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는 무서워 - <삼거리 극장> 퀴어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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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신서윤
WEDITOR 신서윤
1.들어가며
대부분의 공포영화에서 귀신은 처벌의 대상이다. 그들은 불가해한 욕망으로 경계를 침범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타자로 놓이며, 질서 회복을 위해 단죄되어야 한다. 귀신이 이기든 산사람이 이기든 이 소통 불능의 이분법적 구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1990년대 초 유럽과 미국의 뉴 퀴어 시네마가 공포영화 중심이었던 것은 결코 부족한 예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퀴어가 겪는 사회적 공포와 혼란, 죽음에 대한 매혹은 공포의 장르적 기법과 맞아떨어지며 공포영화 속 퀴어 미학을 축적해 나갔다.
한국 영화계 역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게이 멜로드라마를 중심으로 퀴어 텍스트의 폭을 넓히는 과정에 있었다(<내일로 흐르는 강>, <로드무비>, <후회하지 않아>). 이 시기는 <여고괴담>을 시작으로 ‘현대적인’ 공포영화가 선언된 뒤 <폰>, <장화, 홍련> 등 정서적 영역을 건드리는 영화들이 흥행을 거두던 한국 공포영화의 전성기와도 겹쳐진다. 그러나 한국의 퀴어와 공포영화는 좀처럼 궤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이는 퀴어에 대한 초기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던 영화들이 장르적 모험을 고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뉴 퀴어 시네마의 불손하고 반항적인 이미지 대신 사회적으로 관용될 수 있는 퀴어 이미지가 그들에게 얼마 주어지지 않은 스크린을 채웠다.
그러나 2000년대의 공포가 퀴어 정치학을 바탕으로 재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2006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삼거리 극장>은 과잉된 비주얼, 뮤지컬 기반의 내러티브, 다양한 영화 및 신화를 덕지덕지 인용한 텍스트로서 퀴어 하위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뮤지컬부터 공포와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삼거리 극장>은 그 자체로 재조립과 재해석의 결과물인 동시에 관객 역시 재해석의 장으로 뛰어들게 한다. <록키 호러 픽쳐 쇼>, <프랑켄슈타인>, <비틀쥬스>와 미노타우로스 신화……. 원전의 변용을 하나씩 짚어내다 보면 <삼거리 극장>이 퀴어링(queering)에 활짝 열려 있는 텍스트임을 깨닫게 된다. 뮤지컬이 지닌 육체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강조, 모든 등장인물이 지닌 두 개 이상의 정체성,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소외의 기억은 특히 퀴어를 위한 것으로 전환된다.
본 글은 <삼거리 극장>의 두툼한 참고문헌 목록을 해부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의도와 우연을 넘나드는 혼성모방과 씨름하는 것보다야 <삼거리 극장>을 퀴어의 편에 선 공포영화로 다시 써 보는 일이 훨씬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삼거리 극장>은 괴물로서 무섭게 하는 퀴어와 희생자로서 무서워하는 퀴어,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무섭지 않게 될 가능성을 함께 드러내는데, 이때 퀴어는 기존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규범에 어긋나는 경계적 존재를 가리키도록 사용된다. ‘퀴어’는 “항상 담아두려 준비했던 그릇에서 넘쳐나”는 단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내려는 시도는 언제나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고, 본 글 역시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우선 <삼거리 극장>의 배경이 되는 독특한 시공간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2.퀴어의 시공간
2-1. <삼거리 극장>의 퀴어 시간성
규범적 시간성은 이성애 규범적인 문화 및 제도에 조응하며 삶을 연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간의 흐름이다. 교육, 결혼, 가족과 국가가 제도를 매개로 시간을 흐르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퀴어 시간성은 이러한 생산적 시간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며 때때로 순차적 시간성마저 교란한다. 퀴어 시간성은 불연속적인 시간과 비규범적인 관계 속에서 지향될 수 있다.
<삼거리 극장>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지방 소극장을 매개로 2005년과 1940년대를 오가며 진행되지만, 관객에게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연대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삼거리 극장 내부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대와 다소 유리된 것처럼 보인다. 고딕풍의 인테리어가 몇십 년에 걸친 간극을 전부 품어내고, 광대, 기생, 공주 등 역사적 캐릭터들의 복장 역시 과거에도 현대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이다희 미술감독은 “현실 속의 2005년이 아니라 환상 속의 2005년이라는 생각으로” 삼거리 극장의 세트를 구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삼거리 극장의 시간성은 선형적인 흐름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 속하지 않는 비규범적인 것이 된다.
삼거리 극장에 내재된 퀴어 시간성은 규범적 시간 속에서 다른 삶을 갈망하던 소단의 과거 모습과 대비된다. 소단과 귀신들의 첫 만남은 극장 안에서 흡연을 하던 그녀에 대한 재판으로 설정된다. 광대 모스키토는 소단을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기소한다:
이때 모스키토가 증거로 제시하는 소단의 사진들은 고아인 그녀가 할머니에게 혼나는 장면, 빨랫줄에 옷 대신 아기를 걸고 의뭉스럽게 웃는 장면,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홀로 등을 돌린 장면 등으로 구성된다. 소단의 개인사는 가족 혹은 공적 기억 속에서 안정적으로 서사화되지 못하며, 이미 아기의 이미지를 희생시켰기 때문에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해 볼 수도 없다. 재생산적 미래주의의 대척점에 섦으로써 소단에게는 퀴어한 결이 생겨난다. 그녀가 의지할 곳은 담배라는 자기 파괴적 쾌락뿐이다.
하지만 삼거리 극장은 소단에게 대안적인 시공간을 제공한다. 귀신들의 친구가 된 소단은 학교에 가기보다 극장의 매표 일을 택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교 입학, 취업 등으로 이어지는 삶의 규범적 단계를 따라 ‘위로’ 자라는 대신 ‘비스듬히’ 자라나기로 마음먹은 퀴어 청소년의 결단이다. 일하는 극장에는 파리가 날리고, 따라서 소단은 미래를 위한 의미 있는 무엇도 생산하지 못한다. 바로 그 비생산적인 시간 속에서 소단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귀신들에게 진정한 유대감을 느낀다.
성인인 우기남에게 삼거리 극장의 시간성은 소단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기남은 삼거리 극장의 사장으로, 몇십 년째 극장에 갇혀 자살을 기도한다. 그가 감독을 맡은 조선 최초의 괴수 영화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은 어두운 시대상을 담고 있다. 미노수는 근대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던 실험의 실패작으로, 이후 지하 동굴에 갇혀 지내야 하는 “저주스러운 운명”을 타고났다. 사장실에 걸려 있는 소머리 탈은 미노수가 우기남의 페르소나임을 드러내며,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시대에 괴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통을 은유한다.
이후 미노수는 소단과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연인 아랫네와 재회한다. 그러자 60여 년간 고여 있던 극장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우기남은 순식간에 백발노인이 된다. 우기남은 규범적 시간성에 편입할 수 없는 퀴어로서 언제나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페르소나인 미노수가 연인과 성공적으로 결합함에 따라, 강제로 지연되었던 시간의 흐름이 그에게도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이다.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 이후 우기남의 삶은 매분 매초 자신의 실패와 마주해야 하는 형벌이었지만, 그는 극장 안에서 마침내 안식을 찾는다. 삼거리 극장의 퀴어 시간성은 소단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우기남에게는 과거에 대한 애도를 선물한다.
2-2. <삼거리 극장>의 퀴어 공간성
<삼거리 극장>의 촬영지였던 부산의 삼일 극장은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었으며, 1944년부터 2006년까지 62년 동안 운영되었다. 광복 이후 삼일 극장은 적산 극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논쟁에 휩싸였고,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피난민들을 위한 수용소로 기능하며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축적해 왔다. 영화 속 삼거리 극장은 삼일 극장의 비극적인 역사성에 기대어 축조된 꿈의 공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삼거리 극장은 삼일 극장과 마찬가지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귀신들은 하루 손님이 열 명도 안 되는 극장이었다며 자조하고, 시네필 휘순은 화려했던 옛 극장이 스러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따라서 <삼거리 극장>은 주류 멀티플렉스의 자본에 밀려 역사와 다양성을 상실해가는 한국 영화계의 취약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낮의 삼거리 극장은 시간 속에서 빛을 잃은 허약한 모습이다. 극장의 내부는 이미 한 번 버려진 것처럼 쓸쓸하고, 귀신들은 근무 시간 동안 적막한 얼굴로 시간을 죽인다. 귀신들과 소단에게는 자신들의 현재에 대한 어떠한 의식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빈곤함은 삼거리 극장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삼거리 극장에는 현재보다 생생한 과거, 낮보다 충만한 밤이 있다. 소단이 비 오는 날 밤 할머니를 찾다가 발견한 삼거리 극장의 안내문은 다음과 같은 불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모퉁이에서 계속 왼쪽으로 돌다 보면 느닷없이 나타나겠지.” ‘옳은 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아야 도달할 수 있는 곳, 밤마다 은밀한 연회가 펼쳐지는 극장은 퀴어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크루징 공간처럼 보인다.
유명 SF 작가이자 흑인 퀴어 남성인 새뮤얼 딜레이니는 ‘타임스퀘어 레드, 타임스퀘어 블루’에서 타임스퀘어의 포르노 극장 안팎에서 겪은 경험을 서술하였다. 포르노 극장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다양한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를 지닌 사람들이 성적 욕망과 친밀성을 나누는 만남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퀴어들이 극장을 게토화한 것은 단지 외국의 일만은 아니다. 홍민키 감독의 <낙원>은 종로 바다 극장이 게이들의 크루징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 경위를 유쾌하게 전달하는 다큐멘터리이다. 퀴어 게토는 모든 사람이 이성애자라 가정되는 공적 공간을 퀴어로 채움으로써 안전함을 불온함으로 바꾸고, 익숙함을 낯섦으로 채워 넣는다.
하지만 모든 좋은 것에는 (그것이 좋기 때문에) 위기가 닥친다. 1994년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는 도시 정화라는 명분 아래 포르노 극장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중산층 이성애 가족을 위한 쇼핑몰을 세웠다. 바다 극장 역시 2010년 폐관 이후 10여 년 동안 방치되어야 했다. 이러한 젠트리피케이션은 단순히 공적 공간에서 퀴어들을 쫓아내 사적 공간으로 돌려보내는 조치가 아니다. 퀴어들의 사적인 욕망과 관계를 위해 만들어진, 자그마한 공적 영역의 틈바구니마저 위협받고 메워졌음을 의미한다. 소단이 삼거리 극장의 폐관을 막기 위해 사방팔방 애쓰는 것은 이렇듯 퀴어적인 절박함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고독하고 불안하던 자신의 삶에 유일한 기쁨을 안겨 주는 크루징 공간을 잃을 수 없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에 따르면 퀴어 정치는 이 땅에 발붙이고 여기서 살만한 자리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퀴어한 쾌락은 “그동안 금지되거나 차단되었던” 몸들이 서로 맞닿는 기쁨에서 나온다. 따라서 소단이 다른 몸들과 맞닿기 위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그동안 금지되었던 욕망과 관계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적극적인 퀴어 운동으로 보인다. <삼거리 극장>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퀴어 영화로 규정될 수 있다.
3.무섭게 하는 퀴어
3-1.키치와 캠프
헤더 러브는 『Feeling Backward: Loss and the Politics of Queer History』에서 퀴어들을 사로잡는 ‘뒤처짐(backwardness)’의 정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러브는 퀴어 문화의 키치와 캠프 미학을 뒤처짐과 연관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녀에 따르면 캠프는 철 지난 대중문화, 어린 시절의 쾌락과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뒤처진 예술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퀴어들은 성장에 대한 거부, 잊히지 않는 기억의 탐구,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착 등 다양한 형태로 뒤처짐을 수용해 왔다. 이러한 정서는 성스러운 것을 격하시키며, 괴상하고 저속한 것, 유치한 것, 조악한 것을 추구하는 키치의 기반이 된다.
캠프가 고급문화에 대한 비웃음을 함축하며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상품화하는 사조라면, <삼거리 극장>은 분명 캠피한 영화이다. <삼거리 극장>은 원본성을 부정하며 다양한 영화, 신화, 그림과 음악의 자유로운 혼성모방에서 출발한다. 우선 극장을 탐험하는 소단의 설정은 기묘한 환상의 세계에서 모험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변용이다. 특히 2-1에서 다룬 소단의 재판 시퀀스는 제11장 ‘누가 타르트를 훔쳤나?’, 귀신들과의 만찬은 제7장 ‘미치광이 티파티’를 거의 그대로 연상시킨다. “기이한 의자, 인형, 버려진 것들을 살려 표현”한 만찬 시퀀스는 즈지스와프 백진스키 작품의 강렬한 인상을 전달하기도 한다.
귀신들의 설정은 <록키 호러 픽쳐 쇼>, <비틀쥬스>, <프랑켄슈타인>, <크리스마스의 악몽> 등 다양한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태생적인 비극을 타고났지만 영화는 이들을 오해받는 희생자로, 궁극적으로는 동정심을 일으키는 캐릭터로 재현하기를 거부한다. 어두운 밤, 고딕풍의 건물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육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만끽하는 그들은 <록키 호러 픽쳐 쇼>의 천진한 퀴어들과 맞닿아 있다. 특히 악동의 면모를 지닌 모스키토는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프랭크 박사와 <비틀쥬스>의 비틀쥬스를 동시에 닮았다.
기괴하고 위협적인 텍스트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거리 극장>은 소름 끼친다기보다 어딘가 사악하고 귀여운 인상을 준다. 스타 캐스팅과 거액의 투자를 마다한 전계수 감독은 <삼거리 극장>을 통해 당당하게 키치를 추구한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인물들은 최대한 극장 안에 머무르지만, 계단을 타고 자유롭게 흐르는 카메라와 복잡하게 꾸며진 미술로 인해 극장의 내부는 문을 열 때마다 팽창한다. 많은 뮤지컬 시퀀스들이 객석에 앉아 뮤지컬을 보고 있는 듯한 시점을 채택하는데, 특히 ‘밤의 유랑극단’은 뮤지컬 소극장과 영화관 관객석의 유사성을 이용하여 마치 공연 실황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때 체계적이고 일사불란한 안무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전계수 감독은 서병구 안무가에게 “매끈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아니니까 엉성한 춤을 만들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짜임새 있는 안무 대신, 제각기 다른 각도로 팔을 뻗고 몸에 필름을 감은 채 허우적대는 자유롭고 조악한 움직임이 완성되었다.
<삼거리 극장>은 이미 퀴어한 텍스트 이외에도 여러 주류 텍스트 속 재현을 가져와 캠프 미학을 덧씌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류 텍스트는 기존과는 다른 퀴어한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퀴어의 모욕적 의미를 모범적 이미지로 표백하는 대신, 그 멸칭을 그대로 받아치면서 위악적으로 몸을 부풀리는 즐거움이다. <삼거리 극장>은 1940년대에 죽은 귀신들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뒤처짐의 정서와 오래된 극장의 키치한 외피를 조합하여 ‘K-캠프’라고 불릴 만한 무언가를 완성해 냈다. 영화는 이제 기존의 이성애 규범적 헤게모니를 전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3-2.퀴어 괴물
공포영화 속 괴물은 ‘정상적인 세계의 이상한 존재’이다. 문학연구자 로즈메리 잭슨은 주류 문화의 질서가 억압적인 패러다임으로 작용하여 괴물을 만든다고 보았다. 로빈 우드 역시 ‘과잉억압’의 개념을 활용하여 공포영화 속 괴물의 탄생을 설명한다. 로빈 우드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개인을 억압하고 있으며, 개인 역시 자기 자신을 억누르며 살고 있다. 사회의 규범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정상성을 위협하는 것들이 타자의 형상으로 간주되고, 나아가 괴물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타자는 단순히 내가 아닌 타인일 수도 있지만, 주로 여성, 프롤레타리아, 다른 문화, 동일 문화 내의 다른 인종집단,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나 정치제도, 어린이, 그리고 성적 규범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일탈들로 형상화된다고 우드는 명시한다.
영화 속 영화인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에서, 퀴어 괴물 미노수는 노골적인 타자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그는 인간의 몸에 소머리를 가진 괴물로서 인간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해체한다. 미노수가 지하 동굴에 갇힌 것은 단순히 보기에 고약하고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다. 미노수는 태초부터 혼합성을 지닌 불순한 존재이며, 따라서 어느 범주에도 들어맞지 않고 정상성을 위협한다. 미노수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기존의 범주에 문제를 제기하고 주류 문화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들어 놓기 때문에 두려운 괴물인 것이다.
미노수에게 내려진 감금은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보복이지만,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서커스단의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 아랫네는 미노수의 끼니를 챙기다가 그와 사랑에 빠진다. 괴물을 구경하러 온 하쉬바 공주 역시 미노수에게 매혹되어 그에게 동침을 요구한다. 미노수를 가둔 지하 동굴의 미로는 그를 억압하고 잊으려 애쓰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미노수를 유혹적으로 만든다. “탄생과 함께 비극의 젖줄을 달고 나온” 운명, 공포와 매혹의 양가성, 금지된 사랑과 억압되는 섹슈얼리티로 인해 미노수는 퀴어 괴물이 된다.
퀴어는 흔히 죽음과 관련지어진다. 미노수는 모체를 희생시키며 태어났고, 탄생 직후에는 자신에게 비극적 운명(미노수는 거울을 보자마자 자신의 삶이 저주받았음을 깨닫는다.)을 선사한 아버지 표세동 박사를 살해하였으며, 전장에서는 아군을 까무러치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하쉬바가 보낸 청부 살인자 데츠오까지 살해한다. 퀴어는 대를 끊는 존재로서 죽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퀴어라는 사실이 들키면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점에서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퀴어는 “죽음을 욕망하는 존재”로 재현되거나 범죄자-살인마-죽음으로 퇴장하는 역할밖에 부여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삼거리 극장>은 미노수를 스크린 밖으로 끌고 나온다. 미노수는 자신의 퀴어 정체성이 괴물 살인마로 낙인찍혔던 흑백영화의 세계에서 탈출하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혼비백산하며 달아나지만, 적어도 이곳에는 미노수와 함께 난장을 즐기는 귀신들이 있다. <삼거리 극장>은 영화 속 영화의 구조를 활용하여 과거의 공포영화에 도전하고 재맥락화하는 방식으로 퀴어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침내 미노수에게 아랫네를 돌려준다. 아랫네가 미노수를 위해 부르는 ‘내게로 와’는 퀴어 서사를 행복하게 마무리하려는 시도이다. 복잡하고 양가적인 정체성, “두 개의 그림자를 끌고서” 나에게 돌아오라는 노랫말은 그가 함부로 재단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것임을 암시한다.
전계수 감독은 미노스의 미궁 이야기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가장 큰 연민을 느낀다고 밝혔다. 신화와 다른 전복적인 결말은 그가 (퀴어) 괴물에게 보내는 헌사인 동시에 퀴어성에 대한 새롭고 긍정적인 묘사이다. 새로운 시대의 공포영화는 퀴어성을 단순히 두려운 것으로 치환하는 대신, 규범의 바깥에서 규범성을 비판하고 뒤엎는 능동적인 주체로 해석한다. 욕망과 금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공포영화는 이 순간 그 자체로 전복적인 것이 된다.
4.무서워하는 퀴어
미노수가 퀴어 괴물과 희생자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녔다면, 극장의 귀신들은 희생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들이 극장의 고객에게 겁을 주는 방식은 하찮고 사소한 동시에 퀴어하다. 예컨대 히로시는 여성복을 입고 화장을 한 채 군인의 옆자리에 앉아 그를 기절시킨다. 히로시의 타자화된 겉모습은 사장된 게이 크루징 문화를 떠올리게 하며, 이성애 규범적 사회와 게이 하위문화 양쪽에서 소외되는 퀴어성의 두려움을 상기시킨다.
완다 역시 팝콘 봉투에 구토함으로써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먹는 대신 구토하는 것은 완다가 음식에 대해 꾸준히 보여 온 반응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이러한 거식증을 죽음 본능이 성차화된 결과로 파악한다. “거식증은 여성 육체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에 대한 항의의 한 형식이다. 단순히 날씬한 몸매에 대한 당대의 가부장제적 이상과 무절제하게 공모한 것으로 거식증을 해석하기보다는 바로 그 가부장제의 ‘이상’을 정확히 체념한 것으로 거식증은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히로시의 과장된 여성성 수행과 마찬가지로, 완다의 거식증적 반응은 자학적인 즐거움을 유발하고 정상성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두려운 것이 된다.
하지만 귀신들은 무섭게 하기보다 무서워하는 것에 더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모스키토는 히로시, 완다와 달리 사람들에게 겁주는 데 실패하는 보잘것없는 귀신이다. 그래도 그의 외관만큼은 누구보다 강렬한데, 산발인 머리카락, 화려한 의상, 하얗게 칠한 얼굴 위 검은색으로 과장하여 그린 메이크업은 그를 비틀린 광대처럼 보이도록 한다. 모스키토는 제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듯 다른 귀신들 앞에서 까불다가 얼굴을 맞거나 머리에 포크가 꽂힌다. 모스키토가 당하는 피해는 그의 그로테스크한 비주얼과 어우러져 “마치 그 자신이 귀신을 보고 놀라 소스라친 모습”이 된다.
또한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넘버인 ‘정든 꿈’은 세상이 싫어 꿈에 정을 붙일 수밖에 없는 귀신들의 애수를 노래한다. 그러한 종류의 슬픔은 특히 주변적 존재의 몫으로 지상에 남겨져 있다.
곡이 흐르는 동안 화면에는 귀신들의 두 가지 정체성이 병치된다. 귀신들은 낮 동안의 쓸쓸한 직원 정체성 옆에 서서 시간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괴로움을 노래한다. “이게 꿈이라면 사라질까”, “나를 떠나갈까”, “내가 잊힐까” 두려워하는 귀신들은 삶도 무덤도 아닌 곳을 서성거리는 경계적 존재이다. 그들은 억압적인 범주에 잘 들어맞지 않고, 규범에 순응할 수 없고, 세상과 불화하며 살아간다. 시간적 원근감의 부재와 억압의 경험에서 오는 체념이 귀신들의 일상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때때로 고통은 그저 고통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기억도 미래를 위한 실천의 동력도 아니다. 그들은 퀴어가 아니기를, 그렇게 해서 세상과 불화하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삼거리 극장>은 ‘정든 꿈’을 통해 귀신들의 뒷면에 슬픔과 애수의 맥락을 붙여넣고 퀴어적인 잠재력을 더한다. 부정적 정동을 지나간 과거의 것으로 섣불리 무시하지 않음으로써 <삼거리 극장>은 비로소 퀴어 부정성에 대한 양가적인 애착으로 전환된다.
5.나가며
“울지 마라, 외로운 소녀야. 서러운 삶이 어디 너뿐이더냐? 닥치고 춤이나 춰!”
<삼거리 극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뮤지컬 넘버 중 하나인 ‘자 봐라 춤을’은 소단이 귀신들의 친구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귀신들은 소단에게 그대가 얼마나 ‘섹시’하고 ‘거시기’한지 보라며 섹슈얼리티를 해방하는 노래를 부른다. 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모스키토가 외친 도발적인 문장은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한다. <삼거리 극장>은 과거에서 오는 후회, 수치심, 절망과 자기혐오의 정서를 인정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극장은 퀴어 부정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연대 장소가 되고,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부정성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부정성을 안은 채로 춤을 추는 것이다.
<삼거리 극장>을 지탱하는 장르의 축은 이들의 춤을 단단히 받쳐준다. 뮤지컬에 은근하게 깔린 자기애적 특성과 하위 집단의 감수성은 근본적으로 영화에 퀴어성을 부여한다. 뮤지컬은 인간의 몸을 최대한 활용하는 장르이기도 한데, 여기서 오는 에로틱한 감정은 영화의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또한 <삼거리 극장>은 공포영화로서 무엇이 왜 무서운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주류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패러다임의 한계를 폭로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상상의 세계에 실체를 부여하는 판타지와 공포와 맞닿은 신랄한 코미디 역시 <삼거리 극장>을 설명하는 부차적인 단어가 될 수 있다.
<삼거리 극장>을 좋아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본 글은 <삼거리 극장>을 사악하고 귀여운 퀴어 영화로서 좋아해 보려는 시도이다. ‘옳은 쪽’ 대신 왼쪽으로만 모퉁이를 돌아야 나오는 극장. 저주받고 잊힌 것들을 불러내는 장소. 비공식적인 슬픔의 아카이브.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기남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통째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어두운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유령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야. 마치 모든 게 꿈만 같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벗어나서도 삶은 계속되지 않고, 문을 열면 또 다른 어두운 극장에서 영화가 계속되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극장-영화-은 우리를 과거와 현재, 낮과 밤, 현실과 환상 사이에 위치시킨다. 극장에서 우리의 몸은 투명해지고 반쯤 귀신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경계에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고민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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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Love, Heather, Feeling Backward: Loss and the Politics of Queer History, Harvard, 2009.
대부분의 공포영화에서 귀신은 처벌의 대상이다. 그들은 불가해한 욕망으로 경계를 침범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타자로 놓이며, 질서 회복을 위해 단죄되어야 한다. 귀신이 이기든 산사람이 이기든 이 소통 불능의 이분법적 구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1990년대 초 유럽과 미국의 뉴 퀴어 시네마가 공포영화 중심이었던 것은 결코 부족한 예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퀴어가 겪는 사회적 공포와 혼란, 죽음에 대한 매혹은 공포의 장르적 기법과 맞아떨어지며 공포영화 속 퀴어 미학을 축적해 나갔다.
한국 영화계 역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게이 멜로드라마를 중심으로 퀴어 텍스트의 폭을 넓히는 과정에 있었다(<내일로 흐르는 강>, <로드무비>, <후회하지 않아>). 이 시기는 <여고괴담>을 시작으로 ‘현대적인’ 공포영화가 선언된 뒤 <폰>, <장화, 홍련> 등 정서적 영역을 건드리는 영화들이 흥행을 거두던 한국 공포영화의 전성기와도 겹쳐진다. 그러나 한국의 퀴어와 공포영화는 좀처럼 궤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이는 퀴어에 대한 초기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던 영화들이 장르적 모험을 고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뉴 퀴어 시네마의 불손하고 반항적인 이미지 대신 사회적으로 관용될 수 있는 퀴어 이미지가 그들에게 얼마 주어지지 않은 스크린을 채웠다.
그러나 2000년대의 공포가 퀴어 정치학을 바탕으로 재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 2006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삼거리 극장>은 과잉된 비주얼, 뮤지컬 기반의 내러티브, 다양한 영화 및 신화를 덕지덕지 인용한 텍스트로서 퀴어 하위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뮤지컬부터 공포와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삼거리 극장>은 그 자체로 재조립과 재해석의 결과물인 동시에 관객 역시 재해석의 장으로 뛰어들게 한다. <록키 호러 픽쳐 쇼>, <프랑켄슈타인>, <비틀쥬스>와 미노타우로스 신화……. 원전의 변용을 하나씩 짚어내다 보면 <삼거리 극장>이 퀴어링(queering)에 활짝 열려 있는 텍스트임을 깨닫게 된다. 뮤지컬이 지닌 육체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강조, 모든 등장인물이 지닌 두 개 이상의 정체성,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소외의 기억은 특히 퀴어를 위한 것으로 전환된다.
본 글은 <삼거리 극장>의 두툼한 참고문헌 목록을 해부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의도와 우연을 넘나드는 혼성모방과 씨름하는 것보다야 <삼거리 극장>을 퀴어의 편에 선 공포영화로 다시 써 보는 일이 훨씬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삼거리 극장>은 괴물로서 무섭게 하는 퀴어와 희생자로서 무서워하는 퀴어,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무섭지 않게 될 가능성을 함께 드러내는데, 이때 퀴어는 기존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규범에 어긋나는 경계적 존재를 가리키도록 사용된다. ‘퀴어’는 “항상 담아두려 준비했던 그릇에서 넘쳐나”는 단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내려는 시도는 언제나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고, 본 글 역시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우선 <삼거리 극장>의 배경이 되는 독특한 시공간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2.퀴어의 시공간
2-1. <삼거리 극장>의 퀴어 시간성
규범적 시간성은 이성애 규범적인 문화 및 제도에 조응하며 삶을 연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간의 흐름이다. 교육, 결혼, 가족과 국가가 제도를 매개로 시간을 흐르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퀴어 시간성은 이러한 생산적 시간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며 때때로 순차적 시간성마저 교란한다. 퀴어 시간성은 불연속적인 시간과 비규범적인 관계 속에서 지향될 수 있다.
<삼거리 극장>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지방 소극장을 매개로 2005년과 1940년대를 오가며 진행되지만, 관객에게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연대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삼거리 극장 내부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대와 다소 유리된 것처럼 보인다. 고딕풍의 인테리어가 몇십 년에 걸친 간극을 전부 품어내고, 광대, 기생, 공주 등 역사적 캐릭터들의 복장 역시 과거에도 현대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이다희 미술감독은 “현실 속의 2005년이 아니라 환상 속의 2005년이라는 생각으로” 삼거리 극장의 세트를 구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삼거리 극장의 시간성은 선형적인 흐름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 속하지 않는 비규범적인 것이 된다.
삼거리 극장에 내재된 퀴어 시간성은 규범적 시간 속에서 다른 삶을 갈망하던 소단의 과거 모습과 대비된다. 소단과 귀신들의 첫 만남은 극장 안에서 흡연을 하던 그녀에 대한 재판으로 설정된다. 광대 모스키토는 소단을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기소한다:
그녀에게는 가꾸어 나갈 꿈도 지켜야 할 사명도 없었고, 모든 것이 부질없게만 보이는 데다 왠지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만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무관심했고, 너그럽지 못했습니다. 즉, 그녀는 이 세계에 대해 화가 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불안을 감추지 못하며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녀.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참을 수 없이 따분한 21세기. 그렇습니다. 그녀는 파렴치하게도 현-대-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모스키토가 증거로 제시하는 소단의 사진들은 고아인 그녀가 할머니에게 혼나는 장면, 빨랫줄에 옷 대신 아기를 걸고 의뭉스럽게 웃는 장면,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홀로 등을 돌린 장면 등으로 구성된다. 소단의 개인사는 가족 혹은 공적 기억 속에서 안정적으로 서사화되지 못하며, 이미 아기의 이미지를 희생시켰기 때문에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해 볼 수도 없다. 재생산적 미래주의의 대척점에 섦으로써 소단에게는 퀴어한 결이 생겨난다. 그녀가 의지할 곳은 담배라는 자기 파괴적 쾌락뿐이다.
하지만 삼거리 극장은 소단에게 대안적인 시공간을 제공한다. 귀신들의 친구가 된 소단은 학교에 가기보다 극장의 매표 일을 택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교 입학, 취업 등으로 이어지는 삶의 규범적 단계를 따라 ‘위로’ 자라는 대신 ‘비스듬히’ 자라나기로 마음먹은 퀴어 청소년의 결단이다. 일하는 극장에는 파리가 날리고, 따라서 소단은 미래를 위한 의미 있는 무엇도 생산하지 못한다. 바로 그 비생산적인 시간 속에서 소단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귀신들에게 진정한 유대감을 느낀다.
성인인 우기남에게 삼거리 극장의 시간성은 소단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기남은 삼거리 극장의 사장으로, 몇십 년째 극장에 갇혀 자살을 기도한다. 그가 감독을 맡은 조선 최초의 괴수 영화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은 어두운 시대상을 담고 있다. 미노수는 근대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던 실험의 실패작으로, 이후 지하 동굴에 갇혀 지내야 하는 “저주스러운 운명”을 타고났다. 사장실에 걸려 있는 소머리 탈은 미노수가 우기남의 페르소나임을 드러내며,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시대에 괴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통을 은유한다.
이후 미노수는 소단과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연인 아랫네와 재회한다. 그러자 60여 년간 고여 있던 극장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우기남은 순식간에 백발노인이 된다. 우기남은 규범적 시간성에 편입할 수 없는 퀴어로서 언제나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페르소나인 미노수가 연인과 성공적으로 결합함에 따라, 강제로 지연되었던 시간의 흐름이 그에게도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이다.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 이후 우기남의 삶은 매분 매초 자신의 실패와 마주해야 하는 형벌이었지만, 그는 극장 안에서 마침내 안식을 찾는다. 삼거리 극장의 퀴어 시간성은 소단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우기남에게는 과거에 대한 애도를 선물한다.
2-2. <삼거리 극장>의 퀴어 공간성
<삼거리 극장>의 촬영지였던 부산의 삼일 극장은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었으며, 1944년부터 2006년까지 62년 동안 운영되었다. 광복 이후 삼일 극장은 적산 극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논쟁에 휩싸였고,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피난민들을 위한 수용소로 기능하며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축적해 왔다. 영화 속 삼거리 극장은 삼일 극장의 비극적인 역사성에 기대어 축조된 꿈의 공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삼거리 극장은 삼일 극장과 마찬가지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귀신들은 하루 손님이 열 명도 안 되는 극장이었다며 자조하고, 시네필 휘순은 화려했던 옛 극장이 스러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따라서 <삼거리 극장>은 주류 멀티플렉스의 자본에 밀려 역사와 다양성을 상실해가는 한국 영화계의 취약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낮의 삼거리 극장은 시간 속에서 빛을 잃은 허약한 모습이다. 극장의 내부는 이미 한 번 버려진 것처럼 쓸쓸하고, 귀신들은 근무 시간 동안 적막한 얼굴로 시간을 죽인다. 귀신들과 소단에게는 자신들의 현재에 대한 어떠한 의식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빈곤함은 삼거리 극장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삼거리 극장에는 현재보다 생생한 과거, 낮보다 충만한 밤이 있다. 소단이 비 오는 날 밤 할머니를 찾다가 발견한 삼거리 극장의 안내문은 다음과 같은 불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모퉁이에서 계속 왼쪽으로 돌다 보면 느닷없이 나타나겠지.” ‘옳은 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아야 도달할 수 있는 곳, 밤마다 은밀한 연회가 펼쳐지는 극장은 퀴어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크루징 공간처럼 보인다.
유명 SF 작가이자 흑인 퀴어 남성인 새뮤얼 딜레이니는 ‘타임스퀘어 레드, 타임스퀘어 블루’에서 타임스퀘어의 포르노 극장 안팎에서 겪은 경험을 서술하였다. 포르노 극장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다양한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를 지닌 사람들이 성적 욕망과 친밀성을 나누는 만남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퀴어들이 극장을 게토화한 것은 단지 외국의 일만은 아니다. 홍민키 감독의 <낙원>은 종로 바다 극장이 게이들의 크루징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 경위를 유쾌하게 전달하는 다큐멘터리이다. 퀴어 게토는 모든 사람이 이성애자라 가정되는 공적 공간을 퀴어로 채움으로써 안전함을 불온함으로 바꾸고, 익숙함을 낯섦으로 채워 넣는다.
하지만 모든 좋은 것에는 (그것이 좋기 때문에) 위기가 닥친다. 1994년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는 도시 정화라는 명분 아래 포르노 극장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중산층 이성애 가족을 위한 쇼핑몰을 세웠다. 바다 극장 역시 2010년 폐관 이후 10여 년 동안 방치되어야 했다. 이러한 젠트리피케이션은 단순히 공적 공간에서 퀴어들을 쫓아내 사적 공간으로 돌려보내는 조치가 아니다. 퀴어들의 사적인 욕망과 관계를 위해 만들어진, 자그마한 공적 영역의 틈바구니마저 위협받고 메워졌음을 의미한다. 소단이 삼거리 극장의 폐관을 막기 위해 사방팔방 애쓰는 것은 이렇듯 퀴어적인 절박함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고독하고 불안하던 자신의 삶에 유일한 기쁨을 안겨 주는 크루징 공간을 잃을 수 없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에 따르면 퀴어 정치는 이 땅에 발붙이고 여기서 살만한 자리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 퀴어한 쾌락은 “그동안 금지되거나 차단되었던” 몸들이 서로 맞닿는 기쁨에서 나온다. 따라서 소단이 다른 몸들과 맞닿기 위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그동안 금지되었던 욕망과 관계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적극적인 퀴어 운동으로 보인다. <삼거리 극장>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퀴어 영화로 규정될 수 있다.
3.무섭게 하는 퀴어
3-1.키치와 캠프
헤더 러브는 『Feeling Backward: Loss and the Politics of Queer History』에서 퀴어들을 사로잡는 ‘뒤처짐(backwardness)’의 정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러브는 퀴어 문화의 키치와 캠프 미학을 뒤처짐과 연관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녀에 따르면 캠프는 철 지난 대중문화, 어린 시절의 쾌락과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뒤처진 예술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퀴어들은 성장에 대한 거부, 잊히지 않는 기억의 탐구,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착 등 다양한 형태로 뒤처짐을 수용해 왔다. 이러한 정서는 성스러운 것을 격하시키며, 괴상하고 저속한 것, 유치한 것, 조악한 것을 추구하는 키치의 기반이 된다.
캠프가 고급문화에 대한 비웃음을 함축하며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상품화하는 사조라면, <삼거리 극장>은 분명 캠피한 영화이다. <삼거리 극장>은 원본성을 부정하며 다양한 영화, 신화, 그림과 음악의 자유로운 혼성모방에서 출발한다. 우선 극장을 탐험하는 소단의 설정은 기묘한 환상의 세계에서 모험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변용이다. 특히 2-1에서 다룬 소단의 재판 시퀀스는 제11장 ‘누가 타르트를 훔쳤나?’, 귀신들과의 만찬은 제7장 ‘미치광이 티파티’를 거의 그대로 연상시킨다. “기이한 의자, 인형, 버려진 것들을 살려 표현”한 만찬 시퀀스는 즈지스와프 백진스키 작품의 강렬한 인상을 전달하기도 한다.
귀신들의 설정은 <록키 호러 픽쳐 쇼>, <비틀쥬스>, <프랑켄슈타인>, <크리스마스의 악몽> 등 다양한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태생적인 비극을 타고났지만 영화는 이들을 오해받는 희생자로, 궁극적으로는 동정심을 일으키는 캐릭터로 재현하기를 거부한다. 어두운 밤, 고딕풍의 건물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육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만끽하는 그들은 <록키 호러 픽쳐 쇼>의 천진한 퀴어들과 맞닿아 있다. 특히 악동의 면모를 지닌 모스키토는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프랭크 박사와 <비틀쥬스>의 비틀쥬스를 동시에 닮았다.
기괴하고 위협적인 텍스트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거리 극장>은 소름 끼친다기보다 어딘가 사악하고 귀여운 인상을 준다. 스타 캐스팅과 거액의 투자를 마다한 전계수 감독은 <삼거리 극장>을 통해 당당하게 키치를 추구한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인물들은 최대한 극장 안에 머무르지만, 계단을 타고 자유롭게 흐르는 카메라와 복잡하게 꾸며진 미술로 인해 극장의 내부는 문을 열 때마다 팽창한다. 많은 뮤지컬 시퀀스들이 객석에 앉아 뮤지컬을 보고 있는 듯한 시점을 채택하는데, 특히 ‘밤의 유랑극단’은 뮤지컬 소극장과 영화관 관객석의 유사성을 이용하여 마치 공연 실황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때 체계적이고 일사불란한 안무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전계수 감독은 서병구 안무가에게 “매끈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아니니까 엉성한 춤을 만들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짜임새 있는 안무 대신, 제각기 다른 각도로 팔을 뻗고 몸에 필름을 감은 채 허우적대는 자유롭고 조악한 움직임이 완성되었다.
<삼거리 극장>은 이미 퀴어한 텍스트 이외에도 여러 주류 텍스트 속 재현을 가져와 캠프 미학을 덧씌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류 텍스트는 기존과는 다른 퀴어한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퀴어의 모욕적 의미를 모범적 이미지로 표백하는 대신, 그 멸칭을 그대로 받아치면서 위악적으로 몸을 부풀리는 즐거움이다. <삼거리 극장>은 1940년대에 죽은 귀신들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뒤처짐의 정서와 오래된 극장의 키치한 외피를 조합하여 ‘K-캠프’라고 불릴 만한 무언가를 완성해 냈다. 영화는 이제 기존의 이성애 규범적 헤게모니를 전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3-2.퀴어 괴물
공포영화 속 괴물은 ‘정상적인 세계의 이상한 존재’이다. 문학연구자 로즈메리 잭슨은 주류 문화의 질서가 억압적인 패러다임으로 작용하여 괴물을 만든다고 보았다. 로빈 우드 역시 ‘과잉억압’의 개념을 활용하여 공포영화 속 괴물의 탄생을 설명한다. 로빈 우드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개인을 억압하고 있으며, 개인 역시 자기 자신을 억누르며 살고 있다. 사회의 규범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정상성을 위협하는 것들이 타자의 형상으로 간주되고, 나아가 괴물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타자는 단순히 내가 아닌 타인일 수도 있지만, 주로 여성, 프롤레타리아, 다른 문화, 동일 문화 내의 다른 인종집단,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나 정치제도, 어린이, 그리고 성적 규범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일탈들로 형상화된다고 우드는 명시한다.
영화 속 영화인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에서, 퀴어 괴물 미노수는 노골적인 타자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그는 인간의 몸에 소머리를 가진 괴물로서 인간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해체한다. 미노수가 지하 동굴에 갇힌 것은 단순히 보기에 고약하고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다. 미노수는 태초부터 혼합성을 지닌 불순한 존재이며, 따라서 어느 범주에도 들어맞지 않고 정상성을 위협한다. 미노수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기존의 범주에 문제를 제기하고 주류 문화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들어 놓기 때문에 두려운 괴물인 것이다.
미노수에게 내려진 감금은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보복이지만,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서커스단의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 아랫네는 미노수의 끼니를 챙기다가 그와 사랑에 빠진다. 괴물을 구경하러 온 하쉬바 공주 역시 미노수에게 매혹되어 그에게 동침을 요구한다. 미노수를 가둔 지하 동굴의 미로는 그를 억압하고 잊으려 애쓰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미노수를 유혹적으로 만든다. “탄생과 함께 비극의 젖줄을 달고 나온” 운명, 공포와 매혹의 양가성, 금지된 사랑과 억압되는 섹슈얼리티로 인해 미노수는 퀴어 괴물이 된다.
퀴어는 흔히 죽음과 관련지어진다. 미노수는 모체를 희생시키며 태어났고, 탄생 직후에는 자신에게 비극적 운명(미노수는 거울을 보자마자 자신의 삶이 저주받았음을 깨닫는다.)을 선사한 아버지 표세동 박사를 살해하였으며, 전장에서는 아군을 까무러치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하쉬바가 보낸 청부 살인자 데츠오까지 살해한다. 퀴어는 대를 끊는 존재로서 죽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퀴어라는 사실이 들키면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점에서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퀴어는 “죽음을 욕망하는 존재”로 재현되거나 범죄자-살인마-죽음으로 퇴장하는 역할밖에 부여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삼거리 극장>은 미노수를 스크린 밖으로 끌고 나온다. 미노수는 자신의 퀴어 정체성이 괴물 살인마로 낙인찍혔던 흑백영화의 세계에서 탈출하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혼비백산하며 달아나지만, 적어도 이곳에는 미노수와 함께 난장을 즐기는 귀신들이 있다. <삼거리 극장>은 영화 속 영화의 구조를 활용하여 과거의 공포영화에 도전하고 재맥락화하는 방식으로 퀴어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침내 미노수에게 아랫네를 돌려준다. 아랫네가 미노수를 위해 부르는 ‘내게로 와’는 퀴어 서사를 행복하게 마무리하려는 시도이다. 복잡하고 양가적인 정체성, “두 개의 그림자를 끌고서” 나에게 돌아오라는 노랫말은 그가 함부로 재단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것임을 암시한다.
전계수 감독은 미노스의 미궁 이야기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가장 큰 연민을 느낀다고 밝혔다. 신화와 다른 전복적인 결말은 그가 (퀴어) 괴물에게 보내는 헌사인 동시에 퀴어성에 대한 새롭고 긍정적인 묘사이다. 새로운 시대의 공포영화는 퀴어성을 단순히 두려운 것으로 치환하는 대신, 규범의 바깥에서 규범성을 비판하고 뒤엎는 능동적인 주체로 해석한다. 욕망과 금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공포영화는 이 순간 그 자체로 전복적인 것이 된다.
4.무서워하는 퀴어
미노수가 퀴어 괴물과 희생자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녔다면, 극장의 귀신들은 희생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들이 극장의 고객에게 겁을 주는 방식은 하찮고 사소한 동시에 퀴어하다. 예컨대 히로시는 여성복을 입고 화장을 한 채 군인의 옆자리에 앉아 그를 기절시킨다. 히로시의 타자화된 겉모습은 사장된 게이 크루징 문화를 떠올리게 하며, 이성애 규범적 사회와 게이 하위문화 양쪽에서 소외되는 퀴어성의 두려움을 상기시킨다.
완다 역시 팝콘 봉투에 구토함으로써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먹는 대신 구토하는 것은 완다가 음식에 대해 꾸준히 보여 온 반응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이러한 거식증을 죽음 본능이 성차화된 결과로 파악한다. “거식증은 여성 육체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에 대한 항의의 한 형식이다. 단순히 날씬한 몸매에 대한 당대의 가부장제적 이상과 무절제하게 공모한 것으로 거식증을 해석하기보다는 바로 그 가부장제의 ‘이상’을 정확히 체념한 것으로 거식증은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히로시의 과장된 여성성 수행과 마찬가지로, 완다의 거식증적 반응은 자학적인 즐거움을 유발하고 정상성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두려운 것이 된다.
하지만 귀신들은 무섭게 하기보다 무서워하는 것에 더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모스키토는 히로시, 완다와 달리 사람들에게 겁주는 데 실패하는 보잘것없는 귀신이다. 그래도 그의 외관만큼은 누구보다 강렬한데, 산발인 머리카락, 화려한 의상, 하얗게 칠한 얼굴 위 검은색으로 과장하여 그린 메이크업은 그를 비틀린 광대처럼 보이도록 한다. 모스키토는 제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듯 다른 귀신들 앞에서 까불다가 얼굴을 맞거나 머리에 포크가 꽂힌다. 모스키토가 당하는 피해는 그의 그로테스크한 비주얼과 어우러져 “마치 그 자신이 귀신을 보고 놀라 소스라친 모습”이 된다.
또한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넘버인 ‘정든 꿈’은 세상이 싫어 꿈에 정을 붙일 수밖에 없는 귀신들의 애수를 노래한다. 그러한 종류의 슬픔은 특히 주변적 존재의 몫으로 지상에 남겨져 있다.
에리사)
사라지네 잊혀지네
이 세상 정들 데 없어 꿈에 정드네
완다)
꿈이 깊어 병도 깊어
매일 밤 차디찬 구름 속에 잠드네
다같이)
머물 곳 없어라x4
곡이 흐르는 동안 화면에는 귀신들의 두 가지 정체성이 병치된다. 귀신들은 낮 동안의 쓸쓸한 직원 정체성 옆에 서서 시간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괴로움을 노래한다. “이게 꿈이라면 사라질까”, “나를 떠나갈까”, “내가 잊힐까” 두려워하는 귀신들은 삶도 무덤도 아닌 곳을 서성거리는 경계적 존재이다. 그들은 억압적인 범주에 잘 들어맞지 않고, 규범에 순응할 수 없고, 세상과 불화하며 살아간다. 시간적 원근감의 부재와 억압의 경험에서 오는 체념이 귀신들의 일상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때때로 고통은 그저 고통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기억도 미래를 위한 실천의 동력도 아니다. 그들은 퀴어가 아니기를, 그렇게 해서 세상과 불화하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삼거리 극장>은 ‘정든 꿈’을 통해 귀신들의 뒷면에 슬픔과 애수의 맥락을 붙여넣고 퀴어적인 잠재력을 더한다. 부정적 정동을 지나간 과거의 것으로 섣불리 무시하지 않음으로써 <삼거리 극장>은 비로소 퀴어 부정성에 대한 양가적인 애착으로 전환된다.
5.나가며
“울지 마라, 외로운 소녀야. 서러운 삶이 어디 너뿐이더냐? 닥치고 춤이나 춰!”
<삼거리 극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뮤지컬 넘버 중 하나인 ‘자 봐라 춤을’은 소단이 귀신들의 친구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귀신들은 소단에게 그대가 얼마나 ‘섹시’하고 ‘거시기’한지 보라며 섹슈얼리티를 해방하는 노래를 부른다. 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모스키토가 외친 도발적인 문장은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한다. <삼거리 극장>은 과거에서 오는 후회, 수치심, 절망과 자기혐오의 정서를 인정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극장은 퀴어 부정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연대 장소가 되고,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부정성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부정성을 안은 채로 춤을 추는 것이다.
<삼거리 극장>을 지탱하는 장르의 축은 이들의 춤을 단단히 받쳐준다. 뮤지컬에 은근하게 깔린 자기애적 특성과 하위 집단의 감수성은 근본적으로 영화에 퀴어성을 부여한다. 뮤지컬은 인간의 몸을 최대한 활용하는 장르이기도 한데, 여기서 오는 에로틱한 감정은 영화의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또한 <삼거리 극장>은 공포영화로서 무엇이 왜 무서운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주류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패러다임의 한계를 폭로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상상의 세계에 실체를 부여하는 판타지와 공포와 맞닿은 신랄한 코미디 역시 <삼거리 극장>을 설명하는 부차적인 단어가 될 수 있다.
<삼거리 극장>을 좋아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본 글은 <삼거리 극장>을 사악하고 귀여운 퀴어 영화로서 좋아해 보려는 시도이다. ‘옳은 쪽’ 대신 왼쪽으로만 모퉁이를 돌아야 나오는 극장. 저주받고 잊힌 것들을 불러내는 장소. 비공식적인 슬픔의 아카이브.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기남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통째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어두운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유령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야. 마치 모든 게 꿈만 같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벗어나서도 삶은 계속되지 않고, 문을 열면 또 다른 어두운 극장에서 영화가 계속되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극장-영화-은 우리를 과거와 현재, 낮과 밤, 현실과 환상 사이에 위치시킨다. 극장에서 우리의 몸은 투명해지고 반쯤 귀신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경계에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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