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와 션 베이커에 관한 사사로운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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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TEAM FILM


2024년 11월, 션 베이커의 <아노라(2024)>가 마침내 국내에서 개봉했다.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작품상의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그것의 내용물을 하루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트로피를 손에 들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던 션 베이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가운데, 그의 숙원 사업 달성을 축하하며 <아노라>에 관해 소박하게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대담은 11월의 어느 날 용산의 ‘카페 시바’라는 작은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몇몇은 직전에 영화를 보고 자리에 참석했다.

“…!”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시작을 서로 뜸들였다.

미리 알리건대 우리 중 다수는 기실 <아노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화는 즐거웠고 음식은 무척 맛있었으니, 그 점을 감안하며 이 사사로운 대담을 읽어 주시길.


#1 션 베이커

CY: 워낙 동안이라 몰랐는데 션 베이커가 토드 필립스와 같이 영화학교를 다녔다더라고요. 입학할 때만 해도 영미권 바깥 영화에 큰 관심 없이, <다이하드> 후속작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지냈대요. 그러다 후에 에릭 로메르를 시작으로 프랑스 뉴웨이브 영화들을 보게 되고.
네오리얼리즘 영화들도 훑고 마지막으로 카사베츠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하더라고요.

SY: 션 베이커의 영화 취향에 대해 더 얘기해 보고 싶은 게, 직접 꼽은 인생 영화 리스트에 이창동의 <밀양(2007)>이랑 <오아시스(2002)>가 있었고, 그와 비슷한 영화들이 많았어요. 2012년에 사귀던 여자친구한테 <오아시스>를 보여 줬다가, 왜 이런 거 보여 주냐고 욕을 먹고 얼마 안 가 헤어졌다는 일화도 있었다고 하네요. 아,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도 좋아한대요.

CY: <테이크 아웃(2004)> 같은 초기작을 촬영하는 방식에 <백치들>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이 사람 영화 취향은 유독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 같아요. 레터박스도 활발하게 하잖아요. 거기서 자기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 리뷰도 달고.

SY: 뭐라고 달았어요?

CY: 마지막 장면을 디지털로 찍은 게 역겹다고 달았네요. 그것 말고도 넷상에 무물(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글도 올리고, 소통을 많이 하려고 하더라고요. 편견 없는 영화광 이미지로 통하는 느낌인 것 같아요. 학생 때 <스타워즈>나 <다이하드> 시리즈 같은 영화들을 좋아했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하고.

SY: 그런데 또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 정도로 관심사가 치우쳐 있는 감독이 흔하지는 않잖아요. 대체로 감독들은 필모에 한두 개씩은 굴곡이 있는데, 이 사람은 되게 일관적이어서 참 신기했어요.


#2 그리고 아노라



SY: 다들 <아노라>는 어땠어요?

CY: 전 되게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예전이랑 많이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초기작 같은, 근작까지 남아 있던 날것의 느낌은 거의 사라진 것 같았고… 훨씬 말끔하고 안전해진 느낌.

DW: 저는 별로였던 점이 두서없이 생각나요. (웃음)

SY: 정말 오디오가 비는 틈이 없잖아요. 보면서 조금 힘들었던 게,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에 여백이 없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영화에서 사소한 것을 쫓을 때가 좋은데, <아노라>는 그런 순간이 없었어요. 결말 장면 외에는, 모든 장면이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서 하나하나 짜여 있고, 생각해 보거나 추측해 볼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 것 같았어요.

DW: 그거 생각났어요. 사프디 형제 영화 중에 <언컷 젬스(2019)>. 둘이 엄청 비슷하지 않아요?

CY: 그러네. 다 때려 부수고,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오디오가 물리고. 중간에 한 20~30분 동안 소파 둘러싸고 싸우잖아요.

SY: 그리고 사실 스토리라인 자체만 보면 연속극이나 다름이 없잖아요. 재벌 2세랑 만나서 결혼하고, 사기당해 다시 원래의 처지로 돌아가는. 전개 자체는 되게 진부해서, 어떻게 션 베이커의 다른 영화들보다 이 영화가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었는지 의문이었어요. 그래도 스토리텔링이 좋았다고 느끼긴 했던 게, 전반부와 후반부의 느낌이 되게 다르잖아요. 또 끝을 그렇게 매듭 짓는 방식이, 민감하고 논쟁적인 소재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DW: 저는 아르메니아 형제 개그 덕에 끝까지 봤거든요. 솔직히 계속 피식거리면서 봤어요. 그런데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SY가 말했듯이 너무 진부하다고 느꼈어요. 물론 모든 영화가 서사에 중점을 둘 필요는 없죠. 브레송의  <사형수 탈출하다(1956)> 같은 영화를 보면 인물이 탈출할 게 뻔한데, 애초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는 <아노라>의 이야기가 연속극 같다고 생각할 거란 걸, 감독도 알고 만들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런 전개를 취한다면 그 사이와 끝에 무언가를 보여줘야 할 텐데. 결말은 이고르와의 장면으로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열어봐도 별게 없었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CY: 저도 이전 두 영화의 결말은 너무 좋았거든요.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2021)>. 환상으로 도피하면서부터 화면에 온통 이물감이 드는 것도 좋고. 그런데 리얼리즘적 탈출구가 디즈니랜드라는 점이 참 잔인하기도 하고… <레드 로켓>의 결말도 마찬가지로 좋았거든요.

SY: 저는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어요. 아노라가 누구도 만나지 않고 혼자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걸로 끝났으면 어땠을까 했는데, 그것도 엄청나게 진부할 것 같은 거예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왜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는 걸까, 하고 불만스러웠는데, 그것 말고는 대안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 이야기 자체의 한계인가?

CY: 영화가 중간부터 계속 아노라를 이고르랑 엮잖아요. 아노라가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둘의 투샷을 기어코 계속 잡아주는 게 웃겼어요.

DW: 이고르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가 않잖아요. 반야랑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하고. 이고르는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무 순둥순둥한 사람이고. 반야는 알고 보니 그냥 철 없는 캐릭터니까. 이걸 너무 노골적으로 대비시켜서, 결국은 ‘돌고 돌아 이고르에게 가는 아노라’라는 이야기가 너무 예상이 되더라고요.

SY: 이 관계성이 단지 '둘이 잘 어울린다' 라는 션 베이커의 사심이 아니라, 아노라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보여주려고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잖아요. 왜냐하면 계속해서 강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키스를 하려다가 안 하는 게 트라우마에 의한 행동처럼 보였거든요. 근데 한편으로 이런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결국 이고르와의 사랑을 통해서 꺼내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SJ: 저는 마지막 장면이 사랑에 관한 것이기보다, 자기 존재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초라한 몸짓처럼 보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자기 모습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울음이 터진 거라고 생각했어요.


#3 <아노라>와 당사자성

SY: 이건 제 사견이지만 저는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여성 캐릭터를 쓰는 방식을 안 좋아하거든요. 대표적으로 <가여운 것들(2023)>에서의 경우. 근데 <아노라>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단순히 자극적인 장면을 보여 주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걸 통해서 뭘 보여 주고 싶은 건지가 잘 안 와닿았어요. 그냥 보여 주고 싶어서 보여 주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DW: 그게 리얼리즘의 맥락도 아닌... 근데 그런 평가가 있더라고요. 리얼리즘을 엮어서 <아노라>가 주변부 노동자들을 다루는 방식을 이야기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던데.

SJ: 션 베이커 작품 대다수가 성노동자를 중점에 두고 있으니까. <아노라>를 보고도 작품 자체보다 감독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요.

SY: 저도 비슷했어요. 칸에서의 수상 소감으로 성 노동자들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얘기를 했는데, 성노동을 노동으로서 인정하느냐 마느냐도 의견이 갈리잖아요. 그런 컨텍스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데, 일단 이 영화는 성노동도 노동이라고 전제를 깔고 이야기하고요. 그런데 왜 그런 주장을 션 베이커가 하는지 잘 납득이 안 됐어요. 적절한 예시인지 모르겠지만,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 사태(2022)>를 봤을 때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낸 골딘이어서 이해가 갔거든요. 낸 골딘은 당시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보고 겪고 들었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션 베이커는 다큐도 아니고 픽션으로 성(性) 산업이라는 당사자성이 없는 주제를 다루고자 하니까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레드 로켓(2021)>

CY: 션 베이커가 그런 문제를 두고 주저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레드 로켓>의 이야기도 논쟁적이잖아요. 남성 전직 포르노 배우가 어느 여학생을 포르노 배우로 데뷔시키려고 하는 내용인데, 필름메이커 인터뷰에서 그에 관해 질문을 받았더라고요. 근데 거기에 션 베이커는, 이야기의 캐릭터를 이해하고 관객을 거기에 몰입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이성애자 남성의 관점을 사용해야 했다고 대답했어요.

DW: 저는 개인적으로 시선 자체는 크게 상관없는 것 같아요, 누가 무얼 만들든. <아노라>도 이야기의 부실함 때문에 별로라고 느꼈던 거지. 션 베이커가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면 그나마 마약 중독? 20대 때 마약에 심하게 빠졌다가 친구를 다 잃었다고 하던데.

CY: 그때 피폐하게 살던 시기의 영향이 클 것 같아요. 생각보다 공명심이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인터뷰에서 말하길 자기 평생 목표가 칸에 가는 거였고 세계 영화제들을 석권하고 싶은 마음이 크대요. 근데 이 사람은 20대 때 마약 중독으로 완전히 나락을 갔었잖아요. 그때 션 베이커 영화에 나올 법한, 그 사람 표현으로는 ‘밑바닥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대요. 그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 받았던 부정적인 시선에 많이 신물이 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아노라>는 당사자성 문제에 관해서라면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 같은 게, 이전의 영화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데려와서 영화를 찍었어요. 특히 <탠저린(2015)>은 근처 LGBT 센터에서 배우가 아닌 사람들을 데려와서 주연으로 세웠고. 이야기나 대사에도 그들 의견을 많이 반영했대요. 그동안은 그런 식으로 캐스팅과 스토리 디벨롭이 이루어져 왔는데, 아노라는 직업 배우들만을 데려다가 찍은 거잖아요.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4 <아노라>의 인물들

SY: 약간 다른 길로 새는 얘기인데, 다들 연기를 진짜 잘하지 않아요? 아노라를 연기한 마이키 매디슨이 사실은 유대계 미국인인데, 영화에서는 우즈베키스탄계 미국인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걸 전혀 모른 채로 봤었고. 반야를 연기한 마크 아이델슈타인도 이전에 출연했던 영화가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캐스팅했을까 싶었어요.

DW: 계속 눈 반쯤 풀린 채로 연기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CY: 남자 배우가 찰떡이었어요. 한편으로 션 베이커의 연기 디렉팅 방식도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그 모텔 근처에서 살던 아이들을 데려와서 연기를 시켰대요. 션 베이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인식에 한계가 있다고 촬영지 근처 주민들을 캐스팅하고 대사도 그 사람들에게 많은 부분 맡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다들 연기를 너무 잘하잖아요.



DW: <아노라> 보면서 하모니 코린의 <검모(1997)>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냥 갑자기.

SY: 그런데 <검모>는 로맨스의 기미가 진짜 하나도 없는…

DW: 그쵸. 근데 배우를 쓰는 방식이나 <아노라> 초반부를 보면 거기서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CY: 저는 <아노라>에서 거실 장면 마이키 매디슨의 연기가 너무 좋았어요. 진짜 최선을 다해서 싸우잖아요. 가져 본 적 없는 걸 가졌다가 그걸 잃을 때 사람이 미쳐 버리는데, 다 죽여 버려야겠다는 표정으로 날뛰니까… 그때 이고르 표정도 되새겨 보니까 묘하네요.

SY: 이고르는 되게 <밀양>의 송강호랑 비슷한 것 같아요. 구원처럼 보이지 않는 구원을 표방한 존재 같다고 할까요. 계속 묵묵히 보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로맨스적인 관계가 되잖아요.
반야와는, 돌이켜 보니까 둘이서 연기를 되게 잘했다고 느꼈던 게, 진짜 사랑이 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같았어요. 스킨십만 존재하는 겉도는 대화. 아노라와 이고르가 나눈 대화와 반야와 나눈 대화를 비교하면, 단순히 둘이 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어떤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어 볼 수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은 다르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대화의 무게 자체가.

SJ: 저는 최근에 <아노라>와 비슷한 일화를 주변에서 들었어요. 저번에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발제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SY: 주변이 왜 이렇게 어수선하세요. (웃음) 근데 이게 엄청나게 자극적인 얘기라서 그렇지, 저도 와닿지 않는 건 아니었어요.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피상적인 관계를 겪으면 사람이 너덜너덜해지잖아요.

CY: 저는 그래서 반야가 아노라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장면이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둘다 자기 감정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모르잖아요. 아노라도 반야한테 네가 그리워질 것 같다고 말하고서, 근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게 들리냐고 그러고. 자기 마음을 못 믿어서 뱉는 말들이 너무 좋았어요.

SY: 이 둘이 연애하는 모습도 정말 연애 초창기의 모습 같은, 엄청 신나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자, 연인들끼리 한다는 거 전부 해 보자 하는 느낌이잖아요. 결혼을 한 뒤에도 TV에서나 보던 결혼을 진짜 하게 돼서 들뜬 것 같은 느낌. 그런 어리석은 느낌이 너무 잘 살아서 결혼 직후의 할리우드스러운 연출의 장면들이 좋았던 것 같아요.


#5 션 베이커의 스탠스

SY: 한편으로 <아노라>를 보면서 션 베이커가 노동자 계급이나 성 노동자라는 주제에 몰두하는 게, 대단히 정치적인 이유나 사명감 때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CY: 흔히 사회 리얼리즘 감독의 계보로 분류가 되는데, 정작 션 베이커는 그것을 스타일처럼 다루는 것 같기도 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감독들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잖아요. 사회운동가적인 면모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션 베이커는 빈민가를 다루는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고 겐조KENZO 브랜드 필름을 찍었더라고요. 이 사람이 빈민의 문제에 대단히 참여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DW: 어느 한쪽을 옹호하거나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다는 느낌은 아니고, 관심 있어하고 소재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아노라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잖아요. 어머니가 남자친구랑 살고 있다는 것과, 언니는 어디 있다 정도밖에. 우즈베키스탄 이민자 출신으로서의 이야기는 알 수 없고.

CY: 한편으로 저는 션 베이커 영화를 보면서, <레드 로켓> 이전까지는 빈민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 사람들을 통속적인 드라마 인물들처럼 전형화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인물이 이런 모습도 보이고 저런 모습도 보이고, 둘이 대차게 싸움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같이 간식을 사러 나갔다 오고. 이런 장면들이 너무 좋았던 건데, <레드 로켓>이랑 <아노라>는 훨씬 할리우드스러워진 것 같았어요. 아르메니아인 형제도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감초 역할이잖아요.

SY: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설정이나, 이민자들에 대한 언급이 계속 있기는 하잖아요. 그래서 이걸 정치적으로 읽어야 하나 약간 고민을 했는데. 왜냐하면 아노라가 직접적으로 자기 4대 보험 가입 안 시켜주면 나간다는 얘기도 하니까요. 근데 그런 문제들은 대개 스쳐지나가듯 다루더라고요.

CY: 또 개그 욕심이 많아진 것 같아요. 웃기긴 한데,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DW: 그것도 진짜 웃기던데. 토로스가 식당에 서서 요즘 애들은 존중이 없다고 설교하는 장면.

CY: <테이크 아웃>이나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2008)> 같은 초기작은 무슨 다큐멘터리 같아요. 물론 짜여진 흐름이 있긴 한데,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거든요. 더구나 개그 욕심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이던 사람인데. 최근 인터뷰에서는 모든 이야기에 유머가 꼭 필요하다고 단언하길래 의아했어요.

SY: 야심이 생긴 거 아니에요?

<테이크 아웃(2004)>


#6 칸의 선택

CY: 요즘의 칸 영화제에 관해서도 말이 많잖아요. 칸이 근래에 영미권 영화들을 유독 좋아한다는. 물론 미국이 황종 최다 수상 국가이긴 하지만…

DW: 젊은이들이랑 가까워지고 싶은 건가 싶기도 해요. 원래는 약간 고리타분하다는 이미지가 있었으니까. 요즘은 심사위원들도 젊은 사람들을 많이 데려오잖아요. 이번에도 그레타 거윅이 심사위원장이던데, 그 사람도 젊음의 방황 같은 걸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아노라>를 보고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목록을 다시 봤는데, 개인적으로 코로나 이후부터 조금 이상해진 것 같은 느낌. 2021년 수상작이 <티탄(2021)>이었거든요. 그다음이 <슬픔의 삼각형(2022)>,  그다음이 <추락의 해부(2023)>, 그리고 <아노라>.

SY: 근데 진짜 <슬픔의 삼각형>이랑 <아노라>랑 되게 비슷한 결이라고 느껴지네요. 그러니까 내용이 비슷하다는 게 아니고, 결이 비슷해요. <슬픔의 삼각형>도 저는 안 좋아했거든요. 계층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고, 그걸 유머러스하게 연출하려고 하는 태도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아노라도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약간 칸이 되게 계층에 관련된 블랙 코미디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생충(2019)>까지 포함해서.



DW: 아까 그 션 베이커가 여자친구와 <오아시스>를 같이 봤다가 헤어졌다고 했잖아요. 이건 여담인데, 예전에 지인이 영화를 거의 하나도 안 본 사람이었는데 그때 <티탄>이 황종 받았다고 해서 같이 보러 갔었거든요. 근데 영화가 생각보다 많이 잔인한 거예요. 그때 그래서 지인이 영화를 보다가 울었어요. 자리를 늦게 구해서 거의 맨 앞자리였는데… 영화 끝나고 절연당할 뻔했어요. 예고편만 봤을 땐 노래도 나오고 웬 아저씨랑 춤추는 장면이 나와서 그런 걸 기대하고 갔는데 막 의자로 사람을 찍고…

SY: <로우(2016)>도 쥘리아 뒤쿠르노가 만들었지 않아요?

DW: 그 전에는 아예 몰랐거든요.

SY: 진짜 끔찍하다. 저는 <아노라>도 별로 안 친한 사람이랑 봤으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근데 예전부터 칸의 수상작은 씨네필들에게 챙겨봐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잖아요. 코로나 이전의 경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2018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느 가족(2018)>으로 수상했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너무 이해가 안 갔거든요. 그냥 아시아권 영화에 주고자 했던 걸까, 싶었어요.

DW: 그런 담론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역별 분배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유럽 영화를 핵심에 둔 채로 아시아권 할당제, 어디 할당제처럼 수상을 분배하려는 경향을 정치적으로 풀어낸 글이 있더라고요. 저도 황종은 조금 신뢰가 안 가기 시작했는데, 각본상은 다 챙겨봐도 좋은 것 같아요. 그거는 정말 실망을 안 시키더라고요.

CY: 씨네21에서 적은 기사에서는 칸과 아카데미의 공모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칸은 예술적인 영화들을 꼽는다는 이미지가 고착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아카데미는 칸에서 인정받은 영화에 오스카 상을 주면 자기들 위상에 좋고, 반면 칸은 자기들이 뽑은 영화가 오스카까지 수상하면 좋고. 이런 식으로.

SY: 사실 저는 영화제 수상작에 그렇게까지 큰 신경을 안 써서... 칸 영화제 기간 동안 심사 점수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보드가 있잖아요. 저는 그걸 계속 보면서 수상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기했어요.

DW: 그 나름의 덕질 아닐까요?

SY: 그걸 즐기는 것 같긴 한데, 저는 거기서 권위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