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이 되는 동네인 이유
WEBZINE
WEDITOR 도기유
Ⅰ. 문제의 소재
필자는 모종의 이유로 3개월 전부터 서림동(구 신림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평생 이곳에서 살리라 예상했던 적도 없었지만, 어쨌든 살게 된 만큼 후드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고자 신림동을 주제로 글을 쓰고자 한다. 너드에서 처음으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쓰는 글인 것 같다.
Ⅱ. 당사자적격 및 대상적격의 문제
- 1. 문제점
잠깐만! 청담에서 고등학교 나온 놈이 신림동이 왜 후드냐?
-혼자서 후드 분류기준 이론에 대해 정리한 적이 있다. 순전히 필자의 뇌피셜로 도출된 임의적 분류체계이므로 맹신하진 말기 바란다.
-2. 학설
후드 분류기준 이론 (개별적/주관적 사정에 국한)
: 고전학파
① 출생지 우선주의
② 모교소재지 우선주의 - 초등학교파(노론)~대학교파(소론)
: 신흥학파
① 현 거주지 기준설
② 마음의 고향설
③ 절충설
-3. 검토
생각건대, ‘현 거주지 기준설’과 ‘마음의 고향설’의 절충설로 판단하는 것이 조리상으로 타당할 것이다. 우선, 마음의 고향설과 절충설을 제한 나머지 이론들은 개인의 후드 결정 과정에서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고 있는바, 객관적 사정에만 근거한 전면적 권리 제한으로 이어져 비례의 원칙을 위반할 우려가 있다.
-4. 사안의 경우
신림동은 필자의 현 거주지와 인접해있고(법정동으로는 신림동에 속한다), 나름의 연고의식도 느끼고 있다. 신림역 7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나는 구토의 향취, 높은 1인 가구 비율, 썩 좋지 않은 치안은 신림동을 ‘후드’로 칭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 당위성을 강화한다(이곳은 서울의 Bronx입니까?).
Ⅲ. 신림은 왜 되는 동네인가.
집값이 싸다. 젊은이들이 많다. 유동인구가 많다. 퀴어까지? 뜨는 동네의 조건을 갖춰가고 있다. 신림에는 날 것의 무언가가 있다. 문화적 자생력만 갖춘다면 정말 엄청난 동네가 될 것이라 본다. 일단 자생력이 갖춰진다면 이를 이어갈 인재의 수급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민족의 등불, 인재의 본산 서울대학이 바로 근처에 있다. 난 서울대 미대생들이 신림에서 개인전을 열고, 시벨리우스 조작에 찌든 작곡과 학생들이 언젠가 생길지도 모르는 코끼리 신림 브랜치에서 음악을 즐기는 언젠가를 꿈꾼다. 이태원의 쇠퇴가 장기화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
1. 싼 집값
일찍이 ‘되는 동네’의 부흥기에는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이 있어왔고, 젊은 예술가들은 집값이 싼 동네로 모이는 법이었다. 이젠 부촌이 되어버린 소호(Soho)도 이전에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터전이었다. 관악구의 평당 매매가는 약 3500만원으로 서울 25개 구 중 21위이고, 관악구의 1인가구 비율은 38.8%로 서울특별시 내 최고 수준이며, 신림동의 전체 1인가구 대비 청년층 1인가구의 비율은 56.9%로 서울시 내 행정동 중 2위에 해당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주거비용이 청년층 1인가구에 큰 유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권기백이 괜히 14살의 나이에 신림에 올라와 살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유난히 값싼 신림동의 집세와 풍부한 원룸 물량은 권기백을 비롯한 언더그라운드(?) 래퍼뿐만 아니라, 각종 국가고시 준비생을 비롯하여 취업준비생, 서울대생, 외국인 유학생, 새내기 직장인, 성소수자, 불안정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적·문화적 특성을 가진 이들을 신림으로 이끌었다. 이는 신림을 프롤레타리아성, 또는 룸펜성을 공통분모로 한(이외의 모든 것은 이질적인) ‘멜팅팟’으로 만들었다.
2. 퀴어
어느 동네든 퀴어가 모이면 평타 이상의 문화적 자본은 형성하게 된다. 프랑스의 마레지구, 영국의 소호, 뉴욕의 맥두걸 스트리트가 그러했다. 혹자는 종로3가의 사례로 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나, 종로3가는 상권의 구매력이 노년층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이태원이나 전국에서 청년층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신림과 그 조건을 달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신림이 종로와 이태원에 이어, 제3의 ‘퀴어 스팟’이 된 배경과 맥락을 깊게 다뤄보고 싶어 알고리즘까지 내주며 온갖 게이 유튜브 채널과 음지 커뮤니티들을 다 뒤져봤는데, 별 소득은 없었다. 당사자성이 없고(정말이다, 물론 단정할 순 없다), 아직 한국에는 ‘벽장 안’ 성소수자가 많다 보니 인터넷상에 공개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 자료조사에는 불가피하게 한계가 있던 것 같다. 집값이 싸 지방에서 서울로 갓 상경한 게이들이 신림에 정착하기 시작했고(지방에는 일종의 ‘퀴어 인프라’가 사실상 전무하니), 코로나19 이후 클럽 중심의 상권인 이태원이 쇠퇴하며 게이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신림 일대에 이른바 ‘이쪽 술집’들이 생겨나며 퀴어 상권이 형성되었다는 게 일단 대략적인 이쪽 업계의 공통된 의견인 것 같다.
3. 입지
2호선이 다닌다. 신림선이 다닌다. 아직 서울의 서남권에는 동북권의 건대와 성수, 서북권의 홍대, 동남권의 강남 일대와 비빌만한 상권이 없다. 결국, 현재 시점에선 서남권 최대의 대형 상권이자 유흥지구인 신림이 무주공산인 서남권의 대표상권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신림은 서울대입구역 상권을 배후상권으로 삼아 규모로는 홍대 다음으로 적어도 둘째가는 상권은 될 것이다.
4. 신림동만의 내러티브
신림동의 내러티브는 서울의 여타 동네들과 비교했을 때, 현대사에 한정해서는 독보적으로 특이하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의성김씨를 비롯한 몇 가문의 집성촌에 불과했던 신림동은 해방 이후 급증한 도시빈민의 일부가 관악산 기슭에 모여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도시빈민의 터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이들과 달리, 1960년대 후반 잇따른 개발 사업으로 도심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신림동 일대에 떠밀려오기 시작하며 신림동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70년대 초 서울시는 도시개발계획을 더욱 가속화하며 도심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서민주택난 해결을 위한 택지조성에 나섰지만, 철거민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림동을 비롯한 관악구 일대에는 철거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산기슭이나 하천변 등에 무허가 불량주택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이후, 1975년 서울대학교 이전과 2호선 개통으로 주택환경의 개선과 상업·유흥지구의 형성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급성장에 따른 강제 철거와 이주, 도시빈민의 처절한 삶에 대한 투쟁과 서울대학교의 이전, 그리고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은 체제 내 입신을 꿈꾸는 또 다른 열망과 교차되었다. 신림동 서점에는 금지된 사회과학서적과 함께 고시 서적이 있었고, 운동권 학생들이 기염을 토하던 주점은 고시생들이 피로를 푸는 곳이기도 했다. 각기 다른 이들의, 각기 다른 형태의 열망과 인고가 뒤섞인 동네, 그곳이 신림동이었다.
1960~70년대 도시개발에 밀려 쫓겨나듯 정착한 철거민의 삶과 80년대 희뿌연 화염 속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젊은이들의 패기, 90년대 1평짜리 작은 방에서 꿈을 향해 숨죽이던 고시생들의 유예된 청춘과 2000년대 방황하는 1인 세대의 긴 한숨, 그리고 2010년대 이후 성소수자들의 해방구로까지. 신림동의 역사는 점층적이고, 다중적이며, 다층적이었고, 그러한 성질의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의 ‘interstice(틈)’으로서의 현재의 신림이 탄생한 것이다.
Ⅳ. 소결
신림은 되는 동네입니다. 그리고 몰랐는데, 썩 좋아하는 클럽은 아니지만 씽크홀 본점이 신림이라네요.
모두가 불러 여기는 동네
여긴 진짜 좆돼 나중에 성지 순례
나는 말하고 다녀 관악구 우주의 중심
- 권기백 <인간 쓰레기 매립지 신림 (Feat. King South G)> 중
필자는 모종의 이유로 3개월 전부터 서림동(구 신림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평생 이곳에서 살리라 예상했던 적도 없었지만, 어쨌든 살게 된 만큼 후드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고자 신림동을 주제로 글을 쓰고자 한다. 너드에서 처음으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쓰는 글인 것 같다.
Ⅱ. 당사자적격 및 대상적격의 문제
- 1. 문제점
잠깐만! 청담에서 고등학교 나온 놈이 신림동이 왜 후드냐?
-혼자서 후드 분류기준 이론에 대해 정리한 적이 있다. 순전히 필자의 뇌피셜로 도출된 임의적 분류체계이므로 맹신하진 말기 바란다.
-2. 학설
후드 분류기준 이론 (개별적/주관적 사정에 국한)
: 고전학파
① 출생지 우선주의
② 모교소재지 우선주의 - 초등학교파(노론)~대학교파(소론)
: 신흥학파
① 현 거주지 기준설
② 마음의 고향설
③ 절충설
-3. 검토
생각건대, ‘현 거주지 기준설’과 ‘마음의 고향설’의 절충설로 판단하는 것이 조리상으로 타당할 것이다. 우선, 마음의 고향설과 절충설을 제한 나머지 이론들은 개인의 후드 결정 과정에서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고 있는바, 객관적 사정에만 근거한 전면적 권리 제한으로 이어져 비례의 원칙을 위반할 우려가 있다.
-4. 사안의 경우
신림동은 필자의 현 거주지와 인접해있고(법정동으로는 신림동에 속한다), 나름의 연고의식도 느끼고 있다. 신림역 7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나는 구토의 향취, 높은 1인 가구 비율, 썩 좋지 않은 치안은 신림동을 ‘후드’로 칭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 당위성을 강화한다(이곳은 서울의 Bronx입니까?).
Ⅲ. 신림은 왜 되는 동네인가.
집값이 싸다. 젊은이들이 많다. 유동인구가 많다. 퀴어까지? 뜨는 동네의 조건을 갖춰가고 있다. 신림에는 날 것의 무언가가 있다. 문화적 자생력만 갖춘다면 정말 엄청난 동네가 될 것이라 본다. 일단 자생력이 갖춰진다면 이를 이어갈 인재의 수급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민족의 등불, 인재의 본산 서울대학이 바로 근처에 있다. 난 서울대 미대생들이 신림에서 개인전을 열고, 시벨리우스 조작에 찌든 작곡과 학생들이 언젠가 생길지도 모르는 코끼리 신림 브랜치에서 음악을 즐기는 언젠가를 꿈꾼다. 이태원의 쇠퇴가 장기화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
1. 싼 집값
일찍이 ‘되는 동네’의 부흥기에는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이 있어왔고, 젊은 예술가들은 집값이 싼 동네로 모이는 법이었다. 이젠 부촌이 되어버린 소호(Soho)도 이전에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터전이었다. 관악구의 평당 매매가는 약 3500만원으로 서울 25개 구 중 21위이고, 관악구의 1인가구 비율은 38.8%로 서울특별시 내 최고 수준이며, 신림동의 전체 1인가구 대비 청년층 1인가구의 비율은 56.9%로 서울시 내 행정동 중 2위에 해당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주거비용이 청년층 1인가구에 큰 유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권기백이 괜히 14살의 나이에 신림에 올라와 살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유난히 값싼 신림동의 집세와 풍부한 원룸 물량은 권기백을 비롯한 언더그라운드(?) 래퍼뿐만 아니라, 각종 국가고시 준비생을 비롯하여 취업준비생, 서울대생, 외국인 유학생, 새내기 직장인, 성소수자, 불안정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적·문화적 특성을 가진 이들을 신림으로 이끌었다. 이는 신림을 프롤레타리아성, 또는 룸펜성을 공통분모로 한(이외의 모든 것은 이질적인) ‘멜팅팟’으로 만들었다.
2. 퀴어
어느 동네든 퀴어가 모이면 평타 이상의 문화적 자본은 형성하게 된다. 프랑스의 마레지구, 영국의 소호, 뉴욕의 맥두걸 스트리트가 그러했다. 혹자는 종로3가의 사례로 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나, 종로3가는 상권의 구매력이 노년층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이태원이나 전국에서 청년층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신림과 그 조건을 달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신림이 종로와 이태원에 이어, 제3의 ‘퀴어 스팟’이 된 배경과 맥락을 깊게 다뤄보고 싶어 알고리즘까지 내주며 온갖 게이 유튜브 채널과 음지 커뮤니티들을 다 뒤져봤는데, 별 소득은 없었다. 당사자성이 없고(정말이다, 물론 단정할 순 없다), 아직 한국에는 ‘벽장 안’ 성소수자가 많다 보니 인터넷상에 공개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 자료조사에는 불가피하게 한계가 있던 것 같다. 집값이 싸 지방에서 서울로 갓 상경한 게이들이 신림에 정착하기 시작했고(지방에는 일종의 ‘퀴어 인프라’가 사실상 전무하니), 코로나19 이후 클럽 중심의 상권인 이태원이 쇠퇴하며 게이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신림 일대에 이른바 ‘이쪽 술집’들이 생겨나며 퀴어 상권이 형성되었다는 게 일단 대략적인 이쪽 업계의 공통된 의견인 것 같다.
3. 입지
2호선이 다닌다. 신림선이 다닌다. 아직 서울의 서남권에는 동북권의 건대와 성수, 서북권의 홍대, 동남권의 강남 일대와 비빌만한 상권이 없다. 결국, 현재 시점에선 서남권 최대의 대형 상권이자 유흥지구인 신림이 무주공산인 서남권의 대표상권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신림은 서울대입구역 상권을 배후상권으로 삼아 규모로는 홍대 다음으로 적어도 둘째가는 상권은 될 것이다.
4. 신림동만의 내러티브
신림동의 내러티브는 서울의 여타 동네들과 비교했을 때, 현대사에 한정해서는 독보적으로 특이하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의성김씨를 비롯한 몇 가문의 집성촌에 불과했던 신림동은 해방 이후 급증한 도시빈민의 일부가 관악산 기슭에 모여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도시빈민의 터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이들과 달리, 1960년대 후반 잇따른 개발 사업으로 도심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신림동 일대에 떠밀려오기 시작하며 신림동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70년대 초 서울시는 도시개발계획을 더욱 가속화하며 도심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서민주택난 해결을 위한 택지조성에 나섰지만, 철거민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림동을 비롯한 관악구 일대에는 철거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산기슭이나 하천변 등에 무허가 불량주택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이후, 1975년 서울대학교 이전과 2호선 개통으로 주택환경의 개선과 상업·유흥지구의 형성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급성장에 따른 강제 철거와 이주, 도시빈민의 처절한 삶에 대한 투쟁과 서울대학교의 이전, 그리고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은 체제 내 입신을 꿈꾸는 또 다른 열망과 교차되었다. 신림동 서점에는 금지된 사회과학서적과 함께 고시 서적이 있었고, 운동권 학생들이 기염을 토하던 주점은 고시생들이 피로를 푸는 곳이기도 했다. 각기 다른 이들의, 각기 다른 형태의 열망과 인고가 뒤섞인 동네, 그곳이 신림동이었다.
1960~70년대 도시개발에 밀려 쫓겨나듯 정착한 철거민의 삶과 80년대 희뿌연 화염 속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젊은이들의 패기, 90년대 1평짜리 작은 방에서 꿈을 향해 숨죽이던 고시생들의 유예된 청춘과 2000년대 방황하는 1인 세대의 긴 한숨, 그리고 2010년대 이후 성소수자들의 해방구로까지. 신림동의 역사는 점층적이고, 다중적이며, 다층적이었고, 그러한 성질의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의 ‘interstice(틈)’으로서의 현재의 신림이 탄생한 것이다.
Ⅳ. 소결
신림은 되는 동네입니다. 그리고 몰랐는데, 썩 좋아하는 클럽은 아니지만 씽크홀 본점이 신림이라네요.
모두가 불러 여기는 동네
여긴 진짜 좆돼 나중에 성지 순례
나는 말하고 다녀 관악구 우주의 중심
- 권기백 <인간 쓰레기 매립지 신림 (Feat. King South G)>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