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오후들
WEBZINE
WEDITOR 엄동욱
WEDITOR 엄동욱
<고독의 오후(2024)>, 알베르 세라
투우 경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소의 등에 칼이 꽂힐 때마다 소의 힘과 속도는 현저히 약해지지만 동시에 흥분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소는 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명이 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가상의 적 물레타Muleta를 향해 힘껏 돌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투우라는 것이 ‘조롱’의 행위이지 않았던가? 소는 자신의 급소에 칼이 꽂히는 진실의 순간La hora de la verdad 직전까지 투우사의 기만적인 몸짓과 관중의 함성 속에서 조롱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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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대한 조롱이 마냥 일방적이지 않은 것은 맞은 편 투우사의 목숨 또한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투우사는 자기 심장에 날카로운 뿔이 파고들 수 있다는 위험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소보다 조금 더 이성적인 존재라는 우위성에 서서 자신의 생을 시험하고 조롱한다. 그렇게 물레타를 힘차게 휘두르는 매 순간 두 전사의 주도권이 그들의 시선과 호흡 아래에서 교환된다. 혀를 내밀고 발을 구르는 소 앞에서 투우사는 긴장의 침을 삼키지만, 한 번 물레타를 돌파한 소는 투우사에게 모든 주도권을 빼앗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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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뿔이 투우사의 가슴팍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소의 고개가 땅바닥에 더 가깝게 처박힐 때마다 생과 사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진다. 죽음이란 숭고한 의식은 ‘고독의 오후’가 찾아오면 열렬한 찬사와 기민한 조롱이 뒤섞인 행사로 전락한다. 이곳에서 카메라는 피 묻은 흙바닥 위에 떨어지는 죽음의 조각들 말고는 달리 담아낼 것이 없다. <루이 14세의 죽음(2016)>에서 황제 폐하의 기침 소리가 점점 제 죽음을 알리는 경종으로 변모하듯이, 물레타가 휘날릴 때마다 내뱉는 거친 숨들은 두 전사를 ‘죽음’이라는 절대 현상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동등하게 만들어준다.
앞서 말했듯이 조롱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알베르 세라는 이런 조롱과 코미디를 담아내는 데 능숙한 감독이라는 것도 잊지 말자. 그는 언제나 신성성을 비루한 육체적 현실들과 충돌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내 죽음의 이야기(2013)>에서 자신의 건강한 변을 하인에게 자랑하던 백작을 기억하는가? <새들의 노래(2008)>가 사실은 예수의 탄생과는 별 관련 없는 세 동방 박사의 여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투우사를 보호하는 영험한 성모 사진은 사타구니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며, 그의 화려한 복장은 기저귀에 일 보는 어린아이처럼 다리를 벌린 채 낑낑거리고 나서야 더 빛나 보인다. 또 그의 영광을 부풀리기라도 하듯 황금빛 호텔은 유독 더 빛나 보이며, 그의 실수는 조력자들과 관중에 의해 위대한 자신감으로 과잉 포장된다.
<새들의 노래(2008)>
이렇듯 영웅의 위대함은 경기장 바깥에서 무효하므로, 관객은 얼마 안 가 다시 전장으로 이끌려 나온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관중’과 ‘관객’의 시선들이 모두 소거된 처절한 움직임들만이 자취를 남길 뿐이다. 이렇게 끈질긴 전투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마지막 전투의 막이 내리자 이번에는 카메라가 질질 끌려나가던 소를 비추지 않고 멀찍이서 투우사의 퇴장을 비춘다. 긴장을 풀어주던 조력자들의 격려와 관객의 박수 소리는 잠시 침묵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흙바닥을 떠나는 그를 별다른 클로즈업 없이 관조한다. 그는 비록 소처럼 끌려나가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또 매우 조심스럽게 죽음을 뒤로한 채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 암전이 시작되자,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관객은 허상의 빨간 망토를 찾아 극장을 떠나버린다. 마치 자신들의 삶을 조롱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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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 경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소의 등에 칼이 꽂힐 때마다 소의 힘과 속도는 현저히 약해지지만 동시에 흥분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소는 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명이 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가상의 적 물레타Muleta를 향해 힘껏 돌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투우라는 것이 ‘조롱’의 행위이지 않았던가? 소는 자신의 급소에 칼이 꽂히는 진실의 순간La hora de la verdad 직전까지 투우사의 기만적인 몸짓과 관중의 함성 속에서 조롱당한다.

생에 대한 조롱이 마냥 일방적이지 않은 것은 맞은 편 투우사의 목숨 또한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투우사는 자기 심장에 날카로운 뿔이 파고들 수 있다는 위험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소보다 조금 더 이성적인 존재라는 우위성에 서서 자신의 생을 시험하고 조롱한다. 그렇게 물레타를 힘차게 휘두르는 매 순간 두 전사의 주도권이 그들의 시선과 호흡 아래에서 교환된다. 혀를 내밀고 발을 구르는 소 앞에서 투우사는 긴장의 침을 삼키지만, 한 번 물레타를 돌파한 소는 투우사에게 모든 주도권을 빼앗기고 만다.

소의 뿔이 투우사의 가슴팍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소의 고개가 땅바닥에 더 가깝게 처박힐 때마다 생과 사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진다. 죽음이란 숭고한 의식은 ‘고독의 오후’가 찾아오면 열렬한 찬사와 기민한 조롱이 뒤섞인 행사로 전락한다. 이곳에서 카메라는 피 묻은 흙바닥 위에 떨어지는 죽음의 조각들 말고는 달리 담아낼 것이 없다. <루이 14세의 죽음(2016)>에서 황제 폐하의 기침 소리가 점점 제 죽음을 알리는 경종으로 변모하듯이, 물레타가 휘날릴 때마다 내뱉는 거친 숨들은 두 전사를 ‘죽음’이라는 절대 현상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동등하게 만들어준다.
앞서 말했듯이 조롱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알베르 세라는 이런 조롱과 코미디를 담아내는 데 능숙한 감독이라는 것도 잊지 말자. 그는 언제나 신성성을 비루한 육체적 현실들과 충돌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내 죽음의 이야기(2013)>에서 자신의 건강한 변을 하인에게 자랑하던 백작을 기억하는가? <새들의 노래(2008)>가 사실은 예수의 탄생과는 별 관련 없는 세 동방 박사의 여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투우사를 보호하는 영험한 성모 사진은 사타구니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며, 그의 화려한 복장은 기저귀에 일 보는 어린아이처럼 다리를 벌린 채 낑낑거리고 나서야 더 빛나 보인다. 또 그의 영광을 부풀리기라도 하듯 황금빛 호텔은 유독 더 빛나 보이며, 그의 실수는 조력자들과 관중에 의해 위대한 자신감으로 과잉 포장된다.

이렇듯 영웅의 위대함은 경기장 바깥에서 무효하므로, 관객은 얼마 안 가 다시 전장으로 이끌려 나온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관중’과 ‘관객’의 시선들이 모두 소거된 처절한 움직임들만이 자취를 남길 뿐이다. 이렇게 끈질긴 전투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마지막 전투의 막이 내리자 이번에는 카메라가 질질 끌려나가던 소를 비추지 않고 멀찍이서 투우사의 퇴장을 비춘다. 긴장을 풀어주던 조력자들의 격려와 관객의 박수 소리는 잠시 침묵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흙바닥을 떠나는 그를 별다른 클로즈업 없이 관조한다. 그는 비록 소처럼 끌려나가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또 매우 조심스럽게 죽음을 뒤로한 채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 암전이 시작되자,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관객은 허상의 빨간 망토를 찾아 극장을 떠나버린다. 마치 자신들의 삶을 조롱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