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상
– 현실의 이미지
WEBZINE
WEDITOR 최하경
WEDITOR 최하경
지난 15일, 데이비드 린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장 유명한
지지자 중 한
명인 슬라보예 지젝이 “프리라파엘파로서의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as a Pre-Raphaelite)”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린치의 영화는 이해할 수 없기에 오히려 위대하다고 평하는 지젝의 애도는 왜 린치가 찍어낸 이미지들이 우리 눈에 이질감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지적을 던진다. 지젝에 따르면, 린치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존재론(ontology)은 실재(reality)를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것과, 진짜(the real)에 극도로 접근해 혐오스러운 쾌락의 물질—지젝의 표현으로는 라멜라(lamella)—을 목도하는 간극의 대비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린치의 영화는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한가로운 전경에서 시작해, 점차 잔디밭 위를 기어 다니는 꿈틀대는 벌레나 억센 풀을 갉아먹는 곤충 같은 섬뜩한 근접 샷으로 이동한다. 그러고 나서 그 기이한 형상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 관객과 화면 사이의 안전한 거리감이 무너지고 강렬한 이물감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린치의 대표작인 <블루 벨벳(1986)>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한가로운 미국 소도시의 목가적 풍경으로 시작하다가, 잔디에 물을 주던 아버지가 쓰러지는 순간 물줄기가 기이하게 과장된 소변처럼 보이도록 연출된다. 이어 카메라는 잔디 표면으로 점차 다가가 풀 사이를 기어 다니는 곤충들, 풀을 갉는 소리, 그리고 서로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비춘다. <트윈 픽스: 파이어 워크 위드 미(1992)>의 오프닝 시퀀스 역시 처음에는 파란 배경 속을 떠다니는 추상적이고 원시적인 흰 생명체들을 보여 주다가, 카메라가 점차 멀어지면 그것이 사실 TV 스크린을 극도로 확대한 장면이었음이 드러난다. 비록 클로즈업의 순서는 반대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지젝은 린치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현실/실재(the real)’에 과도하게 밀착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성(reality)’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포스트모던적 하이퍼리얼리즘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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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린치의 영화에는 ‘현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말해, 우리가 보편적으로 익숙해온 견고한 규칙과 중심으로서의 현실이 부정된다는 뜻이다. 혹 그러한 ‘단단한 중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린치 특유의 기괴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들은 곧 그것에 수많은 균열을 만들어 낸다. 화면 속 세계는 때로 낮은 부조(浮彫)처럼 납작해 보이고, 인물들도 깊은 내면을 가진 주체라기보다는 인형 같은 합성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 영화가 전통적으로 구축해 온 원근법적 리얼리티와 달리, 린치의 작품 속 리얼리티는 어디까지나 균열과 파편으로만 구성된다.
이런 린치적 미학과 전혀 다른 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이 없는’ 이미지를 보았던 또 다른 영화가 불현듯 떠오른다. 바로 하모니 코린의 <아그로 드리프트(2023)>다. 2024년에 본 작품 중 가장 기이한 영상물이었고, 솔직히 지금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 글을 통해 <아그로 드리프트>를 린치의 영화와 직접적으로 비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이 영화 방식은 달라도 역시 현실(reality)이 없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트래비스 스캇 맞다..)
<아그로 드리프트>는 전부 적외선 카메라(thermal vision)로 촬영되었으며, AR(증강현실) 효과와 AI 이미지 제작 툴을 대거 활용해 만들어졌다. 스크린 속 인물들의 피부는 모두 캔버스가 되어, 열 반응과 AI-생성의 그래픽 문양이 끊임없이 뒤섞인다. 감독 하모니 코린은 기존 시네마로는 더 이상 자신의 세계를 담아낼 수 없었다고 말하며, 의도적으로 게임과 환각적 체험의 영역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는 마치 RPG 게임 같은 유동적인 움직임에, 강렬한 네온색 열화상 이미지를 덧입혀 일종의 ‘마약적 체험’을 관객에게 강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게 기존 극영화가 보여 주던 현실 구도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싶어 하는 코린은 한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저는 항상 여러분이 2D를 뛰어넘는 지점에 도달하고 싶었어요. 그건 미학적인 약물과도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나 자신을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 중심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것은 없어요. 인과관계는 완전히 지워졌으니까요. 그리고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경험일 뿐이죠.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하이퍼가상(hyper-virtual)과 하이퍼피지컬(hyperphysical)이라는 초현실적 공간을 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가상 구현에 관심이 많은데, 그건 사람들이 가상 속에서 힘을 얻고 스릴과 역동적인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죠.”
이런 ‘하이퍼 가상’이라는 초현실을 구현하기 위해 코린은 AI와 VR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AI 생성 이미지를 둘러싼 논쟁은 잠시 접어 두고, 대신 VR이라는 다른 축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최근 여러 감독들이 VR을 활용해 영상 작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VR과 영화는 공존의 관계가 될 것”이라 전망했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VR로 인해 영화감독들이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고 밝혔다. VR은 관객의 시야를 180도 혹은 360도로 확장하고, 때로는 능동적 상호작용까지 요구한다. 이는 전통적인 원근법적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 문법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관객이 언제 어디를 볼지를 감독이 통제하기 어렵고, 그만큼 서사의 선형적 구조가 붕괴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VR이 만들어내는 ‘리얼리티’가 우리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체험해 온 ‘리얼리티’와 같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외연적 측면에서 VR은 분명 물리적 시야의 범위를 확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현실감이 자동으로 증대된다고 보긴 어렵다. 만약 기존 영화가 구축해 온 현실성(리얼리티)과 VR이 지향하는 가상현실성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둘은 확장이 아니라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VR 기술을 활용해 만든 체험형 퍼포먼스 <태양과의 대화>가 전시되었다. 늘 보이지 않는 유령적 존재, 잠들거나 병든 몸, 멈춰 있는 시간 속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시각화해온 그가 이번에는 VR을 통해 한층 더 확장된 가상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했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감상했지만,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는다. VR 헤드셋을 쓰고 ‘현실성 없는’ 이미지에 360도 둘러싸인 순간, 혹은 적외선 카메라와 AI 툴로 재창조된 화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과는 또 다른 층위의 ‘하이퍼리얼’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영화라는 장르가 향해야 할 길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이 더욱 커져만 가는 듯하다.
린치의 영화는 이해할 수 없기에 오히려 위대하다고 평하는 지젝의 애도는 왜 린치가 찍어낸 이미지들이 우리 눈에 이질감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지적을 던진다. 지젝에 따르면, 린치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존재론(ontology)은 실재(reality)를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것과, 진짜(the real)에 극도로 접근해 혐오스러운 쾌락의 물질—지젝의 표현으로는 라멜라(lamella)—을 목도하는 간극의 대비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린치의 영화는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한가로운 전경에서 시작해, 점차 잔디밭 위를 기어 다니는 꿈틀대는 벌레나 억센 풀을 갉아먹는 곤충 같은 섬뜩한 근접 샷으로 이동한다. 그러고 나서 그 기이한 형상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 관객과 화면 사이의 안전한 거리감이 무너지고 강렬한 이물감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린치의 대표작인 <블루 벨벳(1986)>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한가로운 미국 소도시의 목가적 풍경으로 시작하다가, 잔디에 물을 주던 아버지가 쓰러지는 순간 물줄기가 기이하게 과장된 소변처럼 보이도록 연출된다. 이어 카메라는 잔디 표면으로 점차 다가가 풀 사이를 기어 다니는 곤충들, 풀을 갉는 소리, 그리고 서로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비춘다. <트윈 픽스: 파이어 워크 위드 미(1992)>의 오프닝 시퀀스 역시 처음에는 파란 배경 속을 떠다니는 추상적이고 원시적인 흰 생명체들을 보여 주다가, 카메라가 점차 멀어지면 그것이 사실 TV 스크린을 극도로 확대한 장면이었음이 드러난다. 비록 클로즈업의 순서는 반대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지젝은 린치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현실/실재(the real)’에 과도하게 밀착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성(reality)’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포스트모던적 하이퍼리얼리즘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린치의 영화에는 ‘현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말해, 우리가 보편적으로 익숙해온 견고한 규칙과 중심으로서의 현실이 부정된다는 뜻이다. 혹 그러한 ‘단단한 중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린치 특유의 기괴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들은 곧 그것에 수많은 균열을 만들어 낸다. 화면 속 세계는 때로 낮은 부조(浮彫)처럼 납작해 보이고, 인물들도 깊은 내면을 가진 주체라기보다는 인형 같은 합성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 영화가 전통적으로 구축해 온 원근법적 리얼리티와 달리, 린치의 작품 속 리얼리티는 어디까지나 균열과 파편으로만 구성된다.
이런 린치적 미학과 전혀 다른 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이 없는’ 이미지를 보았던 또 다른 영화가 불현듯 떠오른다. 바로 하모니 코린의 <아그로 드리프트(2023)>다. 2024년에 본 작품 중 가장 기이한 영상물이었고, 솔직히 지금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 글을 통해 <아그로 드리프트>를 린치의 영화와 직접적으로 비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이 영화 방식은 달라도 역시 현실(reality)이 없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그로 드리프트>는 전부 적외선 카메라(thermal vision)로 촬영되었으며, AR(증강현실) 효과와 AI 이미지 제작 툴을 대거 활용해 만들어졌다. 스크린 속 인물들의 피부는 모두 캔버스가 되어, 열 반응과 AI-생성의 그래픽 문양이 끊임없이 뒤섞인다. 감독 하모니 코린은 기존 시네마로는 더 이상 자신의 세계를 담아낼 수 없었다고 말하며, 의도적으로 게임과 환각적 체험의 영역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는 마치 RPG 게임 같은 유동적인 움직임에, 강렬한 네온색 열화상 이미지를 덧입혀 일종의 ‘마약적 체험’을 관객에게 강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게 기존 극영화가 보여 주던 현실 구도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싶어 하는 코린은 한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저는 항상 여러분이 2D를 뛰어넘는 지점에 도달하고 싶었어요. 그건 미학적인 약물과도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나 자신을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 중심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것은 없어요. 인과관계는 완전히 지워졌으니까요. 그리고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경험일 뿐이죠.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하이퍼가상(hyper-virtual)과 하이퍼피지컬(hyperphysical)이라는 초현실적 공간을 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가상 구현에 관심이 많은데, 그건 사람들이 가상 속에서 힘을 얻고 스릴과 역동적인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죠.”
이런 ‘하이퍼 가상’이라는 초현실을 구현하기 위해 코린은 AI와 VR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AI 생성 이미지를 둘러싼 논쟁은 잠시 접어 두고, 대신 VR이라는 다른 축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최근 여러 감독들이 VR을 활용해 영상 작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VR과 영화는 공존의 관계가 될 것”이라 전망했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VR로 인해 영화감독들이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고 밝혔다. VR은 관객의 시야를 180도 혹은 360도로 확장하고, 때로는 능동적 상호작용까지 요구한다. 이는 전통적인 원근법적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 문법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관객이 언제 어디를 볼지를 감독이 통제하기 어렵고, 그만큼 서사의 선형적 구조가 붕괴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VR이 만들어내는 ‘리얼리티’가 우리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체험해 온 ‘리얼리티’와 같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외연적 측면에서 VR은 분명 물리적 시야의 범위를 확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현실감이 자동으로 증대된다고 보긴 어렵다. 만약 기존 영화가 구축해 온 현실성(리얼리티)과 VR이 지향하는 가상현실성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둘은 확장이 아니라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VR 기술을 활용해 만든 체험형 퍼포먼스 <태양과의 대화>가 전시되었다. 늘 보이지 않는 유령적 존재, 잠들거나 병든 몸, 멈춰 있는 시간 속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시각화해온 그가 이번에는 VR을 통해 한층 더 확장된 가상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했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감상했지만,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는다. VR 헤드셋을 쓰고 ‘현실성 없는’ 이미지에 360도 둘러싸인 순간, 혹은 적외선 카메라와 AI 툴로 재창조된 화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과는 또 다른 층위의 ‘하이퍼리얼’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영화라는 장르가 향해야 할 길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이 더욱 커져만 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