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팀 발제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 <비디오드롬>
WEBZINE
WEDITOR 송혜령
WEDITOR 송혜령
발제 일자 25.05.22
발제 영화: 데이빗 크로넨버그 <비디오드롬(1983)>
참석 인원: HR, MS, DU, SY
"비디오드롬에게 죽음을! 새 육체에 영원한 삶을!"
크로넨버그의 불후의 명작 <비디오드롬(1983)>의 주인공 맥스는 외친다. 우리를 조종하는 비디오드롬은 죽어 마땅하며 현혹에 취약한 육체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바디 호러를 십분 활용해 만들어진 영화 <비디오드롬>은 현재 무한한 쇼츠의 바다 속에 정신과 육체를 모두 맡긴 우리에게 그렇게 말을 건다. 혹시 당신은 비디오드롬인가요, 라고.
보다 리얼한 포르노를 생산하길 원하는 방송사의 주인 맥스는 어느 날 우연히 해적 방송에 잡힌 리얼한 스너프 영상 하나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그 영상의 이름은 비디오드롬. 당신의 육체와 마음을 전부 앗아갈 조작된 영상이다. 맥스는 그렇게 점차 비디오가 삽입된 TV 그 자체와 결합되기 시작하고 이미 수 년 전 이 비디오드롬을 비롯해 그를 만들어낸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오블리비언과 그의 딸 비앙카를 통해 진실을 깨달은 뒤 복수를 준비한다. 여기서 비디오드롬 그 자체이자 어쩌면 외피라고도 보여지는 포르노는 흔히 접근하기 어려우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이용률을 자랑하는 장르 중 하나이며 원초적이나 동시에 극도로 연출된 영상 매체이다. 맥스는 이 포르노를 제작하는 사람 중 하나로 많은 이용자들을 TV 앞으로 앉혀 놓기를 원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맥스를 비디오드롬에 노출시키고 TV를 매개 삼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며 그를 포르노 안으로 끌어들이게 되는데 이때 맥스의 반응은 어쩐지 모호하다. 욕망의 대상이었던 니키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이 바라보던 현장에 놓이게 되면 적극적으로 그 포르노를 수행하기보단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다름 아닌 영상 매체의 근본적인 본질이 바로 관음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대다수의 이용자들이 포르노를 봄으로써 원하는 것은 대리 체험이자 동시에 그 행위를 바라보는 관음 그 자체에 역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보게 되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비디오드롬은 맥스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미 그를 비디오드롬에 의해 조종당하는 숙주로 만들어버린다. 즉 관음의 주체가 도리어 관음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에게는 더 이상 영혼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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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비디오드롬을 유포시키는 존재 '스펙타큘러 옵티컬'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비앙카 오블리비언은 어떨까. 가장 상단에 기재 되어있는 문구는 비디오드롬에게서 해방된 뒤 비앙카로부터 깨닫게 되는 맥스의 외침이다. 맥스는 그 이후로 철저하게 자신을 이용한 자들에게 복수를 선사한다. 하지만 여기서 역시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는데, 비앙카로부터 얻은 깨달음은 과연 맥스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이미 비디오드롬과 결합된 그의 신체는 어떤가, 그로 인해 행해지는 복수는 과연 비디오드롬에 대한 복수는 맞을까. 모든 복수를 끝마치고 마주하게 된 화면 속 니키는 또 어떠한가. 맥스는 결국 니키의 부름에 응답하고자 새 육체로의 탈피를 위해 자살을 감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 모습 역시 TV를 통해 예견되어지고 맥스는 그저 따르게 될 뿐인 것으로 비춰진다. 이 일련의 행위 역시 맥스의 자유 의지가 맞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비앙카 역시 비디오드롬을 이용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제하고 맥스를 숙주 삼게 되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다시 말해 비디오드롬에 노출이 된 순간 맥스는 돌이킬 수 없어진 관음의 대상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맥스의 이런 대상화는 이미지로도 등장하게 된다. 가령 그의 복부에 생겨난 구멍이 그러한데, 비디오드롬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순간 그의 몸은 카세트 플레이어 자체가 되어 비디오가 삽입되어질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삽입과 적출이 수시로 가능해졌음을 '총'이라는 노골적 상징물로 묘사하는 것에 있어서 맥스가 지배당하고 종속당하는 대상화 상태에 처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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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맥스가 환각의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대상화가 더욱 공고해진다. 맥스가 동업자들을 살해하고 나서 달아나는 장면 중 뒷문에서는 문을 옮기는 노동자들의 작업이 한창이며 할란을 날려버린 뒤 생겨난 커다란 벽의 구멍은 한 소녀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맥스가 벌이는 모든 일들이 적어도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써 기능한다. 하지만 비디오드롬과 결합된, 즉 대상화 된 맥스는 더 이상 그 현실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며 그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폐선박이다. 본래 바다 건너로 그를 옮겨주었어야 할 이동 수단은 이미 오래 전 작동을 멈춘 채 죽어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TV 속 예언을 목도하고 이를 이뤄내기에 이른다. 비디오드롬을 죽이고 새로운 육체로 향할 수 있는 길은 다시 말해 오로지 죽음 뿐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맥스를 통해 이미 TV에 노출된 이들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결합된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음을 보인다. 스펙타큘러 옵티컬은 맥스는 그저 초기 테스트일 뿐이며 모든 이들이 노출되는 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크로넨버그가 예언한 세상이 이미 도래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틱톡과 각종 숏폼들 뿐 아니라 지상파에서 역시 일반인에게로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엔 수용자와 발신자의 경계가 명확했던 반면 점차 퀴즈쇼, 상금 프로그램에 이어 연애 리얼리티 쇼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브랜딩하며 액정 안으로 자진해 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비디오드롬이 말한 기술적 동물 그 위로의 진화 형태일까. 점차 사람의 형태가 맥스와 마찬가지로 0과 1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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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시퀀스는 비서의 알람에 맞춰 맥스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비디오는 테이프가 다 돌아간 뒤 카세트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다시 밀어 넣는 순간 같은 것을 보여주는 형태의 미디어 기기다. 해당 영화에서 맥스는 이미 한 차례 카세트 플레이어로 변모한 바 있다. 즉 맥스가 목숨을 끊고 화면이 암전되는 순간 어쩌면 그는 자신의 소파 위에서 깨어나는 일종의 비디오화가 진행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루프물로서 영화를 감각하는 순간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은 끝나지 않는다. 기구한 엔딩을 맞게 되는 하나의 이야기로, 대상화 된 존재가 등장하는 포르노로, 어쩌면 우리에게 새 육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디오드롬 그 자체로 감각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더 이상 테이프를 쓰진 않지만 우리가 그 테이프가 되었기에 어쩌면 더는 사용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한 가지. 비디오드롬에게 죽음을! 그리고 부디 새 육체에 영원한 삶을.
발제 영화: 데이빗 크로넨버그 <비디오드롬(1983)>
참석 인원: HR, MS, DU, SY
"비디오드롬에게 죽음을! 새 육체에 영원한 삶을!"
크로넨버그의 불후의 명작 <비디오드롬(1983)>의 주인공 맥스는 외친다. 우리를 조종하는 비디오드롬은 죽어 마땅하며 현혹에 취약한 육체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바디 호러를 십분 활용해 만들어진 영화 <비디오드롬>은 현재 무한한 쇼츠의 바다 속에 정신과 육체를 모두 맡긴 우리에게 그렇게 말을 건다. 혹시 당신은 비디오드롬인가요, 라고.
보다 리얼한 포르노를 생산하길 원하는 방송사의 주인 맥스는 어느 날 우연히 해적 방송에 잡힌 리얼한 스너프 영상 하나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그 영상의 이름은 비디오드롬. 당신의 육체와 마음을 전부 앗아갈 조작된 영상이다. 맥스는 그렇게 점차 비디오가 삽입된 TV 그 자체와 결합되기 시작하고 이미 수 년 전 이 비디오드롬을 비롯해 그를 만들어낸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오블리비언과 그의 딸 비앙카를 통해 진실을 깨달은 뒤 복수를 준비한다. 여기서 비디오드롬 그 자체이자 어쩌면 외피라고도 보여지는 포르노는 흔히 접근하기 어려우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이용률을 자랑하는 장르 중 하나이며 원초적이나 동시에 극도로 연출된 영상 매체이다. 맥스는 이 포르노를 제작하는 사람 중 하나로 많은 이용자들을 TV 앞으로 앉혀 놓기를 원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맥스를 비디오드롬에 노출시키고 TV를 매개 삼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며 그를 포르노 안으로 끌어들이게 되는데 이때 맥스의 반응은 어쩐지 모호하다. 욕망의 대상이었던 니키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이 바라보던 현장에 놓이게 되면 적극적으로 그 포르노를 수행하기보단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다름 아닌 영상 매체의 근본적인 본질이 바로 관음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대다수의 이용자들이 포르노를 봄으로써 원하는 것은 대리 체험이자 동시에 그 행위를 바라보는 관음 그 자체에 역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보게 되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비디오드롬은 맥스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미 그를 비디오드롬에 의해 조종당하는 숙주로 만들어버린다. 즉 관음의 주체가 도리어 관음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에게는 더 이상 영혼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디오드롬을 유포시키는 존재 '스펙타큘러 옵티컬'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비앙카 오블리비언은 어떨까. 가장 상단에 기재 되어있는 문구는 비디오드롬에게서 해방된 뒤 비앙카로부터 깨닫게 되는 맥스의 외침이다. 맥스는 그 이후로 철저하게 자신을 이용한 자들에게 복수를 선사한다. 하지만 여기서 역시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는데, 비앙카로부터 얻은 깨달음은 과연 맥스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이미 비디오드롬과 결합된 그의 신체는 어떤가, 그로 인해 행해지는 복수는 과연 비디오드롬에 대한 복수는 맞을까. 모든 복수를 끝마치고 마주하게 된 화면 속 니키는 또 어떠한가. 맥스는 결국 니키의 부름에 응답하고자 새 육체로의 탈피를 위해 자살을 감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 모습 역시 TV를 통해 예견되어지고 맥스는 그저 따르게 될 뿐인 것으로 비춰진다. 이 일련의 행위 역시 맥스의 자유 의지가 맞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비앙카 역시 비디오드롬을 이용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제하고 맥스를 숙주 삼게 되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다시 말해 비디오드롬에 노출이 된 순간 맥스는 돌이킬 수 없어진 관음의 대상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맥스의 이런 대상화는 이미지로도 등장하게 된다. 가령 그의 복부에 생겨난 구멍이 그러한데, 비디오드롬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순간 그의 몸은 카세트 플레이어 자체가 되어 비디오가 삽입되어질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삽입과 적출이 수시로 가능해졌음을 '총'이라는 노골적 상징물로 묘사하는 것에 있어서 맥스가 지배당하고 종속당하는 대상화 상태에 처해졌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맥스가 환각의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대상화가 더욱 공고해진다. 맥스가 동업자들을 살해하고 나서 달아나는 장면 중 뒷문에서는 문을 옮기는 노동자들의 작업이 한창이며 할란을 날려버린 뒤 생겨난 커다란 벽의 구멍은 한 소녀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맥스가 벌이는 모든 일들이 적어도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써 기능한다. 하지만 비디오드롬과 결합된, 즉 대상화 된 맥스는 더 이상 그 현실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며 그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폐선박이다. 본래 바다 건너로 그를 옮겨주었어야 할 이동 수단은 이미 오래 전 작동을 멈춘 채 죽어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TV 속 예언을 목도하고 이를 이뤄내기에 이른다. 비디오드롬을 죽이고 새로운 육체로 향할 수 있는 길은 다시 말해 오로지 죽음 뿐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맥스를 통해 이미 TV에 노출된 이들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결합된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음을 보인다. 스펙타큘러 옵티컬은 맥스는 그저 초기 테스트일 뿐이며 모든 이들이 노출되는 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크로넨버그가 예언한 세상이 이미 도래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틱톡과 각종 숏폼들 뿐 아니라 지상파에서 역시 일반인에게로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엔 수용자와 발신자의 경계가 명확했던 반면 점차 퀴즈쇼, 상금 프로그램에 이어 연애 리얼리티 쇼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브랜딩하며 액정 안으로 자진해 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비디오드롬이 말한 기술적 동물 그 위로의 진화 형태일까. 점차 사람의 형태가 맥스와 마찬가지로 0과 1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비서의 알람에 맞춰 맥스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비디오는 테이프가 다 돌아간 뒤 카세트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다시 밀어 넣는 순간 같은 것을 보여주는 형태의 미디어 기기다. 해당 영화에서 맥스는 이미 한 차례 카세트 플레이어로 변모한 바 있다. 즉 맥스가 목숨을 끊고 화면이 암전되는 순간 어쩌면 그는 자신의 소파 위에서 깨어나는 일종의 비디오화가 진행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루프물로서 영화를 감각하는 순간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은 끝나지 않는다. 기구한 엔딩을 맞게 되는 하나의 이야기로, 대상화 된 존재가 등장하는 포르노로, 어쩌면 우리에게 새 육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디오드롬 그 자체로 감각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더 이상 테이프를 쓰진 않지만 우리가 그 테이프가 되었기에 어쩌면 더는 사용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한 가지. 비디오드롬에게 죽음을! 그리고 부디 새 육체에 영원한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