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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이수아

하라주쿠에서 마주친
올여름 도쿄에 갔다. 한여름의 도쿄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재난이다. 하라주쿠에서 보낸 날은 유독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는 엄마의 법칙도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행객의 신분으로 어찌 가만히 서 있을 수만 있겠는가.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그 부작용인지, 무언가 특별한 장면을 떠올리려 애써도 하라주쿠에서의 기억은 뚝뚝 끊겨 있다. 마치 자르고 붙인 필름같이.
더위에 지쳐 들어간 건물. 그 건물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계단. 계단으로 내려가자 펼쳐진 풍경. 그날은 이런 장면들로 남아있다.


계단 내려가다 찍었다.

(지하 0.5층 같았던) 지하 1층은 신기한 가게로 가득했다. 일본의 서브컬처 룩들이 모여 있었다. 어디서 구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옷들은 다 여기 있구나 싶었다.

‘LEMONeD’ 샵의 모습.

‘LEMONeD’
그중 가장 기억에 깊게 남았던 가게다. 계단을 내려가니 네온 컬러가 눈을 사로잡았다. 형광빛의 공간 한가운데에 놓인 기타. 기타와 함께 걸려 있는 남자의 사진. 이유는 모르지만, 그 장면만은 선명하다. 기타는 단순한 전시물이 아닌 듯했다. 공간 중심에 배치된 기타와 함께 놓인 사진 속 남자 역시, 단순한 아티스트 이상의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 보였다. 저 남자는 누구인지. 왜 하필 기타인지. 시간에 쫓겨 떠오르는 질문들의 답을 찾지 못한 채 건물 밖으로 나가야 했다. 이곳을 그냥 스쳐 지나갔음을 도쿄에 있는 내내 후회했던 것 같다.


이번엔 나의 자취방 맥북에서 마주친



서울로 돌아온 후, 하라주쿠에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사진 속 기타와 남자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전자상거래가 발달한 21세기에는 한국에서도 일본 브랜드의 물건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급히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도쿄에서 풀지 못했던 질문을 풀기 위해 검색창에 ‘LEMONeD’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삼 분이 조금 넘는 조사 끝에 레모네이드의 브랜드 웹페이지를 찾아냈다.

“레모네이드를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브랜드 ‘레모네이드’. 레모네이드는 일본의 전설적 밴드 엑스 재팬(X Japan)의 멤버 히데(Hide)를 테마로 삼아 컬렉션을 출시했다. 내가 하라주쿠에서 본 그 기타는, 히데가 사용하던 모킹버드(Mockingbird) 기타였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이 나를 다시 좌절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일본어로 이루어진 레모네이드의 웹페이지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마우스만 허공을 떠돌 뿐이었다.

나를 어지럽게 한 ‘LEMONeD’의 온라인 구매 사이트

이렇게 끝날 수는 없지! 포기하지 않는 나폴레옹의 정신으로 이미지 검색을 시도했다. 그러다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기타를 펼쳐 입자
전개상 레모네이드의 옷을 사는 데 성공한 내용이 나오는 게 맞지만, 사실 아니다. 미리 사과하겠다. 그래도 흥미로운 국내 브랜드 하나를 얻어 냈다.

사랑은 그 종류와는 무관하게 큰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 브랜드 아콜(AKOL). ‘All kinds of Love’를 줄여 만든 이름이다. 아콜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옷으로 풀어낸다. 그 중에서도 ‘기타 변신 재킷’은 지금까지 본 옷 중 가장 독특했다. 레모네이드와 마찬가지로, 아콜도 히데에 영감 받아 컬렉션을 디자인했다. 아콜의 ‘기타 변신 재킷’ 모킹버드(MOCKINGBIRD) 캡슐컬렉션은 히데의 기타인 모킹버드에서 탄생한 아이디어다.


히데의 모킹버드들

히데가 생전에 사용했던 모킹버드 기타는 그의 화려하고 실험적인 음악적 세계관을 담은 아이템으로, 엑스 재팬의 팬들에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아콜은 모킹버드 기타의 독창적인 실루엣과 디테일을 패션에 녹여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기타 모양 인형 같지만, 단순히 기타 모양을 본뜬 아이템이 아니다. 평소에는 기타 모양의 장식품으로 활용하다가, 필요할 때는 재킷으로 변신시켜 착용할 수 있다. 이처럼 패션과 오브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템이기에 더욱 특별하다. 덕분에 '입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흰색과 검은색 두 가지 컬러로 출시된 것도 마음에 든다. 같은 모양이지만 두 색이 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검은색은 묵직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흰색은 깔끔하고 환한 분위기다. 두 컬러 모두 기타 모양을 살린 실루엣이 매력적이다. 기타의 윤곽선을 그대로 살린 실루엣과 그 윤곽선을 따라 새긴 스카치 디테일이 눈길을 끈다. 어깨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곡선은 기타의 윤곽선을 그대로 따라갔고, 이를 감싸는 스카치 디테일이 마치 기타의 선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듯했다. 재킷으로 변신했을 때, 기타의 디테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좋다. 기타 줄을 형상화한 스티칭이나 작은 버튼 디테일까지, 이 재킷은 그냥 옷이 아니라 히데의 기타를 '옷'으로 구현한 하나의 작품 같았다. 히데의 음악적 세계를 몸에 걸친다는 점에서 옷을 넘어선 상징성을 가진다.


어떤 모양이든지
하라주쿠에서 마주친 기타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히데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고, 나를 새로운 발견으로 이끌었다. 하나의 형태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다른 옷, 또 다른 브랜드, 그리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철학으로까지 이어졌다.

낯선 길에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때로는 아주 작은 것에서 발견은 시작된다. 나는 앞으로도 그런 발견을 멈추고 싶지 않다. 그것이 기타의 곡선이든, 형광빛으로 물든 공간이든, 혹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든, 그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알고 싶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그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믿고 있다. 어떤 모양이든 찾아 내는 과정 속에서, 그 모양이 품은 이야기가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라고.


LEMONeD 웹페이지: LEMONeD[외부 링크]
아콜 웹페이지: All kinds of Love[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