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이야기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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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윤다은
WEDITOR 윤다은
i.
예술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만 하는 걸까? 이 질문은 단순히 어떤 주제를 다룰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다루는 방식과 태도에 관한 것이다. 예술가로서, 혹은 감상자로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란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성을 담보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현재의 예술 환경에서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당장 예술을 포기하고 사회 운동에 뛰어들라는 급진적 요구는 아니다.
다만 이러한 고민이 그리 따뜻하고 아름답지는 못하다는 것과 이 글을 적어 내림으로써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도 없다는 것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ii.
모든 예술은 개념화되며 많은 이야기를 포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다르게 하면 포섭의 대상들을 거리낌없이 안아 버리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듯, 예술은 기득권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거나 사회적 권력을 재생산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다소 엘리트적이고 배타적인 장으로 남아 있을 위험이 크다.— 광대하게 수집된 주제들은 진정으로 그 주제의 ‘이야기’를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는 이질적 시도로 읽히고, 곧잘 폭력적인 태도로 비치곤 한다. —예술이 가진 거리감, 즉 초현실 혹은 반(反)현실적인 속성은 때론 몹시 정교해진다. 이는 무언가를 향해 가장 은유적이고 아름답게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와도 맞물린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무언가를 미적으로 서술하려는 시도 자체가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넓어짐으로써 얕아지는 가벼움이 기만적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술의 가치는 현실을 풍부히 해석하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데 있지만, 특정 계층만이 그 가치에 접근할 수 있다면 이것은 기득권층의 언어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약 미술의 목적이 현시대를 비판함으로써 이후를 내다보며 변화를 환기하는 것이라면, 직술(直述)하려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 어디까지 직술할 수 있는가.
여기서 직술하기는 직면하기, 다시 말해 직면하기란, 이야기할 수 있음이다. 때로 냉정하고도 낯설지만, 복잡한 형식과 개념에 기대어 자주 사용되는 수사적 우회에서 벗어나 구체적 언어의 표현을 마주할 때 우리는 보다 명확한 메시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직설적인 표현이 오히려 주관적 해석의 여지를 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내포하지만, 사회가 다원화됨에 따라 예술은 기존의 상징과 개념을 넘어서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적 발언을 요구받게 됐다. 즉 이러한 접근이 점차 강조되는 것은 이 시대가 부여한 예술의 책임감의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서 창작자는 하나의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이를 통해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예술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탐구에 머무를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물론 두 접근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미학적 접근 속에도 사회적 발언이 자연스럽게 내재할 수 있다. 어쩌면 예술이 본질적으로 가진 미학적 요소가 사회적 의미를 담아 내는 방법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주제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고자 할 때, 예술가가 스스로를 노출하며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면, 이는 강력하고도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이 누군가에 대한 무시나 소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는 쉽게 불식되지 않는다. 특히 특정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불필요한 정치적 레토릭이나 과장된 해석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작가는 은유와 직설의 균형을 고민하며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문제를 지나치게 손쉽게 다루고 층위를 나눠 버릴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몇몇 경우 당사자성을 강조하며 상쇄할 수 있겠지만, 예술이 보편적 언어로 기능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볼 때, 특정 배경을 가진 이들만이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은 또다른 모순을 남긴다. —이 모든 고민 속에서 오히려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탐구로 돌아서는 선택도 충분히 의미 있다. 이를 비겁하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예술의 미학적 탐구는 그 자체로 깊어지고 세밀해지며, 새로운 형식과 전위적 표현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기도 하니 말이다.—
‘당사자성’은 설득력과 진정성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다. ‘당사자’란 말 그대로 특정 사건이나 문제에 직접적인 경험과 이해를 지닌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예술에서 표현될 때,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그 문제를 더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는 자칫 예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당사자만이 해당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독점적 시각’이 강화되면,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보편적 접근이 어려워진다. 즉 ‘증언’의 형식을 넘어 서사를 확장하고 타자의 경험까지 포함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의 경험과 목소리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그 경험을 절대적 진리로 만들고, 그것만이 진정성을 담보한다고 여길 때 예술은 또다시 지나치게 배타적인 공간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는 다시 또 당사자성과 접근성 간의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보여 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감독은 이를 단순히 당사자의 증언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그에 더하여 감상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소외와 단절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모든 이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끌어 낸다. 즉, 당사자의 경험을 발화의 중심에 두되, 그것을 모든 이가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억압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들 때야말로 예술은 보편적 언어로 기능하며 특정한 배경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담론을 넘어선다.
다른 예시로, 형식을 우회함으로써 이야기하는 사례들을 가볍게 소개한다. 기억에 남는 것들을 나열하면 1. 고민을 깔아 두는 식으로 이미지화하기 2. 개념적으로 신화나 이야기를 차용하며 맥락 안에서 시의적인 것들과 연결 짓기 3. 은유하기를 통해 직술하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1. 고민을 깔아 두는 식으로 이미지화하기
부산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담에서 어떤 것을 중점으로 영화를 만들었냐는 질문에 그저 생각하는 것을 꺼내 두었다는 대답을 남긴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펼쳐 낸 정신없는 고민과 방황들이 그 형상 그대로 화면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2. 개념적으로 신화나 이야기를 차용하며 맥락 안에서 시의적인 것들과 연결 짓기
포세이돈과 제우스의 최후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보편적 이미지 전복에 관한 이야기와 섬세한 조각적 형태들은 작가의 작업 세계 안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3. 생략, 은유하기를 통해 직술하기
현대 예술에서 부재의 언어(absence of language)는 기존의 서사적 접근을 재구성하는 핵심적인 방법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작품이 서사의 전형적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비워 두는 방식을 통해 감상자의 해석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부재’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성과 해석적 여지를 제공하는 적극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부재의 언어는 비가시적인 대상이나 불투명한 서사를 통해 타자성을 불러일으키며 언어화되지 않은 영역에서 감각적 경험을 추구한다. 이는 실질적인 대상의 서술보다 오히려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고 풍부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한다.
부재의 언어는 서사의 구조적 빈틈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상자에게 인지적 참여를 요구하는 특성을 보인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이론과도 유사하게, 예술 작품의 텍스트적 요소를 해체하여 언어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그 자리에 비언어적 경험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 스스로 결여된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미완성의 서사’를 생성한다.
은유는 직술이 가진 직선적인 한계를 넘어서 지나치게 노골적일 수 있는 부분을 정교하게 감추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힘을 가진다. 단지 형태와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주제를 다루고 그 주제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의 마지막 단계에 가깝기도 하며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가볍지 않고 진지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iii.
계속해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지금의 예술계는 사회를 마주하며 빠르고 적절하게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여러 크고 작은 담론들에 대해 적합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들이 새롭게 생성된다. 이 글의 검토와 살펴봄 그리고 지금의 예술의 말하기 방식은 최선이 아닐지 모른다. 미리 양해를 구했듯, 결국 이 글도 정답을 찾기보다는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열린 고민을 제안하고 만다. 직설과 우회, 현실과 상징,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의 이 복잡한 관계에서 어느 하나가 완전한 해답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예술의 다면성에 있다.
예술은 여전히 보편적 언어로서 우리를 이어 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 보편성이 진정성 없는 기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와 방식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술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숙고하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예술의 진정성에 닿는 길일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 어느 위치에서 누구를 위해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어떠한 메시지를 설파하고 그로부터 엄청난 구원적 변화가 따르리라 믿는 종교적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술가와 감상자 모두가 계속해서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이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못하는 것은—, 결국 이 논의가 고정된 답을 얻기보다는 다양한 목소리가 겹쳐지며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할 대화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방향성은 고정된 도식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며, 숙원과 같은 고민 위에서 끊임없이 재정립될 것이다. 진행하는 무한한 시간 동안 말이다.
예술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만 하는 걸까? 이 질문은 단순히 어떤 주제를 다룰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다루는 방식과 태도에 관한 것이다. 예술가로서, 혹은 감상자로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란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성을 담보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현재의 예술 환경에서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당장 예술을 포기하고 사회 운동에 뛰어들라는 급진적 요구는 아니다.
다만 이러한 고민이 그리 따뜻하고 아름답지는 못하다는 것과 이 글을 적어 내림으로써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도 없다는 것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ii.
모든 예술은 개념화되며 많은 이야기를 포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다르게 하면 포섭의 대상들을 거리낌없이 안아 버리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듯, 예술은 기득권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거나 사회적 권력을 재생산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다소 엘리트적이고 배타적인 장으로 남아 있을 위험이 크다.— 광대하게 수집된 주제들은 진정으로 그 주제의 ‘이야기’를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는 이질적 시도로 읽히고, 곧잘 폭력적인 태도로 비치곤 한다. —예술이 가진 거리감, 즉 초현실 혹은 반(反)현실적인 속성은 때론 몹시 정교해진다. 이는 무언가를 향해 가장 은유적이고 아름답게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와도 맞물린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무언가를 미적으로 서술하려는 시도 자체가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넓어짐으로써 얕아지는 가벼움이 기만적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술의 가치는 현실을 풍부히 해석하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데 있지만, 특정 계층만이 그 가치에 접근할 수 있다면 이것은 기득권층의 언어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약 미술의 목적이 현시대를 비판함으로써 이후를 내다보며 변화를 환기하는 것이라면, 직술(直述)하려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 어디까지 직술할 수 있는가.
여기서 직술하기는 직면하기, 다시 말해 직면하기란, 이야기할 수 있음이다. 때로 냉정하고도 낯설지만, 복잡한 형식과 개념에 기대어 자주 사용되는 수사적 우회에서 벗어나 구체적 언어의 표현을 마주할 때 우리는 보다 명확한 메시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직설적인 표현이 오히려 주관적 해석의 여지를 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내포하지만, 사회가 다원화됨에 따라 예술은 기존의 상징과 개념을 넘어서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적 발언을 요구받게 됐다. 즉 이러한 접근이 점차 강조되는 것은 이 시대가 부여한 예술의 책임감의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서 창작자는 하나의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이를 통해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예술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탐구에 머무를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물론 두 접근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미학적 접근 속에도 사회적 발언이 자연스럽게 내재할 수 있다. 어쩌면 예술이 본질적으로 가진 미학적 요소가 사회적 의미를 담아 내는 방법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주제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고자 할 때, 예술가가 스스로를 노출하며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면, 이는 강력하고도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이 누군가에 대한 무시나 소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는 쉽게 불식되지 않는다. 특히 특정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불필요한 정치적 레토릭이나 과장된 해석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작가는 은유와 직설의 균형을 고민하며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문제를 지나치게 손쉽게 다루고 층위를 나눠 버릴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몇몇 경우 당사자성을 강조하며 상쇄할 수 있겠지만, 예술이 보편적 언어로 기능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볼 때, 특정 배경을 가진 이들만이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은 또다른 모순을 남긴다. —이 모든 고민 속에서 오히려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탐구로 돌아서는 선택도 충분히 의미 있다. 이를 비겁하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예술의 미학적 탐구는 그 자체로 깊어지고 세밀해지며, 새로운 형식과 전위적 표현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기도 하니 말이다.—
‘당사자성’은 설득력과 진정성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다. ‘당사자’란 말 그대로 특정 사건이나 문제에 직접적인 경험과 이해를 지닌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예술에서 표현될 때,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그 문제를 더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는 자칫 예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당사자만이 해당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독점적 시각’이 강화되면,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보편적 접근이 어려워진다. 즉 ‘증언’의 형식을 넘어 서사를 확장하고 타자의 경험까지 포함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의 경험과 목소리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그 경험을 절대적 진리로 만들고, 그것만이 진정성을 담보한다고 여길 때 예술은 또다시 지나치게 배타적인 공간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는 다시 또 당사자성과 접근성 간의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보여 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감독은 이를 단순히 당사자의 증언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그에 더하여 감상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소외와 단절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모든 이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끌어 낸다. 즉, 당사자의 경험을 발화의 중심에 두되, 그것을 모든 이가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억압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들 때야말로 예술은 보편적 언어로 기능하며 특정한 배경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담론을 넘어선다.
다른 예시로, 형식을 우회함으로써 이야기하는 사례들을 가볍게 소개한다. 기억에 남는 것들을 나열하면 1. 고민을 깔아 두는 식으로 이미지화하기 2. 개념적으로 신화나 이야기를 차용하며 맥락 안에서 시의적인 것들과 연결 짓기 3. 은유하기를 통해 직술하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1. 고민을 깔아 두는 식으로 이미지화하기
레오 까락스의 <잇츠 낫 미(2024)> ⒸM&M
인터내셔널
부산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담에서 어떤 것을 중점으로 영화를 만들었냐는 질문에 그저 생각하는 것을 꺼내 두었다는 대답을 남긴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펼쳐 낸 정신없는 고민과 방황들이 그 형상 그대로 화면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2. 개념적으로 신화나 이야기를 차용하며 맥락 안에서 시의적인 것들과 연결 짓기
MMCA 올해의 작가상 - 윤지영
[제우스의 최후, 2019, 혼합 재료, 타투, 230x60x60cm,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제우스의 최후, 2019, 혼합 재료, 타투, 230x60x60cm,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포세이돈과 제우스의 최후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보편적 이미지 전복에 관한 이야기와 섬세한 조각적 형태들은 작가의 작업 세계 안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3. 생략, 은유하기를 통해 직술하기
현대 예술에서 부재의 언어(absence of language)는 기존의 서사적 접근을 재구성하는 핵심적인 방법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작품이 서사의 전형적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비워 두는 방식을 통해 감상자의 해석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부재’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성과 해석적 여지를 제공하는 적극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부재의 언어는 비가시적인 대상이나 불투명한 서사를 통해 타자성을 불러일으키며 언어화되지 않은 영역에서 감각적 경험을 추구한다. 이는 실질적인 대상의 서술보다 오히려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고 풍부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한다.
부재의 언어는 서사의 구조적 빈틈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상자에게 인지적 참여를 요구하는 특성을 보인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이론과도 유사하게, 예술 작품의 텍스트적 요소를 해체하여 언어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그 자리에 비언어적 경험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 스스로 결여된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미완성의 서사’를 생성한다.
은유는 직술이 가진 직선적인 한계를 넘어서 지나치게 노골적일 수 있는 부분을 정교하게 감추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힘을 가진다. 단지 형태와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주제를 다루고 그 주제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의 마지막 단계에 가깝기도 하며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가볍지 않고 진지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iii.
계속해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지금의 예술계는 사회를 마주하며 빠르고 적절하게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여러 크고 작은 담론들에 대해 적합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들이 새롭게 생성된다. 이 글의 검토와 살펴봄 그리고 지금의 예술의 말하기 방식은 최선이 아닐지 모른다. 미리 양해를 구했듯, 결국 이 글도 정답을 찾기보다는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열린 고민을 제안하고 만다. 직설과 우회, 현실과 상징,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의 이 복잡한 관계에서 어느 하나가 완전한 해답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예술의 다면성에 있다.
예술은 여전히 보편적 언어로서 우리를 이어 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 보편성이 진정성 없는 기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와 방식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술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숙고하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예술의 진정성에 닿는 길일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 어느 위치에서 누구를 위해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어떠한 메시지를 설파하고 그로부터 엄청난 구원적 변화가 따르리라 믿는 종교적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술가와 감상자 모두가 계속해서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이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못하는 것은—, 결국 이 논의가 고정된 답을 얻기보다는 다양한 목소리가 겹쳐지며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할 대화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방향성은 고정된 도식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며, 숙원과 같은 고민 위에서 끊임없이 재정립될 것이다. 진행하는 무한한 시간 동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