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으로
거부당한 릭 오웬스로부터
WEBZINE
WEDITOR 이다현
WEDITOR 이다현
©Instagram/matieresfecales
“그들은 우리에게 메이크업을 지우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고 그러면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외모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이다.”
_해나 로즈 달튼, 스티븐 라지 바스카란
모두가 릭 오웬스Rick Owens의 독특한 스타일에 호감을 갖는 것은 아닌 듯하다. 지난 10월, 그는 아내 미셸 라미Michele Lamy와 페칼 매터Fecal Matter로 활동하는 해나 로즈 달튼Hannah Rose Dalton, 스티븐 라지 바스카란Steven Raj Bhaskaran과 함께 베이징의 자금성을 방문했지만, 옷차림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다.
중국의 언론사 베이징 데일리Beijing Daily는 자금성 측의 결정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하며 “존중은 상호적이다. 이 경우는 그들 복장의 자유가 존중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오웬스와 그의 일행은 ‘어둡고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잦은 시선을 끌었다”고 논평했다. 이에 필자는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패션에 있어 문화적 규범에 대한 존중은 개인의 정체성 표현, 문화적 전유 등의 문제를 안고 있기에 ‘이상한’, ‘부적절한’ 등의 단정 짓는 표현은 아직 모호한 영역이 아닌가?
©Fecal Matter
페칼 매터는 ‘대안적 뷰티Alternative Beauty’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대안적 뷰티는 메이크업을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해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자신의 철학과 개성을 써 내려가는 최근의 추세를 반영한다. 메이크업을 일종의 ‘토론의 장’, ‘예술’로 보고 기존의 규칙과 규율에서 벗어나 사회적 메시지와 문화 현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깊이 있게 담아내는 것이다. 특히 페칼 매터의 둘은 이분법적 성별에서 벗어난 제3의 성별 ‘논 바이너리Non-binary’로서 존재한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다는 답을 정해두고 거기에 자신을 대입해 혹사하기보다, 변화하는 삶과 문화에 맞춰 스스로를 하나의 예술로 여기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 나가는 모습이다.
©Rick
Owens/Converse
그렇다면 패션 또한 기존의 사고와 새로움 사이의 모순이 있을 때 그 모순을 표면화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끌어올린다. 이는 하위문화 스타일적인 미적 특성이 종래의 획일화된 패턴을 깨고 새로운 미의식을 자극해 패션으로서 다양화, 세분화되는 경향으로 설명 가능하다. 의복, 외모, 음악, 행동을 통해 표명되는 ‘스타일’은 집단의 존재와 응집력을 표현하는 유력한 방법이며, 하위문화의 눈에 띄는 특징이자 특정 하위문화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하위문화는 스타일을 통해 타문화와 자신들 간의 경계를 설정하려고 하는 응집력 있는 체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때 하위문화가 가져오는 각종 현상은 우리에게 있어 고유한 문화의 발굴과 대두, 그리고 공존과 혼종 등 새로움을 갈구하는 패션산업의 현장 특성상 결코 낯설지 않으며, 사실 릭 오웬스의 이슈 또한 그렇다. 페칼 매터의 둘은 해당 이슈에 대해 “우리는 전 세계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를 타협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치르는 대가다”라며 “이 경험에서 얻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다름에 대한 더 많은 수용과 관용을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을 계속하고자 하는 더 큰 결의이다”라고 말하기도. 사람들을 가두고 표현의 자유를 없애려는 사람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도발하고 경계를 넓히고자 하는 그들이다.
©GATA
여기서 일반은 그들을 곧 하위문화의 구성원, 즉 ‘비주류 집단’으로 칭한다. 비주류 집단은 스타일을 통해 그들 문화의 중심을 잡고, 의복과 신체 장식을 통해 같은 구성원에게의 충성과 세상으로부터의 자의적인 소외를 상징해 내기 때문에 자신의 집단이 주류가 아님을, 항상 주목과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안다. 일반이 고집하는 고상한 아름다움이 단 하나의 척도나 규준으로 작용하면서 개별적 가치를 배제해 왔다면, 그 아름다움을 거부한 불완전한 주체로서 주목과 감시로부터 결의를 다진 그들, 그들은 타자와 차이, 삶의 부정성을 긍정하고 삶을 풍부하게 바라보는 사유를 촉발함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일반에게 이들의 생성적이며 성찰의 계기 됨을 상기시키며 필자 또한 주류에 마주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