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명사를 구체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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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지하늘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는 성경 구절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사랑이 최우선적 가치로 여겨져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 좇아야 할 가치와 현실의 간극은 아득하게 보이기만 한다. 모두 사랑이 전부라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웃에게 벌어진 재난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회를 표방하지만, 획일화된 기준을 잣대로 정상성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여전하다. 서로의 일상을 들여다보면서도 삶을 바라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꾸며진 기쁨과 슬픔을 내비치며 고립에 빠지는 현상은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손쉽게 혐오하는 시대 속 사랑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사랑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를 꿈꾸는 청년들이 숫자에 갇혀 네모난 삶으로 굳어지고, 주위를 둘러볼 새 없이 달려오다 방향을 잃는 일은 부지기수다. 이처럼 청춘, 사랑, 삶과 같은 추상명사들은 신기루처럼 아득하고 환상적이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같은 구조를 이루어내는 동시에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며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킨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극한의 상황에 처하지만, 경험과 지각을 통해 마침내 지향하는 가치를 자기 삶으로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비현실적인 낭만도, 허황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린 벌판에서 이들이 나누는 온기는 깜깜한 어둠 속 촛불처럼 느껴진다. 그의 영화가 그려내는 것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을 황량하고 척박한 곳으로 내몬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에서는 핀란드 북부의 툰드라 지대에서 활동하던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가 그 대상이다. 그들은 흥행업자의 말을 따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신대륙을 밟지만, 그 꿈은 계속해서 좌절된다. 공연을 제안하던 사람들은 막상 그들의 형편없는 연주를 듣고는, 계약을 하지 않기 위해 차선책을 제시하며 변두리로 쫓아낸다. 대안의 대안의 대안의 대안... 드넓은 신대륙에서조차 그들이 온전히 서 있을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는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그들을 쫓아내는 동시에, 그들을 계속 나아가게 만든다. 그들은 음악에 대해 고집을 피우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음악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다시 새로운 땅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는 신대륙을 벗어난 곳에서 새로이 받아들여진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길목에서도 시간을 타고 그저 흐르는 청춘의 모습을 보인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방황하는 인물들, 꿈꾸던 모습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여전히 노래하는 인물들.




감독의 이러한 논리는 30년이 지나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속 두 인물의 삶은 고되다. 안사(알마 푀위스티)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가져갔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홀라파(유시 바타넨)는 일용직 노동자로 위험한 환경 속에서 일하며 부상을 당해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 헬싱키의 냉담한 날씨와 라디오 속 들리는 전쟁에 관한 소식들은 저임금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고, 우울함에 젖어 알코올에 의존하는 두 인물의 삶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일자리를 잃은 비극적 상황에 처한 두 인물의 교차는 역설적으로 가라오케라는 희극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감정은 서서히 사랑으로 나아간다. 버석한 현실에서 이어지는 만남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라디오에서 지속해서 흘러나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을 통해 관객은 이 영화가 전개되는 시대가 오늘날임을 알 수 있지만, 종이에 번호를 적어 건네고 종이를 잃어버리자 소식을 전할 방법을 잃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지난 세기를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구태여 투박한 방식을 택하며 주고받는 사랑의 모습은 서로의 마음을 가까이서 감각하게 하고, 입체적인 내면을 응시하게 만든다. 간극을 두며 천천히 속도를 맞춰나가는 두 인물의 사랑 방식은 초연결 사회 속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동화와 같이 사랑을 재정의하여 보여준다. 반복되는 엇갈림과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두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 나가기로 한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은 여전히 없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겨울의 삭막함과 꼭 닮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절망에 잠식되는 대신, 다음 걸음을 도모한다. 섣불리 낙담하거나 욕심내어 바라지 않고, 바로 눈앞에 놓인 것들을 하나씩 해내면서. 단순히 어떤 가치를 믿는 것만으로는 나의 삶도, 내가 살고 있는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 가치를 구체화하고 삶에 적용할 때만이, 우리는 꿈꾸는 모습과 닮아있을 수 있다. 이제는 사랑을 믿음에 그치지 않고, 사랑을 행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