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팀 발제 : 발레슈카 그리제바흐 -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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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민솔


발제 일자: 25.09.18
발제 영화: 발레슈카 그리제바흐 - <갈망(2006)>
참석 인원: MS, DU, SY, CY, YS


국내에서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발레슈카 그리제바흐는 이른바 베를린파로 불리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여기서 베를린파는 주류 영화들과 구별되는 카운터 시네마를 제작하는 독일 영화 움직임을 부르는 용어이다―원래는 이 움직임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였다. 베를린파의 영화들은 종종 미니멀한 내러티브와 절제된 연출로 인물의 일상이나 관계, 내면을 관찰하는 영화로 (피상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로 이러한 미니멀리즘에서 비롯된 무미건조함은 이들이 초기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베를린파 영화를 더 넓게 포괄한다면, 일상에서 인지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발레슈카 그리제바흐는 베를린파 감독 중에서도 독특한 방식을 통해 영화에서 현실을 관찰한다. 그리제바흐는 일반인, 비전문적 배우를 기용해 극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을 통해서 일상 밖의 현실을 드러낸다. 그녀가 작업한 세 편의 장편 <나의 별(2001)>과 <갈망>, <웨스턴(2017)>에는 모두 비전문 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리제바흐의 리얼리즘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실제로 거주하던 인물들을 배우로 기용하고, 픽션 속에서 그들이 빚어내는 비전문적인 몸짓으로부터 현실의 단면을 포착하는 데서 발현된다. 다시 말해 그녀는 현실 세계의 인물과 풍경을 기호로 삼아 현실을 재현하는 허구의 세계를 만든다. 필름팀은 그리제바흐의 이 흥미로운 연출 방식을 <갈망>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비관습적 멜로드라마


<갈망>의 운명적 서사와 삼각관계는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로 규정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를 자처하며 그 관습을 따라가면서도, 영화 내내 멜로적이라 불릴 만한 감정적인 장면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SY: 멜로라는 장르보단 하나의 드라마라고 느꼈다. (MS: MBC 아침드라마 같기도 하다.) 독일 특유의 무미건조함 때문인지, 인물들이 서로에 대한 끌림이나 욕망을 갖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두 여자 사이의 긴장감에서 유발되는 멜로적 갈등은 드러나지 않고, 남자는 단지 관성적으로 두 여자와 번갈아 관계하는 듯했다. 두 여자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기보다 이 사람 자체의 내면 혹은 인생에서 해결되지 않는 성질 때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연인과의 동반자살을 시도한 남자를 구한 것을 계기로 주인공 마르쿠스(안드레아스 뮐러 분)는 정체 모를 소방관 모임에 초대된다. 파티에서 술을 먹고 정신없이 춤추다가, 일어나 보니 가게 여종업원 로자(아네트 돈부쉬 분)의 집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내연녀(?)가 된 로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부인인 엘라(일카 벨츠 분)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또다시 내연녀에게 향해 그녀와 관계를 맺으며, 두 여자를 번갈아 갈망한다는 이야기다.

분명 표면적으로는 한 남자가 두 여자를 갈망하는 이야기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남자의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두 여자를 욕망하는 상황에서도―심지어 자살을 시도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똥 씹은 듯한 무표정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이에 감정의 몰입을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기이한 멜로드라마가 형성된다.


비전문 배우들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비전문적인 배우들이다. 이들은 영화 촬영지인 독일 동독 지역 췬렌에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들이며, 길거리 캐스팅으로 섭외되었다. 배우들의 이러한 비전문성은, 영화의 배경과 인물이 맞물리며 생성하는 리얼리즘과 더불어, 감정이 배제된 비관습적 멜로드라마라는 <갈망>의 기이한 정체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리제바흐는 배우들에게 극적 연기를 요구하기보다 오히려 감정을 감추도록 유도한다. 앞서 언급한 마르쿠스의 무표정 역시 의도적으로 감정을 배제하는 연출의 일환이다. 이미지(1)는 마르쿠스가 아내 엘라와 밤을 보낸 뒤 대화하는 장면이다. 마르쿠스의 무표정은 그가 불륜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는 건지, 혹은 내연녀 로자와 바람을 피우러 돌아갈 생각뿐인 건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결국 관객은 그의 속마음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기존 멜로드라마는 극적인 감정 표현으로 관객이 하나의 이야기를 공유하도록 만들었다면, <갈망>은 마르쿠스의 변치 않는 얼굴을 통해 관객 각자가 독자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한다.

이미지(2)에서 무표정이 활용되는 용도는 조금 다르다. 이 장면은 엘라에게 버림받은 마르쿠스의 표정을 담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훌쩍거리며 코를 닦는 몸짓을 보이는데, 우리는 비로소 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게 된다. (물론 슬프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는다...) 눈물 한 방울 없는 건조한 그의 표정에 단출한 몸짓 하나를 더함으로써, 감독은 눈물 연기라는 고난도의 기술 없이도 감정을 전달하는 현명한 연출을 선보인다.



감독은 무표정한 얼굴들로 몽타주를 쌓아가는가 하면, 의도적으로 인물의 표정을 화면에서 지워내기도 한다. 연출하기에 가장 까다롭다는 베드신조차 비전문 배우들을 통해 구현되는데, 이 과정에서 감정을 암시하는 표정이나 대사는 철저히 배제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오직 본능에 가까운, 동물의 행위 같은 몸짓이다. 무표정에서 연장되어 나온 무의 몸짓들이 프레임 사이를 채운다

DU: 특히 남자의 뒷모습을 비추는 쇼트로 편집이 넘어갈 때가 많다. 이 남자가 갖는 감정의 변화와 고민이 끝나는 지점에서 일종의 소박한 클라이맥스가 시작되려 할 때, 갑자기 남자의 뒷모습을 비춘다. 섹스신도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로맨스에서 나오는 격정적인 장면과 다르게, 관계를 맺는 남자의 적나라한 엉덩이나 뒷모습을 비춰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1951)>이 언급되는 대목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인물의 연기에 있어, 바쟁은 심리psychology 대신 몸physiology을 통해서 인물의 현존이 드러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브레송의 아마추어 배우들은 연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상태가 그 자체로 현현하도록 한다. 이처럼 그리제바흐의 비전문 배우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결여 또한 그들의 현존성을 역으로 드러낸다. 무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과 몸짓은 바쟁-브레송의 리얼리즘을 21세기의 현실 속에서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배우의 표정과 몸짓을 넘어, 카메라가 갖는 시선에도 스며든다. 연출이 까다로운 정사 장면을 감정의 재현이 아닌 신체의 배열로 치환함으로써, 카메라는 배우의 뒷모습과 엉덩이를 따라 움직임 자체를 기록한다. 따라서 관객은 서사의 감정선에 몰입하기보다, 현실의 인물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수행하는 몸짓을 관찰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 영화는 극영화의 틀 안에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을 끼워 넣는다. 이는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행동을 단절시키는 편집에서도 드러난다.

CY: 그러한 단절 자체가 그리제바흐의 편집 방식인 것 같다. 할리우드식으로 행동을 잘게 끊지도 않고, 하나의 행동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쇼트를 지속시키지도 않고, 애매한 데서 툭 끊어버린다. 이러한 리듬감이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준다. 다큐멘터리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눈에 보이는 화면 외부에서도 사건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 일부러 쇼트를 이상한 데서 끊고 점프컷도 많이 둔다. 그리제바흐의 편집에서도 비슷한 면이 느껴졌다.


바이마르 영화 Heimatfilme



단절된 쇼트들의 사이를 채워주는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풍경들이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의 관계 이후 뜬금없이 들판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

언뜻 서사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자연 쇼트는 아무 기능도 없는 것처럼 장면 중간에 삽입되는데, 이는 현실의 풍경으로 허구적 세계를 연결하는, 몽타주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다.

YS: 나도 풍경 인서트 때문에 멜로 드라마보다 공간에 관한 얘기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여자 둘이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 있으니까, 서로를 침범할 여지가 없어서 불륜의 긴장감이 엄청나게 낮아진다. 사실 하룻밤 실수를 했다고 해도 남자가 입만 다물면 없던 사고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공간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에게서, 집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돌아갈 곳을 상실한 이방인의 감정을 느꼈다.

엘라와 로자, 두 여자에게 상징적으로 통합된 각각의 풍경들은 갈망Sehnschut을 나타낸다. Sehnschut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여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갈망의 의미)을 이르는 한편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나타내기도 하는 독일어이다. (포르투갈의 ‘사우다지Saudage’나 우리나라의 ‘한’ 같은 상징적인 단어이다.) 갈망은 여성을 향한 성적 갈망을 넘어, 두 여인이 나타내는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확장된다.

엘라와의 관계 이후에는 강, 풀숲, 나무와 같은 시골의 풍경들이 나타나고, 로자와의 관계 이후엔 트럭, 높은 건물 등의 도시 풍경들이 나타난다. 이처럼 두 여인은 베를린에서 90분 거리에 있는 췬렌이라는 마을의 이중적인 면모를 상징한다. 영화는 췬렌이 품고 있는 시골과 도시라는 두 현실의 기호를 두 여인을 통해 상징화하고, 이를 허구의 세계로 통합시킨다. 이는 허구 세계의 구조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기호로 구축된 허구 세계가 그 자체로 현실을 모방하게 되는 과정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현실의 인물과 세계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리제바흐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모방보다는 현실의 직접적 현존에 기반한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마을에 관한 목가적인 이야기로도 기능하는 동시에, 독일의 전통적인 장르인 바이마르 영화의 변주로서도 작동한다. 바이마르 영화, 즉 고향 영화는 시골의 이상적인 세계를 그리며 1950년대 전후 시대의 트라우마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하는 장르로 기능했다. 전통적인 바이마르 영화가 시골을 이상화하고 도시의 타락과 대조하는 데 집중했다면, <갈망>은 마르쿠스가 시골과 도시(=엘라와 로자)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시골 마을에 대한 이상화 없이 관찰자적 시선으로 끊임없이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즉 <갈망>은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와 바이마르 영화라는 두 고전 장르에 한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이한 영화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