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입니다. 거짓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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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성윤

                                       

읽고 싶은 글을 다 읽고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읽고 싶은 글을 읽다 보면 읽고 싶은 글이 더 늘어나기 때문에 내 글은 언제고 쓰일 수 없다. 내 글이 쓰이지 않는 건 다행인 것 같지만 회장인 대현이 형과 편집장인 재현이 형에게는 다행이 아닐 수도 있어서 오늘도 난 눈치 보며 긴급히 글을 쓴다.

기한까지 글을 제출하지 않은 이들이 있을 때 재현이 형이 단체 메신저에 한 말을 재현하면 이렇다.
No Excuse.

사람이 쓰는 글은 재현의 재현일 수밖에 없다. 이미 있는 글로부터 우리는 도리 없이 영향받기 때문이다. 현실은 텍스트로 재현되고 우리의 글은 그 텍스트의 재현이므로 우리는 선행 텍스트에 의해 현실로부터 가로막혀 있고, 현실의 그늘은커녕 밝은 쪽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미술작품의 기록 속에서 어느 작품이 지칭되는 동시에 가려지고 부재중 처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선행 텍스트의 필연성은 한국에서 번역체가 짊어진 멍에를 해체한다. 우리가 여태껏 읽어온 글의 대부분은 번역된 글이고 한국 현대문학의 뿌리 역시 영어와 일어의 번역본이며 우리의 생각 체계도 유럽발 텍스트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텍스트가 한국어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번역체를 자제하라는 거대 담론을 촉발하여 그것이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등장하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한국어에 어떤 고유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듣기·말하기·쓰기 교과서의 번역체 예시 문장은 매력적이었다. 또 ‘듣기’가 말하기와 쓰기보다 앞에 위치하는 이 교과서의 제목은 유교 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았음이 분명하고 나는 '듣말쓰'보다 '말듣쓰'가 훨씬 말의 맛이 좋다고 생각해서 매일 말듣쓰라고 불렀는데, 검색해보니 20세기에는 교과서 이름이 말듣쓰였다가 21세기에 들어 듣말쓰로 바뀌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나는 21세기보다 20세기의 옷을 좋아한다. 분량을 채우기 위해 재현과 번역체에 관한 얘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꽤 채우기는 했다)고 재현이 형 이름 때문에 이런 생각이 났다.

부정변증법이 좋았다. 그래서 그에 관한 내 주절거림을 흥미롭게 들어주었던-내 착각일 수도 있다- 사람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연애 도식에서의 여성과 가공의 대상인 자연이, 그리고 남성과 가공의 주체인 인간이 각각 동치되며, 남성(인간)은 다른 남성(인간)들을 여성(자연)의 시선으로 바라보(가공하)다가 스스로까지 그 시선의 대상에 포함하고, 결국 자의식(내적 자연)은 말살되어 자멸하는 남성으로 맞아떨어지는 게 재밌어 그녀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모를 일이고, 웃지 않았음에도 즐거워 보여서 난 그녀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존 케이지는 나와 아주 연관이 깊은데, 그가 불교와 인터뷰를 좋아했으며 언어의 비결정성과 지연의 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 친한 친구이자 장미가 수놓인 이불을 덮고 자길 즐겼던 근우에게 종종 존 케이지 이야기를 한다. 그의 아버지가 <존케이지빌리어즈>라는 간판의 프랜차이즈 업장-술과 음식을 파는 콘셉트의 당구장. 그곳이 독일의 볼링장처럼 로컬 커뮤니티의 본거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을 운영하다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일순간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근우가 나의 단어 중 하나라도 말꼬리를 잡아 시비를 걸려는 것인 줄 뻔히 알지만, 그가 내 말을 듣는 방식과 다른 이들이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방식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더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훨씬 기분이 좋다. 어차피 대부분은 대부분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하는 거짓말은 누가 봐도 순 엉터리고 개코 말이 안 되는 것들이라 아무도 속지 않지만, 혹여 누군가 속은 것 같아도 그 때문에 피해를 볼 것 같지 않으면 보통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보통 이런 식이다. 형택(외동아들)의 친형이 키가 2미터 넘는 농구선수래. 진짜로? 아니…-진짜냐고 물어보면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 정보가 자신과 아무 관련도 흥미도 없기 때문에 진짜냐는 반응 말고는 할 수 없다.-

은유가 재밌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랑 자게 될 줄 알았다는 류완범(신하균 분)에게 개미 같은 녀석이라고 하는 차영미(배두나 분)는 거짓말쟁이다. 개미는 홍수와 지진의 전조증상을 감지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섹스하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뭉뚱그려서 그렇다는 거지, 라고 말할 거라면 이 글은 그만 읽어라. 그냥 뭉뚱그리는 것 때문에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핵폭탄이 터지며 소수자가 탄압받는 거다. Killing in the Name.

우리는 매일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에 관해 하는 말과 당신들이 당신들에 관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그건 다 은유고 그래서 거짓말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찰자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남에 대해 남이 말하는 걸 내가 듣게 되더라도 나는 그것을 은유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건 은유의 은유인데, 남에 대한 남의 은유를 나의 입장에서 다시 은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나’라는 말을 문장에서 빼고 싶지 않다. 관찰자의 시선을 배제하고 싶지 않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척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생각도 언어로 한다. 생각은 상상이고, 상상은 허구다. 그러면 생각은 거짓인데, 상상은 거짓말이라는 건 자연스럽지만 생각이 거짓이라는 건 그렇지 않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난 마음껏 거짓말을 해도 된다. 이제부터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다. 그 원래가 어느 시점이든지 간에 정말 원래부터.

이지아의 시집 <오트 쿠튀르>에는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접두사나 조사가 많은데, 그 문장을 다시 읽게 하려는 간악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지만 그녀의 얼굴을 인터넷에서 보았을 때 그런 편견은 싹 사라졌다. 그다음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생각했고 한소희보다 소주연을 좋아하는 것이 과연 외모지상주의라는 틀 안에 포괄될 수 있는지 고민했으며 그렇다는 결론을 냈다. 이지아는 산문시도 아닌 길고 긴 시에서 추리소설처럼 떡밥을 회수한다. 그러면 나는 이미지라는 게 단어가 갖고 있다가 내게 주는 건지 갖고 있기만 하고 안 주는 건지 아니면 잠깐 빌려주는 건지 생각하다가 그 페이지를 다시 읽는다.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얇은 시집을 아직도 다 읽지 못했다.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의 〈니노치카(1939)>에는 재밌는 농담이 나온다. “웨이터, 크림 없는 커피로 부탁해요” “죄송합니다, 손님. 크림은 없고 우유만 있는데 우유 없는 커피도 괜찮으실까요?” 결국 나오는 건 똑같은 커피다. 하지만 크림 없는 커피를 우유 없는 커피로 생각하는 건 우리 자유다. 사실 커피는 원래 그냥 커피고, 우유나 크림을 더한 건데 말이다. “그냥 커피”와 “우유 없는 커피”에 차이가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아무 차이도 없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식광대(1922)>에서 단식광대는 여성 둘에게 끌려 나가면서 ‘발을 딛고 있는 지면이 마치 진짜 땅이 아닌 것처럼 헛발질을 하면서 진짜 땅바닥을 찾고 있었다’. A는 그대로 있지만 A가 없다고 말하면서 A로 대체한다.

내가 미래를 보고 또 미래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프로젝트 안에 서 있는 것밖에 없다. 프로젝트는 현재와 미래에 차이를 생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프로젝트에 돌입하면 현재는 미래를 상대로 정당성을 주장해야 한다. 나 이대로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것은 프로젝트 안, 즉 미래 안에 있는 나에게 하는 하나의 변호이므로 의미가 없다. 미래란 없는 것이고 거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금으로 된 산처럼 상상 속에는 있는데,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는 끊임없이 재동기화되면서도 분리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미완성된 프로젝트로서의 존재’로 인간의 위치를 설명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남모를(아무리 말해도 남은 모른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남은 자기가 안다고 믿는 자기만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본다. ‘사적 환경의 다차원적 프로젝트’로 나는 매 순간을 살고 있는데 남은 나의 단면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무조건 극단적으로 소외된다. 자기로부터도.

나는 이 소외로부터의 탈피 가능성을 거짓말에서 본다. 필연적으로 사람은 남을 기만하고 그 자신에게도 진실하지 못한 자기기만에 빠져 살아간다. 이때 구태여 진실하여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은 한 종류의 예술이 된다. 동시에 거짓말은 비동일시라는 예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현실이 전복된다. 나는 거짓말할 때 예술가 놀이를 할 수 있다. 다른 예술가들처럼. 키예프의 화가 말레비치(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는 예술의 가장 큰 적은 진정성이라고 말했다. 난 그를 잘 모르지만 지지해주니 고맙다. 내가 이 문서를 생산한 이유도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언어와 의미를 독자와 공유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텍스트 더미를 하나 쌓아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걸 다 읽은 독자든 중간에 읽다 만 독자든 아니면 아예 독자가 아니든 난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하나 구축해 주었다. 그들은 결코 이전과 같은 세계에 살 수 없다. 이 글이 없던 세상은 이제 없다. 

인간이 행동하는 것이 그 인간 자신이라면 난 그냥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