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수, 작은 산, 2023, 캔버스에 유채, 162.2x130cm
대리 투쟁을 그만둘 때 가까스로 감각하는 <채식주의자>
WEBZINE
WEDITOR 조승준
WEDITOR 조승준
1.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저녁, 한강 작가의 오랜 팬인 내게 축하가 쏟아졌다. 경축을 대신 전하기에 적절한 매개체라는 기대, 혹은 장기 가치투자의 성공을 기념하려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한 축하였겠지만, 체면을 내려 놓고 솔직해지자면 그들의 메시지가 조악하다 느꼈다. 한강 작가는 내가 팬이 된 7년 전부터, 아니, 보다 아득한 옛날부터 한국 문학의 얼굴이었고, 따라서 친구들이 내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축하하는 것은 스스로 독서와 거리가 멀다고 홍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또다른 친구는 <채식주의자>를 에코페미니즘 소설로 여기며 그를 소위 PC주의 운동권 작가로 오독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한강 문학의 과도하게 목적론적인 해석으로 말미암아 나의 팬심에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고도 회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문학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한강 작가의 글이 비교적 단순한 해석으로 더럽혀지지 않았으면 했다. 어리석은 오독이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한림원을 규탄하는 시위에 이르자 지난 몇 년간 축적된 환멸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강 작가가 툭, 언급되기만 해도 폐가 저절로 좌절과 분노의 언어를 게워 냈다.
요컨대, 나는 못난 사람이다. 불안에 못 이겨 남을, 그것도 친한 지인들을 상처 입히려는 비겁자다. 그럼에도 환멸을 동력 삼아 글을 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어김없이 텍스트힙을 비난한다. 한강 문학을 정치적으로 도륙하는 양극단에 분개한다.
2.
<채식주의자>는 주로 생태론과 페미니즘의 관점을 선택적으로 혼합해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오정란(2016)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이 지적하듯이,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채식주의자>를 해석하는 것은 어폐다. 육식 문화로 대변되는 남성적 질서에 저항하는 채식주의, 생물학적 평등주의를 향한 갈망에서 비롯한 나무 되기 등의 수사로 <채식주의자>를 소비할 경우 복합적인 텍스트성이 과도하게 단순화되기 때문이다. 인혜를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인물로 해석한 윤선경(2023)의 비평에 대해 한강 작가 본인이 본문 인용을 거부했다는 사실 역시 상기해야 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것은 아버지에 의해 개가 무참히 도살당하는 꿈 때문이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남성의 폭력에 저항하며 여성성을 부각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직후에 나타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저항의 가능성이 좌절됨을 목격한다.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영혜는 통상 무결함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새를, 그것도 동박새를 입으로 물어뜯는다. 목숨을 걸고 육식을 거부한 영혜가 불가피한 잔혹성에 이끌렸다는 설명 없이는 해석이 어렵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개를 죽일 때 부각되는 것은 영혜 본인이 포식자라는 사실이지 아버지의 폭력성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는 포식자적 본성을 인지했을 때, 그러니까 보다 형이상학적인 죄를 감각했을 때 영혜가 택한 첫 번째 무해의 시도로서 채식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원죄를 부여받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혜는 <몽고반점>에서 암술 수술 간의 화분을 시도한다. <나무불꽃>의 탈육체화 역시 이러한 무해의 시도다. 영혜는 물구나무를 서며 치열하게 나무가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채식의 동인을 다른 생명체를 해하지 않는 존재가 되겠다는 몸부림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3.
외꺼풀 눈에 수수한 이미지의 영혜와, 스무살 전후에 수술한 쌍꺼풀 눈에 서글서글한 이미지의 인혜는 대비를 이룬다. 자매의 완연한 대비는 한강 작가의 단편 <회복하는 인간>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회복하는 인간>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조건을 가진 언니와 결점이 많은 동생을 그리나, 이 단편은 <채식주의자>와 반대로 전개된다. 너그러운 성격의 언니가 동생의 결점을 질투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불행에 가두던 중에 병에 걸려 죽는다. 따라서 <채식주의자>에서는 인혜가 동생의 죽음을 지켜보는 반면, <회복하는 인간>에서는 동생이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언니의 하관을 지켜보던 어머니를 부축하며 계단을 내려오다 발목을 삐는데, 발목의 통증이 악화되자 한의원에 방문해 쑥뜸을 처방받는다. 여기서 입은 화상으로 상처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는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를 키운다. 더디게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 페달을 연거푸 밟는다. 언니의 죽음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다.
<회복하는 인간>의 중심에는 회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위치한다. 한강 작가는 2014년 김연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자학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회복이라는 것에는 결별과 배반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요. 회복되기 전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이 회복되는 게, 회복되지 않은 채로 죽었고 이제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언니에 대한 결별이자 배반이라고 느껴요. 그런 의미에서, 영원히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마지막 기도는 죽은 언니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오와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히 등을 돌리지 않고자 하는 기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역설적으로 회복을 향하는 기도가 돼요. 자신을 허물고 자신 밖으로 간절하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자의 기도라는 점에서요.
살아있는 한 피가 응고하고 딱지가 진다. 따라서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타인의 불행에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때, 후련한 작별만큼 비윤리적인 게 없다는 확신이 들 때, 겨우 윤리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회복을 최대한 지연시켜야 한다. 삶의 충동을 거스름으로써 배반을 지연시키고 무해해질 수 있다. <채식주의자>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위치하는 인간, 포식자 혹은 가해자로서의 인간으로 남지 않기 위해 영혜는 나무 되기, 다시 말해 죽음을 택한다. 국가폭력으로 무참히 학살된 자들을 위해 애도를 연장하는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회복을 지연시키는 문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한강 문학 전반을 가부장제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텍스트화할 경우 은폐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죄의 자각이다. 살아 있다는 것, 생존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수치심-내가 필연적으로 회복할 것이라는 예견에서 비롯하는 죄의식이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의 줄기로 엮는 실이다. 외부를 향하는 적의는 희미하다. 다만 자책이 있다.
4.
40분 남짓한 시간이 걸리는 통학길을 따라 집과 고등학교 사이를 오갔다. 매번 버스 왼편 창밖으로 금정굴이 지나갔지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고양시에 위치한 우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그 낯익은 길목에 금정굴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국군은 고양시를 수복했는데, 우익 치안대, 태극단, 그리고 경찰은 임의로 부역자를 골라내 금정굴 입구에서 아이 8명을 비롯해 153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지역 주민을 총살하고 암매장했다. 3년 간의 통학 중에 한 번도 금정굴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 소름 끼쳤다. 가까운 곳에 학살의 현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고통이 버스 창밖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통학 버스 안에서 친구와 나눈 시시콜콜한 수다가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 자동화되어 있던 내 지각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 알았다.
한편, 21학번으로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2022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첫 학교 대항전이 열린다는 소식에 들떠 있었다. 안암역 골목에서 기차놀이를 하고 술을 얻어 마시며 기분 좋게 고함을 질러 댔다. 그날 밤, 6호선 정거장을 불과 아홉 개만 지나면 도착하는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로 158명이 죽었다. 이후 고등학생 생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159명이 되었다. 이재현 군이 마지막 희생자로 기록된다는 소식을 들은 한덕수 국무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좀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면 좋지 않았을까. 인스타그램에는 그날 밤 안암역 골목의 환호성이 쉴 새 없이 업로드됐다. 도통 사라지지를 않았다. 염치가 예상외로 귀하다는 확신이 섰다.
2023년 여름에는 여행을 다녀왔다. 친형과 함께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방문했다.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찬찬히 걸었고, 그곳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소년들과 함께 서 있는 풍경을 보았다. 뭉클함도 잠시,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안 지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했다. 가자 지구를 방문한 건 아니었지만 서안 지구에 위치한 아이다 난민촌의 아이들과 잠깐 시간을 보냈으므로, 전쟁 소식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쏟아지는 학살 소식을 보고 또 들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미국과 이란의 대리전에 그치지 않고 점차 중동전쟁의 양상을 띠는 지금, 나는 릴스에서 발견한 강아지 영상을 보며 웃는다. 고양이가 상자에 몸을 숨긴 채로 뒤척일 때 가뿐한 미소를 참지 못한다. 그럼에도 웃을 때마다 가슴 한 켠에서 질문이 솟는다-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어떻게 감히.
5.
영혜는 화자로서 말하지 않는다. 마치 2인칭으로 쓰인 <회복하는 인간>의 ‘당신’처럼 1인칭의 왜곡되고 주관적인 시선 속에서만 나타나는 인물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유일한 1인칭 서술자인 영혜의 남편은 1인칭의 언어로 아내를 철저히 규정하고 사물화하며, 심지어는 아내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정치적 양극단이 열정적으로 도륙하는 <몽고반점>은 3인칭으로 쓰였으며, 형부는 영혜와 유사하게 생의 원죄를 자각하고 있으나 역시나 그를 1인칭의 언어로 규정하는 데 그친다. 형부는 본인의 내면에 도사리는 폭력과 1인칭의 언어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의 순간을 갈망하는데, 몽고반점이 여전한 영혜의 신체에서 무결함을 발견했다고 착각한다. 다시 말해 자신 안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근절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영혜를 폭력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남성만이 영혜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혜와 영혜의 이름이 처음 명시되는 <나무불꽃>도 마찬가지다. 인혜는 독해 불가능한 영혜를 자의적으로 의미화하며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잔인한 무책임을 기피한다. 영혜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를 1인칭의 언어로 규정한다. 그런 인혜의 모습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독해하는 것은 해석의 한계를 벗어난다. 죽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기원하는 인혜의 행동이 영혜의 뜻과는 충돌할지라도 반드시 나약한 것은 아니다.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는 자기중심성에 갇혀 있는 인물들로서 각자 상이하게 영혜를 집어삼킨다. 따라서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다른 생명체를 집어삼키는 인간의 포식자적 본성을 의미작용 전반의 구조적 특징으로 이해한다. 요컨대 <채식주의자>에서 나타나는 죄의식은 정립하고 규정하는 언어의 폭력성에 대한 민감한 자각이다. <채식주의자>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단정적 의미화를 거부한다. 의미론적 비결정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죽음 충동이므로 그 역시 거부한다. 다만 불가피한 회복을 지연시킨다. 고통과 애도를 연장함으로써 언어가 회피해서는 안 되는 윤리적 차원을 환기시킨다. 이 윤리적 차원은 <희랍어 시간>의 다음 대목에서 극단적으로 표상된다.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죄의식이 없는 단정적 의미화로 도륙되고 있다. 그러나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것 역시 생의 거부로서, 문학을 무용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선택이다. 문학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겠다는 선한 갈망은 현실의 부정으로서, 모든 존재자를 단적으로 부정하는, 다시 말해 무(無)를 지향하는 죽음 충동이다. 따라서 저자는 손아귀를 벗어나 무분별하게 팽창하는 해석을 응시하는 데 그친다. 단, 저자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여 독자의 태도가 무책임해질 수는 없다. 한강 작가의 글쓰기에서 우리는 바람직한 독자의 자세를 일별할 수 있다. 인혜는 독해 불가능한 영혜를 대하며 무해해지는 데 실패한다. 그러나 인혜는 무해의 실패를 곧 자의식적 독서에 대한 책임의 시발점으로 여긴다. 이것이 한강 작가의 글을 집어삼키는 독자가 유념해야 하는, 해석의 한계다.
6.
인간적 자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끊임없는 상상의 실험을 한다. 예술가 역시 주관적 자의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이들은 우리들이 몸을 의탁하고 있는 외부 세계를 향한 도달 불가능한 도전을 함께한다. 그럼에도 일부 학자와 지식인들은, 그간 축적된 인간적 상상과 주관적 발상으로 펼쳐진 1인칭의 질서를, 마치 스스로 생각해 낸 이데올로기인 양 체화해서 추종한다. 1인칭에 종사하며 대리 투쟁을 한다. 이들은 회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강 문학의 시도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오로지 투쟁적인 적의를 동력 삼아 쓰인 문학 작품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적의를 옹호하거나 비난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양극단에는 화해되지 않는 간극이 있으나, 역설적이게도 한강 문학에 대한 해석은 유사하다. 그 목적론적인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는지 여부에 따라 입장이 갈린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전도서>와 그에 대한 멕시코 신학자 엘사 타메즈(Elsa Tamez)의 해석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타메즈는 전도서의 위 대목에서 각 문장이 무인칭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행위를 집행하는 주체도 없고 그 행위를 받는 객체도 없다. 전도사 코헬렛은 출생과 죽음, 또는 전쟁과 평화와 같은 극적인 순간에마저 개입할 여지가 없음을 지적한다.
인간은 1인칭의 언어를 행사하는 주어 주체로서 위 대목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초월의 존재 역시 그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지전능하지 않되 슬퍼하는 신이다. 영혜가 가족의 언어 속에서 오직 짐작되듯이, 1인칭의 언어 외부에 있는 실체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술어의 놀이 속에서만 짐작된다. 주어 자리에 있다고 상정하는 그것의 규정은 문장이 끝날 때까지 보류된다. 1인칭 외부의 그것은 미결의 상태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 이후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창출하는 온갖 종류의 언어에다 모든 수준의 존재를 귀속시키려는 허구 창작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에 도달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언어가 회피해서는 안 되는 윤리적 차원을 환기시킨다. 언어에 대한 죄의식을 극단으로 몰아붙여 독자로 하여금 본인의 포식자적 본성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고통을 공유하는 독자들에게 인혜의 입을 빌려 어둡고 끈질기게 당부한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7.
1인칭에 종사하는 대리 투쟁을 그만둘 때 가까스로 감각하는 것들이 있다. 1인칭 외부로 탈출할 수 없다는 환멸 속에서 냉소적으로 대리 투쟁을 지속하거나, 혹은 탈출할 수 있다는 과도한 낙관에 힘입어 탈출을 감행하는 걸 중지할 때 가까스로 감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 모호한 감각을 거칠게 표현하자면-형이상학적인 죄다. 이 죄가 형이상학적인 것은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자의식적 독서가 불가피하고, 회복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독자는 자책한다. 회복을 지연시킨다. 고통에 머무르기 위해 애를 쓴다. 애도를 최대한 연장한다.
한강 작가는 스웨덴 공영 방송 SVT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제 생각이어서 잔치를 열지 말라고 했어요. 이 짧은 인터뷰에 동요한 독자가 적지 않다는, 그러니까 실은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죄를 감각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도저히 환호성을 지를 수 없는 시대라는 사실을, 축하조차 무해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예상외로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런 기대는 예정된 좌절을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현실을 긍정하는 우둔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좋은 인연 덕분에 빌리게 된 본 지면을 통해 당부를 직설하자면, 한강 작가가 보이는 그 귀한 믿음을 부수적인 걸로 밀어내지 않았으면 한다.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에서 한강 작가가 한 말을 공유하며 환멸로 쓰인 이 짧은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다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에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해서 아주 깊이 내려가서 뭔가를 말하면-
-읽는 사람이 같이 깊이 내려와서 읽어준다고 믿어요.
그 믿음이 없다면 쓸 수가 없고 문학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연결될 수도 없고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저녁, 한강 작가의 오랜 팬인 내게 축하가 쏟아졌다. 경축을 대신 전하기에 적절한 매개체라는 기대, 혹은 장기 가치투자의 성공을 기념하려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한 축하였겠지만, 체면을 내려 놓고 솔직해지자면 그들의 메시지가 조악하다 느꼈다. 한강 작가는 내가 팬이 된 7년 전부터, 아니, 보다 아득한 옛날부터 한국 문학의 얼굴이었고, 따라서 친구들이 내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축하하는 것은 스스로 독서와 거리가 멀다고 홍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또다른 친구는 <채식주의자>를 에코페미니즘 소설로 여기며 그를 소위 PC주의 운동권 작가로 오독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한강 문학의 과도하게 목적론적인 해석으로 말미암아 나의 팬심에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고도 회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문학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한강 작가의 글이 비교적 단순한 해석으로 더럽혀지지 않았으면 했다. 어리석은 오독이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한림원을 규탄하는 시위에 이르자 지난 몇 년간 축적된 환멸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강 작가가 툭, 언급되기만 해도 폐가 저절로 좌절과 분노의 언어를 게워 냈다.
요컨대, 나는 못난 사람이다. 불안에 못 이겨 남을, 그것도 친한 지인들을 상처 입히려는 비겁자다. 그럼에도 환멸을 동력 삼아 글을 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어김없이 텍스트힙을 비난한다. 한강 문학을 정치적으로 도륙하는 양극단에 분개한다.
2.
<채식주의자>는 주로 생태론과 페미니즘의 관점을 선택적으로 혼합해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오정란(2016)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이 지적하듯이,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채식주의자>를 해석하는 것은 어폐다. 육식 문화로 대변되는 남성적 질서에 저항하는 채식주의, 생물학적 평등주의를 향한 갈망에서 비롯한 나무 되기 등의 수사로 <채식주의자>를 소비할 경우 복합적인 텍스트성이 과도하게 단순화되기 때문이다. 인혜를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인물로 해석한 윤선경(2023)의 비평에 대해 한강 작가 본인이 본문 인용을 거부했다는 사실 역시 상기해야 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것은 아버지에 의해 개가 무참히 도살당하는 꿈 때문이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남성의 폭력에 저항하며 여성성을 부각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직후에 나타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저항의 가능성이 좌절됨을 목격한다.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영혜는 통상 무결함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새를, 그것도 동박새를 입으로 물어뜯는다. 목숨을 걸고 육식을 거부한 영혜가 불가피한 잔혹성에 이끌렸다는 설명 없이는 해석이 어렵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개를 죽일 때 부각되는 것은 영혜 본인이 포식자라는 사실이지 아버지의 폭력성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는 포식자적 본성을 인지했을 때, 그러니까 보다 형이상학적인 죄를 감각했을 때 영혜가 택한 첫 번째 무해의 시도로서 채식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원죄를 부여받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혜는 <몽고반점>에서 암술 수술 간의 화분을 시도한다. <나무불꽃>의 탈육체화 역시 이러한 무해의 시도다. 영혜는 물구나무를 서며 치열하게 나무가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채식의 동인을 다른 생명체를 해하지 않는 존재가 되겠다는 몸부림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3.
외꺼풀 눈에 수수한 이미지의 영혜와, 스무살 전후에 수술한 쌍꺼풀 눈에 서글서글한 이미지의 인혜는 대비를 이룬다. 자매의 완연한 대비는 한강 작가의 단편 <회복하는 인간>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회복하는 인간>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조건을 가진 언니와 결점이 많은 동생을 그리나, 이 단편은 <채식주의자>와 반대로 전개된다. 너그러운 성격의 언니가 동생의 결점을 질투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불행에 가두던 중에 병에 걸려 죽는다. 따라서 <채식주의자>에서는 인혜가 동생의 죽음을 지켜보는 반면, <회복하는 인간>에서는 동생이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언니의 하관을 지켜보던 어머니를 부축하며 계단을 내려오다 발목을 삐는데, 발목의 통증이 악화되자 한의원에 방문해 쑥뜸을 처방받는다. 여기서 입은 화상으로 상처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는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를 키운다. 더디게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 페달을 연거푸 밟는다. 언니의 죽음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다.
<회복하는 인간>의 중심에는 회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위치한다. 한강 작가는 2014년 김연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자학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회복이라는 것에는 결별과 배반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요. 회복되기 전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이 회복되는 게, 회복되지 않은 채로 죽었고 이제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언니에 대한 결별이자 배반이라고 느껴요. 그런 의미에서, 영원히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마지막 기도는 죽은 언니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오와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히 등을 돌리지 않고자 하는 기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역설적으로 회복을 향하는 기도가 돼요. 자신을 허물고 자신 밖으로 간절하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자의 기도라는 점에서요.
살아있는 한 피가 응고하고 딱지가 진다. 따라서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타인의 불행에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때, 후련한 작별만큼 비윤리적인 게 없다는 확신이 들 때, 겨우 윤리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회복을 최대한 지연시켜야 한다. 삶의 충동을 거스름으로써 배반을 지연시키고 무해해질 수 있다. <채식주의자>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위치하는 인간, 포식자 혹은 가해자로서의 인간으로 남지 않기 위해 영혜는 나무 되기, 다시 말해 죽음을 택한다. 국가폭력으로 무참히 학살된 자들을 위해 애도를 연장하는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회복을 지연시키는 문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한강 문학 전반을 가부장제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텍스트화할 경우 은폐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죄의 자각이다. 살아 있다는 것, 생존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수치심-내가 필연적으로 회복할 것이라는 예견에서 비롯하는 죄의식이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의 줄기로 엮는 실이다. 외부를 향하는 적의는 희미하다. 다만 자책이 있다.
4.
40분 남짓한 시간이 걸리는 통학길을 따라 집과 고등학교 사이를 오갔다. 매번 버스 왼편 창밖으로 금정굴이 지나갔지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고양시에 위치한 우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그 낯익은 길목에 금정굴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국군은 고양시를 수복했는데, 우익 치안대, 태극단, 그리고 경찰은 임의로 부역자를 골라내 금정굴 입구에서 아이 8명을 비롯해 153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지역 주민을 총살하고 암매장했다. 3년 간의 통학 중에 한 번도 금정굴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 소름 끼쳤다. 가까운 곳에 학살의 현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고통이 버스 창밖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통학 버스 안에서 친구와 나눈 시시콜콜한 수다가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 자동화되어 있던 내 지각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 알았다.
한편, 21학번으로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2022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첫 학교 대항전이 열린다는 소식에 들떠 있었다. 안암역 골목에서 기차놀이를 하고 술을 얻어 마시며 기분 좋게 고함을 질러 댔다. 그날 밤, 6호선 정거장을 불과 아홉 개만 지나면 도착하는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로 158명이 죽었다. 이후 고등학생 생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159명이 되었다. 이재현 군이 마지막 희생자로 기록된다는 소식을 들은 한덕수 국무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좀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면 좋지 않았을까. 인스타그램에는 그날 밤 안암역 골목의 환호성이 쉴 새 없이 업로드됐다. 도통 사라지지를 않았다. 염치가 예상외로 귀하다는 확신이 섰다.
2023년 여름에는 여행을 다녀왔다. 친형과 함께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방문했다.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찬찬히 걸었고, 그곳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소년들과 함께 서 있는 풍경을 보았다. 뭉클함도 잠시,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안 지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했다. 가자 지구를 방문한 건 아니었지만 서안 지구에 위치한 아이다 난민촌의 아이들과 잠깐 시간을 보냈으므로, 전쟁 소식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쏟아지는 학살 소식을 보고 또 들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미국과 이란의 대리전에 그치지 않고 점차 중동전쟁의 양상을 띠는 지금, 나는 릴스에서 발견한 강아지 영상을 보며 웃는다. 고양이가 상자에 몸을 숨긴 채로 뒤척일 때 가뿐한 미소를 참지 못한다. 그럼에도 웃을 때마다 가슴 한 켠에서 질문이 솟는다-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어떻게 감히.
5.
영혜는 화자로서 말하지 않는다. 마치 2인칭으로 쓰인 <회복하는 인간>의 ‘당신’처럼 1인칭의 왜곡되고 주관적인 시선 속에서만 나타나는 인물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유일한 1인칭 서술자인 영혜의 남편은 1인칭의 언어로 아내를 철저히 규정하고 사물화하며, 심지어는 아내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정치적 양극단이 열정적으로 도륙하는 <몽고반점>은 3인칭으로 쓰였으며, 형부는 영혜와 유사하게 생의 원죄를 자각하고 있으나 역시나 그를 1인칭의 언어로 규정하는 데 그친다. 형부는 본인의 내면에 도사리는 폭력과 1인칭의 언어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의 순간을 갈망하는데, 몽고반점이 여전한 영혜의 신체에서 무결함을 발견했다고 착각한다. 다시 말해 자신 안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근절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영혜를 폭력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남성만이 영혜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혜와 영혜의 이름이 처음 명시되는 <나무불꽃>도 마찬가지다. 인혜는 독해 불가능한 영혜를 자의적으로 의미화하며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잔인한 무책임을 기피한다. 영혜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를 1인칭의 언어로 규정한다. 그런 인혜의 모습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독해하는 것은 해석의 한계를 벗어난다. 죽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기원하는 인혜의 행동이 영혜의 뜻과는 충돌할지라도 반드시 나약한 것은 아니다.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는 자기중심성에 갇혀 있는 인물들로서 각자 상이하게 영혜를 집어삼킨다. 따라서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다른 생명체를 집어삼키는 인간의 포식자적 본성을 의미작용 전반의 구조적 특징으로 이해한다. 요컨대 <채식주의자>에서 나타나는 죄의식은 정립하고 규정하는 언어의 폭력성에 대한 민감한 자각이다. <채식주의자>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단정적 의미화를 거부한다. 의미론적 비결정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죽음 충동이므로 그 역시 거부한다. 다만 불가피한 회복을 지연시킨다. 고통과 애도를 연장함으로써 언어가 회피해서는 안 되는 윤리적 차원을 환기시킨다. 이 윤리적 차원은 <희랍어 시간>의 다음 대목에서 극단적으로 표상된다.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죄의식이 없는 단정적 의미화로 도륙되고 있다. 그러나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것 역시 생의 거부로서, 문학을 무용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선택이다. 문학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겠다는 선한 갈망은 현실의 부정으로서, 모든 존재자를 단적으로 부정하는, 다시 말해 무(無)를 지향하는 죽음 충동이다. 따라서 저자는 손아귀를 벗어나 무분별하게 팽창하는 해석을 응시하는 데 그친다. 단, 저자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여 독자의 태도가 무책임해질 수는 없다. 한강 작가의 글쓰기에서 우리는 바람직한 독자의 자세를 일별할 수 있다. 인혜는 독해 불가능한 영혜를 대하며 무해해지는 데 실패한다. 그러나 인혜는 무해의 실패를 곧 자의식적 독서에 대한 책임의 시발점으로 여긴다. 이것이 한강 작가의 글을 집어삼키는 독자가 유념해야 하는, 해석의 한계다.
6.
인간적 자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끊임없는 상상의 실험을 한다. 예술가 역시 주관적 자의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이들은 우리들이 몸을 의탁하고 있는 외부 세계를 향한 도달 불가능한 도전을 함께한다. 그럼에도 일부 학자와 지식인들은, 그간 축적된 인간적 상상과 주관적 발상으로 펼쳐진 1인칭의 질서를, 마치 스스로 생각해 낸 이데올로기인 양 체화해서 추종한다. 1인칭에 종사하며 대리 투쟁을 한다. 이들은 회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강 문학의 시도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오로지 투쟁적인 적의를 동력 삼아 쓰인 문학 작품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적의를 옹호하거나 비난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양극단에는 화해되지 않는 간극이 있으나, 역설적이게도 한강 문학에 대한 해석은 유사하다. 그 목적론적인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는지 여부에 따라 입장이 갈린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전도서>와 그에 대한 멕시코 신학자 엘사 타메즈(Elsa Tamez)의 해석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타메즈는 전도서의 위 대목에서 각 문장이 무인칭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행위를 집행하는 주체도 없고 그 행위를 받는 객체도 없다. 전도사 코헬렛은 출생과 죽음, 또는 전쟁과 평화와 같은 극적인 순간에마저 개입할 여지가 없음을 지적한다.
인간은 1인칭의 언어를 행사하는 주어 주체로서 위 대목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초월의 존재 역시 그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지전능하지 않되 슬퍼하는 신이다. 영혜가 가족의 언어 속에서 오직 짐작되듯이, 1인칭의 언어 외부에 있는 실체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술어의 놀이 속에서만 짐작된다. 주어 자리에 있다고 상정하는 그것의 규정은 문장이 끝날 때까지 보류된다. 1인칭 외부의 그것은 미결의 상태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 이후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창출하는 온갖 종류의 언어에다 모든 수준의 존재를 귀속시키려는 허구 창작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에 도달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언어가 회피해서는 안 되는 윤리적 차원을 환기시킨다. 언어에 대한 죄의식을 극단으로 몰아붙여 독자로 하여금 본인의 포식자적 본성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고통을 공유하는 독자들에게 인혜의 입을 빌려 어둡고 끈질기게 당부한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7.
1인칭에 종사하는 대리 투쟁을 그만둘 때 가까스로 감각하는 것들이 있다. 1인칭 외부로 탈출할 수 없다는 환멸 속에서 냉소적으로 대리 투쟁을 지속하거나, 혹은 탈출할 수 있다는 과도한 낙관에 힘입어 탈출을 감행하는 걸 중지할 때 가까스로 감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 모호한 감각을 거칠게 표현하자면-형이상학적인 죄다. 이 죄가 형이상학적인 것은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자의식적 독서가 불가피하고, 회복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독자는 자책한다. 회복을 지연시킨다. 고통에 머무르기 위해 애를 쓴다. 애도를 최대한 연장한다.
한강 작가는 스웨덴 공영 방송 SVT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제 생각이어서 잔치를 열지 말라고 했어요. 이 짧은 인터뷰에 동요한 독자가 적지 않다는, 그러니까 실은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죄를 감각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도저히 환호성을 지를 수 없는 시대라는 사실을, 축하조차 무해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예상외로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런 기대는 예정된 좌절을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현실을 긍정하는 우둔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좋은 인연 덕분에 빌리게 된 본 지면을 통해 당부를 직설하자면, 한강 작가가 보이는 그 귀한 믿음을 부수적인 걸로 밀어내지 않았으면 한다.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에서 한강 작가가 한 말을 공유하며 환멸로 쓰인 이 짧은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다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에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해서 아주 깊이 내려가서 뭔가를 말하면-
-읽는 사람이 같이 깊이 내려와서 읽어준다고 믿어요.
그 믿음이 없다면 쓸 수가 없고 문학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연결될 수도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