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욕망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WEBZINE
WEDITOR 강민지
‘나 이상해?’
쥐스틴(가랑스 마릴리에 분)이 언니 알렉시아(엘라 룸프 분)에게 묻는다. 가족을 따라 수의학교에 입학했지만 이곳에 어울리는 것은 쉽지 않다. 쥐스틴은 무리에서 눈에 띄는 쪽이었다. 델마(에일리 하보 분)는 매일 시험에 든다. 처음으로 부모의 곁을 떠나 온 대학은 지금껏 자신에게 금지되었던 것투성이다. 쥐스틴과 델마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 이 세계가.
<로우(2017)>와 <델마(2017)> 속 쥐스틴과 델마를 둘러싼 세계는 이들을 이상한 것으로 규정지었다. 쥐스틴의 학교는 폭력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범주화가 자행되는 곳이다. 채식주의자의 의사는 무시당하고, 신입생들을 바닥을 기어야 하며, 게이와 여자는 다를 바 없다는 취급을 받는다. 델마는 종교라는 미명하에 부모의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살아왔다. 아버지는 델마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묻고, 행동 하나하나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나’라는 존재 자체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이 억압에 대해 이들은 내재한 욕망을 인식함으로써 저항하고, 경직된 세계 속에서 압도적이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이들은 무엇을, 왜 욕망해야 했을까?
쥐스틴과 델마의 욕망은 각각 카니발리즘과 초능력으로 대표된다. 채식주의자인 쥐스틴은 신입생 신고식의 의례라는 이유로 강제로 토끼의 콩팥을 삼켜야 했다. 이후 그에 대한 반발기제로 쥐스틴은 고기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알렉시아의 손가락으로 처음 인간의 맛을 본 순간, 이 갈망은 타인과 외부로 향한다.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대는 쥐스틴의 모습은 그가 누군가를 물어 뜯을 것만 같다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델마의 발작은 그를 통제하던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난 후 시작되었다. 특히 아냐(카야 윌킨스 분)라는, 욕망이자 동시에 금지된 대상을 마주할 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후 아버지를 불태우고, 어머니의 다리를 낫게 해주고, 아냐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델마는 마치 세계를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전능한 신과도 같아 보인다.
이렇듯 욕망은 내부에서 시작되어 외부로 향하는 확장이다. 그러나 뻗어 나가지 못하고 묶여 있던 쥐스틴과 델마의 욕망은 영화의 초중반까지 물리적인 이상 반응을 유발한다. 쥐스틴은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몸을 미친듯이 긁고, 델마는 발작 증세를 보인다. <로우>에서 카메라는 극도의 클로즈업을 통해 발진이 돋고 피부가 벗겨진 쥐스틴의 몸을 화면에 가득 채운다. 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자주 대상화되고 비정상적으로 전시된다. 마치 사물처럼 감정이나 반응은 소거된 채, 관음적 시선의 카메라를 통해, 마네킹처럼 결점 없는 신체가 담기곤 한다.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로우> 이전의 <주니어(2011)>에서부터 그러한 방식에 반발했다. <주니어> 속 청소년기의 변화를 겪는 주인공의 몸은 마치 곤충이 탈바꿈하듯 진액이 흘러나오고, 갈라지고, 살이 벗겨진다. 미화된 여성의 신체를 훑던 영화 속 장면들과 반대로 뒤쿠르노 감독은 관객이 여성의 몸을 보면서 공포와 불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신체형 장애(somatoform disorder)는 억압감이나 우울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신체의 문제로 발현되는 것으로, 의학적으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장애다. 델마의 뇌를 검사한 의사는 델마의 발작이 ‘다른 뭔가의 징후’일 수 있고 ‘정신적 억압에 신체가 반응하는 것’이라며,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이 의심된다고 말한다. 이후 영화는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과 관련된 실제 자료 이미지들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나열하여 보여준다. 그중 는 19세기 남성 신경학자가 여성에게 자주 나타나는 ‘히스테리아’라는 질병에 대해 강연하며 임상 시연을 보이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히스테리아’는 여성의 자궁(포궁)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갖는다. 여성의 신체형 장애를 단순히 광기로 치부해 버리고, 그 원인을 여성들의 삶에서 찾지 못했던 당대 지식인 남성들의 관점이 투영된 말이다. 잔 다르크와 화형을 당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이보다 앞선 중세를 살았던 여성들을 대표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히스테리아’ 증상을 보이는 여성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마녀로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영화에서 델마의 아버지와, 사실상 아무런 죄가 없는 남동생 마티아스가 죽어야 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중세 시대 여성들은 자신이 마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가라앉아야 했다.
<델마>가 중세 여성들의 고통을 미러링하는 것처럼, 두 영화는 이제까지 여성이 영화에서 재현되어 온 방식을 명확히 뒤집고자 한다. 구조상으로도 두 영화는 부계 중심 서사의 전복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영화에서 특수한 능력 혹은 주요한 역할과 지위가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이어지는 부자 계승 구조는 가부장제를 표방하고 어머니와 딸을 소외시킨다. <블랙 팬서(2018)>에서 슈리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기생충(2019)>에서 기정은 칼에 찔려 죽어야 했다. 반대로 <로우>와 <델마>는 모녀 계승 구조를 선택하여 이야기의 주요 흐름에서 남성들을 제외한다. <델마> 속 할머니-아버지-델마로 이어지는 구도에서 능력을 이어받은 것은 델마뿐이고, <로우>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는 쥐스틴과 알렉시아의 본능이 어머니로부터 대물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영화에서 남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델마>의 아버지는 명백히 델마를 억압하는 존재, 따라서 처형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로우>에서도 대학 내 폭력적인 위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자 선배들은 델마의 아버지와 동일하게 분류된다. 하지만 쥐스틴의 아버지와 아드리앙(라바 내 우펠라 분)은 아니다. 여기서 환기해야 할 것은 쥐스틴과 델마의 욕망이 성적 욕망과 함께 간다는 점이다. 두 영화는 여성의 대상화된 욕망이 아닌 주체가 된 성적 욕망을 담는다. 레즈비언 캐릭터를 그리는 <델마>에서는 남성이 아예 배제될 수밖에 없다. 델마의 욕망은 여성에서 시작해서 여성으로 끝난다. 한편 <로우>에서 쥐스틴의 아버지와 아드리앙으로 묶이는 남성은 여성 인물이 갖는 욕구를 해소할 대상으로 머무른다. 상체를 드러낸 채 축구를 하는 아드리앙을 눈으로 좇으며 코피를 흘리는 쥐스틴은 영화의 첫 쇼트에서 사냥하던 알렉시아처럼 금방이라도 돌진할 것 같은 매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이후 집어삼킬 기세로 아드리앙과 몸을 섞는 쥐스틴의 모습은 먹잇감을 목전에 둔 맹수에 가까워 보인다. 남성 인물과의 성적 관계 속에서 여성을 주로 욕망의 객체에 위치시켰던 영화들에 반하듯 두 영화는 성적 주도권을 온전히 여성에게 부여한다.
욕망은 인물의 주체성으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원하고 탐한다는 것은 자아를 이루는 한 요소이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적극성을 띠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를 깨닫는 시발점이 되고, 그것을 표출함으로써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쥐스틴과 델마는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의 문턱을 넘으려는 시점에 놓여있다. 두 영화는 성인으로의 이행, 전환의 시기를 겪고 있는 주인공들이 욕망을 발판 삼아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델마>에서 아버지가 빠져 죽은 호수를 바라보던 델마는 물속으로 들어간다. 아냐를 없앴다는 죄책감에 발작을 일으키다 수영장 물속에 갇혔던 앞선 시퀀스와 달리, 여기서 델마는 어두컴컴한 깊은 호수 아래로 스스로 헤엄쳐 들어간다. 그 어둠 끝에 델마가 헤엄쳐 올라온 곳은 아냐를 만났던 수영장이고, 델마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마주본다. <로우>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리벽에 겹쳐진 쥐스틴과 알렉시아의 얼굴은 제3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곧 쥐스틴의 새로운 얼굴이다. 새로운 쥐스틴은 자신을 깨닫는 과정을 거쳤기에 영화 초반의 쥐스틴과 결코 같을 수 없고, 결국에는 수감되고 만 알렉시아와도 틀림없이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첫머리의 질문 ‘Tu me trouves bizarre comme fille?’는 ‘나 여자로서 이상해?’로 직역된다. 여러 영화에서 욕망하는 여성은 이상한 여성으로 여겨져 왔다. 대부분 여성은 남성 인물이 갖는 욕망의 대상 그 자체가 되었고, 여성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거나 쉽게 대상화되곤 했다. 우리가 영화, 그리고 서사에서 주로 성장하는 인물은 남성 인물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수많은 여성 인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식하지 못했고, 그 욕망이 이루고 있는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그것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쥐스틴(가랑스 마릴리에 분)이 언니 알렉시아(엘라 룸프 분)에게 묻는다. 가족을 따라 수의학교에 입학했지만 이곳에 어울리는 것은 쉽지 않다. 쥐스틴은 무리에서 눈에 띄는 쪽이었다. 델마(에일리 하보 분)는 매일 시험에 든다. 처음으로 부모의 곁을 떠나 온 대학은 지금껏 자신에게 금지되었던 것투성이다. 쥐스틴과 델마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 이 세계가.
<로우(2017)>와 <델마(2017)> 속 쥐스틴과 델마를 둘러싼 세계는 이들을 이상한 것으로 규정지었다. 쥐스틴의 학교는 폭력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범주화가 자행되는 곳이다. 채식주의자의 의사는 무시당하고, 신입생들을 바닥을 기어야 하며, 게이와 여자는 다를 바 없다는 취급을 받는다. 델마는 종교라는 미명하에 부모의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살아왔다. 아버지는 델마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묻고, 행동 하나하나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나’라는 존재 자체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이 억압에 대해 이들은 내재한 욕망을 인식함으로써 저항하고, 경직된 세계 속에서 압도적이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이들은 무엇을, 왜 욕망해야 했을까?
쥐스틴과 델마의 욕망은 각각 카니발리즘과 초능력으로 대표된다. 채식주의자인 쥐스틴은 신입생 신고식의 의례라는 이유로 강제로 토끼의 콩팥을 삼켜야 했다. 이후 그에 대한 반발기제로 쥐스틴은 고기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알렉시아의 손가락으로 처음 인간의 맛을 본 순간, 이 갈망은 타인과 외부로 향한다.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대는 쥐스틴의 모습은 그가 누군가를 물어 뜯을 것만 같다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델마의 발작은 그를 통제하던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난 후 시작되었다. 특히 아냐(카야 윌킨스 분)라는, 욕망이자 동시에 금지된 대상을 마주할 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후 아버지를 불태우고, 어머니의 다리를 낫게 해주고, 아냐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델마는 마치 세계를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전능한 신과도 같아 보인다.
이렇듯 욕망은 내부에서 시작되어 외부로 향하는 확장이다. 그러나 뻗어 나가지 못하고 묶여 있던 쥐스틴과 델마의 욕망은 영화의 초중반까지 물리적인 이상 반응을 유발한다. 쥐스틴은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몸을 미친듯이 긁고, 델마는 발작 증세를 보인다. <로우>에서 카메라는 극도의 클로즈업을 통해 발진이 돋고 피부가 벗겨진 쥐스틴의 몸을 화면에 가득 채운다. 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자주 대상화되고 비정상적으로 전시된다. 마치 사물처럼 감정이나 반응은 소거된 채, 관음적 시선의 카메라를 통해, 마네킹처럼 결점 없는 신체가 담기곤 한다.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로우> 이전의 <주니어(2011)>에서부터 그러한 방식에 반발했다. <주니어> 속 청소년기의 변화를 겪는 주인공의 몸은 마치 곤충이 탈바꿈하듯 진액이 흘러나오고, 갈라지고, 살이 벗겨진다. 미화된 여성의 신체를 훑던 영화 속 장면들과 반대로 뒤쿠르노 감독은 관객이 여성의 몸을 보면서 공포와 불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신체형 장애(somatoform disorder)는 억압감이나 우울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신체의 문제로 발현되는 것으로, 의학적으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장애다. 델마의 뇌를 검사한 의사는 델마의 발작이 ‘다른 뭔가의 징후’일 수 있고 ‘정신적 억압에 신체가 반응하는 것’이라며,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이 의심된다고 말한다. 이후 영화는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과 관련된 실제 자료 이미지들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나열하여 보여준다. 그중 는 19세기 남성 신경학자가 여성에게 자주 나타나는 ‘히스테리아’라는 질병에 대해 강연하며 임상 시연을 보이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히스테리아’는 여성의 자궁(포궁)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갖는다. 여성의 신체형 장애를 단순히 광기로 치부해 버리고, 그 원인을 여성들의 삶에서 찾지 못했던 당대 지식인 남성들의 관점이 투영된 말이다. 잔 다르크와 화형을 당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이보다 앞선 중세를 살았던 여성들을 대표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히스테리아’ 증상을 보이는 여성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마녀로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영화에서 델마의 아버지와, 사실상 아무런 죄가 없는 남동생 마티아스가 죽어야 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중세 시대 여성들은 자신이 마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가라앉아야 했다.
<델마>가 중세 여성들의 고통을 미러링하는 것처럼, 두 영화는 이제까지 여성이 영화에서 재현되어 온 방식을 명확히 뒤집고자 한다. 구조상으로도 두 영화는 부계 중심 서사의 전복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영화에서 특수한 능력 혹은 주요한 역할과 지위가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이어지는 부자 계승 구조는 가부장제를 표방하고 어머니와 딸을 소외시킨다. <블랙 팬서(2018)>에서 슈리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기생충(2019)>에서 기정은 칼에 찔려 죽어야 했다. 반대로 <로우>와 <델마>는 모녀 계승 구조를 선택하여 이야기의 주요 흐름에서 남성들을 제외한다. <델마> 속 할머니-아버지-델마로 이어지는 구도에서 능력을 이어받은 것은 델마뿐이고, <로우>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는 쥐스틴과 알렉시아의 본능이 어머니로부터 대물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영화에서 남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델마>의 아버지는 명백히 델마를 억압하는 존재, 따라서 처형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로우>에서도 대학 내 폭력적인 위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자 선배들은 델마의 아버지와 동일하게 분류된다. 하지만 쥐스틴의 아버지와 아드리앙(라바 내 우펠라 분)은 아니다. 여기서 환기해야 할 것은 쥐스틴과 델마의 욕망이 성적 욕망과 함께 간다는 점이다. 두 영화는 여성의 대상화된 욕망이 아닌 주체가 된 성적 욕망을 담는다. 레즈비언 캐릭터를 그리는 <델마>에서는 남성이 아예 배제될 수밖에 없다. 델마의 욕망은 여성에서 시작해서 여성으로 끝난다. 한편 <로우>에서 쥐스틴의 아버지와 아드리앙으로 묶이는 남성은 여성 인물이 갖는 욕구를 해소할 대상으로 머무른다. 상체를 드러낸 채 축구를 하는 아드리앙을 눈으로 좇으며 코피를 흘리는 쥐스틴은 영화의 첫 쇼트에서 사냥하던 알렉시아처럼 금방이라도 돌진할 것 같은 매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이후 집어삼킬 기세로 아드리앙과 몸을 섞는 쥐스틴의 모습은 먹잇감을 목전에 둔 맹수에 가까워 보인다. 남성 인물과의 성적 관계 속에서 여성을 주로 욕망의 객체에 위치시켰던 영화들에 반하듯 두 영화는 성적 주도권을 온전히 여성에게 부여한다.
욕망은 인물의 주체성으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원하고 탐한다는 것은 자아를 이루는 한 요소이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적극성을 띠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를 깨닫는 시발점이 되고, 그것을 표출함으로써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쥐스틴과 델마는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의 문턱을 넘으려는 시점에 놓여있다. 두 영화는 성인으로의 이행, 전환의 시기를 겪고 있는 주인공들이 욕망을 발판 삼아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델마>에서 아버지가 빠져 죽은 호수를 바라보던 델마는 물속으로 들어간다. 아냐를 없앴다는 죄책감에 발작을 일으키다 수영장 물속에 갇혔던 앞선 시퀀스와 달리, 여기서 델마는 어두컴컴한 깊은 호수 아래로 스스로 헤엄쳐 들어간다. 그 어둠 끝에 델마가 헤엄쳐 올라온 곳은 아냐를 만났던 수영장이고, 델마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마주본다. <로우>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리벽에 겹쳐진 쥐스틴과 알렉시아의 얼굴은 제3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곧 쥐스틴의 새로운 얼굴이다. 새로운 쥐스틴은 자신을 깨닫는 과정을 거쳤기에 영화 초반의 쥐스틴과 결코 같을 수 없고, 결국에는 수감되고 만 알렉시아와도 틀림없이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첫머리의 질문 ‘Tu me trouves bizarre comme fille?’는 ‘나 여자로서 이상해?’로 직역된다. 여러 영화에서 욕망하는 여성은 이상한 여성으로 여겨져 왔다. 대부분 여성은 남성 인물이 갖는 욕망의 대상 그 자체가 되었고, 여성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거나 쉽게 대상화되곤 했다. 우리가 영화, 그리고 서사에서 주로 성장하는 인물은 남성 인물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수많은 여성 인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식하지 못했고, 그 욕망이 이루고 있는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그것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