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 가장자리의 접선을
따라서
WEBZINE
WEDITOR 엄동욱
WEDITOR 엄동욱
시대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스트 왕빙Wang Bing. 그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년간의
촬영 끝에 ‘청춘 삼부작’을 제작했다. <청춘(봄)(2023)>,
<청춘(하드 타임즈)(2024)>, <청춘(홈커밍)(2024)>으로 구성된 삼부작은 상하이에서 150km 떨어진 지리(智利) 시의
거대한 의류공장 지대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농촌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18,000개가 넘는 공장 안에서 하루 15시간 이상의 저임금 노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대부분 미성년자이거나 이제 막 성인이 된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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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중국 내부에 곯아 있는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문제들을 몸소 느낄 수 있으며, 이 세계에 대한 왕빙의 지독한 관심과 존중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도 그런 것이 삼부작은 10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 못지않게 전체 촬영본이 약 2,600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그는 항상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들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노력과 공을 들이는 시네아스트이다. 하지만 왕빙의 영화는 이미 여러 평론가와 국내 영화제를 통해 수차례 소개된 바 있어서, 그에 대한 찬사는 기존에 공개된 지면들에 남겨두도록 하자. 여기서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왕빙의 영화가 왜 이토록 긴 시간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궁금증은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청춘(하드 타임즈)>의 어느 한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왕빙은 여느 때처럼 임금과 일감을 제때 주지 않는 사장과 문제를 두고 협상하기 위해 작업장에 모인 노동자들을 비춘다. 매우 시끄럽고 의견이 분분한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왕빙은 갑자기 컷하고 한 남자를 따라간다. 그 남자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사장을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혼란을 잠식시키기 위해 먼저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의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 계단에 올라선 것이었다. 왕빙은 상황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인 혼돈 속에서 갑자기 별것 없어 보이는 이 남자를 왜 따라갔을까? 물론 촬영의 대상인 그 남자도 일의 까닭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래층의 시끄러운 작업장과 달리 부쩍 조용해진 위층의 복도에 선 자신을 따라오던 왕빙에게 고개를 돌려 한마디를 건넨다. “계속 작업장에서 촬영하셔야죠? 사람들이 지금 사장과 협상한대요.”
왕빙의 영화뿐만 아니라, 본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촬영의 대상이 촬영에 직접 개입하거나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대상이 직접 촬영의 중요도를 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로운데, 그러니까 남자는 촬영 중인 카메라를 향해서 지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자신이 아니라 아래층의 사람들을 따라가야 하지 않느냐고 직접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자가 강하게 의문을 표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발화 의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왕빙에게 말을 건네는 부분에서 공식 영자막은 ‘should’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왕빙은 그 남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말에도 카메라를 뒤로 돌리지 않고 남자가 숙소로 들어가기를 끝까지 기다렸다. 영화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컷한 뒤에야 다시 메인 시퀀스인 협상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이 기이한 몽타주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촬영 당시 왕빙이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잘못 따라갔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추측이 곧장 무마되고 마는 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촬영했을 때 문제가 있거나 쓸모가 부족한 푸티지라고 생각되면 그것들은 얼마든지 제외될 수 있다. 그렇지만 2,600시간 가량의 푸티지 중 언급한 저 별것 없는 1분 남짓의 시간은 10시간의 최종 편집본 안에 담기고야 말았다. 결국 왕빙에게 한 남자의 뒤를 따라간 그 트래킹 쇼트는 매우 중요한 쇼트였다는 말이 된다.
왕빙은 거의 시그니처 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이나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트래킹 쇼트를 자주 사용한다. 그의 영화에서 트래킹 쇼트는 인물을 따라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되거나 촬영 방식에 의한 물리적 한계(인물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예측할 수 없기에)로 인해 불가피한 쇼트가 되기도 하지만, 영화적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매 씬마다 인물을 트래킹하는 것은 그다지 경제적이지 못하다. 보통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픽션 영화에서는 인물의 특수한 심리 변화나 중추적 서사 진행의 상황을 제외하면, 인물이 a 장소에서 b 장소로 이동할 때는 이동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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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빙은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다른 이야기, 다른 공간, 다른 인물로 향하기 위해서 오프 버튼을 누르고 다시 온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강을 헤엄쳐 건너가는 것처럼 직접 움직이고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새로운 이야기의 막이 펼쳐진다. 인물들이 말하고 있을 때 말을 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인물들이 움직이고 있을 때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설사 카메라에 성에가 끼고, 화면이 과노출되고,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그의 영화에서 트래킹 쇼트가 일종의 ‘기준점’이 되어주고 있다고 주장해보려 한다. 이것은 영화적인 측면과 윤리적인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삼부작에는 매우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화면 구석에 왕빙이 그들의 출신 지역과 나이, 이름을 병기하고 있지만 10시간 동안 그들이 등장하는 부분들은 뒤죽박죽 섞여 있다. 픽션 영화가 가진 명확한 서사와 주인공이 부재한 그의 영화에서, 오히려 트래킹 쇼트는 가장 효율적인 연결고리이자 묘사 방식이 된다. 한 방에서 일을 마치고 수다를 떨고 있는 노동자들이 샤워하러 장소를 옮기는 사이, 프레임에 들어오고 나가는 인물들을 모두 담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트래킹이다. 인물들은 사전에 행동을 지시받은 적이 없으므로 카메라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고, 그렇다면 카메라는 끈질기게 인물을 따라다녀야 한다.
또한 삼부작에 만약 서사가 있다면 그것은 이주 노동자들이 1년에 한 번 가족들을 보기 위해 춘절(春节)을 맞아 고향으로 떠난 뒤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왕빙은 공장에서 바로 이들의 고향으로 컷하지 않는다. 그는 노동자들이 설레 하고, 짐을 챙기고, 귀향길의 버스 안에서 잠을 자고, 시골 고향길의 비포장도로를 걷는 장면을 빼놓지 않는다. 이런 세심한 서사적 ‘트래킹’들은 전부 모여 노동자들의 대서사시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하나의 완결된 서사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청년 노동자들 각자의 이야기, 그들 각자의 사연과 연인 관계, 그들 각자가 씻고 먹고 농담 따먹는 휴식의 시간은 전부 하나의 서사가 된다. 그리하여 왕빙의 영화에서 트래킹 쇼트는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는 ‘서사적 장치’이자, 공간적 설명을 부여하는 실시간 ‘설정 쇼트’이자, 시간을 펼쳐놓은 ‘진리의 파편’이 된다. 혹자는 왕빙의 영화를 두고 ‘불행 포르노’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나는 왕빙의 카메라가 노동자들이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하나의 폭력적인 진리 도식 아래에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촬영 대상 모두를 존중할 줄 아는 카메라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트래킹 쇼트는 또한 왕빙의 ‘모럴’이 된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 대상을 관음하거나 얼굴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밀어 관객에게 눈물 맺힌 윤리적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일상적인 거리에서 대상을 천천히 따라가며 존중을 유지하고 있다. 왕빙은 화면에 대상을 담을 때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것들의 위계를 별도로 설계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왕빙은 협상의 현장뿐만 아니라 잠시 혼돈에서 벗어난 한 남자의 뒷모습도 담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혼란의 현장 사이에 그 남자에 대한 쇼트를 삽입함으로써, 그 남자의 이야기가 더 부각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의 영화가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는 팔이 떨어져라 카메라를 들고 서 있고 또 숨차게 달린다. 그는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해, 낮에서 밤으로 나아가기 위해 쉽게 화면을 생략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시간이 영화에게 대상으로의 침입과 관계 맺음을 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 불가피한 저항에 버티고 서있는 자만이 진리를 담아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앞서 언급한 트래킹 쇼트로 돌아와서, 왕빙은 남자의 물음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카메라와 왕빙은 말없이 답한다.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찍어야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다.” 이 응시의 순간은 왕빙의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에 하나이다. 이 쇼트는 그의 영화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 속 노동자들이 수당을 받지 못한 채 다시 야간작업에 가야 하며, 공장 사장과 끝맺지 못할 협상을 재개하러 가야 한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 순간에 우리는 시끄러운 작업장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했던 한 남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새로이 목격하게 되었으며, 이 찰나에 삶과 노동의 시간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영화가 새로운 이음매를 밖으로 펼쳐낸다. 시간은 산개되어 매우 조그만 서사의 파편들과 몇 가지 질문만을 남겨놓을 뿐이다. “저 남자는 협상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협상은 결국 잘 마무리될 수 있을까?”, “오늘 저들에게 야간작업이 있을까?” 이 펼침은 소설가 비엘리가 말했듯이 ‘감추어진 은밀한 힘들의 세밀한 작용에 종속된 영화 필름의 펼쳐짐’이며, 왕빙이 21세기 영화에 제시하는 새로운 몽타주의 위상학이 될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중국 내부에 곯아 있는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문제들을 몸소 느낄 수 있으며, 이 세계에 대한 왕빙의 지독한 관심과 존중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도 그런 것이 삼부작은 10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 못지않게 전체 촬영본이 약 2,600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그는 항상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들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노력과 공을 들이는 시네아스트이다. 하지만 왕빙의 영화는 이미 여러 평론가와 국내 영화제를 통해 수차례 소개된 바 있어서, 그에 대한 찬사는 기존에 공개된 지면들에 남겨두도록 하자. 여기서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왕빙의 영화가 왜 이토록 긴 시간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궁금증은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청춘(하드 타임즈)>의 어느 한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왕빙은 여느 때처럼 임금과 일감을 제때 주지 않는 사장과 문제를 두고 협상하기 위해 작업장에 모인 노동자들을 비춘다. 매우 시끄럽고 의견이 분분한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왕빙은 갑자기 컷하고 한 남자를 따라간다. 그 남자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사장을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혼란을 잠식시키기 위해 먼저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의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 계단에 올라선 것이었다. 왕빙은 상황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인 혼돈 속에서 갑자기 별것 없어 보이는 이 남자를 왜 따라갔을까? 물론 촬영의 대상인 그 남자도 일의 까닭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래층의 시끄러운 작업장과 달리 부쩍 조용해진 위층의 복도에 선 자신을 따라오던 왕빙에게 고개를 돌려 한마디를 건넨다. “계속 작업장에서 촬영하셔야죠? 사람들이 지금 사장과 협상한대요.”
왕빙의 영화뿐만 아니라, 본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촬영의 대상이 촬영에 직접 개입하거나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대상이 직접 촬영의 중요도를 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로운데, 그러니까 남자는 촬영 중인 카메라를 향해서 지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자신이 아니라 아래층의 사람들을 따라가야 하지 않느냐고 직접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자가 강하게 의문을 표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발화 의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왕빙에게 말을 건네는 부분에서 공식 영자막은 ‘should’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왕빙은 그 남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말에도 카메라를 뒤로 돌리지 않고 남자가 숙소로 들어가기를 끝까지 기다렸다. 영화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컷한 뒤에야 다시 메인 시퀀스인 협상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이 기이한 몽타주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촬영 당시 왕빙이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잘못 따라갔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추측이 곧장 무마되고 마는 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촬영했을 때 문제가 있거나 쓸모가 부족한 푸티지라고 생각되면 그것들은 얼마든지 제외될 수 있다. 그렇지만 2,600시간 가량의 푸티지 중 언급한 저 별것 없는 1분 남짓의 시간은 10시간의 최종 편집본 안에 담기고야 말았다. 결국 왕빙에게 한 남자의 뒤를 따라간 그 트래킹 쇼트는 매우 중요한 쇼트였다는 말이 된다.

왕빙은 거의 시그니처 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이나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트래킹 쇼트를 자주 사용한다. 그의 영화에서 트래킹 쇼트는 인물을 따라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되거나 촬영 방식에 의한 물리적 한계(인물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예측할 수 없기에)로 인해 불가피한 쇼트가 되기도 하지만, 영화적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매 씬마다 인물을 트래킹하는 것은 그다지 경제적이지 못하다. 보통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픽션 영화에서는 인물의 특수한 심리 변화나 중추적 서사 진행의 상황을 제외하면, 인물이 a 장소에서 b 장소로 이동할 때는 이동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빙은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다른 이야기, 다른 공간, 다른 인물로 향하기 위해서 오프 버튼을 누르고 다시 온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강을 헤엄쳐 건너가는 것처럼 직접 움직이고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새로운 이야기의 막이 펼쳐진다. 인물들이 말하고 있을 때 말을 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인물들이 움직이고 있을 때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설사 카메라에 성에가 끼고, 화면이 과노출되고,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그의 영화에서 트래킹 쇼트가 일종의 ‘기준점’이 되어주고 있다고 주장해보려 한다. 이것은 영화적인 측면과 윤리적인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삼부작에는 매우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화면 구석에 왕빙이 그들의 출신 지역과 나이, 이름을 병기하고 있지만 10시간 동안 그들이 등장하는 부분들은 뒤죽박죽 섞여 있다. 픽션 영화가 가진 명확한 서사와 주인공이 부재한 그의 영화에서, 오히려 트래킹 쇼트는 가장 효율적인 연결고리이자 묘사 방식이 된다. 한 방에서 일을 마치고 수다를 떨고 있는 노동자들이 샤워하러 장소를 옮기는 사이, 프레임에 들어오고 나가는 인물들을 모두 담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트래킹이다. 인물들은 사전에 행동을 지시받은 적이 없으므로 카메라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고, 그렇다면 카메라는 끈질기게 인물을 따라다녀야 한다.

또한 삼부작에 만약 서사가 있다면 그것은 이주 노동자들이 1년에 한 번 가족들을 보기 위해 춘절(春节)을 맞아 고향으로 떠난 뒤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왕빙은 공장에서 바로 이들의 고향으로 컷하지 않는다. 그는 노동자들이 설레 하고, 짐을 챙기고, 귀향길의 버스 안에서 잠을 자고, 시골 고향길의 비포장도로를 걷는 장면을 빼놓지 않는다. 이런 세심한 서사적 ‘트래킹’들은 전부 모여 노동자들의 대서사시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하나의 완결된 서사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청년 노동자들 각자의 이야기, 그들 각자의 사연과 연인 관계, 그들 각자가 씻고 먹고 농담 따먹는 휴식의 시간은 전부 하나의 서사가 된다. 그리하여 왕빙의 영화에서 트래킹 쇼트는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는 ‘서사적 장치’이자, 공간적 설명을 부여하는 실시간 ‘설정 쇼트’이자, 시간을 펼쳐놓은 ‘진리의 파편’이 된다. 혹자는 왕빙의 영화를 두고 ‘불행 포르노’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나는 왕빙의 카메라가 노동자들이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하나의 폭력적인 진리 도식 아래에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촬영 대상 모두를 존중할 줄 아는 카메라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트래킹 쇼트는 또한 왕빙의 ‘모럴’이 된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 대상을 관음하거나 얼굴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밀어 관객에게 눈물 맺힌 윤리적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일상적인 거리에서 대상을 천천히 따라가며 존중을 유지하고 있다. 왕빙은 화면에 대상을 담을 때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것들의 위계를 별도로 설계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왕빙은 협상의 현장뿐만 아니라 잠시 혼돈에서 벗어난 한 남자의 뒷모습도 담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혼란의 현장 사이에 그 남자에 대한 쇼트를 삽입함으로써, 그 남자의 이야기가 더 부각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의 영화가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는 팔이 떨어져라 카메라를 들고 서 있고 또 숨차게 달린다. 그는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해, 낮에서 밤으로 나아가기 위해 쉽게 화면을 생략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시간이 영화에게 대상으로의 침입과 관계 맺음을 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 불가피한 저항에 버티고 서있는 자만이 진리를 담아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앞서 언급한 트래킹 쇼트로 돌아와서, 왕빙은 남자의 물음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카메라와 왕빙은 말없이 답한다.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찍어야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다.” 이 응시의 순간은 왕빙의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에 하나이다. 이 쇼트는 그의 영화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 속 노동자들이 수당을 받지 못한 채 다시 야간작업에 가야 하며, 공장 사장과 끝맺지 못할 협상을 재개하러 가야 한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 순간에 우리는 시끄러운 작업장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했던 한 남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새로이 목격하게 되었으며, 이 찰나에 삶과 노동의 시간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영화가 새로운 이음매를 밖으로 펼쳐낸다. 시간은 산개되어 매우 조그만 서사의 파편들과 몇 가지 질문만을 남겨놓을 뿐이다. “저 남자는 협상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협상은 결국 잘 마무리될 수 있을까?”, “오늘 저들에게 야간작업이 있을까?” 이 펼침은 소설가 비엘리가 말했듯이 ‘감추어진 은밀한 힘들의 세밀한 작용에 종속된 영화 필름의 펼쳐짐’이며, 왕빙이 21세기 영화에 제시하는 새로운 몽타주의 위상학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