임과 카메라의 활강이 관객을 매료할 때가 찾아온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런 순간을 느껴본 적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편협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당신들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이 상황을 설명해보고 싶었다.
나는 이 글을 마치고 곧장 이태원으로 향해서 밤을 지샐 예정이다. 내일 오후 2시에는 정동에서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2016)>을 볼 것이다. 아메리카노와 에너지 드링크를 꼽고 정신을 차려보려 노력하겠지만, 혹여 내가 객석에서 졸아도 마음을 놓을 것 같다. 설령 잠에 취해 분절된 이미지만이 뇌리에 박혀 있어도, 나는 그 이미지가 주는 쾌감을 기꺼이 만끽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