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선형 구조의 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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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임채윤
WEDITOR 임채윤
1981년의 겨울, 체코발 프랑스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경찰 무리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데리다의 가방에는 출처를 모를 마약이 들어 있었고, 그는 곧바로 연행되어 경찰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마약은 체코의 비밀경찰이 몰래 넣어놓은 것이었는데, 체코 공산주의 정권이 블랙리스트로 지정한 지식인들에게 데리다가 연대를 표하자, 마약 밀매를 구실로 그를 체포하려 했던 것이다. 비밀경찰이 그의 호텔 방에 몰래 침입하던 바로 그 시간에, 데리다는 프라하에서 카프카의 무덤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훗날 그는 그때의 체포와 심문, 짧은 수감 기간을 회상하며, 마치 카프카가 적은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화는 켄 맥멀렌Ken Mcmullen의 영화 〈고스트 댄스(1983)〉에서 데리다가 직접 읊조리는 내용으로, 그의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영화를 시작으로 데리다는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했다. 〈고스트 댄스〉에서 데리다는 철학 교수 ‘자크 데리다’ 역으로 출연했고, 그의 상대역은 젊은 유망 배우였던 파스칼 오지에가 맡았다. 둘은 각각 교수와 학생으로 등장해 유령에 관해 이야기 나누며 즉흥 연기를 펼쳤다.
오지에: 유령을 믿으세요?
데리다: 지금 당신은 유령에게 유령을 믿느냐고 묻고 있군요. 이 자리에서 저는 유령입니다. 이 영화에 출연해 저 자신을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것은, 마치 유령이 저를 대신해서 말하는 기분이군요. (…) 저는 통신 기술과 이미지 기술의 현대적 발전이 유령의 시대를 끝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령들—환영의 힘을 증진시켰다고 믿어요. 당신은 유령을 믿습니까?
오지에: 네, 틀림없이요. / 네, 분명히요. / 지금은 분명히 믿어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파스칼 오지에는 에릭 로메르의 〈만월의 밤(1984)〉에 출연해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그해 가을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6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몇 년이 흐른 뒤, 데리다는 자신이 텍사스에서 가르치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고스트 댄스〉를 재관람했다. 그는 오지에와 유령에 관해 이야기 나누던 그 장면, 이미 사망한 배우 파스칼 오지에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순간을 강렬하게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유령을 믿느냐는 나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어요. 거의 내 눈을 마주 보며, 큰 스크린 위에서 다시 한번 내게 말했어요. ‘지금은 분명히 믿어요.’ 도대체 어떤 ‘지금’이었을까요? 그녀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던 거예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것이죠. 설령 그녀가 그사이에 죽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죽은 자가 말할 날이 올 것이었습니다. 또한 영화의 유령성은 관객마저 유령으로 변화시켜요.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유령이 되어 가며, 살아 있는 나 자신도 결국 ‘귀환할 자’가 됨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전하는 시간
현대의 괴담에서 전자 기기의 오작동은 무척 흔하게 일어난다. 텔레비전은 유령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고, 라디오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흘려보낸다. 기록 매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효과는 시간성을 교란하는 데 있는 바, 그러한 미신적 각색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한때 기록 매체는 데리다가 겪은 것과 같은 혼미한 유령적 체험을 진정 가능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각기 다른 시대의 이미지들을 모니터 인터페이스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디자인적 요소 정도로 바라보는 국면에 이르러, 시공간을 횡단하는 일은 몹시도 일상적이어서 그것을 괴담으로까지 각색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 이 순간에 기록되어 불특정한 미래로 던져진 사물의 이미지가 훗날 유령처럼 엄습해올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한데 미래는 어쩐지, 아무런 구체성도 없이 막연한 느낌으로만 머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미래는 미래에 정박해 있지 않다. 미래는 현재의 몫이고 현재의 사정에 따라 홀연 모습을 뒤바꾼다. 이러한 미래 인식의 가변성에 관해, 노문학자 김수환은 소비에트 문화연구에 있어 가장 커다란 난점이 바로 관점의 문제라고도 언급한 바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소비에트 이후에 내부자들이 내놓은 회고담은 그들이 당시 일기에 적었던 것보다 훨씬 더 비판적으로 소비에트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두 기록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태도 변화 이상의 것이었다. 그 전환기의 경험은 그들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한때 그들이 속해 있었고 그런 와중에는 영원하리라 믿었던 시스템은, 점차 억압적이고 허위적이며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종말은 정말이지 한순간에, 의식의 전환을 일으키며, 하나의 꿈이 앞선 꿈을 집어삼키듯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뒤섞임의 시간을 회고한다. 긴 시간 금서 취급을 받다가 소비에트 말기의 글라스노스트 개방 조치를 통해 물밀듯 밀려 들어온 이국의 서적과 비평 담론들, 자국의 자기 분열적 소설들은 당대의 젊은이들을 고무시켰다. 새로운 텍스트들은 당대의 젊은이들이 접하지 못한 세계를, 소비에트가 아닌 세계, 소비에트가 아닐 수 있는 세계를 상기시키며 그들이 어렴풋이 느끼던 모순을 공언했다. 시대의 불안한 영원성에 유령들이 뒤섞여 지내던, 그리하여 풍전등화처럼 불안한 시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던 시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한때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종말은 점차 필연적이고 논리적인 귀결로서 미래의 형상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종말 이후, 소비에트의 이미지는 양방향으로 증식하였다. 일부는 서구 담론의 틀 안에서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적으로 회고한 반면, 더러는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 더 아름답게 소비에트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이는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었다. 노스탤지어 이론에 천착한 문화 비평가 스베틀라나 보임은 글라스노스트 조치가 시행되기 직전인 1981년, 21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마지막 세대를 “전체주의적 타락의 시대”로 설명하며, 그곳에서 보낸 유년기에 대해 다른 이들처럼 무비판적인 향수를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 시대의 비전과 유한성을 동시에 감지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그녀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에 매혹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래 타틀린의 탑은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에 도전해 20세기 초 소비에트의 아방가르드적 비전을 상징하는 기념비로서 지어질 예정이었지만, 스탈린 체제로의 전환 아래 아방가르드 예술에 탄압이 가해지면서 (혹은 애초에 짓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끝내 건축되지 못했다. 탑의 건축에 있어 예측 불가능성을 중시한 타틀린의 견해에 따라 탑의 도면은 남겨지지 않았고, 탑의 원본 모형조차 소실되어 지금은 몇 장의 사진과 복원된 모형을 통해서만 그것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타틀린의 탑은 비스듬한 나선형 구조로 지어질 것이었는데, 나선은 꼭대기에서 한 점으로 완전히 수렴하는 대신 하늘을 향해 열리도록 되어 마치 완성을 거부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 한데 어떠한 건축 사조의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기념비를 표방한 타틀린의 탑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의 기울기와 개방형 상부로 말미암아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미완성된 바벨탑이라는 신화적인 폐허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레프 트로츠키는 당시 타틀린의 탑을 두고 누군가 치워버리기를 까먹은 스캐폴드처럼 보인다고도 적었다. 스베틀라나 보임은 그 탑이 불완전한 무대 세트로 보였을 거라고, 되레 혁명의 덧없음을 증언하는 구조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폐허 애호 / 디지캠 이미지
최근 몇 년 동안 빈티지 디지캠이 유행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것이 한때의 폐허 애호와 관련이 깊은 현상이 아닐까 하는 섣부른 짐작을 해보았다. 폐허 애호ruinophilia는 스베틀라나 보임에 의해 명명되어 동시대의 한 가지 징후로 부각된 바 있는데, 그녀는 21세기에 들어 사람들이 폐허에 이끌리는 경향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녀에 따르면 사람들은 폐허를 단순한 잔해가 아닌, 현재에 통합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장소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폐허 속에서 여태껏 사용된 적 없는 “창조적 지렛대”를 발견하려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꿈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보임은 폐허가 막연하고 비생산적인 감상으로 소비되는 것, 반성 없는 낭만화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했다. 많은 이들 역시 폐허 애호를 미심쩍게 보았다. 예컨대 재건축된 공간에 남겨진 오래된 흔적들, 혹은 근현대 한국의 경제성장기를 어렴풋이 연상시키는 물품과 자재들은 어떤 끝나버린 것의 정취, 정열이 다 소진된 뒤의 멜랑콜리를 자아낼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많은 폐허 애호가들이 과거의 무엇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는 자신들도 명확히 알지 못했으며, 결국은 물신화된 과거의 잔재들을 범용한 현재에 대비시켜 소강상태의 안식처를 찾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폐허의 정경을 담은 이미지는 곧잘 ‘폐허 포르노ruin porno’로 폄하되었고, 그 때문인지 폐허 애호가들은 어느새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폐허 애호는 다소 사그라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폐허를 거닐며 애수를 느끼는 일은 여전히 가능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편, 오랫동안 낙원상가나 세운상가 같은, 예스러운 환상이 집적된 풍경을 주로 담아왔던 디지캠 이미지들은 어느 순간부터 지극히 현재적인 장면들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근현대의 흔적들을 빼놓은 디지캠 이미지들이 이따금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어느 역사적 풍경과도 관계없어 보이는 일상적인 브이로그 영상에서도 디지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양식에 대한 물신적 애호, 레트로 취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각을 자아냈다. 그 영상들은 특정한 과거에 종속되지 않으며 마치 역사와 완전히 무관한 장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감각은, 어쩌면 영상이 마련해 둔 감상자의 시점이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에 속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이미지들은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전달되어 올 기억 속 이미지를 미리 엿보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결국 시대의 유한성을 미리 감지하려는 시도이자, 노스탤지어를 한발 앞서 선취하려는 감각으로도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지캠으로 포착된 무척이나 일상적인 장면들은 그저 눈앞의 사물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다르게 보일 사물들의 이미지를, 그 변화 가능성의 거리만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보임의 말을 빌리면 오직 사물과의 “장거리 관계”만을 확보하려는 듯, 어떠한 신화적인 집으로서의 역사를 재건하려는 시도 없이, 다만 그 시간의 간극에 매혹된 채로 말이다.
가정된 수신자
작가 데이비드 실즈는, 모든 글을 편지 형식으로 쓰면 덜 외롭게 느껴진다는 시인 매기 넬슨의 말을 인용한다.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면 실즈는 어떤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아니면 맞은편에서 누군가 줄을 잡아당기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편지는 늘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므로, 그에게 필요한 어떤 절박함이 생겨나서 글을 진전시킨다. 물론 그는 편지의 가정된 수신자에 대해, 수신자가 어떤 말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편지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므로 쓰이기 마련이고, 결국 어디로든 날아가 그가 알지 못하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때 편지의 내용은 수신자에 대한 정보에 선행한다. 나아가 편지는 수신자의 실질적인 존재 여부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이 얼마나 통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너는 나를 불태워(2024)〉를 보면서 그가 마치 무명의 수신자에게 편지를 쓰듯 이 영화를 작업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시인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 『레우코와의 대화』중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와 님프 브리토마르티스 대화를 각색한 작품으로, 그 자체로 파베세가 보낸 희곡에 대한 답장이기도 하다. 영화는 한 편의 그리스 신화를 다룬 파베세의 희곡을 영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차근히 보여준다. 피녜이로는 마치 외국어를 가르치듯 맥락이 지워진 푸티지에 특정한 단어를 연결 짓도록 유도한다. 그에 의하면 “나는 너를 불태워”라는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너는,
나를, 불태워 = 건물 / 초인종 / 배수구로 흘러드는 수돗물
![]()

급기야 피녜이로는 텍스트를 읊조리는 내레이션을 제거하고 영상 푸티지만을 나열한다. 하지만 앞서 각 푸티지에 그에 대응하는 단어가 부착된 까닭에, 우리는 나열되는 푸티지만을 보고도 그것이 문장으로서 갖는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푸티지는 피녜이로가 제시한 의미의 체계 속에서 일정한 사전적 의미를 지니며 마치 통용 가능한 어휘처럼 기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작품 중에는 일부분이 유실되어 전체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 사포의 원문 텍스트가 인용되는데, 2014년경 그녀의 잃어버린 시 몇 편이 발견된다. 피녜이로는 이 발견을 바탕으로 언젠가 사포의 불완전한 작품 여러 편을 완역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러곤 후대에 번역될 그 작품들—즉, 아직 도래하지 않은 텍스트들을 미리 번역한다는 명분으로, 지금껏 보여주지 않은 푸티지들을 무작위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는 말하자면, 지시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미지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통념에 대한 역방향의 실험이다. 부분 부분이 누락되어 불완전한 문장을 번역자는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출발점을 알 수 없다면 도착지 역시 정해질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를 가장한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대상에 대응하는 이미지가 먼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기표가 앞서 존재하여, 미래에 도래할 기의를 위한 형틀을 마련해 놓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기호도 단지 지금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폐기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유유히 흘러가다 끝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장소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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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월, 체코에서 석방된 자크 데리다는 파리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의 셔터 세례에 둘러싸였다. 사진 속의 그는 넥타이가 조금 풀어진 채로, 그러나 머리는 조금도 헝클어지지 않은 채로, 혼미한 표정을 지으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1979년 이전까지 그는 자신의 사진이 공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강한 반감을 보여 온 것으로 유명했다. 철학자들이 책더미 앞에서 상반신을 찍어 저서의 표지로 사용하는 관행에도 그는 따르지 않았다. 그러한 태도에 관해 한 인터뷰어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진 예술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작가의 이미지를 프레임 안에 가두어 고정시키고, 그것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문화 산업에 저항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더 깊은 이유는, 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초상 사진마다 배어 있는 죽음의 느낌, 그 얼굴과 내가 맺고 있는 그 낯설고도 복잡한 관계 때문이죠.”
그런데 이후 몇 년에 걸쳐, 그는 자신의 사진을 영번역서 표지에 싣고, 영상 인터뷰에 응하며, 심지어는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전환의 계기는 1979년 프랑스에서 마련된, ‘철학의 현황’이라는 국가적인 철학적 토론 자리였다. 수많은 기자가 몰려든 행사였고, 그때까지 데리다는 자신의 사진을 대중 앞에 노출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고, 온 이목이 그에게 쏠리는 바로 그 순간, 스크린에 ‘자크 데리다’라는 글자와 함께 떠오른 것은, 머리가 벗겨진 그의 친구의 사진이었다. 그것이 공식 석상에서 ‘자크 데리다’라는 이름에 덧붙은 첫 번째 이미지였다.
그 순간 데리다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그는 이어 말한다. “그 후로는 체념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요. 한데 어느 한편으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신을 맡기고, 타인이 제 이미지를 원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도록 내버려두는 것, 거기에는 뭔가 좋은 면이 있었어요. 그건 흘러가고, 흘러갑니다. 그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