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여행자를 위한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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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임채윤


 

1.

중요한 일은 이미 다 일어나버린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많지 않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여지가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중요한 일은 예고 없이 일어나곤 했고, 그래서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으로 중요한 일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예삿일이었다. 한데 넋을 놓고 위 말을 읽고 보면, 얼핏 설득력 있는 경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식의 말은 사실과 무관한 채로 어떤 정동을 자극하는데, 그 정동이란 어쩌면 포스트- 세대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뒤늦게 도착한 세대가 공유하는 시름 내지는 향수와 관련이 깊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죽음이니 영화의 죽음이니… 우리는 선대가 규정한 매체의 본질이 유효하던 시기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있고, 그래서 뭔가 주소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 느낌, 아니, 애초에 조문객으로서 이곳에 초대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아무래도 그것은 너무 많은 시간을 알고 접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개인사를 넘어서는 방대한 공공 기억을 흡수하는 것, 어느 한 장소에 켜켜이 쌓인 여러 기억을 눈여겨보는 것, 그리하여 지금의 이 순간을 기나긴 역사적 스펙트럼의 말단에 속하는 낱장으로 여기는 것. 그리하여 현재는 너무도 엷고 보잘것없다. 현재는 폐허 같고 여기에서는 볼 장 다 본 것 같다… 이것은 아카이브에 매혹된 이들이 곧잘 이르게 되는 질곡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보는 세계에는 잔영이 과적되어 있다. 한데 그러한 느낌은 어떤 면에서 달콤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폐사지의 정취라고도 할 수 있을, 세계를 두고 벌인 실험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거나 그와 비슷한 것으로 무산되어버린 이후의 소강상태, 변화의 여지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기분. 사실이 그렇지 않을지라도. 

“밤은 아직 오지 않았고 낮은 이미 가버린 순간”. 발자크의 단편소설 <지갑>에서 젊은 화가 히폴리트 쉬너가 몽상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의 몽상은 그가 갑작스레 사다리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기 이전까지만 지속된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그처럼 화가의 몽상이 우연하게 중지되는 지점에서 이야기 속 인물의 행위와 몽상(묘사) 사이의 긴장을 엿본다. 몽상은 행위를 지연시키고, 행위는 몽상을 중지시킨다. 양자가 양립하지 못하는 것은, 그 둘이 서로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몽상의 즐거움은 “옛 건축물 외관의 기묘함, 그림 같은 길의 굴곡, 늦은 오후의 빛”에서 비롯되며, 몽상가는 그것을 언어로 묘사해 내는 데 몰두한다. 이때 몽상의 즐거움은, 마지못해 일어나는 작위적인 것으로 행위를 격하시키거나, 행위를 중단시킨다. 고전적인 픽션이 행위와 사건의 인과적 연쇄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해온 것과 달리, 근대적 픽션은 세부적인 묘사를 통해 몽상을 지속시키고, 설령 행위를 통해 몽상이 중단되더라도 다시금 몽상의 순간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2.

미겔 고메스: (<그랜드 투어> 관련 씨네21 인터뷰 중) 에드워드는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어 하지만 몰리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나선다. 1부에 해당하는 에드워드의 파트에선 각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활용했다. 에드워드가 숨는 만큼, 그가 방문한 아시아 국가들의 이미지가 더 많이 드러난다.

미겔 고메스의 이 말을 듣고, 나는 에드워드의 선발자라고도 할 수 있을 두 명의 여행자를 더 떠올렸다. <여행자(1975)>의 데이비드 로크와 <키메라(2023)>의 아르투. 그들은 행위하고 이동하도록 명령을 받지만, 행위를 유예한 채 무언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진정 근대적 픽션의 주체라 부름직하다. 그러나 코앞까지 들이닥친 현재의 시간은 그들을 몰아붙이고, 기어코 그들은 시간으로부터 도망치기를, 도망치는 방식으로만 행위하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떠나온 여행에서는, 행위와 몽상이 맞부딪치고, 몽상의 와중에는 두 가지 시간선이, 개인의 시간과 세계의 시간이 서로 교차하며 뒤섞인다.

<키메라>에서 도굴꾼 동료들과의 축제가 마무리될 무렵, 아르투는 우연히 에트루리아 문명의 지하 신전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비로소 온전한 형태의 대리석 여신상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신상은 밖으로 들고 나가기에는 너무 무거웠고, 그의 친구들은 여신상을 잘라 머리만 가지고 나가자고 제안한다. 멀리서 경찰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아르투는 잘려 나간 두상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그는 거기서 다른 무언가를, 어쩌면 그의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를 떠올리는 것 같다. 산 자들에게 감추기 위해 건축된 고대의 성소, 그의 죽은 연인. 소생될 수 없는 것들의 잔영이 그 두상에 집적되어 있고, 아르투는 그것을 바라보다 사이렌 소리조차 듣지 못하는 도취 상태에 빠진다. 그는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서야 마지못해 그곳을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는 그가 매혹된 유령들이 현실의 시간 속에서는 더는 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금지된 장소에 머물러야 할 것들은 현실의 시간 속에서 가격이 매겨지고, 진열되고, 신비를 상실한다. 그래서 아르투는 자신이 갖고 있던 두상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그 순간 카메라는 바다에 잠기는 두상의 시선으로 아르투를 올려다본다. 그것은 아르투의 내면에 뿌리내려 마침내는 그를 집어삼킬 수 있었을지도 모를, 아르투의 것만은 아니지만 그의 안에 얼마간 존재하는, 혼종적인 기억의 시선이다.



한편 <여행자>의 데이비드 로크는 현실의 시간이 자신을 덮치기 이전에, 유령의 자취를 먼저 따라잡는다. 그는 기자이며, 혁명가를 동경하는 산책자로, 어느 날 호텔에서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무기 밀매상 데이비드 로버트슨의 시신을 발견하곤, 그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로버트슨의 삶을 대신 살아간 지 오래되지 않아, 로크는 살인 청부업자들의 미행에 시달리게 되고, 그의 아내 또한 그의 죽음을 의심하며 그를 추적해온다. 그렇게 로크의 여정은, 로버트슨이 가려던 길을 따라가다 오래된 건물 앞에서 젖어 드는 나른한 몽상과, 그 몽상을 중단시키는 추격 사이를 오간다. 마지못해서만 움직이는 그는, 선발자 로버트슨의 운명에 따라 어느 호텔방의 침실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아마도 그가 청부업자들에게 살해당했을 그 순간(영화는 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가 있던 침실의 창틀을 넘어, 공터를 유유히 떠돌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헛된 바람을 가지고 창밖을 바라볼 테지요. 그러면 항상 당신을 형성해왔던 다른 사람들의 의식과 기억이, 당신이 연기해온 인물들, 당신을 연기해온 인물들이 정체를 숨긴 채 창문에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질 것입니다. 그 나타났다 사라짐이 일정한 속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기차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 배수아,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카메라가 다시 방향을 돌려 창틀 너머에서 침실을 비출 때, 데이비드 로크는 죽어 있고, 뒤늦게 그곳에 도착한 그의 아내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데이비드 로버트슨인 채로 죽음을 맞는다.




개인적인 시간과 또 다른 시간, 자신의 발자취와 선발자의 흔적. 어쩌면 폐허를 여행하는 것은, 이 두 시간이 서로 경합을 벌이도록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현실의 시간이 승리를 거두며 여행자는 마지못해 폐허를 빠져나온다. 환영에서 물러서고, 유령이 더는 전과 같이 유지될 수 없음을 깨달으며, 꿈에서 깨어나듯 일상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때로, 유령들이 승리를 거두도록 둘 때, 직접 겪지 않은 기억이 우리 몸속의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도록 둘 때, 우리는 무언가 허물어진 채로, 환영에 둘러싸인 채로 지내게 된다. 그럴 때 우리의 존재는 한껏 묘연해진다.


3.

긴 몽상에 잠겨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거나, 다른 곳으로 내몰리듯 행위해야 한다는 데 폐허 여행자의 멜랑콜리가 있다. 그들은 어느 한 장소에서 지난날의 잔영을, 혹은 그 안에 깃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보지만, 그것을 되살리거나 바꿀 힘은 없는 무력한 주체이다. 현실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못한 채, 지상을 흐릿하게 떠돈다. 그러나 그 상태는 단순한 체념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허물어진 풍경 속에서 발화시키는 몽상의 시간은, 끊어진 점과 점을 잇는다. 타인의 일생과 자기 자신의 생애, 한때의 세계사적 사건과 그림 같은 길의 굴곡—서로 무관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그들의 시선 아래에서 이어진다.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없고, 그러므로 완전히 소멸하는 것 또한 없다. 폐허 여행자의 몽상은 픽션적 폭력, 즉, 구획하고 배제하고 밀어붙이는 고전적 서사의 질서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잔존하는 모든 것을 포착하려는 아카이브적 욕망을 품는다. 이것은 윤리적인 태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무수한 가능성만이 충만한 세계에 머물며, 기약 없는 희망 속에 정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잠재적인 것들의 공존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잠재적인 것들은 하나의 시간 위로 수렴되며, 마침내 정해진 형태를 요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젠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을 믿으며, 그러나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속에서, 몽상의 상태를 떠난다. 긴 몽상은 결국, 사다리에서 넘어지듯 불시에 개입한 행위에 의해 중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