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에 관한 신화
WEBZINE
WEDITOR   최서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우라(파울라 베어 분)에 대한 어떠한 부연 설명 없이, 그저 그녀가 강물에 비친 잔영을 고요히 응시하는 장면으로 〈미러 넘버 3(2025)〉는 막을 연다. 관객들이 영문 모른 채 라우라가 겪는 드라마의 뒤를 좇다가 꽤나 온정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페촐트의 이전 작품들과 같은 무게감을 기대하던 이들에게 영화는 그와 유사하면서도 어쩐지 흐릿한 인상만을 남긴다. 페르소나인 파울라 베어가 재차 등장하며 음악을 단순 사운드트랙 이상의, 극 전반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제재로 활용한다는 것 등에서는 그의 인장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3부작으로 일컫는 관행을 따라 더없이 독일적이고 거시적인 주제 의식을 다루던 ‘역사 3부작’이나 ‘원소 3부작’과 비교해본다면, 이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소소한 단막극의 두께를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역사성과 신화를 경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영화 내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던 로맨스를 상기해 보아도 〈미러 넘버 3〉에서는 뚜렷한 로맨스도 오래된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작품 세계가 하나의 분기점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최근의 감독전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접하기 수월해진, 페촐트가 2000년대 내놓은 작품들을 떠올려 본다면 앞선 의문은 자연히 해소된다. 〈미러 넘버 3〉에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기에 해당하는 당대에 보여 주었던 작품 세계의 경향성이 재차 드리워 있다. 이제는 그의 세계를 대변하듯 종종 언급되는 ‘상실’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한다면, 그가 역사적인 차원의 상실에만 천착해 온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 하루간의 일상과 그 다음 날에 이어질 일상 사이 벌어진 균열에도 주목해 온 작가다. 라우라가 전쟁 중 망명자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와 같은 시대적 맥락 없이 단지 베를린의 젊은 피아니스트 같은 범상한 소개로 수식되는 방식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유이다. 실제로 파울라가 페촐트에게 왜 라우라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을 다 들어 내었는지 물었을 때, 페촐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당신은 앨리스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뭇 귀여운 은유로 답한다.

페촐트가 그의 영화 내로 다시금 일상성을 불러 내면서 등장시키는 것은 흥미롭게도 자동차 사고라는 비일상적인 소재다. 애인을 잃는 자동차 사고 이후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라우라의 삶을 다룬 〈미러 넘버 3〉와, 2000년대 초반의 걸작인 〈볼프스부르크(2003)〉 그리고 〈옐라(2008)〉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공통적으로 한 차례 또는 그 이상의 자동차 사고가 극을 긴장 상태에 올려 놓곤 한다. 사고의 우발적인 희생자 또는 가해자가 된 인물은 전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혹은 이전의 일상을 회복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며, 그 선택은 반드시 여생의 방향을 뒤바꾸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동일한 소재를 활용한 전개의 변주라는 점에서, 앞선 세 작품을 여타의 3부작과 같은 선상에 둔다면 ‘자동차 사고Autounfall 3부작’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페촐트의 장편 데뷔작인 〈필로티넨(1995)〉이 교외를 떠도는 로드 무비임을 고려할 때 페촐트의 시야에 자동차는 단순 탈것 이상의 오브제로 위치해 있다는 추정도 동반해볼 수 있다. 주시해야 할 것은 페촐트는 사고에서 어트랙션 따위처럼 비극의 충격만을 취하거나 크로넨버그처럼 페티시즘으로서 소화하는 유형의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화두는 그러한 극한의 비극 이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남겨진 생을 회복하며 살아 가는지에 있다. 그런데 왜, 비극의 형태로서 자동차 사고를 다시금 등장시켰을까?

3부작의 시작점이 되는 〈볼프스부르크(2003)〉의 도입부에서, 자동차 판매원으로 일하는 필립(벤노 퓨어만 분)은 한 도로에서 어린아이를 차로 치고 달아난다. 증거를 인멸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아이의 홀어머니인 라우라(니나 호스 분)의 주변을 맴돌다가 신분을 숨긴 채 사랑에 빠진다. 결국 그는 교제 중이었던 애인에게 차이고 근무하던 아우디 지점에서도 해고된 후, 라우라에게 정체가 발각되며 범죄자의 처지보다도 못한 파국을 맞는다. 이 뒤틀린 멜로드라마의 무대가 되는 독일의 도시 볼프스부르크Wolfsburg에는 폭스바겐의 본사와 공장이 자리잡아 있다. 자동차 산업으로 번성한 도시에서 자동차 판매원으로서 순항하던 남자가 결국 차로 인해 패가망신한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어쩌면 자동차 산업 자체를 공격적으로 겨냥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 〈옐라(2008)〉에서도 극의 초입에 옐라(마찬가지로 니나 호스 분)와 그녀의 남편이 동승한 채 차 사고가 일어나는데, 이것으로 옐라는 폭력을 일삼던 남편에게서 도망쳐 타지에서 새 삶을 꾸리게 된다. 그러나 번듯한 직장과 애인을 만난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남편이 나타나는 환영과 이명에 시달리는데, 냉소적인 결말을 맺는 엔딩 시퀀스마저 또 한번의 자동차 사고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전개된다.

〈볼프스부르크〉의 첫 장면은 실제 폭스바겐 공장이 보이는 한 도로의 전경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볼프스부르크〉와 〈옐라〉의 엔딩 시퀀스가 공통적으로 비추는 것은 전복된 붉은색 차체와 사고의 여파로 쓰러져 있는 인물의 모습이다. 〈미러 넘버 3〉를 만든 이후의 한 인터뷰[링크]에서, 페촐트는 자신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수리’의 모티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 딸이 5살이었을 때,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TV에서 나오는 제임스 본드 영화를 함께 봤던 것을 기억합니다. 본 지 20분 뒤에 딸이 말하기를, ‘제임스 본드 영화가 정말 좋아요. 더 보고 싶어요.’라고 하더군요. 제가 왜냐고 묻자 딸은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는 뭐든지 파괴하고 고칠 필요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어요. 딸은 자기 방에 있는 물건을 망가뜨리면 항상 고쳐야만 했으니까요. 이게 제가 흥미를 느끼는 지점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무언가를 다시 고치고자 노력하는지요how people try to start to repair things again.”

(영화를 포함해서 말인가요?)  “맞아요. 영화계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백지 상태tabula rasa에 대한 갈망이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쓰레기 같은 상황을 복구할 수가 없으니 다 파괴해야 한다는 거예요. 세계를 다시 깨끗한 곳으로 만드는 수많은 디스토피아 영화들이 나왔어요. 이건 모든 걸 깨끗이 청소하겠다는 파시스트적 비전과 같죠, 알베르트 슈페어[나치당과 히틀러에 복무했던 나치 독일의 건축가]의 베를린 건축물처럼요. 저는 우리가 세계를 다시 수리하고, 무엇이 망가졌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볼프스부르크의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대비되는 자동차 공장 단지를 응시하는 시선에는 모종의 냉소가 담겨 있다. 자동차 산업 자체가 거대 규모의 자본에 기반해 급속도로 성장한 자본주의 신화의 산증인이라면, 페촐트의 자동차 사고 3부작은 이것이 결국 신화에 불과함을 우아하게 비트는 반-자본주의적인 우화에 가깝다. 신문물이 인간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유토피아적인 믿음은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했고, 더 이상 새롭게 희망을 생산해 낼 여력이 없는 자본은 모든 것이 소진되지 않았던 시절을 본떠 복고적인 복제품을 생산해 내고 있다. 전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혹은 이전의 일상을 회복할 것인가? 무언가를 복구할 수도 원점으로 회귀할 수도 없으리라는 절망에 빠진 인물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그리하여 라우라와 옐라가 각기 행했던 것은 양자 간의 선택이 아닌 상황에 대한 체념이었다.

이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 만든 〈미러 넘버 3〉에서 이전의 반-자본주의적 우화는 낙관적인 버전으로 변주된다. 동시에 페촐트는 수리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를 직관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트라우마적 사고를 당한 라우라를 목격하고 데려온 베티(바바라 아우어 분)의 남편과 아들의 직업을 아예 자동차 수리공으로 설정한 것이다. 자동차 수리소를 운영하는 리하르트(마티아스 브란트 분)와 막스(엔노 트렙스 분)는 눈에 보이는 고장난 것은 무엇이든 당장 고쳐야 하는 직업병의 증세까지 보인다. 고장난 집안 기물이 눈에 띄는 즉시 고치려 들고, 그들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된 라우라가 탈 자전거를 막스가 손수 수리해 주기도 한다. 무엇이든 고쳐서 내놓는 이들의 능력은 단순한 직업적 자질의 영역을 넘어 페촐트의 어린 딸이 몸소 배워야 했던 고전적인 ‘고쳐 쓰기’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베티가 라우라를 죽은 딸의 현신으로 여기며 마치 풀밭의 모세처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과정과, 막스가 라우라의 자전거를 금세 고쳐 그녀가 교외의 집과 시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는 과정은 오래전에, 어쩌면 자본주의 체제가 도래하면서 대가 끊겨 버린 재건의 방법을 여전히 체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볼프스부르크〉에서 망가진 필립의 차와 쓰러져 있는 그를 뒤로 하고 라우라가 유유히 떠나는 장면.
2) 〈옐라〉에서 옐라와 그의 남편이 동승해 있던 차체를 강에서 끌어 올리는 장면.
3) 〈미러 넘버 3〉의 초반부 사고 현장에서 전복되어 있는 라우라의 애인의 차. 공교롭게도 세 대 모두 붉은색이다.


〈볼프스부르크〉에서 필립의 정체를 알게 된 라우라가 동승한 차에서 필립을 찔러 죽이는 아연한 결말에 온전한 회복과 재건의 여지는 없었다. 전복된 붉은색 포드를 비추는 마지막 장면에는 제 것의 상실에 또다른 상실로 응수하는 냉소만이 남는다. 〈옐라〉에서 옐라가 초반의 사고를 겪었을 때와 동일한 구도로 쓰러져 있는 것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자유에 대한 옐라의 갈망은 허황된 미래로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미러 넘버 3〉에서 사고는 단 한 차례 일어나며 비극은 반복되지 않는다. 페촐트는 라우라에게 모종의 계시처럼 베티의 존재를 등장시킴으로써 회복의 실패가 아닌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한다. 베티가 연고 없는 라우라에게 친절을 베풀게 된 전말이 드러나며 라우라의 생활에도 잠시 균열이 가지만, 그 균열은 메워지고 라우라는 그녀의 일상으로 강물의 흐름처럼 고요히 돌아간다. 마침내 라우라가 졸업 연주회에서 모리스 라벨의 거울 모음곡 3번을 선보이는 엔딩 시퀀스에서, 그것을 몰래 지켜보러 온 베티와 리하르트, 막스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하다. 결말이 응시하는 대상은 폐허가 된 차체가 아닌 그 모든 수난에도 불구하고 여상하게 미소 짓는 그들 가족, 그리고 라우라의 얼굴이다.

〈미러 넘버 3〉는 비극적인 소재의 낯익은 변주와 동시에 페촐트에게 작가로서 생겨난 시점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는 이제 폐허가 된 자리에 드러난 불길함의 징후가 아닌, 희망에 대한 간명한 명제로 시선을 돌린다: 희망이 없다면 희망을 고쳐 쓰면 된다. 페촐트는 망가진 것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앞선 이야기를 마친 뒤,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틀 전에, 장 뤽 고다르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대화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해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세계를 해체deconstruct해야 한다고요. 아마도 60년대 말에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재건reconstruct해야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