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半分인간
WEBZINE
WEDITOR 엄동욱
WEDITOR 엄동욱
<스탑 메이킹 센스(1984)>
같은 공연 실황 영화가 또 있을까? 때가 좀 지났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영화가 너무 별로였다. 토킹 헤즈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게 과연 '영화'인지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대안을 찾아다니다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흥미로운 공연 실황 영화 하나를 발견했다.
일본 펑크 필름의 대부 이시이 가쿠류는 80년대에 독일의 인더스트리얼 밴드 아인스튀어첸데 노이바우텐Einstürzende Neubauten의 라이브 공연 실황 영화를 제작한 적이 있다. <폭렬도시(1982)>, <역분사 가족(1984)> 등으로 잘 알려진 이시이는 당시 일본 펑크,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노이바우텐도 공업용 폐자재를 활용한 실험적인 노이즈로 두각을 나타내며 언더그라운드 밴드계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은 노이바우텐의 당시 일본 투어 제목이자 정규 3집 제목인 <Halber Mensch(1985)>를 그대로 가져온 <반분인간(1986)>이었다. 일본의 영화감독과 지구 반대편 독일의 밴드가 어떻게 함께하게 된 걸까?
이시이는 십대 시절부터 펑크 문화에 매료되어, 영화 전공이 아니었음에도 꾸준히 저예산 펑크 영화를 만들어왔다. 수십 명이 넘는 자원 엑스트라들의 도움을 받고 학교 장비를 빌려 만든 첫 장편 영화 <고교 대패닉(1978)>과 졸업 작품인 <쿠루이자키 썬더로드(1980)>는, 각각 닛카츠 스튜디오와 토에이 배급사의 지원을 받아 일본 내에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 이어 제작한 <폭렬도시>와 <역분사 가족>이 점차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시이는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받는다. 생전 처음 밟아본 이국땅에서 그는 자기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노이바우텐의 리더 블릭사 바르겔트와 만나게 되고, 이때부터 이들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다. (바르겔트는 이시이의 근작 <더 박스 맨(2024)>이 베를린에 초청되었을 때도 자리에 함께했다)
그리고 바르겔트는 곧장 이시이에게 자신들이 몇 달 뒤에 일본에서 투어를 진행하는데, 그때 함께 영상 작업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이시이는 이를 거부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이미 <쿠루이자키 썬더로드>에서 오토바이와 인간의 신체를 결합한 폭주족을 그린 적이 있고, <폭렬도시>는 원자력 발전소와 버려진 고철 더미 위에서 펑크 밴드가 노래하는 영화였다. 이시이는 이제 스튜디오와 상업 시스템 안에서도 더 자유롭게 펑크를 그려낼 수 있는 전환점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노이바우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의 혼란스러운 80년대 독일을 온전히 자신들의 음악 세계로 받아들였다. 폐공장의 잔해들, 파워 드릴, 쇼핑 카트, 깨진 유리, 쇠 파이프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노이즈를 생성하고 그것을 새로운 미학으로 창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1, 2집이 날 것의 소리를 찾는 것에 더 집중했다면, 전환점을 맞은 3집부터는 스튜디오에서 더 자주 작업하면서 인간의 소리와 기계의 소리를 결합하는 데에 집중했다. 공허한 인간의 아카펠라 화음과 여전히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폐자재 노이즈가 공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이제 막 서사를 만들어가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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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목표에서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더 갈구하고 있었다. 이시이는 영화의 틀 안에서, 펑크 음악과 액션을 섞으며 청각적 역동성에서 비롯되는 에너지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이바우텐은 음악의 틀 안에서, 그들이 가진 광범위한 앰비언트적 스펙트럼을 확장할 시각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게 각자가 가진 것 이상의 무언가를 더 좇고 있는 두 창작자가 일본의 한 폐공장에서 만난다. <반분인간>의 첫 장면은 공장의 폐자재를 비추며 시작된다. 이어 웬 해진 나시를 입은 밴드가 망치로 퉁퉁 치며 소리 내더니, 톰 요크의 90년대 금장발 시절보다 약 1.3배 정도 멋있는 헤어스타일의 보컬 바르겔트가 등장하면서(머리숱은 이쪽이 확실히 졌다) 2집의 <Armenia>로 운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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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평범한 공연 실황처럼 보컬과 밴드를 번갈아 가며 비추는 듯하지만, 이시이의 카메라는 보컬과 밴드 사이를 유영하며 인간의 소리와 기계의 소리가 충돌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폐공장의 잔해물 사이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인간은 가차 없이 구타당하는 철판의 떨림과 그곳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발 구름으로 피어나는 먼지구름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과 버려진 TV, 쇼핑 카트는 모두 공평하게 얼마간 싱글 쇼트를 점유하면서 동등한 밴드의 일원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셸링은 언젠가 “건축은 공간에서의 음악이다”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노이바우텐이 공장의 구조물과 자재를 파괴하면서 내는 노이즈는 그들의 이름 그대로 ‘붕괴된 새로운 건물Einstürzende Neubauten’ 형태의 건축이 된다. 그리고 바그너의 정의를 빌리자면, 그것은 건축과 음악이 만들어내는 총체예술Gesamtkunstwerk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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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의 하이라이트, 3집의 4번 트랙 <Z.N.S.>가 흘러나오자 인간의 중앙신경계Zentrales NervenSystem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시이는 이 트랙에서 죽음을 다루는 일본의 전후 현대 무용인 부토 무용을 등장시키는데,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무용수들이 곳곳에서 쏟아져나와 신들린 듯 춤을 춘다. 그들은 괴상한 인공 호스와 철 자재를 몸에 매달고 춤추는 ‘반분인간’이다. 기계도 인간도 아닌 딱 절반만 인간인, 혹은 그 경계를 오가는 사이버네틱 생명체다. 노이바우텐은 공장 한가운데에서 그 반분인간들을 위한 진혼곡을 부르며 공장 바깥을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의 영혼을 달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생태주의적 치유 예술의 타락한 기계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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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결말로 치닫자 이시이는 마치 반분인간들을 해방해 주려는 듯이 공장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지만, 여전히 노이바우텐은 시끄러운 도로 한복판에서 노래하고 있다. 자동차들이 분주히 지나가는 아스팔트 도로와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내는 노이즈와 균열은 거대한 기계 도시 안으로 다시 흡수된다. 도시가 여전히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따뜻한 말소리가 아니라 반분인간의 차가운 소음이었을 테다. 오늘날 이만큼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공연 실황 영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또 혹자가 이게 대체 디스토피아 사이버펑크 컨셉 뮤비와 뭐가 그리 다른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크로마키 앞에서 로봇암에 알렉사 미니를 매달고 어지럽게 휘날리는, 작금의 양산형 쇠-맛 뮤비들보다는 훨씬 가치 있을 것이라고.
일본 펑크 필름의 대부 이시이 가쿠류는 80년대에 독일의 인더스트리얼 밴드 아인스튀어첸데 노이바우텐Einstürzende Neubauten의 라이브 공연 실황 영화를 제작한 적이 있다. <폭렬도시(1982)>, <역분사 가족(1984)> 등으로 잘 알려진 이시이는 당시 일본 펑크,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노이바우텐도 공업용 폐자재를 활용한 실험적인 노이즈로 두각을 나타내며 언더그라운드 밴드계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은 노이바우텐의 당시 일본 투어 제목이자 정규 3집 제목인 <Halber Mensch(1985)>를 그대로 가져온 <반분인간(1986)>이었다. 일본의 영화감독과 지구 반대편 독일의 밴드가 어떻게 함께하게 된 걸까?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시이 가쿠류다.
이시이는 십대 시절부터 펑크 문화에 매료되어, 영화 전공이 아니었음에도 꾸준히 저예산 펑크 영화를 만들어왔다. 수십 명이 넘는 자원 엑스트라들의 도움을 받고 학교 장비를 빌려 만든 첫 장편 영화 <고교 대패닉(1978)>과 졸업 작품인 <쿠루이자키 썬더로드(1980)>는, 각각 닛카츠 스튜디오와 토에이 배급사의 지원을 받아 일본 내에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 이어 제작한 <폭렬도시>와 <역분사 가족>이 점차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시이는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받는다. 생전 처음 밟아본 이국땅에서 그는 자기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노이바우텐의 리더 블릭사 바르겔트와 만나게 되고, 이때부터 이들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다. (바르겔트는 이시이의 근작 <더 박스 맨(2024)>이 베를린에 초청되었을 때도 자리에 함께했다)
그리고 바르겔트는 곧장 이시이에게 자신들이 몇 달 뒤에 일본에서 투어를 진행하는데, 그때 함께 영상 작업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이시이는 이를 거부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이미 <쿠루이자키 썬더로드>에서 오토바이와 인간의 신체를 결합한 폭주족을 그린 적이 있고, <폭렬도시>는 원자력 발전소와 버려진 고철 더미 위에서 펑크 밴드가 노래하는 영화였다. 이시이는 이제 스튜디오와 상업 시스템 안에서도 더 자유롭게 펑크를 그려낼 수 있는 전환점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노이바우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의 혼란스러운 80년대 독일을 온전히 자신들의 음악 세계로 받아들였다. 폐공장의 잔해들, 파워 드릴, 쇼핑 카트, 깨진 유리, 쇠 파이프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노이즈를 생성하고 그것을 새로운 미학으로 창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1, 2집이 날 것의 소리를 찾는 것에 더 집중했다면, 전환점을 맞은 3집부터는 스튜디오에서 더 자주 작업하면서 인간의 소리와 기계의 소리를 결합하는 데에 집중했다. 공허한 인간의 아카펠라 화음과 여전히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폐자재 노이즈가 공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이제 막 서사를 만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목표에서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더 갈구하고 있었다. 이시이는 영화의 틀 안에서, 펑크 음악과 액션을 섞으며 청각적 역동성에서 비롯되는 에너지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이바우텐은 음악의 틀 안에서, 그들이 가진 광범위한 앰비언트적 스펙트럼을 확장할 시각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게 각자가 가진 것 이상의 무언가를 더 좇고 있는 두 창작자가 일본의 한 폐공장에서 만난다. <반분인간>의 첫 장면은 공장의 폐자재를 비추며 시작된다. 이어 웬 해진 나시를 입은 밴드가 망치로 퉁퉁 치며 소리 내더니, 톰 요크의 90년대 금장발 시절보다 약 1.3배 정도 멋있는 헤어스타일의 보컬 바르겔트가 등장하면서(머리숱은 이쪽이 확실히 졌다) 2집의 <Armenia>로 운을 뗀다.

영화는 평범한 공연 실황처럼 보컬과 밴드를 번갈아 가며 비추는 듯하지만, 이시이의 카메라는 보컬과 밴드 사이를 유영하며 인간의 소리와 기계의 소리가 충돌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폐공장의 잔해물 사이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인간은 가차 없이 구타당하는 철판의 떨림과 그곳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발 구름으로 피어나는 먼지구름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과 버려진 TV, 쇼핑 카트는 모두 공평하게 얼마간 싱글 쇼트를 점유하면서 동등한 밴드의 일원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셸링은 언젠가 “건축은 공간에서의 음악이다”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노이바우텐이 공장의 구조물과 자재를 파괴하면서 내는 노이즈는 그들의 이름 그대로 ‘붕괴된 새로운 건물Einstürzende Neubauten’ 형태의 건축이 된다. 그리고 바그너의 정의를 빌리자면, 그것은 건축과 음악이 만들어내는 총체예술Gesamtkunstwerk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제 영화의 하이라이트, 3집의 4번 트랙 <Z.N.S.>가 흘러나오자 인간의 중앙신경계Zentrales NervenSystem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시이는 이 트랙에서 죽음을 다루는 일본의 전후 현대 무용인 부토 무용을 등장시키는데,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무용수들이 곳곳에서 쏟아져나와 신들린 듯 춤을 춘다. 그들은 괴상한 인공 호스와 철 자재를 몸에 매달고 춤추는 ‘반분인간’이다. 기계도 인간도 아닌 딱 절반만 인간인, 혹은 그 경계를 오가는 사이버네틱 생명체다. 노이바우텐은 공장 한가운데에서 그 반분인간들을 위한 진혼곡을 부르며 공장 바깥을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의 영혼을 달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생태주의적 치유 예술의 타락한 기계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가 결말로 치닫자 이시이는 마치 반분인간들을 해방해 주려는 듯이 공장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지만, 여전히 노이바우텐은 시끄러운 도로 한복판에서 노래하고 있다. 자동차들이 분주히 지나가는 아스팔트 도로와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내는 노이즈와 균열은 거대한 기계 도시 안으로 다시 흡수된다. 도시가 여전히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따뜻한 말소리가 아니라 반분인간의 차가운 소음이었을 테다. 오늘날 이만큼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공연 실황 영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또 혹자가 이게 대체 디스토피아 사이버펑크 컨셉 뮤비와 뭐가 그리 다른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크로마키 앞에서 로봇암에 알렉사 미니를 매달고 어지럽게 휘날리는, 작금의 양산형 쇠-맛 뮤비들보다는 훨씬 가치 있을 것이라고.
