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페미니스트 진짜 계심>
WEBZINE
WEDITOR 강민지
석순은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다. 활동 중이던 후배의 꼬드김에 넘어간 부분도 크지만, 대학을 2년 넘게 다니면서 석순의 존재조차 몰랐을 정도로 학내 인권 단체에 대해 무지했던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작년부터 편집위원이 되었다. 학관 구석에 겨울에는 난방도 전혀 안 되어 벌벌 떠는 작은 편집실이지만 침대와 스케이트 보드와 트램펄린도 있고, 한쪽 벽을 천장까지 빼곡하게 채운 책들과 먼지 쌓인 자료집에, 얼굴 모르는 성원이 칠해 놓고 간 노란색 문까지(나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를 보고 너드와 석순 친구들을 함께 떠올렸다). 무엇보다 나와 함께 고민해 주는 소중한 여성들을 만나게 되어 이곳에 들어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여하튼 급선무는 마감! 개강 직전 글감 회의 이후 마감까지 두 달이 채 안 된다. 각자 거칠게 떠올린 주제를 바탕으로 매주 조금씩 글을 발전시켜 와야 한다. 글을 완성해 가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럽다. 그러나 글을 써 본 이라면 알겠지만 쓰는 건 어떻게든 된다. 사실 가장 어려운 단계는 글감 회의다. 쓰고 싶은 글보다도 써야 하는 글에 대한 고민이다. 학교에서 석순을 향한 관심은 적다. 에타의 관심사는 우리보다도 차라리 세븐틴 부석순이 축제에 올지 여부다. 가판대에 보충해 놓은 최신 호가 다 나가면 우리는 누가 갖다 버린 것은 아니냐며 장난 섞인 의심을 한다. 그만큼 작은 존재감이기에 우리가 어떠한 글을 써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바라든지 개인에게 부여되는 무거운 사명감 따위도 솔직히, 느끼기 어렵다.
석순에 들어온 각자의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통적으로는 백래시에 잠식된 대학과 사회에 갑갑함을 느끼고 노트북 자판이라도 뚜들겨 보기 위함이다. 글감 회의에는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섹슈얼리티, 노동, 환경, 미디어 등등.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글자는 써진 순간 낡기 시작한다는 게 편집위원으로서의 첫 번째 걱정이다. 당장 어제 쓴 일기가 오늘 읽어 보면 구려 보일 때가 있지 않은가. 내가 쓴 글이 다음 학기에, 아니 인쇄소에 맡긴 지금 이미 시간에 뒤처진다면… 막을 방법은 끝없는 자료조사뿐이다. 틀리지 않도록, 빼먹지 않도록.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면 소화불량 상태가 찾아올 때도 있다. 완성되지 못한 글도, 결국 타협으로 끝내는 글도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나라에서 여성주의 교지라는 이름을 내건 채 한 자리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쓴 단어 하나가 건덕지가 되어 전체가 공격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크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안온한 글을 생각한다. 커다란 주제는 기피하고,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며 차라리 ‘빤쓰 벗는’ 쪽을 택한다. 심각한 글보다 재미있는 글을 써야 더 많이 읽어주려나 싶을 때도 있다. 너드 잡지에 영화 기사를 쓰던 나는 석순에 들어와서도 영화 글을 썼다. 영화를 좋아해서도 맞지만, 나는 영화 뒤에 숨은 것이다.
편집실에서 글을 쓰다가 80년대 석순 초창기 글을 읽어 보면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인권학회지라고 해도 손색없는 빽빽한 분량과 탁월한 수준의 글을 보고 있자니 지금 화면 속 턱걸이 마감을 치고 있는 나의 글은 한없이 빈약해 보인다. 물론 상황이 변하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해야 할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달라짐을 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가장 정치적인 글이 되기도 한다. 빤쓰 벗기란 의외로 수고스럽다. 무엇보다 그때도 지금도, 글자 앞에서의 어려움은 같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들어와, 해야 할 이야기를 고민한 뒤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쓴다. 예순두 번째의 책에 다다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인 글들은 그렇게 지금의 우리에게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러면 조금은 덜 주저하는 손가락으로, 써야 할 글을 써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게 2024년을 살아가는 페미니즘 교지로서 가장 큰 숙제일 테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 더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독자들이다. 매번 새로운 책이 나오기 전에 이전 학기 배포되고 남은 책을 수거해야 한다. 진작 모두 나가 틈틈이 보충해 놓는 가판대가 있는 반면 다섯 권도 안 나가고 그대로 남아 있는 가판대도 있다. 우리의 글이 완벽하다거나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 석순을 마구마구 가져가 주시라. 목차라도 훑어보고, 눈길을 끄는 제목이 있다면 페이지를 넘겨 보고. 그리고 글을 읽었다면, 그리고 혹시나 관심이 생겼다면 독자모임에 참석해도 좋다. 어떤 페미니즘 도서들은 저자의 모든 문장에 공감하지 못할지라도, 글자 한 획에 뒤엉켜 풀 수 없는 감정들이 깊게 박히곤 한다. 그 감정은 너무 복잡한 나머지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 미세하게라도 이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독자들이 곳곳에 존재하기를 바라며 이번 주 석순 62집이 무사히 인쇄되어 나오길 기다린다. (2024.05.20.)
여하튼 급선무는 마감! 개강 직전 글감 회의 이후 마감까지 두 달이 채 안 된다. 각자 거칠게 떠올린 주제를 바탕으로 매주 조금씩 글을 발전시켜 와야 한다. 글을 완성해 가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럽다. 그러나 글을 써 본 이라면 알겠지만 쓰는 건 어떻게든 된다. 사실 가장 어려운 단계는 글감 회의다. 쓰고 싶은 글보다도 써야 하는 글에 대한 고민이다. 학교에서 석순을 향한 관심은 적다. 에타의 관심사는 우리보다도 차라리 세븐틴 부석순이 축제에 올지 여부다. 가판대에 보충해 놓은 최신 호가 다 나가면 우리는 누가 갖다 버린 것은 아니냐며 장난 섞인 의심을 한다. 그만큼 작은 존재감이기에 우리가 어떠한 글을 써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바라든지 개인에게 부여되는 무거운 사명감 따위도 솔직히, 느끼기 어렵다.
석순에 들어온 각자의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통적으로는 백래시에 잠식된 대학과 사회에 갑갑함을 느끼고 노트북 자판이라도 뚜들겨 보기 위함이다. 글감 회의에는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섹슈얼리티, 노동, 환경, 미디어 등등.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글자는 써진 순간 낡기 시작한다는 게 편집위원으로서의 첫 번째 걱정이다. 당장 어제 쓴 일기가 오늘 읽어 보면 구려 보일 때가 있지 않은가. 내가 쓴 글이 다음 학기에, 아니 인쇄소에 맡긴 지금 이미 시간에 뒤처진다면… 막을 방법은 끝없는 자료조사뿐이다. 틀리지 않도록, 빼먹지 않도록.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면 소화불량 상태가 찾아올 때도 있다. 완성되지 못한 글도, 결국 타협으로 끝내는 글도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나라에서 여성주의 교지라는 이름을 내건 채 한 자리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쓴 단어 하나가 건덕지가 되어 전체가 공격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크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안온한 글을 생각한다. 커다란 주제는 기피하고,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며 차라리 ‘빤쓰 벗는’ 쪽을 택한다. 심각한 글보다 재미있는 글을 써야 더 많이 읽어주려나 싶을 때도 있다. 너드 잡지에 영화 기사를 쓰던 나는 석순에 들어와서도 영화 글을 썼다. 영화를 좋아해서도 맞지만, 나는 영화 뒤에 숨은 것이다.
편집실에서 글을 쓰다가 80년대 석순 초창기 글을 읽어 보면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인권학회지라고 해도 손색없는 빽빽한 분량과 탁월한 수준의 글을 보고 있자니 지금 화면 속 턱걸이 마감을 치고 있는 나의 글은 한없이 빈약해 보인다. 물론 상황이 변하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해야 할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달라짐을 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가장 정치적인 글이 되기도 한다. 빤쓰 벗기란 의외로 수고스럽다. 무엇보다 그때도 지금도, 글자 앞에서의 어려움은 같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들어와, 해야 할 이야기를 고민한 뒤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쓴다. 예순두 번째의 책에 다다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인 글들은 그렇게 지금의 우리에게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러면 조금은 덜 주저하는 손가락으로, 써야 할 글을 써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게 2024년을 살아가는 페미니즘 교지로서 가장 큰 숙제일 테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 더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독자들이다. 매번 새로운 책이 나오기 전에 이전 학기 배포되고 남은 책을 수거해야 한다. 진작 모두 나가 틈틈이 보충해 놓는 가판대가 있는 반면 다섯 권도 안 나가고 그대로 남아 있는 가판대도 있다. 우리의 글이 완벽하다거나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 석순을 마구마구 가져가 주시라. 목차라도 훑어보고, 눈길을 끄는 제목이 있다면 페이지를 넘겨 보고. 그리고 글을 읽었다면, 그리고 혹시나 관심이 생겼다면 독자모임에 참석해도 좋다. 어떤 페미니즘 도서들은 저자의 모든 문장에 공감하지 못할지라도, 글자 한 획에 뒤엉켜 풀 수 없는 감정들이 깊게 박히곤 한다. 그 감정은 너무 복잡한 나머지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 미세하게라도 이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독자들이 곳곳에 존재하기를 바라며 이번 주 석순 62집이 무사히 인쇄되어 나오길 기다린다. (202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