童謠遺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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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정재현(너드 전 편집장, <씨네21> 기자)
4월 27일 오전 11시 00분
지인의 결혼식을 위한 외출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늘의 예식엔 보통의 마음가짐과 옷차림으론 가고 싶지 않았다. 신부 A와 나는 스터디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한 사이다. 스터디 당일을 제외하면 사적으로 그룹원들을 거의 만나진 않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공부하다 보니 A와 나는 서로의 직장과 직업을 알고 있다. A와 연애하게 된 신랑 B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A와 B와 나는….
4월 27일 오전 11시 15분
당연히 별 사이 아니다. 다만 A와 B의 인륜지대사 당일 성장(盛裝)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이 둘의 프러포즈에 전부 내가 동원됐기 때문이다. 사정은 이러하다. A는 나를 내세워 B에게 청혼했다. A는 B에게 “영화기자인 재현이 공짜 영화 예매권 두 장을 줬으니 영화 데이트를 하자”며 B를 소환해 청혼했다. 당연히 나는 영화 티켓을 준 일이 없다. A는 청혼 일주일 후 스터디에 나와 내게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아무튼 A의 인생에 중요한 단락이 맺어지는데 나도 모르게 협조할 수 있어 친구로서 기뻤다. 문제는 B 또한 나를 걸고 A에게 청혼했다. B가 A에게 “재현이 네 프러포즈 에피소드를 듣고 재밌었다며 정말 영화 티켓을 선물해 줬다. 이걸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후 A를 만나 청혼했다. 결국 나는 두 번이나 프러포즈의 구실이 됐다. A와 B에게 가방이라도 선물 받거나 새 여자친구라도 소개 받아야 덜 억울할 것 같지만, 아무렴 괜찮다.
4월 27일 오전 11시 40분
둘의 결혼에 무언가 일조한 것 같아 진심으로 축‘하’하는 ‘손님’, ‘하객’이고 싶었다. 그래서 옷을 잘 갖춰 입고 하객의 미덕을 보이고 싶었다. 모든 채비를 마친 후 신발장 앞에 섰다. 정장에 어울리는 신발을 신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운동화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내 발목 아래엔 평발이 달려 있다. 일평생 “박지성보다 조금 심한 평발이다”라고 줄곧 농을 던져왔다. 나의 발바닥에는 아치가 없다. 내 발의 모든 면적은 지표면의 하중을 모두 받기 때문에 오래 걷거나 서 있으면 쉽게 피로해진다. 결국 오늘의 상, 하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를 신었다. 결혼식 이후 불가피하게 오래 걸어야 하는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27일 오후 16시 00분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새 신발을 사러 갔다. 신던 운동화가 수명을 다해 새 신발이 필요했다. 평발은 신발 고르기에도 큰 수고를 요한다. 평발을 위한 깔창, 그러니까 발에 강제로 아치를 만드는 인솔을 신발에 넣기 위해선 평소 내 발 크기보다 좀 더 큰 치수의 신발이 필요하다. 평발은 일상 중 발목이 쉽게 무너지므로 뒤꿈치를 온전히 잡아주는 견고한 머드 가드와 힐 그리고 쿠션이 있어야 한다. 10대 시절 나의 발이 이룰 수 없는 꿈은 컨버스 척 테일러 올스타를 신는 것이었다. 20대 시절 나의 발이 이룰 수 없는 꿈은 로퍼를 신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발은 결국 농구화, 트레일 러닝화, 등산화 중 하나를 새 집으로 장만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전의 신발과 큰 차이가 없는 신발을 사 들고 매장 밖을 나섰다. 봄이 가고 있었다. 오래전 나는 봄에 입대했다. 당시 평발로 인해 현역이 아닌 보충역으로 병역의무를 다했다. 애초에 군화를 오래 신을 수 없는 발이라는 군의관의 소견이 있었다.
4월 27일 21시 20분
나의 근무지는 공립유치원이었다. 유치원엔 늘 동요가 흘렀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근무하기 전부터 나는 동요를 가끔 들었다. 지금도 가끔 동요를 듣는다. 아니 가끔 동요를 찾는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다. 동요는 아이들이 불러야 하는 노래라 단순한 멜로디에 단순한 단어를 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글을 써 본 사람은, 어떤 종류든 예술을 잉태해 본 사람은 안다.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얼 더하는 일이 아니라 무얼 덜어내는 일이다. 동요는 가장 쉬운 단어를 조합해 가장 짧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전하려는 모든 의미를 정확하게 함축해낸다. 진리를 구하기 위해 암자를 찾는 행자처럼, 나는 말과 음으로부터 글쓰기의 정도를 배우기 위해 동요를 찾는다. 동요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전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재다. <과수원 길>이 꽃잎이 휘황한 정경을 노래하다 돌연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을 넣어 이야기에 극한의 로맨티시즘을 보탤 때, <아기 염소>가 어떤 꿈이든 마음 놓고 자랄 수 있을 화창한 날을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로 표현할 때. 적소에 배치한 단 한 줄의 문장이 글 전체를 어떻게 좌우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동요는 심신 수양에도 좋다. 산울림의 동요 <예쁜 맘 예쁜 꿈> 가사는 마음이 남루해질 때마다 나를 다잡는다. “마음이 예쁘면 꿈도 예쁘죠, 예쁜 꿈 꾸며 나비 같이 날아”. 미운 마음이 나를 잠식해 적개심에 타들어 갈 때면 이 가사 한 줄을 주술처럼 되뇌며 나비 같이 날 나를 위해서라도 예쁜 마음을 가지려 무진 애를 쓴다.
시와 노래가 그러하듯, 동요 또한 많은 걸 설명하지 않고 여백을 둔다. 하지만 동요가 더 설명하지 않는 가사들에 동심이 소진한 어른의 비뚠 상상력이 개입하면 어느새 노래들은 새로운 논의를 낳는다. <숲속 작은집>이라는 동요를 기억하는가. 아이가 홀로 있는 집에 토끼가 뛰어와 “포수가 나를 쫓으니 살려달라”고 호소하자 토끼를 집에 들이는 아름다운 노래 말이다. 하지만 그 집 주인이 포수라면, 그러니까 아이가 포수의 자녀라면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잔혹해진다. <퐁당퐁당>은 어떤가. 이 노래는 단 10초 만에 세상 모든 장녀, 장남의 울분을 부른다. 이 노래의 화자는 차남이다. 차남은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누나에게 “퐁당퐁당 누나 몰래 돌을 던진”다. 노동자인 누나는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자본가의 상품인 화폐와 교환하기 위해 애쓰는데 그 자본으로 호의호식할 자는 노동자와 연대하기는커녕 괴롭힌다. <새 나라의 어린이> <동네 한 바퀴> <둥근 해가 떴습니다>는 착한 어린이의 기준을 협소하게 설정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어린이는 좋은 어린이인가. (솔직히 양육자의 입장에선 아이가 좀 더 자는게 더 편할 수 있다). 게다가 <새 나라의 어린이>는 끝내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로 끝을 맺는다. 애초에 p → q가 거짓인 명제고 부국강병의 꿈을 어린이에게 주입하는 프로파간다성 노래다. 수면과 기상에 대한 괴상한 판타지는 <기찻길 옆>에서도 드러난다. “기찻길 옆 오막”에 사는 아기는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는 잘도 잔다”. 동요에 의하면 아이들은 혼란한 소음 속에서도 잘 자야하고, 잘 잤으니 일찍 일어나야 한다. 대체 어떻게? 정말 어떻게? 동요는 종종 동물들의 일상을 방해한다. <다람쥐>가 대표적이다. 멀쩡하게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가”는 “산골짝 아기 다람쥐”를 멈춰 세워 대뜸 “재주나 한번 넘으렴”이라며 묘기를 요구한다. <나비야>도 그렇다. 멀쩡히 잘 날고 있는 나비에게 “이리 날아 오너라”라고 한 뒤 급기야 춤까지 추며 날길 바란다.
4월 28일 11시 13분
다시 발 이야기로 돌아온다. 새 신발을 샀으니 <새 신>을 청취한다. “새 신을 신고 팔짝 뛰어”보아도 평발은 발에 무리가 갈 수 있으므로 “머리가 하늘까지 닿는” 높이뛰기나 “단숨에 높은 산을 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상에, 평발 어린이를 위한 동요도 없다. 평발 어린이는 <머리 어깨 무릎 발>이 “발 무릎 발”을 여러 차례 반복할 때마다 다른 어린이보다 몇 배의 하중이 종아리 근육에 간다. 또 한 번 피로해진다.
동요 가사는 정상 이데올로기에 기댄다. 발을 포함해 신체 일부에 장애가 있는 어린이가 감응할 수 있는 노래 가사는 현저히 적다. 장애 어린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정말 정상 신체의 세상일까. 장애가 없어진 세계가 아름답고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라 이야기하는 뮤직비디오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동요 속 가족의 개념은 소위 말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부역한다. <곰 세 마리>의 가족은 “아빠, 엄마, 아이”로 이루어져 있고 <개구리>의 가족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아래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모여 있다. 딸과 손녀는 가사에 지워져 있고 며느리만 있을 뿐이다. 대체 며느리는 왜 저 집안에서 “목청도 좋게”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개굴개굴” 노래를 하고 있단 말인가. 21세기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아기 상어> 또한 “어여쁜” “자상한”과 같은 관형어를 여성 가족 구성원에게, “힘이 센” “멋있는”과 같은 관형어를 남성 가족 구성원에게 덧붙인다. 동요가 보여줘야 하는 세상은 아이들이 자신이 처한 조건을 직시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동요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데 무리 없이 반영되어야 한다. 지금의 동요는 여러모로 유감이다.
지인의 결혼식을 위한 외출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늘의 예식엔 보통의 마음가짐과 옷차림으론 가고 싶지 않았다. 신부 A와 나는 스터디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한 사이다. 스터디 당일을 제외하면 사적으로 그룹원들을 거의 만나진 않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공부하다 보니 A와 나는 서로의 직장과 직업을 알고 있다. A와 연애하게 된 신랑 B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A와 B와 나는….
4월 27일 오전 11시 15분
당연히 별 사이 아니다. 다만 A와 B의 인륜지대사 당일 성장(盛裝)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이 둘의 프러포즈에 전부 내가 동원됐기 때문이다. 사정은 이러하다. A는 나를 내세워 B에게 청혼했다. A는 B에게 “영화기자인 재현이 공짜 영화 예매권 두 장을 줬으니 영화 데이트를 하자”며 B를 소환해 청혼했다. 당연히 나는 영화 티켓을 준 일이 없다. A는 청혼 일주일 후 스터디에 나와 내게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아무튼 A의 인생에 중요한 단락이 맺어지는데 나도 모르게 협조할 수 있어 친구로서 기뻤다. 문제는 B 또한 나를 걸고 A에게 청혼했다. B가 A에게 “재현이 네 프러포즈 에피소드를 듣고 재밌었다며 정말 영화 티켓을 선물해 줬다. 이걸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후 A를 만나 청혼했다. 결국 나는 두 번이나 프러포즈의 구실이 됐다. A와 B에게 가방이라도 선물 받거나 새 여자친구라도 소개 받아야 덜 억울할 것 같지만, 아무렴 괜찮다.
4월 27일 오전 11시 40분
둘의 결혼에 무언가 일조한 것 같아 진심으로 축‘하’하는 ‘손님’, ‘하객’이고 싶었다. 그래서 옷을 잘 갖춰 입고 하객의 미덕을 보이고 싶었다. 모든 채비를 마친 후 신발장 앞에 섰다. 정장에 어울리는 신발을 신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운동화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내 발목 아래엔 평발이 달려 있다. 일평생 “박지성보다 조금 심한 평발이다”라고 줄곧 농을 던져왔다. 나의 발바닥에는 아치가 없다. 내 발의 모든 면적은 지표면의 하중을 모두 받기 때문에 오래 걷거나 서 있으면 쉽게 피로해진다. 결국 오늘의 상, 하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를 신었다. 결혼식 이후 불가피하게 오래 걸어야 하는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27일 오후 16시 00분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새 신발을 사러 갔다. 신던 운동화가 수명을 다해 새 신발이 필요했다. 평발은 신발 고르기에도 큰 수고를 요한다. 평발을 위한 깔창, 그러니까 발에 강제로 아치를 만드는 인솔을 신발에 넣기 위해선 평소 내 발 크기보다 좀 더 큰 치수의 신발이 필요하다. 평발은 일상 중 발목이 쉽게 무너지므로 뒤꿈치를 온전히 잡아주는 견고한 머드 가드와 힐 그리고 쿠션이 있어야 한다. 10대 시절 나의 발이 이룰 수 없는 꿈은 컨버스 척 테일러 올스타를 신는 것이었다. 20대 시절 나의 발이 이룰 수 없는 꿈은 로퍼를 신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발은 결국 농구화, 트레일 러닝화, 등산화 중 하나를 새 집으로 장만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전의 신발과 큰 차이가 없는 신발을 사 들고 매장 밖을 나섰다. 봄이 가고 있었다. 오래전 나는 봄에 입대했다. 당시 평발로 인해 현역이 아닌 보충역으로 병역의무를 다했다. 애초에 군화를 오래 신을 수 없는 발이라는 군의관의 소견이 있었다.
4월 27일 21시 20분
나의 근무지는 공립유치원이었다. 유치원엔 늘 동요가 흘렀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근무하기 전부터 나는 동요를 가끔 들었다. 지금도 가끔 동요를 듣는다. 아니 가끔 동요를 찾는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다. 동요는 아이들이 불러야 하는 노래라 단순한 멜로디에 단순한 단어를 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글을 써 본 사람은, 어떤 종류든 예술을 잉태해 본 사람은 안다.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얼 더하는 일이 아니라 무얼 덜어내는 일이다. 동요는 가장 쉬운 단어를 조합해 가장 짧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전하려는 모든 의미를 정확하게 함축해낸다. 진리를 구하기 위해 암자를 찾는 행자처럼, 나는 말과 음으로부터 글쓰기의 정도를 배우기 위해 동요를 찾는다. 동요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전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재다. <과수원 길>이 꽃잎이 휘황한 정경을 노래하다 돌연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을 넣어 이야기에 극한의 로맨티시즘을 보탤 때, <아기 염소>가 어떤 꿈이든 마음 놓고 자랄 수 있을 화창한 날을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로 표현할 때. 적소에 배치한 단 한 줄의 문장이 글 전체를 어떻게 좌우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동요는 심신 수양에도 좋다. 산울림의 동요 <예쁜 맘 예쁜 꿈> 가사는 마음이 남루해질 때마다 나를 다잡는다. “마음이 예쁘면 꿈도 예쁘죠, 예쁜 꿈 꾸며 나비 같이 날아”. 미운 마음이 나를 잠식해 적개심에 타들어 갈 때면 이 가사 한 줄을 주술처럼 되뇌며 나비 같이 날 나를 위해서라도 예쁜 마음을 가지려 무진 애를 쓴다.
시와 노래가 그러하듯, 동요 또한 많은 걸 설명하지 않고 여백을 둔다. 하지만 동요가 더 설명하지 않는 가사들에 동심이 소진한 어른의 비뚠 상상력이 개입하면 어느새 노래들은 새로운 논의를 낳는다. <숲속 작은집>이라는 동요를 기억하는가. 아이가 홀로 있는 집에 토끼가 뛰어와 “포수가 나를 쫓으니 살려달라”고 호소하자 토끼를 집에 들이는 아름다운 노래 말이다. 하지만 그 집 주인이 포수라면, 그러니까 아이가 포수의 자녀라면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잔혹해진다. <퐁당퐁당>은 어떤가. 이 노래는 단 10초 만에 세상 모든 장녀, 장남의 울분을 부른다. 이 노래의 화자는 차남이다. 차남은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누나에게 “퐁당퐁당 누나 몰래 돌을 던진”다. 노동자인 누나는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자본가의 상품인 화폐와 교환하기 위해 애쓰는데 그 자본으로 호의호식할 자는 노동자와 연대하기는커녕 괴롭힌다. <새 나라의 어린이> <동네 한 바퀴> <둥근 해가 떴습니다>는 착한 어린이의 기준을 협소하게 설정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어린이는 좋은 어린이인가. (솔직히 양육자의 입장에선 아이가 좀 더 자는게 더 편할 수 있다). 게다가 <새 나라의 어린이>는 끝내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로 끝을 맺는다. 애초에 p → q가 거짓인 명제고 부국강병의 꿈을 어린이에게 주입하는 프로파간다성 노래다. 수면과 기상에 대한 괴상한 판타지는 <기찻길 옆>에서도 드러난다. “기찻길 옆 오막”에 사는 아기는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는 잘도 잔다”. 동요에 의하면 아이들은 혼란한 소음 속에서도 잘 자야하고, 잘 잤으니 일찍 일어나야 한다. 대체 어떻게? 정말 어떻게? 동요는 종종 동물들의 일상을 방해한다. <다람쥐>가 대표적이다. 멀쩡하게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가”는 “산골짝 아기 다람쥐”를 멈춰 세워 대뜸 “재주나 한번 넘으렴”이라며 묘기를 요구한다. <나비야>도 그렇다. 멀쩡히 잘 날고 있는 나비에게 “이리 날아 오너라”라고 한 뒤 급기야 춤까지 추며 날길 바란다.
4월 28일 11시 13분
다시 발 이야기로 돌아온다. 새 신발을 샀으니 <새 신>을 청취한다. “새 신을 신고 팔짝 뛰어”보아도 평발은 발에 무리가 갈 수 있으므로 “머리가 하늘까지 닿는” 높이뛰기나 “단숨에 높은 산을 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상에, 평발 어린이를 위한 동요도 없다. 평발 어린이는 <머리 어깨 무릎 발>이 “발 무릎 발”을 여러 차례 반복할 때마다 다른 어린이보다 몇 배의 하중이 종아리 근육에 간다. 또 한 번 피로해진다.
동요 가사는 정상 이데올로기에 기댄다. 발을 포함해 신체 일부에 장애가 있는 어린이가 감응할 수 있는 노래 가사는 현저히 적다. 장애 어린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정말 정상 신체의 세상일까. 장애가 없어진 세계가 아름답고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라 이야기하는 뮤직비디오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동요 속 가족의 개념은 소위 말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부역한다. <곰 세 마리>의 가족은 “아빠, 엄마, 아이”로 이루어져 있고 <개구리>의 가족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아래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모여 있다. 딸과 손녀는 가사에 지워져 있고 며느리만 있을 뿐이다. 대체 며느리는 왜 저 집안에서 “목청도 좋게”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개굴개굴” 노래를 하고 있단 말인가. 21세기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아기 상어> 또한 “어여쁜” “자상한”과 같은 관형어를 여성 가족 구성원에게, “힘이 센” “멋있는”과 같은 관형어를 남성 가족 구성원에게 덧붙인다. 동요가 보여줘야 하는 세상은 아이들이 자신이 처한 조건을 직시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동요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데 무리 없이 반영되어야 한다. 지금의 동요는 여러모로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