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다큐멘터리
WEBZINE
WEDITOR   임채윤

1.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현실과 접하기만 해야지 스스로를 현실에 내놓으면 안 돼. 지나치게 현실과 많이 접하고 현실에 노출이 되면 희생자가 될 테니까. 내 말 듣고 있나?” 다소 무실하고 모호한 데다 언뜻 귀족주의적으로도 들리는 이 말은 이내 청자에게 냉소 받는다. 그런데 그 말이 마음에 한편 와닿는 구석도 없지 않았다. 그때그때 현실을 어떻게 구획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의미화하지 않더라도, 우발적으로 다가오는 ‘현실’ 때문에 머릿속이 엉망이 될 것 같다거나 일순간에 감염될 것 같다거나 하는 공포는 누구든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다큐멘터리들은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 그것도 자신이 다루어야 할 대상으로부터. 유일하게 접근 가능한 대상이 폐허뿐이라거나, 거기서 유령 비슷한 것만 나타난다거나, 인물의 내면이 불가지한 블랙박스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어떤 소박한 경우에, 대상은 보이는 그대로 거기 버젓이 있다. 다만 그 안에 내비치는 괴물성을 견딜 수 없는 경우에 대해, 그래서 말을 멈추고 주저앉는 다큐멘터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익숙한 상이 잦아들고 마땅히 보여야 할 것들이 이미지로 풀려나기 시작할 때. 그 환멸의 지점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본래 바이오그래피 다큐멘터리가 안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스포츠 스타나 기업가, 예술가들을 신화화하는 주례사 다큐멘터리가 유독 만연한 지금엔 잊기 쉽다. 그러나 바이오그래피 다큐멘터리에서는 인물의 신뢰에 부응하는 일만큼이나 폭로하기란 명목으로 그를 배반하는 일도 가능하다. 내가 취사선택한 이야기가 그를 상처 입힐 것이 분명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그곳은 인물 다큐멘터리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어느 괴물적인 존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우 가능성은 더욱 열려 있다. 괴물의 무덤 앞에서 모종의 의식을 치를 수도 있을 테고, 살아 있는 괴물에게 칼을 숨긴 채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대개 저널리즘적 무용담이 되어 널리 전해진다. 그런데 호의를 안고 다가간 대상의 괴물성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라면 어떨까. 그것만은 무용담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비극으로 전해진다.


2.
“내가 그를 배신할까봐 두렵다. 그가 왜 촬영을 허락했는지, 어째서 나를 믿는 것인지 의문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비가시 권력에 대항하는 인물을 그려 온 다큐멘터리스트 로라 포이트라스는 그녀의 작품 <리스크(2017)>에 위와 같은 독백을 두었다. 이는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것을 극장 개봉을 위해 재편집하던 중에 추가된 내레이션의 일부분이다. <시티즌 포(2014)>,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2023)> 같은 그녀의 여타 작품을 떠올린다면, 이는 사뭇 기이한 선택이다. 그녀가 작품 전면에 나서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며, 인물과 대척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리스크>는 기밀 문서 유출 플랫폼 위키리스크의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를 밀착 취재한 2년을 담는다. 시리아 민간인을 무참히 살해한 미군의 녹화 비디오를 포함해, 미 정부의 기밀 자료들이 위키리스크를 통해 유출되었고, 어산지는 거의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한편 그의 행보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던 포이트라스는 운이 좋게도 그 과정을 가까이서 기록할 수 있었다. 어쩌면 포이트라스가 해왔던 방식대로, 자신을 권력에 대립하는 구도자로 그려주길 바랐던 것일까. 어산지는 기꺼이 포이트라스를 그의 은둔지 안으로 들였다.



균열의 발단은 촬영이 한창이던 어느 밤중이었다. 돌연 어산지가 두 스웨덴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고, 스웨덴 당국은 영국에 있던 어산지를 호출했다.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송환될 것을 염려한 어산지는 이를 거부했고, 이어 그의 망명을 받아준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몇 년을 지냈다. 그는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개의치 않고 스웨덴의 호출에 분개심을 쏟아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 레즈비언들이 자신을 모함했다며, 자신을 고소하는 즉시 그녀들은 세계의 비난을 견뎌야 할 것이라고 힐난했다. 그 무렵부터 포이트라스와 어산지 사이에는 모종의 불화가 자라났다. 그에 따라 어산지의 형상도 이리저리 모습을 뒤틀기 시작했다. 저널리즘의 선지자, 자기애적 독재자의 형상이 한곳에 뒤섞였다.

칸에서 상영된 <리스크(2016)>는 마지못해 거기서 반체제적 영웅의 현시를 읽어 냈고, 어산지에게 송사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말하자면 관성에 기대어 가까스로 완성된 작품이었다. 그녀는 미혹을 끊어 내는 데 실패했고, 얼떨떨한 나머지 가만한 형상마저 바로 보는 데 실패한다. 그에 관해 포이트라스가 명확히 소회를 밝힌 적은 없으나, 재편집 과정에서 추가된 독백은 그녀가 진작부터 환멸의 임계점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갖은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더는 전과 같을 수 없음을 자각할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한편 칸 상영 직전에 영화를 확인한 어산지는 성범죄 혐의와 관련된 내용이 영화에 포함된 것을 보고 격노했다. 그는 포이트라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관련 내용을 모두 삭제하라고 위협했다. 추후 그의 변호사에게서 날아온 메일에는, 포이트라스의 영화가 어산지의 자유에 해가 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부터 온 영화가 다르게 보였다고, 포이트라스는 회고한다. 개봉 이전까지 일 년 남짓한 시간이 있었다. 그녀는 <리스크>를 재편집했다. 다만 혼란에 찬 자기 독백과 어산지의 독선적 언행을 숨김없이 집어넣었다. 그녀로서는 이례적인, 반성과 고백의 방식이었다. 영화에 추가된 내레이션의 일부. 그녀는 촬영 도중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모순을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고. 그건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그것이 스스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3.
그렇게 <리스크>는 두 가지로 갈라졌다. 아쉽게도 칸에서 상영된 버전을 지금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이미 온갖 먼지가 그 위로 내려앉았고. 지금은 뒷소문을 빌려 그 윤곽을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상상해보는 일은, 현존하는 <리스크>에 한결 입체감을 더한다. 가공할 우발성과 환멸의 이후. 끊어지고 남은 것들의 잔해─로서의 다큐멘터리. 거기서 무용담 같은 건 건너오지 않는다. 영화는 칸 영화제로부터 일 년이 지난 2017년 5월에 개봉했고, 가디언지의 기자는 포이트라스에게 <리스크>가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오히려 질문을 듣고 상심한 듯 보였다. “저는 제가 존경하던 사람들과 불화가 생기길 원하지 않았어요. 제게는 비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