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팀 발제: 미겔 고메스 - <그랜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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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민솔


발제 일자: 25.04.03
발제 영화: 미겔 고메스 <그랜드 투어(2024)>
참석 인원: MS, DU, SY, HR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가 부산국제영화제를 거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투어는 낯선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모호하면서도 은은한 여운을 남겼지만, 정작 우리는 여행의 목적지를 알 수 없었다. 여행사의 투어가 모두에게 성공적으로 남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딘가 불편했던 여정의 이유를 되짚어보는 것 역시 여행의 묘미일지 모른다.

우리가 나눈 솔직한 대화를 통해, 영화가 던지는 질문-감독의 연출과 서사가 어떻게 유효해야 하는지, ‘좋은 영화’의 기준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의 여정에 동행해주시기를.


1. 그랜드 투어

MS: 쇼트들이 대부분 시점 쇼트잖아요. 투어에 초대받은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초특가 패키지 다녀온 느낌. 그런데 영화 자체에서 순수하게 즐기지는 못했어요. 오리엔탈리즘을 너무 의식했나?

SY: 공간의 이미지들과 현재와 과거의 이미지들이 뒤섞여서 나오잖아요. 그런 실험을 하는 작품들이 되게 많은데, 특정 효과를 내기 위해서나, 리듬을 만든다든가, 아니면 이미지나 텍스트 중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고, 정말 기차 타고 투어 다니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동양인이 아니었으면 유쾌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들이 많거든요. <그랜드 투어>도 그랬어요. 보면서 불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고메스가 찍어 내는 이미지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마음속에서 양자가 충돌했어요.

HR: 팬데믹 시기에 촬영된 영화잖아요. 중국 씬부터는 원격으로 촬영되었는데, 그 현장에 감독이 없다는 게 느껴졌어요. 감독의 디렉팅이나 현장성이 보이지 않았달까.

SY: 저도 감독의 의도대로 카메라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여기 인도에 가서 이런 풍경을 찍어라.’와 같은 프롬프트만 있는 장면인 것 같았어요.

HR: 감독이 현장에 있을 때, 촬영 감독이랑 별개로 디렉션이 생긴다거나 카메라에 무브먼트가 생기는 등의 영향이 있거든요, 해당 부분이 장면 안에서 느껴지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이 투어를 나한테 왜 보여주는지 의문이었어요.


2. 오리엔탈리즘

SY: 이 영화에서 그게 유독 걸리는 이유는 전에 언급했던 오리엔탈리즘의 맥락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동양인이라 느끼는 불쾌함과 별개로, ‘서양인들은 이걸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겠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유쾌하지 않았어요.

DU이 가져온 미겔 고메스의 인터뷰(https://mubi.com/en/notebook/posts/all-is-full-of-grace-miguel-gomes-on-grand-tour)에서 문화 관광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아래는 그에 대한 인용이다.

이 문제에 대해 제 안에 어떤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아요. 세상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은총으로 가득 차 있죠. 베트남에서 촬영하기 위해 베트남 사람일 필요는 없어요. 그저 그 은총을 포착하고 세상과 공유하려고 노력하면 돼요. 다른 모든 주장에는 공감하지 못해요. 지적으로는 공감하지만, 영화 제작자로서 우리는 어느 나라에서든 촬영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달에서도 촬영할 수 있다고요. 모든 건 당신과 세상에 관한 거예요. 그 누구도 독점권을 가질 수 없어요. 세상의 은총에 대한 저작권은 없어요.’

오리엔탈리즘 논쟁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었으나, 우리에게는 크게 공감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다시 우리들의 대화로 돌아와 보자.



MS: 개인적으로 갖는 의문이 있어요. ‘<타부(2012)>가 있음에도 <그랜드 투어>가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가 뭘까.’ <타부>는 두 인물의 사랑 이야기 안에서 서사와 관계없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이미지에 계속 등장시켜서 조국이 가졌던 제국주의를 경계하는 측면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랜드 투어>는 그와는 다른 나라들을 배경으로 하고, 투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올라서 즐거운 이미지들을 담아내려 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랜드 투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려운 것 같아요.

HR: <80일간의 세계일주> 있잖아요. 어렸을 때 처음 보고, 동양을 체험하지 않은 서양인들이 동양에 갖는 시각을 엿보았죠. 근데 ‘2024년에 이 얘기를 지금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위성을 영화에서 찾는 게 아니고 이걸 보는 나한테서 자꾸 찾는 것 같아요.

SY: 예전 필름팀 너드분들이 <홍등(1991)>으로 발제를 했었는데, ‘동양인이 오리엔탈리즘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한가?’라는 얘기를 나눴더라고요. 만약 <그랜드 투어>에서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이 ‘포르투갈 출신 백인 남자’인 창작자의 당사자성 결여의 문제라면, 당사자성을 지닌 이들은 고정관념을 답습해도 되는 걸까요?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영화에 대한 비판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MS: 영화에서 대사가 정확히 나왔거든요. ‘백인은 동양을 이해할 수 없어’. 저는 공감이 크게 안 돼요. ‘서양인들인 우리조차도 서양을 이해할 수 없다.’ (https://www.thecurb.com.au/grand-tour-interview-miguel-gomes/)는 미겔 고메스의 입장과 그가 당사자성이 없어 조심스러운 시각을 갖는 것은 알겠지만, 이해해 보려는 노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심지어 동양인인데 동양을 이해 안 하려고 한다면 더 괘씸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죠.

HR: 상업 영화를 예로 들면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들이 굉장히 많이 녹여져 있어요. 스테레오타입화하고, 그걸 더 증폭시키고 과장해서 자극적으로 만들잖아요. OTT 드라마들도. 그런데, 예술 영화에서의 오리엔탈리즘적 접근은 감독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분석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SY: 일본 영화에서도 ‘일본적’ 요소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해요. 감상하면서 ‘나도 같은 아시안인데 이걸 좋아해도 되는지’ 내적 갈등이 심했단 말이에요. <그랜드 투어>도 보면서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이걸 좋아하면 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배반인가 싶은 혼란이 와요.

DU: 그럼 아예 생각을 빼고 보면 되죠.

SY: 아예 생각 안 하고 싶은데 안 되네.

HR: <블레이드 러너(1982)>를 볼 때,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을 읽게 되지만 다른 생각도 하려고 하잖아요.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에서 인간성에 대한 탐구라든가. 또, <게이샤의 추억(2005)>도 게이샤라는 일본 문화를 다루지만 영화에 일본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주연도 다 중국 배우들이며, 대사도 모두 영어예요. 그렇지만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볼 수 있죠. 이렇게 오리엔탈리즘과 별개로 영화의 다른 요소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안 되는 영화도 있는 거예요. 이것밖에 안 남은 영화.


3. 연출



DU: 그럼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겔 고메스는 주로 현실과 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들, 다큐멘터리와 극을 넘나드는 방식들로 작업을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는 어떻게 이 작품을 보셨나요.

MS: 말씀하신 것처럼, 몰리가 탄 배 위에 갑자기 울려 퍼지는 오페라나, 1918년 배경과 모순되는 고층 건물들, 심지어 팬데믹 시기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프레임에 삽입되는 부분들이 인상 깊었어요.
또, 연출에서 특이했던 점은 몽타주가 거의 없다는 점이에요. 이미지로 사건을 전개하지 않고 보이스오버로만 채우더라고요.

HR: 시점 쇼트를 주로 사용하거나, 몽타주가 없거나, 극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물려고 하는 시도들 자체가 이전에 없던 것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연출이 주는 감동이나 메시지가 크게 와닿지 않았어요.

DU: 제가 해당 방식의 작업을 특히 좋아해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미지와 텍스트의 사이에서 그 둘이 길항하는 작업도 있고, 같은 포르투갈 감독인 몬테이로와 올리베이라는 우화적인 서사를 많이 사용해요. 페드로 코스타도 다큐멘터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했죠.
그런데 저도 HR처럼 이 영화에서 그러한 작업이 어떤 효과가 있냐, 첫 번째로 어떤 역사적인 문맥을 끌어냈는가를 보면, 포르투갈도 혁명을 겪은 아픈 역사가 있지만 고메즈가 녹인 역사적인 아픔이 있지도 않고, 아시아와의 연관성도 없어요. 포르투갈 자체를 논하는 것도 아니고, 영국인이 갑자기 포르투갈어를 쓰거나 자막이 없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어떤 맥락이 없었어요.
두 번째, 여기서 재밌는 부분이라고 하면 마스크 쓴 시민들이 지나갈 때 보이스 오버에서는 ‘주인공이 도시를 걷고 있었다.’ 라고 하잖아요. 시차를 둔 건데, 그 이상의 감흥을 못 느끼겠어요.
마지막으로, 그럴 거면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서 대립하거나 길항하는 요소들, 혹은 말의 리듬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어요. 결론적으로는 저도 영화에서 뭘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4. 서사 구조



MS: 2막 구조로, 1부는 에드워드, 2부는 몰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두 이야기가 영화 시간적으로도 거의 정확히 절반이에요. 내용적 이야기 자체는 하나지만 그 시점을 나눠서 두 개의 이야기를 하는 서사 구조예요. 그리고 에드워드가 지나온 여정들이 있는데 그것을 몰리가 따라가는 서사 구조로 되어 있어요.

이 부분이 잘 드러나는 이미지 시퀀스가 있는데, 에드워드의 이야기에선 기차가 앞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몰리의 이야기에선 기차가 뒤에서 따라가는 것을 보여줘요.

그런데, 특이한 점은 둘이 만나려는 시도가 없어요. 예를 들어, 몰리가 정말 에드워드를 만나고 싶었다면, 전보를 보내지 않으면 되지만, 계속해서 보내요. 그리고 전보가 에드워드에게 무조건 전달이 되고, 계속해서 도망가는 서사 구조가 이어지거든요. 이런 부분들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을 드러내고 있어요. 또 몰리가 바동이라는 예언가를 통해 중국에 가게 되는 부분에서도요. 그러면서도 결코 단 한 프레임도 두 인물을 함께 담지 않았어요. 서사 구조가 특이한 것 같은데 어떻게 보셨나요.

HR: 저는 마술적 리얼리즘 좋아해요. 『백년의 고독』도 되게 재미있게 읽었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는 둘이 만나지 못하는 설정에서 저는 솔직히 마술적 리얼리즘을 못 느꼈어요. 이런 쇼트들을 나열하겠다는 의도는 알겠지만, 쇼트들이랑 저 서사가 안 붙어요.

SY: 그래. 저도 방금 딱 그 생각이었어요. 안 붙어.

그리고 영화가 스토리라인 한 줄로 설명이 되잖아요. ‘약혼녀랑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간다.’ 보편적으로 많이 소비되는 스토리와 달리 성별을 반전한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질 뻔했는데, 결정적으로 인물들이 매력이 없었어요. 로맨스 서사에선 기본적으로 인물 자체의 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서도 어필을 하지 못했어요.

DU: 이 서사가 성공할 수 있었을 거면, 쫓아가는 사람이 앞선 사람이 남긴 흔적들로 따라가고, 이 흔적들로 어떤 역사의 흔적이든, 아니면 거기 남겨진 문화적인 흔적이든, 연결성을 확장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에서는 별 당위성이 없었어요. 레퍼런스에 나왔던 나라들만 장소로 옮긴 느낌.

SY: 맞아요. 돌아다니는 게, 이 사람이 진짜 여행한다는 인상보단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상이었어요. 너무 짜여 있는.


5. 레퍼런스와 두 인물



MS: 영화의 레퍼런스가 서머싯 몸의 『The Gentleman in the Parlour』인데, 버마부터 베트남까지의 아시아 남쪽 여행을 담은 책이에요. 책에서 결혼에 관한 농담이 나오는데, 그 부분에서 <그랜드 투어>의 이야기를 영감을 얻었다고 해요. 그리고, 작가 개인적으로도 런던에 사는 와이프와 별개로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와 함께 아시아로 여행을 떠났어요. 자기 반영성이 드러나는 부분이죠.
특히 에드워드에게 서머싯 몸과 연관된 부분이 많은데, 예를 들어 몰리의 사촌을 처음 만날 때 정보부라고 의심하는 장면이 나와요. 서머싯 몸이 실제로 1차 세계대전 때 정보부 역할을 했다는 점도 연관성이 있어요.
반면, 몰리는 특유의 웃음을 가지잖아요. 해당 부분은 캐서린 햅번(https://www.youtube.com/watch?v=_gJZSC02VvA)에서 레퍼런스를 따서 스크루볼 코미디적 요소를 구현했어요.

HR: 레퍼런스 따온 얘기 진짜 흥미로운 것 같아요. 레퍼런스가 뚜렷하기도 하고, 인물에 대한 디렉션도 구체적으로 있었네요. 문제는 영화에 레퍼런스가 잘 녹아들지 않았고, 보는 재미가 덜했다는 점이에요.

DU: 몰리가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따왔다고 그랬는데, 영화와 연결이 안 돼요. 스크루볼 코미디는 대화가 재치 있거나 카메라 워킹이 산만하게 움직이면서 남녀의 삼각관계를 잘 표현하는 등의 장치가 특징인데,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어요.

MS: 조금 다른 애기인데, 두 인물의 중요한 차이가 결말에서 나타나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이 투쟁 아니면 회피잖아요. 에드워드는 회피를 하고 몰리는 뭔가를 얻기 위해서 계속해서 에드워드를 쫓아가요. 결국 에드워드는 그대로 잠들어 버린 후에 살해됐고, 몰리는 스튜디오에서 조명으로 깨워 현실로 그 인물을 불러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에게 어떠한 실천력을 말하고 싶은 건데, 그 실천력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어요.


6. 생각나는 관광


 
SY: 개인적으로 일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 씬 속 공간을 자세히 봤는데, 돈키호테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라멘집 묘사가 너무 전형적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MS: 필리핀 장면에서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노래를 틀고 열창하기도 해요. 그것도 재밌어서 찍었다고 하는데, 보면서 ‘뭐지, 왜 갑자기 이렇게 열창하시지’ 싶었어요.

HR: 제가 필리핀에서 2년 간 살았는데, 열 집 중에 아홉 집은 노래방 기계가 있어요. 마닐라 도심 벗어나면 주변에 판잣집들 늘어서 있고 천막이 쳐져 있는데, 거리 걸어가면 무조건 노랫소리가 들려요. 필리핀 분들이 노래를 진짜 잘해요. 그들의 민족성이에요. 길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풍경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