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한 엘리트 아이들
WEBZINE
WEDITOR 엄동욱
WEDITOR 엄동욱
우리말로 직역하면 ‘우울한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매우 독특한 이름의 LA, 파리 기반 패션 브랜드인 앙팡 리쉬
데프리메Enfants Riches Déprimés, 통칭 ERD가
지난 5월 23일 서울 도산공원 인근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다.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인데, 서울에 열린 매장이
파리 마레지구에 이은 전 세계 두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의 단독 매장이기 때문이다. 평소 국내 소비자로서도 Ssense, Departamento, SVRN 등의 유명 온라인 편집샵에서
ERD를 만나볼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여태 단독 오프라인 매장을 내지 않은 채 폐쇄적인 마케팅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 보통의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아시아 시장에 발을 들일 때 서울보다는 홍콩이나 도쿄를 먼저 선택하기 때문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적극적인 수입 활동을 잠시 제쳐놓더라도, ERD가
굳이 왜 서울을 두 번째 근거지로 삼았을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튼 한국 패션 시장에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한 이들에게 먼저 축하를 전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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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같은 날 시장의 반대편에서는 ‘우울한’ 소식이 하나 전해져 왔는데, 보리스 비잔 사베리Boris Bidjan Saberi가 7월 부로 공식적인 브랜드 활동을 종료한다는 것이었다. 그간 이들은 릭 오웬스Rick Owens, 율리우스Julius, 다미르 도마Damir Doma 등의 브랜드들과 함께 다크웨어와 아방가르드 패션의 한 축을 굳건히 지켜왔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의 생산 조건 아래에서 더는 높은 품질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내비치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했다. 바르셀로나의 도심 구석에서 옛 방직 공장을 개조한 아틀리에와 쇼룸을 운영해오며 전 공정 수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은 끝내 시장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물론 본인의 브랜드를 종료한 뒤 디오메네Diomene로 다시 돌아온 다미르 도마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중단되었지만 M_Moria를 조그맣게 운영 중인 마우리치오 알티에리Maurizio Altieri의 사례를 보건대 보리스가 언젠가 새로운 비전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지금으로써 그는 한발 물러나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마지막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를 뒤따라 “더 큰 탐구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구조 아래 다른 형태와 형식”을 이어갈 디자이너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소재와 물질에 관한 창의적 탐구, 지속 가능한 패션, 소비자-브랜드 간의 직접 소통 등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적어도 ERD의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는 이것들과 가장 거리가 먼 장소임은 틀림없다.
ERD도 표면적으로는 소규모 수작업, 폐쇄적 마케팅 등의 비슷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아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ERD의 디자이너 앙리 알렉산더 레비Henri Alexander Levy는 브랜드 초창기 시절부터 소규모 작업실에서 자주 작업했고, 특히 디스트로이 디테일, 페인팅, 빈티지 가공만큼은 수작업으로 각 개체를 전부 다르게 디자인했다. 옷에 뚫린 구멍과 해진 실밥은 그의 사적인 감정과 저항 정신을 새기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고, 자연스럽게 프린팅을 비롯한 다른 디자인에도 펑크가 반영되었다. ERD의 펑크는 굉장히 도발적인데, 예컨대 마오쩌둥이 전면에 프린팅된 티셔츠나 나치 문양이 각인된 미키 마우스가 성교하는 모습을 그린 반체제적인 티셔츠를 자주 선보인다(이 티셔츠는 Grailed에서 리셀가 430만 원 정도에 판매되었다). 펑크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앙리는 엘리트주의적이고 자본주의에 찌든 오늘날의 패션 트렌드와 소비 문화를 재치있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티셔츠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고고하고 따분한 현 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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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흥미롭고 전복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앙리의 의도는 매우 모순적인 마케팅 방식 탓에 곧장 소멸된다. “만약 이 옷이 비싸다고 느껴진다면 아마 당신을 위한 옷은 아닐 것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발언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대중을 배척하는 태도와 엘리트주의를 소중히 간직한다. 그가 작업실에서 손수 구멍을 뚫어 가며 만든 재킷이 전 세계에 10점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정교한 패턴 작업과 빈티지 복각의 생산적 한계 때문이 아닌 소수 판매를 위한 개체 수 조절의 소여에 불과하며, 동시에 옷의 가격을 의도적으로 부풀렸다. 달리 말해 “계급투쟁은 모든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마오주의자가 마오쩌둥이 그려진 ERD의 티셔츠를 사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본주의적인 부르주아가 되어야 한다(중국 북서부 개발 지역의 아나키스트와 파리의 알튀세리앵들은 돈이 없다). 그리하여 ERD가 섬유 조직 위에 새긴 펑크와 우울증은 ‘엘리트 펑크’라는 교묘한 술수에 가려진 부잣집 아이들의 한낱 소비 놀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완전히 사태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는 어쩌면 이 허무맹랑한 옷들이 판매되는 기이한 현상까지도 철저히 계획한, 뱅크시Banksy 같은 일종의 행위예술가가 아닐까? 그렇다기에는 이미 지구 반대편에 으리으리한 매장을 내놓았지만, 우선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이쯤에서 ERD가 편승한 트렌드와 보리스의 퇴장이 마냥 관련 없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의도가 어쨌건 간에 가치 부풀리기와 가짜 펑크, 가짜 희소성 마케팅은 작업실에서 천천히, 한 땀 한 땀 가치를 만들며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는 보리스와 그의 후예 ‘엘리트’들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 셈이다. 양극단의 소비자층 교집합이 전혀 없음에도. 점점 더 소비자는 자극적인 문구와 마케팅에 휘말려, 마치 이 흐름에 자신이 합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 장애를 겪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호흡을 바꾸어 다시 보리스의 마지막 인사말로 돌아오자. “더 큰 탐구”와 “다른 방식”의 유산을 떠안은 몇몇 ‘우울한 엘리트 아이들’은 누가 될 수 있을까? 2020년대 전후로 활동을 시작한 신진 브랜드 4곳을 추려보았다.
Paolo Carzana
웨일스의 디자이너 파올로 카르자나Paolo Carzana가 운영하는 영국 기반의 브랜드이다. 2022년에 시작됐으며, 최근 2024 LVMH Prize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것과 컬렉션 런웨이를 파올로의 집 뒷마당에서 선보인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들은 식물성, 재활용, 유기농 소재와 천연염료 사용을 고집하며, 파올로 본인을 포함한 작은 팀이 전 공정 수작업으로 옷을 제작한다. 데드스탁 실크, 오간자, 머슬린부터 옥양목, 갈매나무, 상아 야자, 그리고 염색에는 강황과 생 엄버, 꼭두서니, 유칼립투스, 히비스커스, 코치닐, 로그 우드 등등… 이 수많은 재료는 모두 염색과 방직 작업에 쓰이는 것들이다.
소재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는 모두 지속가능성과 친환경성에 대한 파올로의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언제나 옷을 만들 때마다 지구와 친해지는 법을 고민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자연에는 강인함과 취약함이 동시에 공존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인위적인 가공을 피해 최대한 자연 본연의 특성을 옷에 담고 싶어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옷을 직접 마주했을 때의 경험을 상기해보면, 옷에서 여러 염색 자국과 염료 냄새들, 그리고 당장에라도 손으로 찢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연적인 소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파올로는 단순히 천연 소재로 옷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창의적인 스타일로 변화시킨다. 그는 자연에 환상성의 요소를 결합해 외계 행성의 외딴 숲에 떨어진 생명체에 어울릴 만한 옷을 제작한다. 더 재밌는 것은 그는 컬렉션마다 단편 소설 제목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데, 25 S/S 컬렉션의 제목은 <How to Attract Mosquitoes>이며, 이번에 공개된 25 A/W 컬렉션의 제목은 <Dragons Unwinged at the Butchers Block>이다. 한 판타지 일대기 같은 이들의 행보를 앞으로 더 주목해보자.
Atelier Inscrire
마치 엘레나 도슨Elena Dawson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구두들. 이 구두들은 전부 칠레의 디자이너 다마리스 브란데치크Dámaris Vandrecic의 것이다. 그녀는 2018년부터 스페인 지중해의 메노르카 섬에서 작은 아틀리에를 운영 중이며, 그곳에서 현지 장인들과 협력해 신발과 액세서리를 전부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있다. 2022년부터는 그녀를 눈독 들였던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의 제안으로 그의 여성복 컬렉션에서 함께 작업하고 있다.
신발의 주재료인 가죽은 주로 벨기에, 독일에서 천연 염색해 들여온 것들을 사용하며, 액세서리에는 진주, 바다 조개, 산화된 황동 등을 사용한다. 나무와 천연고무로 밑창을 만들고 부서짐에 취약한 비단과 아마포도 즐겨 사용하는데, 안 그래도 가죽을 여러 번 세척하고 말렸다 다시 매달아 주름을 잡고, 펴고를 반복하며 만든 독특한 실루엣 위에 취약성을 한 번 더 얹으니,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펑크가 아닌가. 그녀의 신발은 오래된 골동품 같지만 앞으로 더 취약해질 미래의 시간을 담고 있으며, 구부러진 가죽과 리넨은 모든 예측 불가능성을 떠안는다.
보통의 아티잔 슈메이커들은 라스트나 앞굽의 형태를 신경 쓰기 마련인데, 그녀의 신발이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바로 신발 끈이다. 위에서 엘레나 도슨을 언급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엘레나는 이따금 신발 끈이 아예 없는 파격적인 부츠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주로 우아한 리본과 신발 끈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다마리스도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대부분 신발에 시그니쳐 리본, 실크 거즈, 시폰을 매단다. 그녀의 신발은 꼭 검은 드레스를 입은 대저택의 한 우울한 공주가 신고 있을 것만 같다.
Jordan Arthur Smith
미국의 젊은 디자이너 조던 아서 스미스Jordan Arthur Smith가 2020년부터 운영 중인 동명의 브랜드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천연 소재와 수작업을 고집한다. 그는 주로 천연 직물, 천연고무, 유기농 무두질 가죽을 사용하며 친환경 솔기 작업을 즐겨 한다. 염료는 산화구리로 만들거나 밤나무 껍질과 찻잎에서 추출한 탄닌, 철분 등을 사용한다.
여기까지 보면 그의 옷도 굉장히 자연 친화적이어야 할 것 같지만, 그의 옷은 겉보기에 자연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도 물론 자연에서 깊은 영감과 재료를 얻지만, 환상성이나 취약성보다는 자연과의 새로운 연결성에 더 초점을 맞춘 듯하다. 그는 인간의 능력으로 자연을 초월하는 경험에 관심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과 연결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가 옷을 만드는 것은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바이오필릭Biophilic적 본능에 따른 행위가 아닐까?
이 추측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면 아마 조던이 만드는 옷의 형태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몸에 편안하고 오버한 실루엣을 추구하기보다, 이음새와 암 홀이 없는 곡선 패턴과 조각품을 연상시키는 실루엣을 추구한다. 그는 패턴 작업을 할 때면 인간의 신체 바깥과 비인간의 형태를 상상하며, 인간 외골격의 해부학적 연구에 큰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또 옷을 뒤집어야만 드러나는 주머니나 이상한 곳에 구멍이 나 있는 슬리브 등등의 난해한 구조적 디테일도 자주 선보이는데, 그는 이러한 난해함을 소비자의 몫으로만 남기지 않는다. 그는 패션의 일방향적 소통 관계, 즉 웹사이트에서 소비자가 옷을 구입하면 브랜드가 옷을 발송함으로써 끝나는 일회적 관계에 반대한다. 그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소비자와 소통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언제나 옷의 새로운 용도와 스타일의 창조를 기다리고 있다. 조던의 옷 안에서는 여전히 어떤 소용돌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Evade House
스페인 디자이너인 에반젤리나 줄리아Evangelina Julia는 마드리드 우세라 지역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옷을 제작한다. 2020년에 시작한 이베이드 하우스는 역시나 자연에서 주로 소재를 가져오지만, 위에 언급한 디자이너들보다 재활용 소재, 제로-웨이스트를 더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방식으로 옷을 제작한다. 재활용 커피 백, 해초, 조류 등의 생각지도 못한 소재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그녀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접근성’으로, 그녀는 절대 비현실적인 방식이나 대규모 산업 시스템의 방식으로 재료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소재를 연구하는 친구들, 그리고 각 지역사회의 장인들과 협력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주로 바르셀로나의 실크, 재활용 원단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들과 협력하며, 진흙과 숯으로 염색한 천과 미쿠슈 천은 일본에서 직접 가져오고, 그녀의 친구가 사는 히말라야에서 직접 대마를 공수하기도 한다. 그녀는 작금의 패스트 패션 트렌드에서 누구보다 느리게 반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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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베이드 하우스의 브랜드 이미지이다. 브랜드와 디자이너 에반젤리나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재활용 소재와 천연 소재를 다루면서도 매우 관능적이고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이 때문인지 이들의 옷은 신스 팝의 대표 주자인 캐롤라인 폴라첵Caroline Polachek과 Charli XCX의 뮤직비디오, 무대 의상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 마지막으로 반드시 언급할 것이 하나 있는데, 이베이드 하우스의 옷은 언급한 네 개의 브랜드 중 가장 저렴하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대로 소비자에게 접근하고 있다. 에반젤리나는 재활용 원단과 묻혀 있던 데드 스탁 원단을 낭비 없이 조합해 생산가를 합리적으로 줄이면서, 동시에 이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자인 셈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시장의 반대편에서는 ‘우울한’ 소식이 하나 전해져 왔는데, 보리스 비잔 사베리Boris Bidjan Saberi가 7월 부로 공식적인 브랜드 활동을 종료한다는 것이었다. 그간 이들은 릭 오웬스Rick Owens, 율리우스Julius, 다미르 도마Damir Doma 등의 브랜드들과 함께 다크웨어와 아방가르드 패션의 한 축을 굳건히 지켜왔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의 생산 조건 아래에서 더는 높은 품질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내비치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했다. 바르셀로나의 도심 구석에서 옛 방직 공장을 개조한 아틀리에와 쇼룸을 운영해오며 전 공정 수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은 끝내 시장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지난 몇 년간 저희에게 보여주신 지지와 신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보리스 비잔 사베리는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폐쇄는 끝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보리스의 비전, 미학, 그리고 정신은 브랜드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더 큰 탐구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구조 아래 다른 형태와 형식으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Boris Bidjan Saberi
물론 본인의 브랜드를 종료한 뒤 디오메네Diomene로 다시 돌아온 다미르 도마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중단되었지만 M_Moria를 조그맣게 운영 중인 마우리치오 알티에리Maurizio Altieri의 사례를 보건대 보리스가 언젠가 새로운 비전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지금으로써 그는 한발 물러나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마지막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를 뒤따라 “더 큰 탐구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구조 아래 다른 형태와 형식”을 이어갈 디자이너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소재와 물질에 관한 창의적 탐구, 지속 가능한 패션, 소비자-브랜드 간의 직접 소통 등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적어도 ERD의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는 이것들과 가장 거리가 먼 장소임은 틀림없다.
ERD도 표면적으로는 소규모 수작업, 폐쇄적 마케팅 등의 비슷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아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ERD의 디자이너 앙리 알렉산더 레비Henri Alexander Levy는 브랜드 초창기 시절부터 소규모 작업실에서 자주 작업했고, 특히 디스트로이 디테일, 페인팅, 빈티지 가공만큼은 수작업으로 각 개체를 전부 다르게 디자인했다. 옷에 뚫린 구멍과 해진 실밥은 그의 사적인 감정과 저항 정신을 새기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고, 자연스럽게 프린팅을 비롯한 다른 디자인에도 펑크가 반영되었다. ERD의 펑크는 굉장히 도발적인데, 예컨대 마오쩌둥이 전면에 프린팅된 티셔츠나 나치 문양이 각인된 미키 마우스가 성교하는 모습을 그린 반체제적인 티셔츠를 자주 선보인다(이 티셔츠는 Grailed에서 리셀가 430만 원 정도에 판매되었다). 펑크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앙리는 엘리트주의적이고 자본주의에 찌든 오늘날의 패션 트렌드와 소비 문화를 재치있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티셔츠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고고하고 따분한 현 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더 흥미롭고 전복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앙리의 의도는 매우 모순적인 마케팅 방식 탓에 곧장 소멸된다. “만약 이 옷이 비싸다고 느껴진다면 아마 당신을 위한 옷은 아닐 것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발언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대중을 배척하는 태도와 엘리트주의를 소중히 간직한다. 그가 작업실에서 손수 구멍을 뚫어 가며 만든 재킷이 전 세계에 10점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정교한 패턴 작업과 빈티지 복각의 생산적 한계 때문이 아닌 소수 판매를 위한 개체 수 조절의 소여에 불과하며, 동시에 옷의 가격을 의도적으로 부풀렸다. 달리 말해 “계급투쟁은 모든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마오주의자가 마오쩌둥이 그려진 ERD의 티셔츠를 사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본주의적인 부르주아가 되어야 한다(중국 북서부 개발 지역의 아나키스트와 파리의 알튀세리앵들은 돈이 없다). 그리하여 ERD가 섬유 조직 위에 새긴 펑크와 우울증은 ‘엘리트 펑크’라는 교묘한 술수에 가려진 부잣집 아이들의 한낱 소비 놀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완전히 사태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는 어쩌면 이 허무맹랑한 옷들이 판매되는 기이한 현상까지도 철저히 계획한, 뱅크시Banksy 같은 일종의 행위예술가가 아닐까? 그렇다기에는 이미 지구 반대편에 으리으리한 매장을 내놓았지만, 우선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이쯤에서 ERD가 편승한 트렌드와 보리스의 퇴장이 마냥 관련 없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의도가 어쨌건 간에 가치 부풀리기와 가짜 펑크, 가짜 희소성 마케팅은 작업실에서 천천히, 한 땀 한 땀 가치를 만들며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는 보리스와 그의 후예 ‘엘리트’들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 셈이다. 양극단의 소비자층 교집합이 전혀 없음에도. 점점 더 소비자는 자극적인 문구와 마케팅에 휘말려, 마치 이 흐름에 자신이 합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 장애를 겪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호흡을 바꾸어 다시 보리스의 마지막 인사말로 돌아오자. “더 큰 탐구”와 “다른 방식”의 유산을 떠안은 몇몇 ‘우울한 엘리트 아이들’은 누가 될 수 있을까? 2020년대 전후로 활동을 시작한 신진 브랜드 4곳을 추려보았다.
Paolo Carzana



웨일스의 디자이너 파올로 카르자나Paolo Carzana가 운영하는 영국 기반의 브랜드이다. 2022년에 시작됐으며, 최근 2024 LVMH Prize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것과 컬렉션 런웨이를 파올로의 집 뒷마당에서 선보인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들은 식물성, 재활용, 유기농 소재와 천연염료 사용을 고집하며, 파올로 본인을 포함한 작은 팀이 전 공정 수작업으로 옷을 제작한다. 데드스탁 실크, 오간자, 머슬린부터 옥양목, 갈매나무, 상아 야자, 그리고 염색에는 강황과 생 엄버, 꼭두서니, 유칼립투스, 히비스커스, 코치닐, 로그 우드 등등… 이 수많은 재료는 모두 염색과 방직 작업에 쓰이는 것들이다.
소재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는 모두 지속가능성과 친환경성에 대한 파올로의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언제나 옷을 만들 때마다 지구와 친해지는 법을 고민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자연에는 강인함과 취약함이 동시에 공존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인위적인 가공을 피해 최대한 자연 본연의 특성을 옷에 담고 싶어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옷을 직접 마주했을 때의 경험을 상기해보면, 옷에서 여러 염색 자국과 염료 냄새들, 그리고 당장에라도 손으로 찢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연적인 소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파올로는 단순히 천연 소재로 옷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창의적인 스타일로 변화시킨다. 그는 자연에 환상성의 요소를 결합해 외계 행성의 외딴 숲에 떨어진 생명체에 어울릴 만한 옷을 제작한다. 더 재밌는 것은 그는 컬렉션마다 단편 소설 제목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데, 25 S/S 컬렉션의 제목은 <How to Attract Mosquitoes>이며, 이번에 공개된 25 A/W 컬렉션의 제목은 <Dragons Unwinged at the Butchers Block>이다. 한 판타지 일대기 같은 이들의 행보를 앞으로 더 주목해보자.
Atelier Inscrire



마치 엘레나 도슨Elena Dawson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구두들. 이 구두들은 전부 칠레의 디자이너 다마리스 브란데치크Dámaris Vandrecic의 것이다. 그녀는 2018년부터 스페인 지중해의 메노르카 섬에서 작은 아틀리에를 운영 중이며, 그곳에서 현지 장인들과 협력해 신발과 액세서리를 전부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있다. 2022년부터는 그녀를 눈독 들였던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의 제안으로 그의 여성복 컬렉션에서 함께 작업하고 있다.

신발의 주재료인 가죽은 주로 벨기에, 독일에서 천연 염색해 들여온 것들을 사용하며, 액세서리에는 진주, 바다 조개, 산화된 황동 등을 사용한다. 나무와 천연고무로 밑창을 만들고 부서짐에 취약한 비단과 아마포도 즐겨 사용하는데, 안 그래도 가죽을 여러 번 세척하고 말렸다 다시 매달아 주름을 잡고, 펴고를 반복하며 만든 독특한 실루엣 위에 취약성을 한 번 더 얹으니,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펑크가 아닌가. 그녀의 신발은 오래된 골동품 같지만 앞으로 더 취약해질 미래의 시간을 담고 있으며, 구부러진 가죽과 리넨은 모든 예측 불가능성을 떠안는다.
보통의 아티잔 슈메이커들은 라스트나 앞굽의 형태를 신경 쓰기 마련인데, 그녀의 신발이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바로 신발 끈이다. 위에서 엘레나 도슨을 언급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엘레나는 이따금 신발 끈이 아예 없는 파격적인 부츠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주로 우아한 리본과 신발 끈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다마리스도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대부분 신발에 시그니쳐 리본, 실크 거즈, 시폰을 매단다. 그녀의 신발은 꼭 검은 드레스를 입은 대저택의 한 우울한 공주가 신고 있을 것만 같다.
Jordan Arthur Smith



미국의 젊은 디자이너 조던 아서 스미스Jordan Arthur Smith가 2020년부터 운영 중인 동명의 브랜드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천연 소재와 수작업을 고집한다. 그는 주로 천연 직물, 천연고무, 유기농 무두질 가죽을 사용하며 친환경 솔기 작업을 즐겨 한다. 염료는 산화구리로 만들거나 밤나무 껍질과 찻잎에서 추출한 탄닌, 철분 등을 사용한다.
여기까지 보면 그의 옷도 굉장히 자연 친화적이어야 할 것 같지만, 그의 옷은 겉보기에 자연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도 물론 자연에서 깊은 영감과 재료를 얻지만, 환상성이나 취약성보다는 자연과의 새로운 연결성에 더 초점을 맞춘 듯하다. 그는 인간의 능력으로 자연을 초월하는 경험에 관심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과 연결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가 옷을 만드는 것은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바이오필릭Biophilic적 본능에 따른 행위가 아닐까?
이 추측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면 아마 조던이 만드는 옷의 형태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몸에 편안하고 오버한 실루엣을 추구하기보다, 이음새와 암 홀이 없는 곡선 패턴과 조각품을 연상시키는 실루엣을 추구한다. 그는 패턴 작업을 할 때면 인간의 신체 바깥과 비인간의 형태를 상상하며, 인간 외골격의 해부학적 연구에 큰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또 옷을 뒤집어야만 드러나는 주머니나 이상한 곳에 구멍이 나 있는 슬리브 등등의 난해한 구조적 디테일도 자주 선보이는데, 그는 이러한 난해함을 소비자의 몫으로만 남기지 않는다. 그는 패션의 일방향적 소통 관계, 즉 웹사이트에서 소비자가 옷을 구입하면 브랜드가 옷을 발송함으로써 끝나는 일회적 관계에 반대한다. 그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소비자와 소통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언제나 옷의 새로운 용도와 스타일의 창조를 기다리고 있다. 조던의 옷 안에서는 여전히 어떤 소용돌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Evade House



스페인 디자이너인 에반젤리나 줄리아Evangelina Julia는 마드리드 우세라 지역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옷을 제작한다. 2020년에 시작한 이베이드 하우스는 역시나 자연에서 주로 소재를 가져오지만, 위에 언급한 디자이너들보다 재활용 소재, 제로-웨이스트를 더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방식으로 옷을 제작한다. 재활용 커피 백, 해초, 조류 등의 생각지도 못한 소재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그녀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접근성’으로, 그녀는 절대 비현실적인 방식이나 대규모 산업 시스템의 방식으로 재료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소재를 연구하는 친구들, 그리고 각 지역사회의 장인들과 협력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주로 바르셀로나의 실크, 재활용 원단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들과 협력하며, 진흙과 숯으로 염색한 천과 미쿠슈 천은 일본에서 직접 가져오고, 그녀의 친구가 사는 히말라야에서 직접 대마를 공수하기도 한다. 그녀는 작금의 패스트 패션 트렌드에서 누구보다 느리게 반항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베이드 하우스의 브랜드 이미지이다. 브랜드와 디자이너 에반젤리나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재활용 소재와 천연 소재를 다루면서도 매우 관능적이고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이 때문인지 이들의 옷은 신스 팝의 대표 주자인 캐롤라인 폴라첵Caroline Polachek과 Charli XCX의 뮤직비디오, 무대 의상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 마지막으로 반드시 언급할 것이 하나 있는데, 이베이드 하우스의 옷은 언급한 네 개의 브랜드 중 가장 저렴하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대로 소비자에게 접근하고 있다. 에반젤리나는 재활용 원단과 묻혀 있던 데드 스탁 원단을 낭비 없이 조합해 생산가를 합리적으로 줄이면서, 동시에 이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