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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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이수아
WEDITOR 이수아
나는 5년 전부터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책을 이야기하기로 정해 두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도서관은 꽤 컸다. 작은 시골 학교였음에도 도서관만은 그랬다. 학교 본관이 아닌 시청각실 위에 따로 있을 정도로 말이다. 도서관만 다른 건물에 있다는 사실이 왜인지 모르게 좋았다.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에 자주 갈 것을 다짐했다.
고등학교 도서관의 깊숙한 곳에는 먼지 쌓인 책들이 아주 많다. 아무래도 그들이 십 대 아이들의 복잡한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는 그 책들을 보고 싶어 가장 안쪽의 서가로 갔다. 그곳에서 발견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말이다.
열면 먼지가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이 낡은 책이었다. 표지에는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안개라는 단어가 먼지로 탁해진 안쪽 서가의 공기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옛 책을 읽으면 무언가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대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책을 펴자마자 실망스러웠으니 말이다. ‘무진기행’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분명 두껍고 무거웠는데, 알고 보니 단편 소설집이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이 단편집의 제목이 된 것이다. (말을 길게 했지만) 어쨌든 무진기행의 이야기 길이가 짧다는 것에 실망했다. 오래 두고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고른 책이기도 했는데. 그러나 곧 이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내용이 살짝 거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열일곱 살에게는 적절치 못한 묘사들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작은 항구 도시인 ‘무진(霧津)’은 '안개 나루'라는 의미를 지닌다. 문자 그대로 안개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에 무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있을 법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진은 소설을 위해 지어낸 가상 도시다. 가상 도시라고는 해도 작가의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이 모티브라고 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은 윤희중이라는 남자다. 그를 ‘윤’이라고 줄여 불러 보겠다. 윤은 그의 장인이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전무로 승진하기 전 고향인 무진에 간다. 무진에 가게 된 것은, 고향에서 잠시 머리를 식혀 보라는 아내의 제안(혹은 명령) 때문이었다. 남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을 위해 작은 도시를 떠나 서울로 온 그가, 모순적이게도 가장 큰 성공을 앞둔 때에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윤은 무진에 머무는 동안 여러 일을 겪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은 하인숙이라는 여자와의 만남이다. 윤과 하인숙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이 그렇게 큰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만국 공통의 보편적 관심사임을 알기에 인정하고 넘어갔다) 하인숙은 윤에게 자신을 서울에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윤은 약속한다. 어느 날 아침, 윤에게 전보 한 편이 도착한다.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전보였다. 윤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탄다. 그는 사랑하는 도시와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고 떠난다.
윤에게 무진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임과 동시에 도시에서 상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탈일상적 공간이다. 하인숙은 윤에게 그런 무진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윤이 무진을 생각하면 하인숙을 생각하는 것이고, 하인숙을 생각하면 무진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떠난 것은, 사랑하는 것은 무진인지 하인숙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도시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했다.
허무했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랑을 하는 주인공에게 짜증이 나 책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편지를 보게 됐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윤이 쓴 편지를.
무진을 떠나는 편지(윤희중이 하인숙에게)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글로 여기고 있다. 몇 줄 안 되는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편지를 읽은 후에야 겨우 무진기행의 의미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잠깐의 일탈 정도로 여겼던 마음이 사랑으로 보였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은 이유까지 구구절절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을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은 쓴 편지를 쓰자마자 찢어 버린다. 이런 편지를 쓰려면 대체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사랑도 있고, 사랑의 이유도 있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 완벽한 연애 편지였는데. 왜 주지도 않을 편지를 쓰는 걸까. 마음이 소중하면 가지고나 있지 왜 편지를 찢는 거지. 서울에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 이상하구나 싶었다.
무진기행을 처음 읽었던 날로부터 벌써 6년이 지났다. 그사이 나는 여러 번 바뀌었다. 바뀐 만큼 성장했을까. 잘 모르겠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배웠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헷갈릴 정도로 떠밀리듯 얻어 냈다.
자란 곳을 떠나 서울에 왔다. 나이를 물어볼 때 대답해야 하는 숫자가 점점 커졌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해 왔다. 정성스럽게 적어 내려간 편지를 전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마음인지를 알게 되었다.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이 주는 허무함을 알게 되어 버렸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도서관은 꽤 컸다. 작은 시골 학교였음에도 도서관만은 그랬다. 학교 본관이 아닌 시청각실 위에 따로 있을 정도로 말이다. 도서관만 다른 건물에 있다는 사실이 왜인지 모르게 좋았다.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에 자주 갈 것을 다짐했다.
고등학교 도서관의 깊숙한 곳에는 먼지 쌓인 책들이 아주 많다. 아무래도 그들이 십 대 아이들의 복잡한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는 그 책들을 보고 싶어 가장 안쪽의 서가로 갔다. 그곳에서 발견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말이다.
열면 먼지가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이 낡은 책이었다. 표지에는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안개라는 단어가 먼지로 탁해진 안쪽 서가의 공기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옛 책을 읽으면 무언가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대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책을 펴자마자 실망스러웠으니 말이다. ‘무진기행’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분명 두껍고 무거웠는데, 알고 보니 단편 소설집이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이 단편집의 제목이 된 것이다. (말을 길게 했지만) 어쨌든 무진기행의 이야기 길이가 짧다는 것에 실망했다. 오래 두고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고른 책이기도 했는데. 그러나 곧 이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내용이 살짝 거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열일곱 살에게는 적절치 못한 묘사들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작은 항구 도시인 ‘무진(霧津)’은 '안개 나루'라는 의미를 지닌다. 문자 그대로 안개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에 무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있을 법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진은 소설을 위해 지어낸 가상 도시다. 가상 도시라고는 해도 작가의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이 모티브라고 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은 윤희중이라는 남자다. 그를 ‘윤’이라고 줄여 불러 보겠다. 윤은 그의 장인이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전무로 승진하기 전 고향인 무진에 간다. 무진에 가게 된 것은, 고향에서 잠시 머리를 식혀 보라는 아내의 제안(혹은 명령) 때문이었다. 남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을 위해 작은 도시를 떠나 서울로 온 그가, 모순적이게도 가장 큰 성공을 앞둔 때에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윤은 무진에 머무는 동안 여러 일을 겪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은 하인숙이라는 여자와의 만남이다. 윤과 하인숙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이 그렇게 큰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만국 공통의 보편적 관심사임을 알기에 인정하고 넘어갔다) 하인숙은 윤에게 자신을 서울에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윤은 약속한다. 어느 날 아침, 윤에게 전보 한 편이 도착한다.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전보였다. 윤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탄다. 그는 사랑하는 도시와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고 떠난다.
영화 <안개> 스틸 이미지 ⓒ 태창흥업주식회사
윤에게 무진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임과 동시에 도시에서 상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탈일상적 공간이다. 하인숙은 윤에게 그런 무진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윤이 무진을 생각하면 하인숙을 생각하는 것이고, 하인숙을 생각하면 무진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떠난 것은, 사랑하는 것은 무진인지 하인숙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도시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했다.
허무했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랑을 하는 주인공에게 짜증이 나 책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편지를 보게 됐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윤이 쓴 편지를.
무진을 떠나는 편지(윤희중이 하인숙에게)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글로 여기고 있다. 몇 줄 안 되는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편지를 읽은 후에야 겨우 무진기행의 의미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잠깐의 일탈 정도로 여겼던 마음이 사랑으로 보였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은 이유까지 구구절절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을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은 쓴 편지를 쓰자마자 찢어 버린다. 이런 편지를 쓰려면 대체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사랑도 있고, 사랑의 이유도 있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 완벽한 연애 편지였는데. 왜 주지도 않을 편지를 쓰는 걸까. 마음이 소중하면 가지고나 있지 왜 편지를 찢는 거지. 서울에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 이상하구나 싶었다.
무진기행을 처음 읽었던 날로부터 벌써 6년이 지났다. 그사이 나는 여러 번 바뀌었다. 바뀐 만큼 성장했을까. 잘 모르겠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배웠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헷갈릴 정도로 떠밀리듯 얻어 냈다.
자란 곳을 떠나 서울에 왔다. 나이를 물어볼 때 대답해야 하는 숫자가 점점 커졌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해 왔다. 정성스럽게 적어 내려간 편지를 전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마음인지를 알게 되었다.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이 주는 허무함을 알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