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제이팝 신과 3776에 관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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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민준
WEDITOR 김민준
2017년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서 펼쳐진 AKB48과 한국 아이돌 그룹 간의 합동 무대는 확실히 기묘했다. 당시 시상식이 일본에서 개최되기도 했고, 엠넷에게는 이후 제작될 <프로듀스 48>을 위한 빌드업이 필요했기에 AKB48의 초청 자체에 크게 의구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다만 당시 약 5분 간 세계 전파를 탄 이 무대는 한일 양국, 또는 아시아 음악 문화가 화합하는 장이 되었다기보다는 엠넷의 기획 의도를 넘어 일본 아이돌 산업의 질적 저하를 해외에 여실히 드러내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정확히 이 분기점을 지나며 케이팝이 산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파른 상승 곡선에 오른 반면 제이팝, 특히 일본의 아이돌 문화는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고, 당시의 무대와 시상식은 이 대비를 현격히 드러냈다.
일본의 걸그룹계를 대표하는 AKB와 사카미치(坂道) 시리즈의 총괄 디렉터 아키모토 야스시秋元康는 케이팝에 대해 논하며 “케이팝이 프로야구라면 일본의 아이돌 음악은 고교야구와 같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를 단순히 케이팝의 우월성에 대한 인정과 일본 아이돌계의 질적 하락에 대한 자조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도 발언자인 아키모토 야스시 본인이 일본의 아이돌 음악을 홀로 이끌어 온 장본인이지 않은가. 일본에서의 고교야구란 프로야구 못지않게 인기가 높은 종목이다. 즉 그의 발언을 바르게 해석하자면 한국의 아이돌은 큰 기업 자본과 장기간 연습 생활을 통해 이미 완성형이 된 상태에서 데뷔하는 반면, 일본의 아이돌은 미숙한 상태 그대로 데뷔하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또 다른 측면에서 매력을 갖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아키모토 야스시의 프로듀싱에서 핵심이 되는 소녀의 ‘미숙함’의 정서는 숱한 중년 남성들의 잃어버린 부성애를 삽시간에 끌어모았다. 권위를 실추당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아버지들의 (다소 비틀어진) 관심과 (막대한) 지출이 모여 지금의 ‘미소녀’와 ‘카와이’ 컬쳐를 형성하는 심리적, 자본적 토대가 되었다는 비판은 이미 제기된 지 오래된 것이다. 오늘날 일본 걸그룹계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은 이러한 환경을 기반으로 태어났고, 지금도 그 제한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수 산업으로서만 명맥을 잇고 있다. 애초에 40대 이상 중년 남성을 타깃으로 제작되는 일본의 아이돌 음악이 트렌디한, 말하자면 동시대적인 그것과 융화되기가 원리적으로 가능할 리 없다. 즉 처음부터 해외는 타깃이 아니었고, 일본 국내에서도 다수의 젊은이들은 케이팝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고, 힙스터들에게도 먹힐 도리가 없으니 일본의 걸그룹은 여전히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며 가사에 은근슬쩍 에로틱한 코드를 끼워 넣는다거나, 성장 과정에 있는 어린 소녀의 미숙함을 진중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등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거기엔 별다른 유쾌함도 없으며 새로운 음악적 시도라든가 일말의 진보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의 아이돌 음악계 전반을 다루고자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기에 더 이상 이야기를 끌고 갈 필요는 없지만, 지금의 일본 아이돌 음악계는 그만큼 아저씨들의 걸쭉한 정념에 기초 지어진, 출구 없는 답보 상태다.
이러한 환경에서 등장한 프로젝트 아이돌 3776은 확실히 특이한 변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룹의 세세한 역사나 디스코그래피 등의 단순 정보는 일본어판 위키백과를 참고하는 편이 낫기에 간략히 기술하자면, 3776은 후지산의 로컬 아이돌当地アイドル을 정체성으로 표방하는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으로, 2012년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 시청의 후원을 받아 결성되었다. (지자체 자본에 의해 결성된 아이돌을 본 적이 있나?) 프로듀서는 이시다 아키라石田彰 1인, 그리고 멤버 또한 2010년대 중반 이후 오랜 기간 이데 치노요井出ちよの의 1인 체제로 활동을 지속해 왔다. 현재는 사실상 이데 치노요만으로 구성된 1인 아이돌 그룹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3776을 기존 일본의 아이돌 생태계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논할 수는 없다. 프로듀서 이시다 아키라는 그룹의 결성 시점부터 지금까지 AKB 그룹을 자신의 작업의 주요한 레퍼런스 중 하나로 삼아 왔다는 사실을 공연히 알려 왔고, 어린 소녀를 멤버로 한다는 점 및 로컬 아이돌, 성장형 아이돌이라는 개념 모두 기존의 문법과 전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3776을 기존 아이돌의 전형적 틀에 끼워 맞추는 것에도 큰 무리가 따른다. 즉 단순한 정보의 나열만으로는 그들이 최근 수 년 간 RYM을 위시한 해외 음악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序曲(2014)」
예컨대 3776의 초기 앨범인 「序曲(서곡)」에서부터 그들의 비범함은 감지된다. 단순히 모리무라 야스마사森村 泰昌를 연상케 하는 앨범 재킷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룹이 지자체의 예산으로 결성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면 참을 수 없이 웃기긴 하다. 또한 이후 3776의 음악적 시도를 생각하면 이는 다분히 의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아직 4인조의 그룹으로 활동 중이던 시절이었으며 지금의 활동 구조가 확립되기 이전이기도 하기에 말 그대로 3776 그룹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으로서 제작된 앨범이지만, 내내 지글거리는 이시다 아키라의 기타 사운드나 단순하게 반복되는 드럼 사운드는 곡의 포스트 펑크성을 강화하고, 그 위에 얹어지는 일본 소녀들의 조증적인 합창, 쉼 없이 변주를 거듭하는 멜로디, 귀 언저리에서 꾸준히 맴도는 산발적인 자잘한 사운드의 연쇄는 분명 이들이 범인(凡人)은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내비친다.
또한 2015년 발매된 첫 정규 앨범 「3776を聴かない理由があるとすれば(3776을 듣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은 3776의 본격적인 컨셉 앨범 제작의 기점과 같다. 잇따른 멤버의 탈퇴와 그룹의 해산 위기를 겪은 프로듀서 이시다 아키라는 지역사회에 대한 커밋이라는 그룹의 정체성을 포기하기는커녕 더욱 강화한다. (이 점이 AKB 및 사카미치 사단의 허름한 마케팅용 지역주의와는 구분된다.) 이 앨범을 기해 3776은 후지산이라는 지역성과 성장하는 소녀를 교차시키는 테마로 하는 고유의 서사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원테이크로 재생되는 앨범에 대한 형식주의적 집착을 강화하고 산발적 사운드에 간결한 멜로디를 채택하는 구성 등을 확립하며 자신의 음악적 완성도를 점차 더해 나간다.
「3776を聴かない理由があるとすれば(2015)」
「歳時記(2019)」
이후 3776은 이데 치노요의 솔로 프로젝트로 완전히 변모한다. 그리고 아이돌 음악의 틀 안에서 꾸준히 실험성을 추구해 온 그들의 시도는 2019년 앨범 「歳時記(Saijiki)」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이 앨범의 형식주의적 완벽에 대한 고집 내지는 강박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1. 전체 앨범의 진행은 1년 365일을 아우른다.
2. 곡에서의 1초는 현실의 2시간에 해당하며, 각 트랙은 1개월의 경과를 의미한다.
3. 따라서 2월을 제외하고 모든 트랙은 6분 또는 6분 12초로 트랙 길이가 고정되어 있다. (30일 또는 31일의 경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4. 동시에 앨범의 진행 내내 음악의 배경부에서는 12간지와 날짜의 경과를 읊조리는 이데 치노요의 목소리가 반복되고,
5. 첫 트랙은 F 메이저에서 시작되며 각 월을 지날수록 트랙의 조성이 반 계단씩 상승한다.
6. 도중 이십사절기에 해당하는 날에는 특별한 효과음이 첨부되어 있기도 하다.
7. (아직 찾지 못한 이스터에그가 더 발견될 수도 있다)
위와 같은 구조적 틀 안에서 이데 치노요는 일 년 사계절의 후지산과 함께하는 소녀의 생활을 소박한 일기와도 같이 노래한다. 또한 패스티시적으로 무작위하게 섞여 들어간 일본과 유럽의 민요는 3776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포스트 펑크, 글리치 사운드에 곁들여진다. (프로듀서 이시다 아키라가 지역 도서관에서 발견한 민요가 다수 차용되었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이 무려 4392초 간 논스톱으로 진행된다.
핑크 플로이드가 후지산의 소녀로 환생한다면 이런 앨범을 만들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다만 상술했듯 이 앨범에서도, 그리고 3776의 음악 전반에서도 이데 치노요가 노래하는 주된 멜로디 자체는 크게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민요나 동요, 팝적인 멜로디를 다수 차용하고 꾸준히 ‘카와이’라는 중심 정서 자체는 유지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프로듀서 이시다 아키라는 곡을 절대 단순하게 방치하지 않고 이를 끊임없이 실험과 전위의 영역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 즉 3776이 AKB 사단을 비롯한 기존 아이돌 음악과 강하게 대비되는 점은 청중이 곡을 따라 부르기가 도무지 어렵다는 점에 있다. (=챈트chant가 불가능하다.) 매 순간 3776은 분명 익숙한 멜로디를 차용하지만 이는 순조롭게 흘러가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 분절되고 파편화되고 다른 사운드의 침범을 받으며 청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한다.
「The Birth and Death of the Universe Through Mount Fuji (2023)」
최근 발매된 신작 「The Birth and Death of the Universe Through Mount Fuji」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매스 록(Math Rock)과도 같이 치밀하게 계산된 카운트와 구석구석 깔리는 보컬 이데 치노요의 내레이션, 몇 개인지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로 흩어져 ADHD적으로 병치되어 있는 사운드의 흐름, 전체 앨범을 하나의 서사로 융합하는 방법론 모두 전작 「歳時記」에서부터 이어져 온 3776 사운드의 가장 큰 특징이고, 실제로 가볍게 듣는다면 이 앨범은 「歳時記」를 포함한 이전 작들의 단순한 연장선 또는 자기복제처럼 들릴 수도 있다. 다만 전작이 후지산을 중심 제재로 일본의 민요를 대거 차용해 1년 365일과 사계의 흐름을 담아냈다면 이번에 3776은 더욱 대담하게 그 시간 스팬을 확 늘려 우주의 탄생과 종말을 서사로 삼아 버린다. 여기서도 여전히 이들이 참을 수 없이 웃긴 이유는 거기에마저 평범한 여고생의 삶을 겹쳐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두 주제 모두 제이팝 신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음악들은 대개 높은 확률로 감상적인 양상으로 빠져 일본 음악계의 고질병인 오글거림의 정서를 양산하곤 한다. 물론 이는 일본 문화의 창작물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억압된 감정의 분출을 위한 장치로서 강한 진지함이 매개되고, 이는 청자에게 웃음이나 여유를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화자와 함께 울음을 터트리거나 번민하는 등 오로지 서로의 감정 상태만을 동일시하도록 요구하곤 한다. 즉 이러한 오글거림은 자아가 갖는 일종의 비장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거기에는 별다른 건설적인 대화나 텍스트 재생산의 여지가 없다.
3776은 이를 의식적으로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고생이 아직은 다소 섬약한 자신의 자아로 세상과 마주하며 갖는 강렬하고 위태로운 감정을(그것은 실제 이데 치노요 본인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우주의 탄생론이라는 천체물리학적 세계관이나 이자나기 이나자미イザナギ・イザナミ를 위시한 일본 열도의 탄생 설화에 결부시켜 버리는, 대담하고도 어이없는 이 시도와 마주하며 청자는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요컨대 3776의 음악적 강점이란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 데 있다. 대중성과 전위성 사이를 즐겁게 누비는 그들의 창작적 태도와 실험적 근면함 앞에서 기존 일본의 아이돌 음악계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나 이에 기반한 비평성은 일시에 무력화되고 만다.
한편 「The Birth and Death…」 앨범의 후반부에서 시간은 극단적으로 빠른 흐름에 휘말려 무려 우주의 종말에까지 치닫는다. 물론 이 과정은 고교 생활의 시작을 우주의 시작에, 또 고교 졸업을 한 우주의 끝과도 같이 느끼는 모종의 극적인 클리셰와의 결합이다. 여기서도 이 앨범이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마무리될 수 있는 이유는 앨범의 최후미(最後尾)에 이어지는 이데 치노요의 낙관적인 내레이션 덕분일 것이다. 실제로 이 앨범은 성인이 된 이데 치노요의 3776으로서의 마지막 활동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자신의 성장기를 함께한 한 세상의 종말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거기서 께름칙한 회상이나 감상의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자신은 앞으로 또 다른 우주를 찾아 나서겠다고 외치는 이데 치노요의 명랑한 내레이션은 그 자체로 이데 치노요 개인의 인간적 성숙과 3776 프로젝트의 완수를 선언하는 동시에 청자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