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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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정재현

                                       

하나, 나는 그렇다.

누군가의 인사치레를 빈말로 치부해 본 적이 없다. 비어있는 말이라는 게 존재할까. 빈말로 묶이는 말들엔 기실 성의가 있다. 청자를 향한 최소한의 애정도 발화자 자신을 향한 최소한의 체면치레도 성의 없인 완성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빈말은 행여 그 말이 순도 백퍼센트의 진심이 아닐지라도 진실을 부러 전하느니 실속이라도 챙기려는 셈이 개입된 말하기다. 그래서 빈말에도 영혼이 존재한다 믿고 타인들의 빈말에 담긴 영혼에 공명하려 애쓴다. 마음을 다해 고마워한다.



, 올리브는 그렇다.

<올리브 키터리지(2014)>의 올리브(프랜시스 맥도먼드 분)가 위 고백을 들으면 끌끌 혀를 차며 기막혀할 것이 빤하다. 상대의 말에 언제나 이죽이고 빈정대는 올리브의 말들엔 사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올리브의 말들엔 타인에게 호감을 구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다. 이토록 언행이 일치하는 캐릭터도 드물다. 올리브의 사전에 단 하나 없는 개념이 있다면 그건 ‘장단을 맞추는’ 것일 터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말에 서운해 타인에게 투정을 부릴 때 종종 말하곤 하는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아?”에서 올리브는 실존 자체로‘그렇게’를 담당하고, 몸소 ‘그렇게’의 임계점을 낮춘다. 올리브는 마뜩잖은 상황을 접하는 것만으로 이미 부대껴 -그게 아들의 결혼식일지라도- 시도 때도 없이 왈칵 트림이 차오르고, 줄줄 새는 감때센 독설을 막아보려 입술을 꼭 깨물지만 그럴 때면 주체할 수 없이 안압만 올라 눈동자를 뱅뱅 굴린다. 올리브의 말은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 맞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 인간 관계에서는 꼭 정답은 아니다. 수학교사인 올리브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수학 시험 문제와 흡사하다. 유도 과정은 몰라도 문제 풀이를 위해 일단 대입만 하면 적어도 답은 도출할 수 있는 수학 공식처럼, 올리브의 대화 공식은 유도 과정보다 우선 저 편한대로 답을 내는데 급급하다. 답이 맞으면 그만이고, 득점을 하면 그만이다.



, 올리브가 사랑하는 것

놀랍게도 올리브는 그의 주변 사람들을 감화한다. 그 자신도 지독한 우울과 절망에 일생을 잠영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올리브는 죽으려던 이를 살리고 죽으려던 이를 일시적으로 구하며 죽으려던 이들의 마음에 정확히 감응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를 보살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죽으려다 올리브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한 다른 사람을 살린다.

올리브는 죽음의 곤경이 드리운 사람을 언제든 적극적으로 돕고 그들을 ‘사랑한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1956)』 서문에서 인용하는 파라켈수스의 사랑에 관한 문장은 올리브가 사랑하는 방식을 짐작하게 돕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중략)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 위대하다.” 지식인 올리브가 수학만큼 해박한 분야는 죽음이다. 우울과 죽음의 근간엔 언제나 회피가 깔려 있다. 자살의 충동은 곧 생이 부여하는 극한의 징벌을 스스로 종결해 모면하려는 기피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으니 말이다. 죽음을 향해 내처 달리는 수많은 이들을 살린 노년의 올리브는 자살을 시도한다. 추측건대 죽음에 매몰된 사람들이 오히려 올리브를 살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가고 사라진 다음 올리브가 살아 갈 이유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외로움으로 숨이 막힌다'는 올리브의 곁에 공명할 이가 더이상 없는 것은, 살아남은 올리브가 받은 축복이자 벌이다.

죽음만큼 올리브가 사랑했던 것은 그의 가족이다. 올리브는 남편 헨리(리처드 젠킨스 분)도 사랑하고 아들 크리스토퍼(존 갤러거 주니어 분)도 사랑한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 짐(피터 멀런 분)과 밀애 중일 때도 올리브는 헨리를 떠날 생각은 추호도 품지 않는다. 올리브는 헨리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진 않지만 남편에게 “사랑함과 다정함은 같이 갈 수 없다” 며 자신은 그 두 갈래 길 중 헨리를 사랑하는 길을 택했음을 분명히 한다. 올리브가 아들에게 폭언을 쏟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하나 있는 아들을 전심으로 키우고 사랑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올리브는 가족들에게 심리적으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올리브는 종종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감히(how dare)’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남들이 자기에게 보내는 피드백을 주제넘는 말로 취급하는 올리브는 꼭 그 뒤에 “내가 맞다는 걸 인정해라” “왜 그걸 모르냐”라며 타박을 굳이 별도로 덧붙인다. 사랑하는 주체가 대상을 향해 지닐 수밖에 없는 아집이 있다. 사랑하다보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며 당신을 수없이 생각한다는 점을 때로는 -파라켈수스의 말처럼- 내가 당신에 대해 남들보다, 혹은 당신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죽음도 가족도 올리브는 사랑했다. 다행히도 올리브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올리브는 상처를 준 이들에게 사과를 구하자니 너무도 큰 자신의 사랑이 종종 스스로의 눈을 가리기도 했다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진작 직시했더라면 더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 자책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다.



, 올리브를 사랑하는 것

살면서 내게 상처 준 사람들을 무수히 이해해보려 했다.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나쁜 사람이고 안 보면 될 사람이라고 마음에서 제쳐두는 일은 손쉽지만 그렇다 해서 사는 날에 비례해 누적해가는 상처들을 모두 넘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 곁에 올리브가 있다면 어땠을까. 내가 다닌 학교에 올리브같은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면, 내가 살던 동네에 올리브같은 이웃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올리브 키터리지>를 완주하는 경험은 좋아할 구석이 전무해 보이는 올리브에게 정이 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싫어할 이유를 찾는 것이 좋아할 이유를 찾는 것에 비해 얼마나 간편한 절차인지를 깨닫는 과정이다. 적어도 <올리브 키터리지>를 본 후의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 싫어한다로 이분하지 않고 호오에 구체적인 이유를 대게 됐다. 강퍅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만큼 품이 든다. 그리고 그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내가 편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와 원작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2009)』의 리뷰엔 늘 올리브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의 기쁨이 가득하다.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뒤틀린 구석과 꼬인 마음을 누구라도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젊은 내가 중년에서 장년, 노년으로 넘어가는 올리브의 삶을 독파하다 놀란 점은 올리브의 인생에 실망이 산재해있다는 점이었다. 나이가 들면 세상을 비관할 일도 사람에 낙망할 일도 줄어들 거라 생각했는데, 올리브의 인생엔 실망할 일이 여전히 천지다. 달리 생각하면 올리브가 지속적으로 삶에 실망하는 까닭은 그가 실망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상해 고통받고 기대가 어긋나 속상할 때 올리브는 이를 바로잡으려 끝까지 노력한다. 그렇게 올리브는 잘 산다. 올리브를 통해 잘 사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재화의 측면에서 잘 살고 못 살고를 나눌 것이 아니라, 살면서 겪을 수많은 함정과 고난을 잘 밟아 가는 것. 절망과 좌절이 가득하더라도 한해살이 튤립 구근을 매년 심으며 다음 해에 필 튤립을 기다리는 것. 올리브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은 올리브가 죽음과 가족을 사랑했듯 자기 안의 올리브를 사랑할 것이다. 나 역시 그리하여 올리브를 사랑한다.

이 고백까지 하고 나니 다시 한번 올리브의 반응이 자동연상된다.

“뭘 또 그렇게. 눈 큰 애가 또 쓸모 없는 일을 했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