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館) , 영화-관(棺)

WEBZINE
WEDITOR   최하경

                                       

棺 널 관
- 시체를 담는 궤

館 집 관
- 1.집 2.객사(客舍) 3.관사(官舍)

영화(cinema)는 그 자체로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앉아 있는 육체가 담긴 관과 같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 글은 작년 자 웹진에 기고한 “한 집중력 결핍의 영화관 예찬론”의 연장선으로 쓰인 글이다. 그때와 비교해 영화관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많이 변화했다. 간단히 말해, 집중을 강제하는 장소가 영화의 마땅한 집(館)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상영 장소의 특수성이 영화의 여전히 중요한 성격 중 하나임은 자명하지만, 신성화된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단일성, 그리고 그 순간의 유일성은 이젠 어느 정도 낡아버린 가치인 듯하다. 단순히 스크린의 편재성과 OTT 플랫폼이라는 개인화된 관람 양상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경계와 대상을 규정했던 셀룰로이드 기반의 물질성은 쇠퇴하고 있고 관람의 형태 또한 몰입의 지각에서 정신 분산의 지각으로 이동하고 있다. 영화는 적극적으로 유동성을 요구하는 매체이다. 그러니 영화의 집도 마땅히 유연하게 변모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강요된 재위치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영화는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이 (딱히 정돈되지 못한) 질문과 생각의 흐름을 적어보고자 한다.


1. 불편한 영화-관(棺)
<니미트(2007)>의 무너진 화면, <엠파이어(2010)>의 깊은 물 속 암굴, <엉클 분미(2010)>의 인류 최초의 영화관으로서 동굴 벽화. 영화의 장소, 혹은 집은 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작품 속 중요한 이미지였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 관람의 환경을 자꾸만 환기하던 아피찻퐁은, 공연/영화 <열병의 방(2015)>에서 꽤 이상한 영화의 장소를 제안한다. (아피찻퐁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열병의 방>이 “연극적인 요소가 깊숙이 개입했지만 나는 이 작품이 여전히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바 있다) <열병의 방>에 대한 관객의 체험은 그 이상한 장소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시작된다. 관객들은 좁은 출입구를 통해 암전되어 있는 통로로 진입하여 스태프의 조그마한 불빛에 의지해 공연장을 더듬더듬 찾아가 맨바닥에 흩어져 앉는다. 바닥에 앉아 앞을 바라보다 보면, 태국의 풍경을 담은 (아피찻퐁의 다른 작품을 보았다면 익숙할) 영상이 상영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크린이 상, 하의 두 화면으로 분할되는데, 이 두 스크린은 서로의 장면을 따라가기도, 같은 인물을 다른 각도로 포착하기도 한다. 상관관계가 명백하지 않은, 관찰자의 시점이 틀어진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혼란은 여기서 더 가중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석 좌·우에 위치한 화면이 켜지고, 정면의 두 스크린과는 또 다른 영상을 상영하기 시작한다. 관객의 시야는 이제 ‘무엇’을 넘어 ‘어디’를 봐야 할지 혼란에 빠진다.

여기까지 관객의 신체는 명백히 불편하다. 관객은 편안한 쿠션 의자가 아닌 맨바닥에 앉아야 하며, 단차가 없는 좌석은 시야에 주변 관람객들이 자꾸 걸리게끔 만든다. 어쩌면 열악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관람환경에 불편함을 호소한 관람객도 있었다. 이 또한 흥미로운 반응이다. 신체의 불편함은 몰입을 깨트리고 관객의 신경을 관람하는 공간으로 분산시킨다. 무엇보다 3면으로 관객을 둘러싼, 이어지지 않는 화면들은 관객의 시야를 줄곧 사방으로 분산시킨다. 시선이 한 스크린을 부여잡으려거든 틀림없이 다른 나머지에서 공백이 발생한다. 그렇게 아피찻퐁은 특정 시점에서 다른 시점을 바라보는 축을 없애버린, 혼란이 가득한 ‘공간’의 세계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사실 <열병의 방>의 진가는 스크린이 관객의 눈앞에서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관객을 둘러싼 4개의 화면은 동굴 아래로 내려가는 복면을 쓴 한 남성을 보여주다 (<엉클 분미>의 동굴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이내 암전된다. 그리고 스크린과 뒤에 있던 커튼이 올라가며 관객은 자신이 앉아 있던 곳이 객석이 아니라 무대 안쪽 공연 단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복된 관람의 위치. 이러한 관객의 재위치는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아핏차퐁은 무대 뒤편 낯선 공간에서 바라보는 객석이 주는 불편함과 혼란함을 공유하고 싶어 이와 같이 극장을 재구성했다고 설명한다. 불안정한 건 관객의 위치뿐만이 아니다. 스크린 또한 셀룰로이드 화면에서 공연장을 채우는 연기로 변모해 매 순간 흔들린다. 객석의 작은 조명에서 퍼져나와 연기를 비추는 빛을 바라보다 보면 마치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안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든다. 어두운(obscura) 방(camera)이 영화의 공간과 중첩되는 그 순간, 스크린에 머물러있던 영화는 제의가 아닌 전시적 요소로 표출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아핏차퐁은 자신의 에세이 「어둠 속의 유령들」에서 영화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지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그들의 행동이 마치 앞에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유령들 같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영화(cinema)는 그 자체로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앉아 있는 육체가 담긴 관과 같다. 스크린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의 카메라 기록이다; 그것들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일제히 엮어냄으로써 영화(film)로 불린다. 이 어둠의 넓은 방 안에서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열병의 방>은 이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을 바라보는 어둠의 넓은 방을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그 속의 관객은 분산된 집중, 불편한 신체와 함께 수동적 관람객 아닌 적극적 참여자로 무대 위 위치된다. 다시 말해 관객과 영화, 두 개의 유령으로 분리되어 있던 상태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합쳐진 것이다. 유령이 담긴 관(棺) 같은 영화관(館)이다.


2. 유령만이 남은 영화관
사실 영화 속 극장에는 자주 유령이 도사린다. 폐관을 앞둔 영화관이면 특히. 대한극장을 포함한 국내 예술 영화관의 폐관 소식이 자주 들리는 요즘, 시의적절하게 보게 된 극장에 대한 애가(哀歌) 같은 두 영화, <유령들의 초상 (2023)>과 <안녕, 용문객잔 (2003)>은 모두 유령이 머무는 쓸쓸한 영화관을 그려낸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루는 <유령들의 초상>에서 그가 청소년기를 보내고 이제는 문을 닫은 영화관을 찾아간다. 낙후되고 비어있던 공간은 클레베르의 카메라 속에서 유령으로 둘러싸여 텅 빈 극장의 승강기와 문은 저절로 열리고, 인적 없는 계단에서는 발소리가 들린다. 극장의 마지막을 기록한 청년 클레베르의 푸티지 속 영사기사 알렉산드르는 마치 유령과 같이 잔재하다 영사기의 빛과 함께 사라진다. 이는 영화 포스터로 가득했던 거리, 꽉 찬 객석이 뿜어내던 열기, 극장 문을 나서는 즐거운 얼굴들과 대조되며 영화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애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 현재의 클레베르 감독이 우버 택시를 탄다. 감독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택시 기사는 갑작스레 자신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초능력에 대해 고백한다. 이내 택시 기사는 정말 사라지지만, 핸들을 여전히 돌아가고 택시는 잘 굴러간다. 클레베르는 그가 있을 자리를 보며 말한다:
“거기 있는 거죠?”
“네, 여기 있어요.”

흔적과의 대화. 유령은 아직 그곳에 존재한다, 마치 영화처럼. 사실 모든 영화는 과거의 흔적이다. 다시 말해, 스크린이 보여주는 모든 것들은 과거에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소멸했지만 남아있는 흔적, 유령 혹은 영화.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은 비슷하게 폐관을 하루 앞둔 영화극장의 마지막 작품인 <용문객잔 (1967)> 상영의 안팎을 담아낸다. 낙후된 극장 안의 몇 안 되는 관객들은 마치 유령처럼 비현실적으로 묘사된다. 뭐, 영화 전체를 이루는 몇 안 되는 대사 중 하나가 “이 극장에 귀신 들린 거 아십니까”이니 말 다했다. 이 유령 관객들은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대며 좌석을 옮겨 다니거나 담배를 피우러 상영관 안팎을 들락날락하기도 하고 앞좌석에 다리를 걸치며 소리 나게 음식을 먹어댄다. 영화에 몰입하는 이는 영화 <용문객잔>의 배우, 마오 티엔과 사천뿐이다. 이제는 늙은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영화관에 남아있던 두 배우는 영화가 끝난 후 “아무도 이 영화를 보러 오지 않아요. 아무도 더 이상 우리를 기억하지 않고요”라 말하는데, 이 대사는 처량한 극장의 모습과 함께 영화의 지나가 버린 영광에 대한 안녕처럼 서글피 다가온다.

그러나 차이밍량은 <안녕, 용문객잔>을 전통적인 시네마에 대한 애가로만 끝내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극장 앞에 공지된 ‘잠정영업(暫停營業: temporarily closed)’이라는 문구야말로 더 이상 전통적인 형태로는 존립하기 어렵지만, 마지막 상영작의 필름을 되감고 정리하는 의식을 거친 후,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기약하는 단계로 이행하는 시네마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럼, 그 새로운 영화적 경험은 어떤 것일까? 시네마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3. 전시의 영화(Cinema d’exposition), 그리고 영화관으로의 회귀
차이밍량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미술관이었다. “영화의 미래가 미술관과 갤러리에 있다”고 선언한 그는 영화관의 블랙박스에서 상영되는 장편 영화 제작에서 미술관의 화이트큐브에서 전시되는 확장된 무빙 이미지로 이동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설치작품 <꿈이야(2007)>에선 폐관된 영화관에서 뜯어낸 극장용 의자들을 전시실에 설치하고 스크린을 갖춰 영화관처럼 만든 뒤 단편들을 상영했는데, 이렇게 볼 때 작품이 “영화관에서 볼 때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붉은 승복을 입은 행자, 배우 이강생이 맨발로 느리게 걷는 영화들의 모음인 ‘행자 연작’ 또한 미술관에서 상영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유운성 평론가는 이를 보며 “[행자 연작]의 걷기를 수행 중인 이강생은 오늘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나선 영화 자체에 상응하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차이밍량은 이처럼 오랫동안 영화관의 경험을 미술관으로 이송하려 노력했다.

사실 전시장으로의 이주는 샹탈 아커만, 하룬 파로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포함한 많은 시네아스트들에 이해 진행되어 왔다. 전시장에서의 관람성은 보다 자유롭고 참여적이다. 다시 말해, 지속적인 집중을 요구하는 표준적 영화의 관람성과는 달리 전시관에서의 관람성은 관람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이동을 전제로 한다. 완결된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한 편의 영화 대신 다양한 단편 영상들이 상영되는 공간에서 관객은 자신이 원하는 동선에 맞추어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감상한다. 상영시간 동안 집중해야 하는 표준적 영화의 시간 경제와는 달리 영상 설치 작품에서는 개별 관람자가 특정 작품 또는 작품 전체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해진 기준이 없다. 그래서 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스크린 앞으로 갈 수도 있고 그냥 자리를 뜰 수도 있다. 관람의 순서 또한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즉, 관객은 전시 공간 내에서 움직이면서 감각하는 몸으로 이미지와 스크린의 물질적, 형식적 요소들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 분산(Distraction)의 관람이자 영화적 형태와 경험이 유지되는 동시에 인접 예술의 영향력에 의해 변형되는 이중 과정의 목격이다. 접근하기 쉬운 ‘열병의 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차이밍량은 올해 ‘행자 연작’의 열 번째 작품 <무소주>와 함께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하며 미술관에 걸려던 연작을 다시 영화관으로 옮겨왔다. 이에 대해 이강생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관람자가 이동하면서 작품을 선택하는 미술관 보다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영화관에서 행자 전작을 상영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한다. 왜 차이밍량의 영화는 다시 영화관(館)으로 돌아왔을까?




폐관된 영화관의 문을 다시 두드린 영화가 하나 더 떠오른다. <벌집의 정령 (1973)>에서 영안실이 되어버린 영화관의 문은 빅토르 에리세의 31년 만의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에서 다시 한번 열린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에리세는 “칼 드레이어 이후의 영화의 기적은 없다”라고 말하며 시네마의 죽음을 꽤 직설적으로 표명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리세가 기적을 찾아 다시금 향하는 곳은 문을 닫은 영화관이다.

시네마가 다른 환경으로 재배치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분위기를 띠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본적으로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매체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다른 것이 되는 것이 포스트-시네마 시대 영화의 운명이지 않을까.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시네마의 연속성을 보증하는 것은 ‘필름-영사기-극장’ 복합체로 된 물리적 측면의 영속성이 아니라, 보고 듣고 감각하는 경험 형식의 생존 여부라고 말한다. 현세의 영화는 예정된 방랑의 시기를 견디고 있다. 자꾸만 시네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유령이 가득한 영화-관(棺) 또한 시네마의 기적이 있는 영화관(館)인데 뭐 어떤가. 우리는 재위치된 영화도 어디서든 계속해서 보고 듣고 감각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