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팀 발제 : 홍상수 - <여행자의 필요>

WEBZINE
WEDITOR   최서윤

                                       

발제일자: 5.9
발제 영화: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2024)>
참석인원: EB, CY, SY, SJ

이제는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시네아스트 홍상수가 31번째 장편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31번째라는 숫자에 놀라기 무색하게 발제 날에는 이미 그가 다음 장편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날 우리들은 그의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가로지르며 <여행자의 필요>가 지닌 영화적 독특함과 이전 작품들과의 차이 또는 반복에 대해 자유롭게 유영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영화 속 여행자 이리스(이자벨 위페르 분)의 고고한 걸음걸이처럼 말이다.


1. 언어의 불투명성 & 홍상수 작품 세계의 변화


SY: 형식에 앞서 내용이나 주제 의식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첫 번째로 생각한 게 언어였어요. 아무래도 이 작품에서 또 이자벨 위페르가 등장하다 보니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언어라는 요소를 사용한 것 같아요. 그런데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 언어 내지는 말이라는 게 홍상수 영화에서 항상 중요한 주제였잖아요.
예를 들어 어떤 여자를 둘러싼 말, 어떤 한 사람을 둘러싼 말이 그 사람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상황을 다뤄 왔어요. 이렇게 ‘말의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왔다는데, 특이하게 여기서는 대놓고 이 말이 제대로 전달이 안 돼요.
애초에 이리스가 번역하는 과정을 보면 사실상 엉터리고, 시를 번역하는 장면을 봐도 단어를 뭉뚱그려서 번역을 한단 말이에요. 이렇게 언어의 전달이 불확실하고 오가는 언어 자체가 불투명한데 이 영화는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오히려 이런 식으로 전달을 해도 상대방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다는 듯이 긍정하는 느낌이어서 언어에 대한 홍상수의 태도가 살짝 달라진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번역이라든지, 영화 속에서 언어가 전달되는 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해요.

CY: 저는 처음에는 이리스가 사람이 아니라 뭔가 거울인 것 같은, 시금석 같은 캐릭터처럼 느껴져서 외국어를 듣더라도 그 말을 모국어로 해석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냥 그대로 프랑스어로 받아 적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되게 의아했어요. 이 사람을 추상화시켜서 어떤 상징으로 본 게 아니라, 결국에는 여기 안에 있는 그냥 한 사람으로 보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SJ: 아까 언급했듯이 이리스가 시를 번역할 때 ‘그냥 꽃인데요’, ‘그냥 샌데요’라면서 단어를 정확히 전달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실 시라는 매체에서 꽃이 어떤 종의 꽃인지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걸 뭉뚱그려서 ‘그냥 꽃이에요’라고 그런 식으로 번역해도 괜찮다고 넘어가는 게 신기했어요.
또 언어에 대한 얘기는 아닐 수도 있는데, 이리스가 갑자기 피리를 연주한다든지 산에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 있잖아요. 이런 장면들에서 저도 이리스가 비일상적인 존재라고 느꼈어요. 어떤 정령 같은 존재?

SY: 맞아요. 이리스가 속세를 초월한 도인 같은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쳐 준다면서 자의적으로 번역을 해서 카드를 만드는 게 어이없기도 한데 되게 비범한 교육 방식이잖아요. 도대체 어떤 과정으로 이런 걸 생각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중간에 원주(이혜영 분)가 자기는 못 믿겠다면서 비꼬는 뉘앙스의 장면이 있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이 사람을 속물적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그저 먹고 살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한 사람으로 볼 뿐이죠. 아무튼 다시 언어로 얘기로 돌아가보면, 언어를 가르치는 행위 그리고 번역하는 행위에서 언어가 뭔가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이 서로 진짜 이해했는지 알 수 없는데 이 영화는 마치 전부 이해한 것처럼 가정하고 진행이 되니까요.

SJ: 어쩌면 그게 홍상수의 오랜 생각일 수도 있어요. 언어 자체가 갖고 있는 모호함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다루어 왔다고 봐요.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은 아주 옛날부터 갖고 있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늘 영화 속에서 인물 간의 대화가 붕 뜨는 느낌이잖아요.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서로 각자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평행선을 달리는 느낌. 특히 술자리 대화에서 그게 강하게 느껴지고요. 이게 이번에는 외국어를 통해서 표현된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도 엄마랑은 한국어로 대화하는데도 겉도는 느낌인 데 반해서 이리스와는 서툰 영어로 대화하는데도 훨씬 잘 통하잖아요. 단어도 제대로 생각이 안 나서 머뭇거리는데도 통하는 느낌이고.

EB: 다들 <클레어의 카메라> 보셨나요? 언어에 대한 아이디어 자체는 이 영화랑 비슷한 것 같아요.

SJ: 맞아요. 그런데 좀 가벼워진 느낌이 있어요. 홍상수는 영화를 수필처럼 만들잖아요. 비슷한 시기에 반향을 일으킨 이창동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훨씬 더 거시적인 주제로 영화를 만들어요. 이창동이 마치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 같은 소설을 쓰는 느낌이라면, 홍상수는 나쓰메 소세키의 수필 같은 느낌. ‘그냥 나는 요새 이러고 살아’ 하는 룸펜의 자기고백적인 태도가 초기 작품부터 보여요. 그런데 초기에는 자기와 비슷한 룸펜들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보다가, 이번 작품에서는 이제는 어떤 할아버지가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어요.

SY: 지금은 그런 세속적인 룸펜이랑 대비되는 도인 같은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하루>에서도 시인이 그런 역할이었잖아요. 이런 비범한 인물을 자꾸 등장시키는 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홍상수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재미있는 변화인 것 같아요.


2. 차이와 반복

SY: 아무래도 홍상수 영화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구조잖아요. 이전 작품들에서 이런 구조가 더더욱 두드러졌고 <여행자의 필요>에서도 최근작 중에서는 그런 구조가 제일 눈에 띄어요. 그래서 예전의 재미가 돌아온 것 같다 싶으면서도 진부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어요. 

SJ: 씨네21에서 매년 홍상수 작품을 ‘올해의 영화’로 선정하면서 차이와 반복 언급을 하잖아요. 한 10년째 차이와 반복의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하는 거니까 좀 재미없게 느껴지기는 하죠. 그런데 <물안에서>는 약간 실험적이지 않아요? 그 구조에서 벗어난 느낌.

EB: <물안에서>에서 시도한 건 전체 영화사적으로 보면 아주 초기에 시도되었던 영화적 실험을 복구한 느낌이에요. 홍상수가 뤼미에르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뤼미에르 영화에 대한 이미지 면에서의 오마주가 나오거든요. (SJ: 영화의 태동적인!) 그래서 혁신적인 것보다는 이제 다 늙은 사람으로서의 영화랄까...

SY: 제가 느끼기에 이런 차이와 반복의 구조가 미학적으로 기능한 작품은 <옥희의 영화>가 정점이었거든요. 이 작품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도 있지만, 그때만큼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근래에는 없었던 것 같아서 좀 아쉬워요.
그런데 사실 홍상수 필모그래피 내에서 진부한 거지 다른 감독이 이걸 시도했을 때 이 사람만큼 좋았던 적은 또 생각해보면 없는 것 같거든요. 약간 김치찌개 맛집처럼... 계속 똑같은 것만 내주지만 이 사람 만한 게 없는 느낌.

SJ: 저는 그래서 <물안에서> 보면서 ‘나 계란말이 먹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싶었어요. 
‘나도 김치찌개 먹으러 왔는데 왜 이러지’ 이런.

EB: 저는 계란말이가 나았어요. (웃음)

SJ: (웃음) 그랬군요. 저는 사실 SY의 의견에 조금 동의하는 게, 최고작이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좀 다르잖아요. 저도 최고작으로는 <옥희의 영화>가 맞다고 생각해요. 

CY: 저는 이전 작품들을 많이 보지 않아서 그런지 재밌게 봤어요. 그 전에 봤던 게 저는 풀잎들이었는데 사실 이건 차이와 반복이 두드러지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래서 저는 (<여행자의 필요>가) 되게 새롭다고 생각하면서 봤던 것 같아요.


3. 그 누구도 아닌 이리스?


SY: 홍상수의 영화가 한 여성 인물에 집중하는 건 유구한 방식이잖아요. <우리 선희>라든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처럼 아예 제목부터 인물을 내세우기도 했었고. 그런 영화들에서 항상 느꼈던 특징이 그 인물을 신비화한다는 거였어요.
이리스에게서도 그 점이 똑같이 느껴졌던 게, 이 사람이 해탈한 도인처럼 그려지는데 정작 이 사람이 이곳에 왜 왔고 이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아요. 그런 걸 영화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런 도인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이리스를 미지의 인물로만 남겨 놓잖아요. 이런 면에서 전작에서 느꼈던 여성 인물에 대한 신비화의 문제가 이어지는 것 같아요.

EB: 이름부터가 이리스예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지개의 여신.

SJ: 홍상수가 젊었을 때 만들었던 영화는 세이렌을 찾고 싶어 했던 것 같죠. 초기에는 일방적인 구애의 대상이었다면, 최근 작품들에서는 그 인물 개인에게 보다 집중하긴 하지만 여전히 대상화 되는 느낌이에요.


4. 기묘한 러브라인


SJ: (이리스와 인국의 관계에서) 이리스가 여자친구인 건지 어떤 인물인 건지 모르겠어요. 무슨 영적인 교감을 나눈 사이인지...

SY: 예전 작품인 <자유의 언덕>에서 권(서영화 분)이랑 모리(카세 료 분)랑 편지를 주고받는 뭔가 요상한 관계잖아요. 완전 똑같지는 않지만 이 관계가 뭔가 떠올랐어요. 여성이 연상이면서 서로 국적이 다른데 애초에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는.
그래서 이런 세상 물정 모르는 예술가 지망생이 도인 같은 여자에게 휘둘리는 것에 대한 환상을 표현한 건가...? 싶었어요. (웃음)  

SJ: 본인이 젊었을 때의 경험이 반영된 것은 아닐지... 사랑과 동경을 헷갈리는 어떤 젊은 예술가의 초상? 그리고 반대로 본인이 이리스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했을 수도 있지 않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랑 <해변의 여인> 같이 찍었던 고현정 인터뷰 중에 그런 말이 있거든요. 감독한테 "현학적인 말로 나를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했다고.

EB: 사람 자체가 너무 투명해요. 영화도 투명하고 이 영화의 주제도 투명하고. 그래서 사실 비평적으로 바라보기 힘든 면이 있죠. 그냥 ‘그랬구나, 그렇게 생각했구나’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는.

SY: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인국과 이리스 둘 다 자기반영적인 인물인 게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거쳐간 것들을 다 이렇게 객관화해서 하나의 풍경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게 감독 본인도 이리스처럼 해탈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초기에는 객관화가 되었다기보다는 치기 어린 느낌이 강했잖아요.


5. 여행자로서의 홍상수


SY: 전작 <우리의 하루>에서는 시인이었고, 아주 비슷하지는 않지만 그 이전에는 소설가도 있었고, 이번에는 여행자잖아요. 그런 인물상들이 연이어 나타나다 보니까 자연히 다음에는 또 어떤 인물이 나올지 궁금해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홍상수가 이 시점에 와서 영화로서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요. 영화가 속세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또 이제 영화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이 같이 뒤따르는 것 같아요.

EB: 그런데 홍상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진짜. (일동 웃음)

SY: 조금 딴 소리 같지만 이 영화 되게 불교적이지 않아요? 

EB: 그 차이와 반복 자체가 그렇죠. 서양식 나아감이 아니라 ‘무’로 가는 게 진짜 동양적으로 느껴져요.

SJ: 불교에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를 존재의 본래 상태라고 본대요. 그런데 이리스가 딱 그런 인물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런 비일상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사람이라면 멍들 수밖에 없거든요.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사람이라면 멍들 수밖에 없는데 이리스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죠. 

SY: 그래서 이리스 자체가 인생에 있어 어떤 이상향을 형상화해놓은 인물 같아요. 막 ‘잘 살아야 돼’라는 마음가짐보다는 그냥 정말 사는 것 자체에, 먹고 사는 것 자체에 충실한 인물이잖아요. 이전 작품들에서 잘 살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 거쳐서 ‘그냥 살자’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아요.
그런데 65세라는 나이가... 이렇게 어떤 경지에 오르기엔 조금 이르지 않나요?

EB: 사실 이리스가 자신의 이상향인 게 아니라 본인이 이미 그 이상향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그런데 왠지 본인이 한 10년쯤 뒤에 이걸 스스로 깨닫고 ‘65살밖에 안 됐는데 내가 너무 도인처럼 굴었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웃음)

SJ: 과거에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어떤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잖아요. 본인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비아냥도 보였었고. 그런데 최근에 베를린영화제에서 했던 말을 보면 “이렇게 말하면 너무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도 내가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